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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1장 1-16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1장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드러내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25). 그리고 이것을 통해 장차 성도들이 어떻게 부활하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일도 놀라운 일이지만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정도 되면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만 하다고 여겨지지만, 요한복음 11장 45절과 46절에 보면 모두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고 도리어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는 자도 있음을 기록합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통해서도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신 교훈을 새길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6-27) 더불어 놀라운 표적과 이적과 기적의 역사를 펼치신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니란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통해 믿음을 주시는가? 표적이 아니라 그의 말씀입니다. 물론 말씀하신다고 해서 그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믿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하시지만, 표적을 보이시지만 그리스도의 양이 아닌 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양이라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에서처럼(롬10:17)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표적은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는 수단으로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병든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식과 죽고 난 이후 그에게 가고자 하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단 1절에 보시면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고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10장 40절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벗어나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은 요한복음 1장 28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베다니’라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동일한 지명이 언급되고 있는데, 동일한 장소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 지역은 18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자들의 성경인 제네바 성경이나 킹제임스 번역 성경에 보면 이 두 지역을 구분하는데, 요한복음 1장 28절에 나오는 지역을 ‘Bethabara’[베다바라]로 적고 있다면 요한복음 11장 1절에 나오는 지역을 ‘Bethany’[베다니]로 적고 있습니다(Stephens 1550 Textus Receptus도 참조). 오늘 본문 8절만 하더라도 7절에서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실 때 제자들이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란 말을 하게 됩니다. 저들을 피하여 요한복음 1장 28절 베다니로 오셨지만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다시금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다니로 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즉 지금 주께서 계신 곳은 유대 땅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시 본문 1절을 보시면 어떤 병자가 있다고 하면서 그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누이들의 이름도 언급합니다. 복음서를 순서대로 읽어본다면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10장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마르다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눅10:38), 그 과정을 보면 예수님과 상당히 가깝게 지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특히 오늘 본문 2절에서는 마리아에 대하여 좀 더 소개를 하는데,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고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하여 기록할 때 마리아에 대하여 칭찬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그 뉘앙스가 좀 더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지만 누가복음 10장 41절과 42절을 읽어드리면 다음과 같이 교훈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본래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만 필요하니라 마리아는 이 선한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10:42)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 절대적으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마리아가 행한 그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경우는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지 않더라도 더 중요한 일, 아니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귀한 분을 자기 집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러면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일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먹고 마시기 위함이 아니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 특히 그들 가운데 자기 양으로 부르고자 하시는 자들에게 그의 말씀을 먹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고 또한 더 풍성히 얻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리아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사건으로 마태복음 26장, 그리고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7장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주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한 여자가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으로 기록합니다(눅7:38). 이 여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를 죄인이라고 판단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누가복음 7장의 인물을 요한복음 12장의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보지만, 같은 인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1장 19절에 의하면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인물이 아니란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를 소개하면서 요한복음 12장에 나올 사건을 미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요한복음 자체로도, 또한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더라도 주께서 죽음을 앞두고 행하신 거의 마지막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할 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가 하면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요한복음 자체만 하더라도 여러 가지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오래된 병을 고치기도 하시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이기도 하시며,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기도 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이보다 더 많은 이적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은 이적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교훈을 위하여 선별하여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는 이적이 무엇이냐?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입니다. 칼빈의 표현으로 하자면 이전에 행하셨던 모든 이적을 총결산하는 것입니다. 표적 중의 표적이 요나의 표적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을 보여 죽음으로 끝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도 단순히 보여주는 정도만이 아니라 이미 말씀하신 사실을 확증하고자 하신 것이요(요6:57-58 참조), 또한 말씀하실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요11:25-26 참조).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병들었기 때문에 속히 오셔서 치유해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동안 행하셨던 일들을 알고 있기에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병이 들면 의사를 찾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할 때 의사조차 치유할 수 없는 병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사를 통해 치유하든, 아니면 의사를 통해 치유할 수 없든 여기서 동일한 가르침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우리의 도움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병이 들면 의사를 찾고, 의사를 찾아 병을 치유하면 의사를 통해 병을 낫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 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8) 내가 행한 것이지만 내가 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을 찾은 것은 단순히 의사가 치유할 수 있다, 치유할 수 없다는 문제를 넘어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믿는 믿음을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통해 뭔가를 했다고 해서 사람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도 기억해야 하지만 그리고 그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가져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요청할 때 그의 오라비인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로 지칭합니다.