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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골육의 정을 통해서 배운 하나님 사랑/룻3:1-18
오늘 이 말씀에 보면 기업 무를 자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기업 무를 자. 여기 9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죠.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은 우리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라. 그런 말을 하고 있어요.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아들이 없는 자에게 아들을 낳아줘서 그 대를 잇게 한다 그런 뜻입니다. 엘리멜렉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은 아들이 둘 있었는데, 다 죽어죠. 두 아들이 죽으니까 엘리멜렉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요. 그래서, 대를 이를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서 누군가 친족 중에서 룻과 결혼을 해줘야 했어요. 그래서 그 룻에게 아들을 낳아주면 거기서 대를 잇게 되는 그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요청을 보아스가 쾌히 승락하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기업을 무르게 할 자가 자기 외에 또 있지만, 그 사람에게 먼저 물어보고 먼저 가까운 친족에게 물어보고 가까운 친족이 먼저 기업을 무를 자격이 있습니다. 가까운 친족에게 물어보고 그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겠다 하면 네 청을 들어주겠다. 그래서 결국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가 되고 맙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아들을 낳아줘서 혈통적인 대를 잇는다는 것 외에, 이스라엘 백성이 대를 잇는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고 신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속량하다, 기업 무른다는 그 뜻은 속량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속량한다, 대신 값을 지불해준다, 뭐든지 빚이 있으면 다 갚아주고, 대신 가족으로 삼아서 그 빚을 다 갚은 다음에 속량해준다는 그런 뜻이 기업 무를 자라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업 무를 자에요.
우리가 영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기업 무를 자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친 자녀로 만들어 주셨다는 그런 영적인 의미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가족이라는 그런 개념으로 좀 바꿔서, 하나님은 바로 이 기업 무를 자를 가족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가족을 통해서 하나님은 전도하게 하시고, 가족을 통해서 영적인 대가 이어지게 하시고, 남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가족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제가 이번 주간에 저쪽 west coast에 다녀왔습니다. 일종의 가족 신방입니다. LA에서부터 저희 형님을 방문하고, 또 몬테리 올라가서 이모님 방문하고, 또 샌프란시스코 가서 이모님 또 방문하고 그러고 왔습니다. 가족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또 그 믿음을 다지고, 또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가족들에게 더 늦기 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언제 다시 또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고 왔습니다.
몬테리에 계신 저희 이모님은 지금 칠순이 넘으시고 이모부님은 팔순이에요. 얼마전에 스트럭이 와서 지금 거동이 불편하세요. 그 분은 1948년도에 미국에 오신 분인데 한국말이 서툴러요. 그 분이 1948년부터 지금 2005년, 오십몇년, 오십칠년 동안 그 집에 예수라는 말이 지금까지 한번도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집안에서 오십칠년동안 예수라는 말 한마디가 한번도 전해진 적이 없을 거에요. 가족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가족 아니면, 그 산골짝 시골에 찾아가서, 몬테리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곳은 아주 산골이에요. 그 산골에 가서 그 집안에 가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가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제 팔순이니까 아마 이제 제 생각에는 얼마나 더 오래 사실지 모르겠어요.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그러고 갔습니다. 또 샌프란시스코 가서 이모님에게 또 찾아갔어요. 그 이모님은 좀 더 젊어요. 그래서 아직 시간이 좀 더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이모부와 이모님은 얼마나 더 오래 사실 지 몰라요. 또 LA에는 저희 형님이 있습니다. 형님이 얼마 전에 신앙 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이번에 찾아 갔더니, 신앙 생활을 너무 잘 하고 계세요. 집사님이 되셨어요. 저는 우리 교회 집사님 많은데, 죄송합니다만, 저희 형님이 집사님이 되었다는 그 말에 그렇게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이상해요. 다른 사람에게 느낄 수 없는 그런 어떤 특별한 감정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에 제가 나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같이 나갔습니다.
