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나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나의 하나님, 나를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시편 38:21]
시편에는 일곱 편의 참회시(6, 32, 38, 51, 102, 130, 143)가 있다.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본능적으로 '혹시 내가 어떤 죄를 지은 결과인가' 돌아보게 된다.
'먼저 자기를 돌아보는 훈련'은 중요한 영성훈련이다.
지금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주님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길이 열린다.
내 죄로 인해서 산산조각 부서진 삶이라고 할지라도,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향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은 그를 비껴가지 않는다.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죄를 더 많이 지은 사람이 은헤를 넘치게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죄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아주 작은 죄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죄를 지었음에도 본인이 '죽을 죄'라고 생각하면, 그 은혜가 큰 것이다. 반면에 살인죄를 저질렀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그에게 은헤는 없다. 영화 <밀양>의 유괴범처럼 "하나님이 나의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고 감격스러워할 수 있다면 그가 받은 것은 은혜가 아니다.
자기 죄에 대한 통찰의 크기만큼 은혜의 크기도 비례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허물을 지으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의 멍에를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사랑하는 자들과 친구들과 가족들이 그 멍에를 더 무겁게 한다. 거기에 시인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과 시인의 불행을 바라는 이들은 조롱을 하고 죽이려고 달려든다. 그래서 시인은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에 빠졌다. 그대로 익사할 것만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곳에서 유일한 길을 발견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러르고 바라볼 그분이 계심을 믿는 것이다.
최후의 보루이신 하나님에게 시인은 미주알 고주알 탄식하며 자신의 삶을 토로한다. 자기의 잘못을 다 털어 놓는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22절 시인의 절규를 보면 "빨리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여전히 시인이 환난 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참회하고, 기도하고, 부르짖지만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정말 달라진 것이 없는가?
시인이 절망의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과 자기를 조롱하는 이들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을 구하지 않는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해주실 수 있으며, 그래야만 폭력의 악순환도 멈추게 될 것임을 알기에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랄뿐이다. 이것은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달라'는 무책임한 신앙의 차원이 아니다. 시인은 지금 아무것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니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므로, 그것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일이고,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유일한 방법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자각했을 때,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지 않는 유한 방법은 그 분이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그분에 대한 신뢰만이 그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이런 점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그러므로, 신 앞에서 자신을 솔직하게 토로하라. 숨기지 말고 다 토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