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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38장 1-30절
유다와 다말
창세기 37장 이하는 주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시작으로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을 통해 요셉을 어떻게 세우실지를 알리셨는데, 이것은 단지 요셉 한 사람을 높이시겠다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지키시기 위해 요셉을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꿈을 꾼 요셉이나 꿈의 내용을 듣게 된 요셉의 형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꿈의 내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줄을 분명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요셉이나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의 경우 그 꿈이 일반적인 꿈은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특히 형들의 경우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로 인하여,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악에 대하여 요셉이 아버지께 고자질하는 것으로 인하여 미워하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들이 요셉에게 절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석되는 그런 꿈의 내용을 듣자 더욱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형의 안부를 알기 위하여 요셉이 형들을 찾아갔을 때 형들은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 가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셨습니다. 고난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생명을 보존하시면서 요셉을 애굽으로 팔려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실 내용상으로는 가장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37장에서 39장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장 마지막 절에 보시면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36)고 말씀하고 있고, 그 말씀을 받아 말하는 것이 창세기 39장 첫 절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1) 그러나 37장과 39장 사이에 유다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 37장 이하가 요셉에게 초점을 두고 있지만 야곱의 족보, 다시 말해 야곱의 역사와 관련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둔다면 요셉을 이야기하다 유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특히 역대상 5장에 의하면 육신적으로는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다고 말씀합니다(대상5:1).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가진 요셉을 중심으로 기록되는데, 그러나 역대상 5장에서 어떤 내용도 말하느냐 하면 유다에게서 주권자가 났다고까지 기록합니다(대상5:2), 그러니까 육신적인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고, 영적 장자로서 주권자는 누구에게서 나오느냐 하면 유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야곱의 자녀인 열 두 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셉을 세우셨다면, 좀 더 확대하여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세우고자 하시는가 하면 유다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창세기 38장의 기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 자체로서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유다와 다말의 죄악상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창세기 38장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상 5장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만, 이 내용 속에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르우벤에게 있어야 할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돌아갔는가 할 때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잃은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서 적용하자면 르우벤 다음인 시므온과 레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했다는 것으로 한 성을 완전히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다 점과 흠이 있는 자들이었고, 그런 측면에서 그나마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요셉이 장자의 명분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요셉의 경우 점과 흠이 전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도 아담 안에 함께 죄를 지은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요셉이 장자의 명분을 받은 것은 요셉의 공로라고 할 만한 무엇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르우벤의 죄를 지적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요셉에게 돌리고 있지만 요셉은 전혀 점과 흠이 없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다를 보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자신의 며느리와 동침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르우벤과 다르지 않는 죄악을 저지르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몰랐다고는 하지만 몰랐다고 해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죄는 분명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족보 가운데 누가 오시느냐 하면 모든 인류 가운데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자가 오십니다. 만약 죄가 궁극적인 원인이라면 유다를 통해서도 주권자가 나올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족보 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주권자를 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르우벤과 관련하여 그의 죄가 장자의 명분을 잃게 만든 원인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그렇게만 적용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를 더 비교해 보자면 롯의 경우 자신의 두 딸이 자신 몰라 동침하여 자녀를 낳게 되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모압과 암몬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그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로 서게 됩니다. 반면 유다와 다말을 통해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는데, 분명 같은 죄입니다. 롯이 두 딸과 지은 죄나 유다가 다말과 지은 죄나 다르지 않습니다. 롯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유다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롯의 경우 자신의 두 딸입니다. 유다의 경우는 자신의 며느리입니다. 전혀 다르지 않는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두고 괴롭히는 자들로 있고,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자가 나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되는 일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진 요셉은 그의 남다름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가졌는가? 창세기의 내용을 보면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장자의 명분을 주신 것입니다.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과 비교하자면 공로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며느리와 동침하게 되는 죄악의 뚜렷함만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손을 통해 주권자를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내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데, 인간으로부터는 끊임없이 죄가 넘쳐나지만 그런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죄에 죄를 더하는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죄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세우신 뜻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 바로 창세기 38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제 내용으로 들어가겠는데, 1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여기서 아둘람 사람은 이방인으로 가나안 사람입니다. 