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고, 또 누가복음 10장과 같은 내용으로 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잘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께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행했기 때문에 당신도 나를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요청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 그의 사랑하심에만 호소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요청할 때조차 자신의 공로를 근거로 들고자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런 것 아닙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감사를 한다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자신의 공로를 버리지 못하는 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했다는 것으로 은밀한 공로주의를 말할 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이, 그의 사랑하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다, 음식도 대접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선하심, 그의 사랑하심에 근거한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의 오라버니인 나사로를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빨리 오시기를 요청합니다. 이것이 저들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은밀한 공로주의를 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에게만 요청한다고 할 때 우리의 공로에 따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의 선하심을 따라, 그의 사랑하심을 따라 구하고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요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와 함께 있는 자들에게 4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9장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일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는 다음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이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어두움이요, 모든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 있지만, 그들 가운데 자기 양들을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을 병에 걸려 죽어가는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고난과 고통, 그리고 질병의 원인은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죄라는 원인에 도달하게 됩니다. 죄만 없었다면 우리가 겪는 고난과 고통, 질병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죄로만 돌릴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고난과 고통과 질병조차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나사로의 병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일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한 일로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고의로 지체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마르다와 마르아를 통해 들은 말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기록하기를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도 사실은 빨리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예수님께서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가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가 계시던 곳이 요한복음 10장 40절,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던 곳인 베다니라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것도 몇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 17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죽었다면 곧바로 가셨을 것입니다.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이 이틀입니다(요11:11 참조). 그리고 가서 도착했을 때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따라서 죽은 직후 곧바로 가셨다고 할 때 나흘 만에 거기에 도착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갔다고 하더라도 도착하기 전에 죽어 이틀이 지난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이틀을 더 머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면서도, 죽을병에 걸려 오늘 내일 하는데도, 그만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사랑하신다고 하시면서 나사로의 생명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신다고 하시면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요청에 대하여 귀 기울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으십니다. 무엇입니까? 4절 말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지체하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병이 아니더라도 고난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 남편이 속 섞입니다. 내 아내가 속 섞입니다. 내 자녀가 속 섞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한순간 변화가 되고, 가정이 평안해 졌으면 하는 바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기도하고 기도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게 맞는가 묻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하나님이 너무 하시는 것 아닌가 라는 식으로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해서 항상 그 기도에 곧바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체하십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우리가 보기에 지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때가 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기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은밀하게 역사하시면서 기다리실 뿐입니다. 그 말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일에 있어 조급하게 현재의 상태만을 가지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단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인내하는 자들로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응답이든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기다리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곧바로 응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분이 어떻게 아들까지 내어주신 그 대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현재 상태에 따라 하나님 사랑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서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 질문은 지금 현재 상태를 보시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참한 상태, 고통의 상태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답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에서는 미워하되 야곱은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정에 기반을 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영원 전부터 사랑하되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할만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무선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우리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 사랑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울 수 있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지만 그렇게 내버려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틀을 더 유하시고 난 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십니다. 7절을 보시면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그러나 제자들 편에서는 걱정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8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한복음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오병이어 이후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의 반감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기록된 명절이 되었을 때는 은밀하게 가실 정도입니다. 