여러분, 가족을 통해서 진실한 믿음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내 형제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 지 그것을 보면 내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 믿음인지 그것을 반대로 확인할 수 있어요. 자기 믿음의 반증이 되는 거에요. 찾아가서 혹시 그 동안 믿음이 떨어지지는 않았는가, 그 동안 또 은혜 생활에서 멀어진 건 아닌가 해서 가서, 제가 염려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일년 반전에 제가 봤는데, 지금 훨씬 더 믿음이 좋아졌어요. 새벽 기도 나가서 둘이서, 여러분 우리 40일 특별 새벽기도 해서 은혜 많이 받고 감동 많이 받았지만, 제 사십 평생에 형님하고 새벽기도 나간 건 처음이에요. 여러분, 형제가 새벽에 같이 나가서 기도하는 그 감동을 제가 처음으로 이번에 알았어요. 그 특별한 감동이에요. 새벽기도 가자고 했는데, 전에 같으면 어림도 없는 소리에요. 어림도 없는 소리에요. 그런데, 새벽 기도 가자고 하는 데, 기쁘게 같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는 교회 옆으로 이사 간대요. 왜. 교회까지 한 40분 걸려요. 근데, 전에는 그냥 설렁설렁 교회 다닐 때는, 일주일에 한번 교회 갔잖아요. 그리고 또 어쩌다 뭐 빠지면 한 달에 두 번 세 번 교회 갔잖아요. 그러니 뭐 40분이든 한시간이든 관계없는 거에요. 가끔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차 타고 가면, 40분도 괜찮았어요. 그런데 점점 믿음이 자라고 교회생활에 열심을 가지게 되니까, 일주일에 이제는 네 번, 다섯 번. 애들도 데려다 줘야 하고 그러니까 도저히 40분씩 걸려서는 안되겠다 생각해서 좀 있다가 교회 옆으로 이사를 간대요.
여러분, 교회 옆으로 이사 간다는 그 말은 은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까 가까워지는 것입니까. 당연히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 멀리 사시는 분들 제가 탓하는 것 아닙니다. 그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제 형만 두고 하는 말이에요. 가족을 통해서 내 진실한 믿음을 확인하게 되요. 기업 무를 자. 결국은 영적으로 대를 잇는 그 역사를 하나님은 가족을 통해서, 보아스라는 친족을 통해서 이루어 주셨어요. 친족, 친족을 찾았습니다. 친족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에요. 친족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들이 있어요.
여러분 마음 속에 여러분들의 혈육과 여러분들의 골육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혹시나 있다면 여러분들의 믿음이 진짜 믿음이에요. 반대로, 혹시 그런 마음이 나에게 들지 않는 다면, 그 믿음은 아직 어린 믿음이고,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이 그 믿음을 귀하게 생각할수록 그 믿음을 가지고 형제에게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반드시 생깁니다.
제가 믿음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 제가 믿음이 자라지 못했을 때는 그냥 나 혼자 잘 믿으면 되었어요. 나 잘 믿고 또 내가 교회다는 게 즐겁고, 내가 예수 믿는 게 기쁘면 그걸로 족했는데, 이제는 형제와 또 친족, 골육, 심지어는 이모 내 가족을 내가 가족으로 정말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여러분들을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 가족을 믿음 안에서 가족을 대하지 않으면서, 여러분들 앞에서 제가 복음을 말하고 여러분들 앞에서 이 복음의 소중함을 얘기하고 믿음의 소중함을 얘기한다는 것은 좀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족을 통해서 우리를 진실하게 만들고 가족 앞에서 우리가 모든 가면과 가식을 다 벗게 만들었습니다. 나의 진짜 모습은 사실 여기서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고, 다른데 있습니다. 제 신앙과 제 믿음과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모습들은 여기에서 보여지는 게 아니고, 여기는 사실 많은 가면이 있고 많은 가식이 있어요. 옷을 다 입고 여러분들 앞에 서는 거에요. 그런데 정말 제 모습, 제 신앙과 제 인격과 제 삶의 모든 적나라한 모습은 가족 앞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가족을 대하는 모습 속에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내 형제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지 않는 다면, 과연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할 것인가. 내가 그 믿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여러분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식이나 부모나 형제에게 그 믿음을 주려고 할 거에요. 그래서 형제를 통해서 가족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시킵니다.