특히 여호수아 12장 15절에서 아둘람 왕이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당한 가나안의 왕으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지금 유다는 그곳 사람 가운데 히라라는 사람과 가까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까이 하는 것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무조건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 멍에를 메는 일이 있다면 분명 문제로 지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2절 이하 5절에 보면 유다가 가나안의 한 여인을 취하여 자녀를 낳은 것을 기록하는데, 이런 내용이 그들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사실 우리는 에서가 가나안 여인들을 취함으로 그의 부모에게 근심이 되었다는 내용을 살핀 적이 있습니다. 지금 유다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나안 사람 중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지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와 함께 멍에를 메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수아라 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세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에서 11절을 보시면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우선 장자가 엘입니다. 아마도 엘이 장성하였을 것인데, 유다는 그를 위하여 다말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후사를 잇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법이 있기 전부터 형을 위한 후사를 동생이 이어가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 같은데, 칼빈의 경우 근친상간에 해당하지 않는 촌수를 말하지만 본문을 통해 그것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룻기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그래서 이전에 이러한 율법을 도덕법의 범주에서 볼 수 있는가 할 때 그렇지 않고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시민법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란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어쨌든 엘의 죽음으로 인하여 유다는 동생인 오난으로 하여금 형의 후사를 잇도록 합니다. 그러나 오난은 자신의 씨가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 땅에 설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 그도 죽이십니다.
사실 엘의 경우 정확한 죄목이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죽이셨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엘과는 달리 오난의 경우 분명한 죄목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형수에게로 들어갔을 때 형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씨를 땅에 설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하여 하나님은 죽음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만큼 심각한 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동일한 죄에 대하여 누구는 죽이시지만 누구는 내버려두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심각한 죄이기 때문에 무조건 죽이시느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죽이셨지만 다른 곳에서는 죽이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죄라도 죽음의 형벌에서 먼 죄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결코 가볍게 생각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한 예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거짓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사소한 거짓으로 자신의 잘못을 가리거나 자신의 잘못을 경감시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런 거짓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해를 입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진실하신 이상 거짓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거짓은 어떤 이유에서든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한 예로 든 것이지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하신 마태복음 5장에서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짓는 죄만이 아닙니다. 유아로서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할 때 어떤 이들은 유아들의 경우 죄가 없는데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고 묻지만, 아담의 허리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죄인으로 출발합니다. 그 스스로 지은 죄는 없다 할지라도 원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 죄책이 있고 부패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죄악 속에서도 죽음에 이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인들에게는 죽음의 형벌이 미뤄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죄로도 죽어 마땅하지만 그들의 죄가 관영하기까지 보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음의 형벌을 맞게 됩니다. 반면 의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에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나오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으로 인한 형벌로서의 죽음을 면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자들은 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없고, 오히려 죄를 멀리하고 거룩을 가까이 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순결함과 정절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두 아들이 죽음 이후 셋째인 셀라가 형을 대신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하지만 아버지 유다 입장에서는 두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셀라도 죽을까 염려하여 셀라가 장성하기까지 기다리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말의 아버지 집으로 돌려보내게 되는데, 이후 다말이 꾀를 내어 결국 시아버지와 동침하게 되는 내용으로 연결이 됩니다. 12절 이하 18절을 먼저 보시면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다말의 악한 계획을 보게 됩니다. 물론 유다가 셀라의 장성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말을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악한 계획을 세운 것이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악한 계획과 악한 일은 악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명분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으로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의 경우 자신의 며느리인 줄 알지 못하고 동침하게 됩니다. 이미 창녀로 여겨 들어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알지 못하고 며느리와 동침했다고 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그런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악에 대하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대든, 아니면 몰랐다 혹은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를 대든 그것은 모두 핑계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죄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은 가장 선한 것을 내놓을 뜻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시기로 하셨는데, 그 족보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을 통해 알려지고 있는 유다와 다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동침이 있고, 그 일로 인하여 자녀를 낳게 되는데 그 자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죄를 내놓는데 그 죄악 속에서 가장 선한 것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더란 것입니다.
