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6 자유글쓰기.hwp
자유글쓰기-그리운 이여 안녕
2019. 09. 26 그래도
단톡방에 올라 온 향기 영란의 문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 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뻘 같은 그리움/문태준
영숙이가 그립다. 눌러 놓은 풀들이 슬적슬쩍 일어나듯이.
10년 전, 영숙은 지상의 고단한 순례를 마치고 우리 곁을 떠났다. 만개한 벚꽃 잎이 눈처럼 흩날리던 비 오는 날에.
어린 두 딸은 슬퍼하는 우리들에게
“이모들, 울지 마세요. 우리 엄마 더 이상 아파 잠 못 들지도 않고, 이제는 편히 쉴 수 있을 거예요. 너무 오랫동안 힘드셨는데 이제는......”
하지만 그렇게 의연하던 두 딸도 불구덩 속에 엄마가 들어가고 철거득 쇠문 닫히는 소리가 날 때는 그만 무너져 내리더라. 서로의 몸을 의지하여 부둥켜 앉고 서럽게 서럽게 지 엄마를 부르더라.
‘영숙이는 그 곳에서는 안녕한가?’어린 것들은 이렇게 다 큰 처녀가 되었는데 보지도 못하고.
마음으로만 수 천 번 다녀갔는가? 우리에게는 도통 안 오고.
진주 한마음 선원 영탑에 잠든 영숙이,
그곳을 갈 때마다 늘 탑 앞에는 꽃이 있다. 그곳에서 일손을 돕는 사람들은 영숙이 이름만 말해도 소식을 전해 준다. 제자들이 간간히 찾아와 꽃을 놓고 인사를 드린 후, 이야기를 나누고 간다고. 언제나 꽃이 끝이질 않는다고.
미애 말처럼 영숙이는 그 곳에서도 지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눈을 반짝이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며 잘 살 거다.
내 젊은 날의 애창곡인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는 이제 안 부른다. 영숙이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35년 전 쯤 된 일이다.
아이들 기저귀 막 떼고 겨우 고만고만하게 걸어 다닐 즈음이었지 싶다. 애들 몽땅 마산 갑영의 아파트에 몰아두고 우리만 노래방에 갔다.어두컴컴 하고 칙칙한 지하 노래방이었는데도 우리는 신나게 놀았다.
교대 졸업 하고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 게 오랜만이었다 절대음감인 선자와 영숙의 노래와 탬버린 반주는 우리 모두를 신나게 했다.
거기까지 잘 나갔는데 갑자기 내 차례가 돌아오자 나는 시부직하게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불렀다.
그런데 그 순간, 영숙이가 무너져 내리듯이 흐느꼈다.
너무 당황했다.
그 때가 영숙이에게는 아주 힘든 시기였다는 걸 우리는 몰랐었다. 영숙이는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햇빛 보다 눈부시게 웃는 아이였으니까.
그때만 해도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는 뜨는 곡이 아니었다. 가수도 노래도 겨우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였다.
영숙이는 립스틱도 짙게 바르지 않는 아이였다.“내일이면 잊으리 또 잊으리”하며 상처 준 그를 미워하지 않으려, 고이고이 보내려 하는 아이다.
영숙는 남의 허물은 흐르는 물에 새기고, 사랑은 바위에 새기는 아이였으니까.
아, 영숙이 그립다.’
내일은 영숙이 대신에 장영목 대구로 간다.
며칠 전, 교대 때 우리들을 가르치셨던 장영목교수님의 전화가 왔다.
“박선생, 잘 사는가? 혹시 27일 금요일 7시에 콘서트에 올 수 있는가? 지금은 모두 각 분야의 유명한 음악가가 된 제자들이 모여 내 이름으로 된 합창단을 조직하고 각자 한 곡씩 지휘를 하는 형식으로 콘서트를 한다네. 나는 이제는 팔순이 넘어 더이상 무대에 서서 지휘를 하지 않는데 이번 콘서트에서는 마지막 곡의 지휘봉은 내가 잡으라고 하는군.”
“교수님, 가고 싶어요. 갈게요. 갈 수 있어요. 영숙이가 있었으면 같이 갈 텐데. 제가 영숙이 대신에 갈게요.”
잘 듣고 와서 영숙에게 들려 줄 거다.
