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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막힌 인생흐름, 흐름으로 뚫자>의 줄거리:
막힌 배수관을 뚫는 방법은 크게, 뚫기 기구인 뚫어뻥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뚫기용 액체인 트래펑을 사용하는 두 가지입니다. 다양한 이유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나 삶도 흐름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뚫어야 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인생의 흐름이 막힐 때에는 절대로 뚫어뻥을 사용하면 안됩니다. 막힘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인생 흐름이 막힐 경우는 오직 흐름으로만 뚫어야 합니다. 원수로 인해 인생 흐름이 막힌 초기에 다윗은 또 다른 흐름에만 전력합니다.
막힌 인생흐름, 흐름으로 뚫자
(시편 59:1~17)
1.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2. 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3.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4.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
5. 주님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오니 일어나 모든 나라들을 벌하소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막힌 인생흐름, 흐름으로 뚫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막힌 인생흐름, 흐름으로 뚫자’
본문에 의거해서 좀 더 제목을 풀어보면 ‘원수로 인해서 막힌 내 인생의 흐름 하나님의 뜻의 흐름으로 뚫자’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막힌 배수관을 뚫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뚫어뻥을 이용해서 직접 뚫거나 액체로 된 화학제품(트래펑, 펑크린)을 부어서 녹여버릴 수도 있습니다. 배수관이 막히듯이 우리 인생도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뚫어뻥 방식으로 직접 뚫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흐름이 막힐 때에는 반드시 또 다른 흐름을 통해서 뚫어야만 합니다.
한방에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치료를 합니다. 신체의 통증을 총칭해서 비증(痹症)이라고 합니다. 모든 통증의 원인은 막혀서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활동을 지탱해주는 에너지인 기와 영양물질인 혈의 막힌 부분을 뚫어주고 원활하게 해주는 것이 한의학의 지상과제입니다. 모든 병의 원인을 기와 혈의 흐름이 막혔음에 기인한다고 보고 이 흐름을 원활하게 해 줄 때 치료가 된다고 봅니다.
우리 인생이 아프고 괴롭고 무겁고 힘든 이유는 흐름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나서서 뚫으려 할수록 막힘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인생의 흐름이 막히면 흐름으로 뚫어야만 하는데, 그 흐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마치 화학제품을 붓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녹아서 뚫리는 방식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도 한의학에서 말하는 건강법과 마찬가지로 흐름을 유지해주면 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에 꿈과 비전을 가지라’고 말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인생을 막습니다.
우리는 대단한 꿈은 아닐지라도 언제나 소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로부터 발생한 소원과 계획과 바라는바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꿈과 소원과 계획이 인생의 흐름을 막습니다.
인생에 필요한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날 때에 이미 하나님의 뜻 안에는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 대한 비전뿐만 아니라 꿈과 계획까지 이미 다 가지고 계십니다. 심지어 그러한 꿈과 비전이 이루어지기 위한 힘과 능력까지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문제는 흐름입니다. 인생에 하나님의 뜻을 흐르도록 하느냐 막아버리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꿈과 비전을 갖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함과 동시에 나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고 계셨던 하나님 뜻의 흐름은 막혀버립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에 대처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 처하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은 있습니다. 이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 없이 발생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들에 피는 백합화나 공중에서 날다가 떨어지는 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인간은 내가 어떤 상황에 대처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묻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흘러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단 하나 어떠한 상황에 대해 내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부모님의 뜻이나 전문가의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최선이고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존재하는 그 뜻을 흘러들어오게만 하면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산다면 비전이나 꿈을 가질 필요조차 없고 문제가 생겨도 해결 방법을 궁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일이기에 그 뜻을 흘러들어오게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 수반되기 때문에, 뜻이 흘러들어오는 곳에 이루어지지 않음과 막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처럼 인생에서 흐름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관계해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흐르도록 상태를 유지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관계 또한 통로이기 때문에 일단 나에게 받아들여진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 퍼져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진다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관계에 있어서 나의 말하고 행동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배우자에게 잘 흘러들어 간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로 인해 원수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나의 대적자가 되거나 위협을 가해 오기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은 관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관계들 중에 하나가 막혀버리고 인간의 뜻으로 공격해 들어오려고 할 때에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차피 관계로 이루어진 삶이기 때문에 나만 하나님의 흐름을 통과시킨다고 해서 인생이 편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나는 하나님 뜻의 흐름을 통과시키면서 살고 있지만, 나를 원수로 여기는 이들은 하나님의 흐름을 단절하고 나를 대적하고 위해를 가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어떻게 대응해야 나의 인생의 막힌 흐름이 뚫리고 기쁨과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들 중에서도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BC.1020년경에 다윗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 왕의 신하이자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명령을 받아 전쟁에 나갈 때마다 공을 세우게 되자 백성들은 다윗의 이름을 칭송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인생에서 거칠 것 없는 약진이 이루어지고 승승장구하게 되었습니다. 