유다가 자기의 며느리인줄 모르고 창녀로 여겨 들어가려고 할 때 다말은 무엇을 주고 들어오겠느냐고 묻자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말합니다. 다말의 경우 그럼 그것을 받기까지 담보물을 요구하는데, 그때 준 것이 도장과 끈과 지팡입니다. 이후 이 담보물을 통해 유다와 동침한 자가 자신의 며느리임을 증명하는 것이 되는데, 19절 이하 23절까지를 보면 약속한 어린 양떼를 주기 위해 창녀라고 여긴 사람을 찾지만 찾지 못하게 됩니다.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어느 정도 자신이 창녀라 여긴 자에게 들어간 일이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담보물을 찾고자 할 때는 자신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와 동침한 창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곳에는 창녀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입장에서는 더 찾아볼 수 있었지만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여 묻어 두기로 합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는 창녀와의 동침이 매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날 성의 문란함 속에 있어서 점점 성적인 죄악들에 있어 무뎌지고 있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7계명을 통해 말씀하신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깊이 살펴가야 합니다. 특히 한 나라의 멸망의 이유로 성적인 타락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예를 들자면 소돔이 그러합니다. 이미 소돔에서 sodomy[소도미, 남색]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런 성적인 문란함이 소돔의 멸망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난이라는 이름도 나오지만, 이 오난이란 이름에서 onanism[오나니즘, 수음]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7계명을 어긴 죄악이 분명합니다. 성적 타락이 한 나라의 멸망 이유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일반 역사가들도 한 나라 멸망 이유로 성적인 타락을 지적하는 일이 있는데, 그만큼 경계해야 될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을 때 의인이란 분명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자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계명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순결과 정절을 지키는 자, 하나님께서 거룩을 요구하신다고 할 때 거룩함을 따라 살아가는 자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주의 백성은 순결과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거룩하라고 명하신 말씀에 따라 거룩함으로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위해 가만히 덮어두려고 했지만 결국 며느리 다말이 임신하게 됨으로 모든 일의 자초지정을 알게 됩니다. 24절 이하 26절입니다.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반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인색합니다.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다는 다말이 정절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물론 다말은 남편 엘을 잃었고, 오난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셀라와 약속한 상태이기 때문에 유다의 가정과 완전히 결별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는 판단 아래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그러나 다말이 가지고 온 도장과 끈, 지팡이를 보자 자기 것인 줄 알았습니다. 자신이 며느리와 동침하였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죽어 마땅하다고 해야겠지만 담보물을 보고는 그가 나보다 옳다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죄의 결과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는 말은 쏙 들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후 유다는 더 이상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유다와 다말 사이에 쌍둥이 두 형제가 태어나는데 27절에서 30절입니다.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일단 이 둘은 유다와 다말 사이에 태어난 자들입니다.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낳은 아들들이 아닙니다. 때문에 수치스러운 일을 생각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시는데, 내용을 보면 손이 먼저 나온 자가 있어서 그가 형이 되겠다고 판단하어 홍색 실을 매게 됩니다. 그런데 도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먼저 나온 자가 누구냐 하면 동생이라고 판단한 자입니다. 특히 먼저 나온 자에 대하여 산파가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라고 하여 그 이름을 베레스라 하였는데, 그 뜻은 ‘터뜨림’입니다. 칼빈의 주석을 참고하자면 베레스가 어떻게 가로 놓인 장애물을 돌파하고 먼저 나왔는지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본래는 홍색 실을 맨 자가 먼저 나올 줄 알았지만 베레스라 이름 한 자가 그것을 뚫고 먼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홍색 실 맨 자가 나오게 되는데, 그 이름을 세라라 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은 결국 인간의 판단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베레스를 통해서 나오게 되는데, 인간의 판단에 따르면 세라가 장자로서 먼저 나올 것처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손이 먼저 나왔을 때 그가 형이라고 생각해서 홍색 실을 매었는데, 그 손이 다시금 들어가 버리고 동생으로 생각된 베레스가 터뜨리듯 나온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판단대로 행하시지 않다는 것을 이런 방식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은 이처럼 유다 가문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가나안 여인을 취할 때 아버지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는데, 야곱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따라 밧단아람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형을 피해 도망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거기서 아내를 얻어 열 두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당연히 자녀들에게도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을 금지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딸 디나의 사건도 있었습니다. 더더욱 그런 일에 대하여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계한 그 일이 지금 유다 가문에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가나안 여인을 취할 뿐만 아니라 가나안 여인 중 한 명을 자신의 아들의 아내로 얻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도 죽고, 둘째 아들도 죽어 셋째의 경우 죽을까 하여 다말에게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말이 임신하였을 때 음행했다는 이유로 죽이겠다고 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음행한 자가 자신임을 알고 살려두게 됩니다.