나는 개조개 20킬로를 사서 새벽에 깠다. 개조개 유곽을 섬섬하게 만들어 조개껍질에 담아 은박지로 포장을 했다. 교수님 부부에게 가지고 갈 음식 선물로.
빛과 같은 친구 영숙이,
빛과 같은 스승이 있어 행복합니다.
저도 저의 선생님처럼 누군가에게 빛이 되는 스승이 될 수 있을까요?
<2007년 편지>
27년 전,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두 주일 전에 미리 전화를 드렸지만, 확실한 약속을 잡지 못했습니다. 대구에서는 물론, 전국에서도 음악분야에서 역량을 지니신 분이어서 1년의 일정이 대부분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우초등학교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화요일에 잠정적으로 선생님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고 알렸습니다.
화요일, 친구가 조퇴를 신청하고 약속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시청 앞으로 왔습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미옥아, 선생님과의 약속이 잡힌 후, 그 옛날 우리가 교대생 이었던 시절로 돌아 가 그 때의 일들을 생각해 보았어.
너에 대한 교수님의 사랑은 남달랐지만 나에 대해서도 큰 사랑을 주셨던 것 같다.
내가 합창 지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교수님께 여쭙자 지휘는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설명하지 않으시고 전 곡을 지휘하시며 직접 보여 주시더라.
보통의 경우라면 그런 분들은 그렇게 하질 않잖아.
발표회 날, 무대에서 지휘를 하고 내려오는 나를 보며 잘했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못 했어’도 아니고, 따뜻한 눈빛을 담아
“애썼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았어.
그리고 생각해 봐.
가난한 우리 교대생들에게 크리스마스 이브 날, 그 멀리 대구까지 초청해서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그렇게 엄청난 헨델의 메시아합창에 초대해 주셨잖아.
무려 두 시간에 걸친 연주회에서 지휘를 하신 교수님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꽃다발을 전하려 무대로 오른 나와 마주친 그 분의 눈빛은 평생 잊지 못해. 부드럽고 온유한 그 분에게서 그렇게 빛나는 카리스마와 열정, 눈빛을 본 건 감격이었어.
이후로 교직에서도 지휘를 할 때마다 교수님이라면 ‘이 곡의 이 부분에서는 이런 마음을 담아내려 하셨을 거야.’ 하고 생각하게 돼.
나는 그렇게 유능한 분이 진주교대에 까지 오셔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지만, 그런 분이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에게 그런 기회를 통해 세상을 보여 주려 했다고 생각하니 그지없이 감동스럽더라. 그 엄청난 무대와, 뒷풀이 자리인 칵테일 파티, 그리고 교수님의 애마인 아이보리 색의 폭스바겐으로 대구 시내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해 주셨던 일. 그 때는 어린 마음으로 처음으로 만나는 문화적 충격에 감탄만 했지만 어른이 되어 그 때를 생각해보니 그게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겠더라.”
시청에서 교수님 부부를 만났습니다.
일흔이 넘어셨는 데도 젊은 날처럼 온유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너무나 곱게 늙으신 모습이었습니다.
5․18광주학생사건, 12․12사태 등으로 배움의 기간이 짧았던 시절이었지만 우리 두 제자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바닷가 횟집에서 교수님 부부를 모시고 식사를 했습니다. 친구는 마여고 연대장, 진주교대 여학생장 등 주로 활동을 많이 한 아이답게 적극적이고 시기 적적하게 대화를 이어 갔습니다.
친구는 상대방을 편안하고 기분 좋게 하는 대화로 언제나 자리를 빛나게 해 줍니다. 말이 별로 없는 제게 교수님은
“미옥이 자네는 여전하네.”
그러셨습니다.
그러자 사모님께서 “아, 도대체 보이질 않는다는 당신 연구실의 그 학생이군요.”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그랬어요.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었던 게 목, 금요일에만 강의가 있어 진주로 오시는 교수님께 그 날 만큼은 아침부터 연구실에 머물면서 말벗도 되어 드리고, 잔심부름도 하고, 알아서 일을 찾아 해야 했었는데 청소를 하고, 환기를 시키고, 난로를 피우고 보리차만 끓여 두고는 하루 온종일 나타나지를 않았던 거예요.
그런 저를 두고 교수님은 아마 사모님께
“도대체 보이질 않는 당신 연구실의 학생”이라 표현 하셨나 봐요. 지금 생각해도 참 한심하고 답답한 노릇이죠.