소위 인생에 대박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기세로 약진하던 다윗의 인생의 흐름에 돌연 막힘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온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에게 집중되자 사울 왕의 시기심은 증오심으로 커져갑니다. 그리고 증오심은 살의(殺意)가 되어서 다윗을 향하게 됩니다. 어느 날 사울이 두통으로 괴로워할 때에 다윗을 시켜 수금을 타게 하였습니다. 그러다 느닷없이 이성을 잃고 창을 집어던져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겨우 창끝을 피한 다윗이 자기 집으로 도주하자 이번에는 자객들을 보내어 죽이려고 합니다. 바야흐로 다윗의 십년간의 도주생활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입니다.
본시는 이렇게 다윗의 집이 사울 왕이 보낸 자객으로 둘러싸인 순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다윗은 사울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였던 미갈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자객들의 포위망을 뚫고 도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십년을 광야와 동굴을 전전하며 도피 생활의 괴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은 이 도피생활을 시작하는 첫 번째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먼저 3~4절을 보면 사태 파악에 들어갑니다.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로소이다 /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라고 합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호소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뒤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대면하고 있을 때에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다윗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의 흐름을 통과시켰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사위가 되어서 전쟁에 나갈 때마다 그 전쟁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의 흐름이 흘러 들어와서 표현되도록 했을 뿐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나서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의 흐름만을 주시하며 살았던 결과가 장인으로서 신하로서 섬기는 왕이 시기심에 미쳐서 자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상황을 보며 사울을 비롯한 원수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의 흐름이 흐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합니다. 결국 사울은 그로 인해서 망하고 말 것임을 다윗은 파악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뜻의 흐름이 막힌 것은 이미 이전의 일이었지만,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 사울의 상태를 파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시를 통해서 그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견합니다. 한편 사울의 시기심으로 인해 다윗도 나름대로 급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울 왕에게 그대로 흘러들어 갔다면 사울이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잘 나가면 잘 나갈수록 오히려 사위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고, 백성들 앞에서도 자신의 으뜸가는 장수가 된 다윗을 추켜세우는 미덕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백성들도 왕과 신하의 화목한 모습을 보며 기뻐하였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요새 TV를 보면 정당 간에 단 하나의 안건에서도 하나가 되질 못합니다.
국민들은 한 번이라도 화목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사사건건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울에게 원하는 것이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높아질수록 장인이자 왕으로서 그 위에 있는 사울도 높아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의 흐름이 막힌 사울의 통찰은 그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해치는 것은 원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도 이를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울을 파악한 다윗은 이 깨달음을 스스로에게 적용해봅니다. 지난 말씀에서 천하 만물이 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길거리의 돌멩이조차도 하나님 뜻의 만물인터넷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촘촘하게 연결된 하나님 뜻의 그물망 안에서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교만으로 그물망을 찢습니다. 그것을 12절에서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 그들이 말하는 저주와 거짓말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의 흐름이 막히면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말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 됩니다. 그럴 때에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은 거짓말이고 사기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머리카락만큼의 행동과 말도 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뜻을 발동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교만함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 안에서 그물을 찢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고 복지가 주어질 수 없습니다.
14~15절을 보면 “그들에게 저물어 돌아와서 개처럼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굶주려서 밤에 배회하는 개들로 비유합니다. 그러나 16~17절에서는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그들과 반대되는 삶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관계함으로서 자객들에게 둘러싸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의 흐름으로만 맞서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흐름이 막힘없이 계속해서 나를 통해 흐를 수 있을까요?