유다가 창녀에게로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는 그 일이 분명 부끄러운 일인 줄 알았지만 들어가게 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말의 경우 시아버지인 것을 알았지만 알면서도 자신의 몸을 내주기까지 합니다. 온갖 형태의 악행이 지금 창세기 38장을 통해 기록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 유다와 다말 사이에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납니다.
어떤 면에서는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요셉과는 철저히 대조적입니다. 심지어 창세기 39장에서는 어떤 일까지 있습니까? 요셉이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는 일까지 있게 됩니다. 정절을 지킨 것입니다. 정절을 지키다가 결국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철저히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룻기 4장 18절 이하 22절을 보겠습니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족보가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즉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모든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메시아 하면 좀 더 좋은 조건 속에서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요셉의 족보를 통해 그리스도가 나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38장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아무리 인간의 죄가 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을 세우고자 하시는 뜻을 형들의 악함이 방해할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죄악이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악함 가운데 선한 것을 내놓는다는 이유로 악한 것을 악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말의 악한 계획, 그리고 그 실행은 분명 악한 것입니다. 유다의 경우 알지 못하고 며느리와 동침하였으나 그것 또한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입니다. 심지어 다말의 행동에 대하여 유다가 인정하는 것처럼 하고 있지만 유다가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의 죄를 가리는 모습으로 있을 뿐입니다. 가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가려진 채로 그들을 보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 없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죄의 저자가 아니십니다. 죄의 저자는 아니시지만 섭리 가운데 이런 일이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인간의 극악한 죄악 속에서도 그런 인간의 죄를 해결하고 그들을 구원하실 자를 보내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 주고, 약 주는 식이 아닙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인간이 병에 걸린 것은 그들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습니다. 아담과 하와 스스로의 자유의지의 방치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 죄의 종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기로 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죄가 난무하는 유다의 가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기로 하신 것입니다.
요셉의 가문을 통해 보내실 수 없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도록 하기 위하여 죄를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자비가 얼마나 깊은지 알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 스스로의 죄악 된 계획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긍휼이 얼마나 높은지 알기 위해서 인간 스스로가 짓는 죄악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사실 때문에 다음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즉 우리는 창세기 38장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그 은혜 가운데 있다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살고 있다면 유다와 같은 죄악 가운데 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38장을 통해 우리는 율법을 통해 말씀하고 있는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런 죄악에 물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살펴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창세기 38장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내다보는 내용으로서의 기록입니다. 요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면 그는 바로 이 유다의 가문을 통해 오실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룻기에서 확인했지만 이러한 족보의 내용은 계속해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런 기록 속에서 영광스럽고 고귀함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최대 수치가 폭로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실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악에서 최선을 나타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믿고 의뢰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이 하나님이란 사실과, 이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형통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