제가 교수님께
“교수님, 그 때 제게 평소에 연구실에서 공부도 하고 목, 금요일에는 이런저런 정도의 일만 준비하면 된다 하셨는데 시키는 일만 해 놓고는 도대체 보이질 않다가 겨우 학생을 시켜 연구실로 부르면 묻는 말에
대답만 하고 대화가 이어지질 않아 참 많이 답답하셨겠어요?”
라고 하자
“ 아니야. 대화는 말로만 하는 건 아니야. 자넨 그 때 너무 수줍고 순수한 학생이었어.”
스승과 제자는 긴 시간 동안 저녁을 먹으며 기억 저 편에 가물거리는 옛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시종일관 매끄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친구와는 달리 많이 머뭇거리는 저를 배려해선지 제게 한 마디씩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과거의 어느 기억들은 마치 단층이 지듯 필름이 뚝-
끊어지다가도 어떤 일들은 너무도 선명한 거였습니다.
연주회가 마치고 난생 처음으로 가 본 자리 리셉션 자리.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유리잔 들, 술과 음료, 카나페......
은은한 음악과 함께 작은 이야기들로 대화가 꽃피는 자리.
그곳에 하얀 레이스가 달린 검정 벨벳원피스를 입은 뽀오얀 소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 둘레에 모여 관심어린 표현을 하곤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동산병원간호과장이라는 직함으로 소개된 사모님과 하나뿐인 외동딸의 소개가 옆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흘려듣듯 들은 그 아이의 이름은 장세리였습니다 라고 말하니 교수님은
“자네는 모르는 게 없네 그려.” 그러셨습니다.
저는 아주 사소한 것 까지 비교적 많은 것들을 기억하는 편입니다. 교수님은 우리의 과제물에 제이콥(야곱)이라는 사인을 해 주신 거며, 제주도 졸업여행에 스니커즈 같은 편한 신발을 신고 분홍 점퍼를 입으셨던 것도 기억합니다. 그 때의 저는 언어로 표현 못하지만 많은 것을 마음에 담는 편 이었거든요.
늦은 시간에 교수님 부부를 숙소에 모셔다 드리고 생수 한 병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첫 발령을 받을 당시에 취입한 한국가곡 레코드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물론 교수님 성함 앞에 제이콥이라는 영문 사인도 있는 걸 보았습니다.
다음 날 새벽 저는 영숙의 부탁으로 새벽시장에 갔습니다.
자연산 전복과 향기가 특별한 통영 미드덕, 자연산 뽈락어, 소라, 대합 등등 9가지의 해산물을 사서 얼음을 채운 아이스박스에 넣어 포장했습니다.
혹시 일찍 잠을 깨실까봐 객실 프론트에 품명과 요리방법을 적은 메모를 붙여 놓았습니다.
전화는 전날 사모님께 드렸구요.
어제 늦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무얼 그렇게 알뜰히 챙겨 보냈냐. 집사람이 많이 고마워한다.”
저는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27년 전 일입니다.
가족 여행 중 제자의 얼굴이라도 볼 겸해서 물어물어 우리 동네를 찾아와 우체국에서 전화를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전봇대 뒤에 숨어 버렸어요.
우연히 버스 정류소에 서 있는데 아이보리색 폭스바겐을 탄 교수님 가족을 저만 봤거든요.
어린 소견에 교수님께는 격에 맞는 대접을 해야 할 텐데 그 때의 우리 집 형편이 그렇질 못했거든요.
교수님께서는 그런 걸 바라실 분이 아니셨을 텐데
화요일, 친구에게는 그 부끄러운 기억을 고백했지만 교수님께는 차마 말씀 드리지 못했거든요.
늦게라도 이렇게 두 분을 모시니 오래 전 빚을 조금은 지운 것 같아 한결 마음이 좋았어요.
저는 살면서 참 많은 분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유 없이 그냥 마음을, 사랑을 듬뿍 주셨습니다. 아마 저는 겁 많고 여린 늘 보살펴줘야 할 것 같이 부족한 모습이었나 봅니다.
뻘 같은 그리움으로 교수님과 영숙이를 다시 불러 봅니다.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조개처럼 아주 천천히 뻘흙을 토해내고 있다는 말
그립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돌로 풀을 눌러 놓았었다는 얘기
그 풀들이 돌을 슬쩍슬쩍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
풀들이 물컹물컹하게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
뻘 같은 그리움/문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