굶주린 개로 비유된 사울과는 다르게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그 뜻의 흐름은 유지됩니다.
16절에서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생활에 적용하여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직장에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부장님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인간적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일을 잘해서 성과를 낸다든지 명절에 선물을 보내서 화친하려 할 수도 있고 혹은 사표 낼 각오를 하고 당당히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대처는 하나님의 흐름을 더욱 막을 뿐입니다. 직장이 여러분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쉽게 사표 쓰지 마십시오. 다윗은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막힌 배수관을 녹이는 트래펑을 붓듯이 하나님의 뜻을 직장에 흘려보낼 뿐입니다.
부장님께 부당하게 야단을 맞아서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다윗도 사울 왕이 시킨 대로 전쟁에 이겼는데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럴 때에 야단맞고 돌아와서 하나님을 피난처와 요새 삼는 기도를 하십시오. 부당하게 대하는 부장님께 달라붙어서 분한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피난처와 요새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난하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격해서 자신의 지경을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꾸 도망해서 요새에 숨을 생각을 하고 피난 갈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피난처로 생각해서 도망치고 요새에 숨어서 평강을 누릴 생각을 할 때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흐름이 막힘없이 나를 통과하게 됩니다.
어떤 악한 직장상사를 만나더라도 사표라는 이름의 뚫어뻥을 들고 직접 맞서 싸우려고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곤란을 당할 때에 마음은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그 현장을 떠나는 것입니다. 왜 그 현장에 남아서 감당해보겠다고 합니까? 다윗처럼 그 현장을 떠나서 마음이 피난가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막힌 배수관을 뚫어버릴 하나님 뜻의 트래펑이 부어집니다. 그럴 때에 내 인생의 흐름을 막고 있는 악한 자들의 행태에 하나님의 흐름이 맞닿을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세움 받기 위해 사울 왕의 막힘이 십년에 걸쳐 뚫렸습니다.
뚫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그것이 뚫렸을 때에 이 세상에서 이루실 계획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보내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삶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마음을 피난시키면 그에 합당한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뜻의 흐름이 막힌 곳을 뚫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심을 통해 하늘을 피난처 삼는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천지 어느 곳에나 손길이 닿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피난가야만 합니다. 마음을 일이 벌어지는 현장에 남아있지 않게 하십시오. 자녀 문제, 부부간의 문제, 돈 문제,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에 암이 걸렸을지라도 그 현장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암에 의해 인생의 흐름에 막힘이 일어나면 그 막힘에 대해서 내가 나서려 하지 말고 우선 마음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피난 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암이라는 막힘에 하나님 뜻의 트래펑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 뚫림은 암이 낫는 것이라면 암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가 없이도 나을 것입니다. 신유은사를 받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안수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암을 주신 이유를 알게 됨으로서 스데반 집사님처럼 하늘나라를 보면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소망하는 믿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암 걸려 죽는 것이 손해 보는 것이고 억울한 것입니까? 하나님께로 빨리 갈 수 있는 길이라면 최고로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는 한 성도님께서도 암으로 돌아가실 때에 “암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영혼의 암을 치료하는 약이었다.”라고 고백하시고 42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분의 신앙심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과 똑같은 신앙입니다. 이것이 인생이 뚫리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한때는 암 때문에 두려워 벌벌 떨었으나 이제는 암을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고맙고 감사할 수 있고, 아버지께로 빨리 가고 싶어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면 뚫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앞서 말씀드린 대로 치료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암은 나을 것입니다.
이제는 인생에 막힘이 생길 때에 내 손에 뚫어뻥을 들고 직접 나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피난 갈 때에 현장에는 하나님의 뜻의 흐름이 부어져서 막힘을 뚫어나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막혀있는 현장에 대해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 현장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트래펑이 부어지듯이 하나님의 뜻의 흐름이 부어진다면 막힘이 뚫리는 역사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삶에는 크고 작은 막힘과 장애들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에서 그 현장에 대해 죽게 해주셔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로 피난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떠난 자리에는 트래펑이 부어지듯이 하나님의 뜻의 흐름이 부어지고 지속되어서 막힌 곳이 뚫리는 역사를 하루 종일 경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