은밀하게 가시지 않아도 되는 분이시지만 그만큼 예수님의 대한 반감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8절과 관련된 내용은 바로 앞에 있는 요한복음 10장에서의 사건을 언급한 것입니다. ‘방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오고 가는 시간만 하더라도 일주일이 넘게 걸리고, 요한복음 10장 40절에 의하면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사정은 어떠한가? 얼마 전에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던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은 곧바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어쩌면 제자들 마음에 큰 병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들보다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더 잘 아실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나사로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이틀을 더 유하신 것으로 인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틀 후 갑자기 유대로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께 유대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다고 하면서 만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9절과 10절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낮과 밤이라는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낮이면 빛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녀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없는 밤이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니다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유대인들의 반감으로 만류하지만, 지금은 밤이 아니라 낮이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죽기 위해서지만 죽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20절에 보면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내용과 동일한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 11절을 보시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하는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신자들도 마지막 때 다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부활이 아닙니다. 영원한 형벌을 위한 부활일뿐입니다. 우리와는 다른 부활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잠잔다는 표현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직 성도만이 생명의 부활로 있기에 잠잔다는 표현을 돌립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이지만 부활을 염두 해 두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었지만 내가 그를 다시금 살리실 것이란 겁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은 12절로 반응합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그리고 13절에 보시면 예수님의 뜻과 저들의 이해한 바가 다르다는 것을 밝힙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만 이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잠들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잠들었다고만 이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깨우러 간다는 말의 의미를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잠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이제 병이 호전되었다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유대로 올라가시는 것을 만류하고자 하는 저들의 마음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그리고는 15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하나님의 모든 섭리 안에서 유대인을 피해 베다니로 온 것, 그리고 유대를 떠나 있으면서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려 죽게 된 것, 그리고 이제 올라가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보이고자 하시는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것으로 있는가? 너희를 위한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너희로 믿게 하려 한다는 것은 믿음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들은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이 거짓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10장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는 말씀처럼 믿음을 더하기 위하여 병든 자를 고치시는 정도만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 또한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지만 표적 자체가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살아났을 때 믿는 자도 있지만 모두가 믿는 자로 있는 것은 아님을 말씀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들은 그의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요한복음이 증거 하는 것처럼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사실을(요1:4) 더욱 주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요한복음 5장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4-29) 이런 말씀의 확증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부이지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지만,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뜻이 확고하기에 더 이상 제자들은 만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도마라는 제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16절을 보시면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왜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로 가고자 하는 것을 가지 못하도록 했는지 그 이유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한 마디로 거기 가면 죽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낮과 밤에 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의 의미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행보를 보면서 죽을 위기 가운데 있었어도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아 잡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도마는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끝까지 의심하는 자로 소개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손과 옆구리에 난 구멍자국을 보이시고 그곳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 보고서야 믿게 됩니다. 이런 그가 이 말을 했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불신앙이요, 경솔함이요, 절망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 말씀의 확증을 위해 지금까지 표적을 보이셨고, 이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표적까지 보이고자 하십니다. 물론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표적을 본다고 해서 당장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참되게 깨닫게 되는 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 성취 되는 때입니다. 성령의 특별한 역사와 함께 성령의 조명하심이 그들에게 주어질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 일어난다고 해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표적을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치셨고, 표적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나사로의 부활 이후 다른 표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이런 점에서도 저들의 믿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말씀 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이 사역만큼은 내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역만큼은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씀 사역을 대체해 뭔가 좀 더 빠르게 효과를 보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상관없는 프로그램, 말씀에 근거한다고는 하지만 형식적일 뿐인 그런 프로그램, 이것들이 교회 안에 자리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수요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8문의 내용을 살폈는데, 가톨릭에서는 형상들을 평신도들을 위한 책처럼 여겨서 교회에서 허용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말씀의 살아 있는 선포를 통해서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고전1:21). 이 지혜 안에 머물길 기뻐해야 합니다. 이 지혜 안에 참된 믿음이 있으며, 이 지혜 안에 혹 더딜지라도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임을 다시금 새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