1. 무오사화(戊午士禍)
성종은 25년에 하세하시고 세자 즉위하니 곧 연산군(燕山君)이라. 연산이 세자 때부터 선비를 좋아하지 않고 날마다 방종을 일삼더니 및 왕위 오름에 간세 소인배들이 다투어 나아와 비참한 사화를 빚어내었다. 우리나라 역대로 내려오는 당파는 이 때 시작되었다.
성종 조에 흉악한 소인 유자광(柳子光)이 북방의 도적을 쳐 물리친 큰 군공을 세운 남이(南怡)대장을 반역죄로 얽어 무고하여 죽인 흉악한 소인이다. 그 공으로 무령군(武靈君)이 되었더니 남선 함안 고을에 유람한 일이 있었다. 시 일수를 지어 그 고을 군수에게 주고 현판에 새겨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그 후에 김종직이 함안군수가 되어 유자광의 현판을 보고 관로를 명하여 떼어 버리었더니 유자광이 듣고 김종직을 미워하기 시작하여 김종직의 일파를 모함하기를 꾀하더니 종직의 일파는 내외관직에 포열(布列)하였고 글 읽는 선비치고는 다 김종직의 문인 아닌 사람이 없다. 혹 강호에 숨어 있는 사람도 있고 현달하여 벼슬한 사람도 있었다. 이때 김종직은 연산이 위에 오른 후에 곧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 선산에 내려가 있다가 임의 별세한지 몇 해 지내었다.
유자광은 사류 모함을 꾀하던 중 성종 국상 때 전라감사 이극돈(李克墩)이 기악(妓樂)을 싣고 서울 온 일로 일반 인사들의 비평이 자자하여 그때 사관(史官) 김일손(金馹孫)이 이 사실을 사초에 기록하였더니 이극돈이 이것을 알고 사초에 고치기를 청하거늘 김일손이 듣지 않았다. 그 후에 이극돈이 사국(史局) 당상(堂上)이 되어 김일손의 사초 중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의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 일편을 기록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에 이극돈과 유자광이 서로 결탁하여 가지고 이제 원한을 갚을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김종직의 이제 조상하는 글이 가만히 세조를 비방함이라 하여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은 당시 극한 소인이라. 서로 의논하고 김종직은 세조를 비방한 대역부도라 고발하여 김종직의 문집을 모아 전정에서 불사르고 또 김종직의 무덤을 굴파 하여 부관육시(剖棺戮屍)하고 그 문인 되었던 일당(一黨)을 다 잡아 죽이니 일국이 소연하고 불안한 공기가 사림 가운데 서리였다.
어느 나라이든 군자와 소인이 서로 용납지 못함으로 종종 환란이 생기는 일이 있지만 연산 때 같이 심한 때가 없다. 이것을 유파와 비유파의 알력(軋轢)이라 이름 한다. 이 사화가 연산 4년 무오(戊午)에 일어난 고로 이것을 무오사화라 칭하고 그 사림 중 참화를 입은 자 중 최저한 자는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은 다 당시 혁혁한 명사들이다. 그 외에도 친구로 혹 문인으로 죽기도 하고 유배 간 이도 부지기수이다. 조선의 참 문화도 이 사림으로 비롯되었고 조선의 가장 참혹한 화도 이 사림으로 인하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