두 번째로, 가족의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은 진실한 용서를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 보니까 나오미가 지금 타작 마당에 있는 보아스의 누워있는 곳을 갔어요 밤에. 그래서 보아스가 하루종일 타작을 하고 그 곡식을 지키기 위해서, 타작 마당에서 잠자고 있을 때, 보아스가 누워있는 그 이불을 덮어 들고 , 그 이불 밑으로 들어갔어요. 이건 도덕적으로 볼 때, 굉장히 큰 일입니다. 큰 허물이에요. 도덕적으로 만약에 이것을 보아스가 받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굉장히 큰일 날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보아스가 덮어줬습니다. 9절에 보니까, 보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신이요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덮으소서. 이건 단순히 이불을 덮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허물을 덮는다는 말, 허물을 덮는다는 뜻입니다. 허물입니다. 사실 이 룻의 가정은 허물이 많아요. 그 시어머니도 허물이 많고 시아버지도 허물이 많고 그 잃은 두 아들은 제 명에 못 죽고 일찍 갔어요. 허물이 많은 가정이에요. 허물이 있기 때문에 지금 기업 무를 자가 필요하게 된 거에요. 우리가 허물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 필요없어요. 우리가 죄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 믿을 필요 없습니다. 다 허물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 우리를 덮어줄 사람이 필요한 거에요. 덮어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서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 덮어주는, 진정한 덮어줌의 진리, 진정한 덮어줌의 용서를 배우는 곳이 어디냐, 바로 가정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가족, 자기 형제나 자기 자식이나 자기 부모에게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한 열배는 더 관대합니다. 혈육에게는 관대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좀 참지 못한 부분도 있어요. 혈육이기 때문에, 금방 성을 내고 금방 화를 내고 다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대개의 경우 혈육에게는 타인에게 보다 한 열배는 우리가 관대해요. 진정한 용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장이 바로 가정이란 말이죠.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조그만 일도 우리가 참지 못하는 것도, 우리 형제에게나 자식에게나 부모에게는 다 덮어주고 넘어갑니다. 진정한 가족의 아픔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진실한 용서라는 것을 하나님은 가르쳐 주십니다.
형제의 아픔은 고통이기 보다는 고민이에요. 저는 고통과 고민을 좀 다르게 생각했어요. 고통이라는 것은 좀 양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고민은 그건 정신적인 거에요. 형제의 아픔은 고통이 아니고, 고민이에요. 다른 사람의 아픔은 우리가 고통으로 생각합니다. 아 고통이 심하겠구나 그런데, 형제의 아픔은 고통이 아니고, 나에게 고민으로 다가옵니다. 정신적인 아픔으로 다가와요.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우리가 그냥 고통으로 생각하면, 예수님 굉장히 아프셨겠구나, 그 정도에서 우리가 그냥 예수님 많이 아팠겠다, 근데 그게 아니란 걸 우리는 알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당하신 그 아픔은 단순히 그냥 많이 아픈 정도가 아니잖아요. 거기에는 인류의 죄를 짊어진 하나님의 고민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픔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 아픔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죠. 잴 수가 없는 것이죠. 측량할 수가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의 아픔이라는 것, 가족의 아픔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아픔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남의 아픔에 동정을 해도, 사실 그 아픔이라는 것은 그저 많이 고통스럽겠다, 많이 아프겠다 이 정도지, 그것이 나의 고민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이번에 제가 갔는데, 저희 이모님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희 이모님 밑에 동생이 하나 있어요. 남자 동생. 지금 뉴욕에 사시는데, 저에게 외삼촌이죠. 저희 어머님의 동생이고 저희 이모님의 동생이죠. 그 외삼촌 가정이 좀 문제가 많았어요. 그래서 아픔이 많고, 자녀들이 다 아픔이 많고, 이번에 갔더니, 이모님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세요. 그 동생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대요. 가슴이 찢어진대요. 여러분, 제가 힘들고 어렵고 고생할 때, 그 이모님이 조카인 저에게, 조카 때문에 가슴이 찢어진다는 그런 말은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조카를 사랑하고 다 좋아 하지만, 제가 들으면서 그렇구나, 동생에게 쓰는 표현하고 조카에게 쓰는 표현이 다르다. 조카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일은 없어요. 그런데 동생때문에는 가슴이 찢어져요. 그 아픔은 아무데서도 배울 수가 없어요. 그건 하나님이 주신 아픔이고, 그것은 정신적인 아픔이고, 심지어는 영적인 아픔이에요. 그런데, 사실 그 아픔을 통해서 우리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요. 거울처럼. 왜 그럼 내가 내 형제를 통해서는 그런 아픔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왜 다른 사람,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하는 다른 성도들의 아픔을 보면서는 왜 내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가 하는 자기의 이중적인 모습을 거울로 보듯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픔을 통해서 진정한 아픔과 덮어줌의 그 사랑을 하나님께 배우게 하신다 하는 거죠.
제가 이번에 오면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이모님하고 좀 다퉜어요. 여러분 남이면, 다툴 일도 없어요. 뭐 거기까지 가서 다투고 옵니까. 재미있게 놀다 오면 되지. 왜 다퉜냐 하면, 가족 얘기인데, 양해하시고 들으십시오. 우리 사촌들 중에서 제가 29년 동안 아직 보지 못한 사촌이 있어요. 미국에 온 지가 제가 딱 29년 되었어요. 근데, 미국에 왔을 때 딱 한 번 보고 아직까지 못 본 사촌들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모님께 따졌어요. 도대체 이모들이 어떻게 해서, 사촌들이 삼십년 동안 서로 못 보게 만들었냐고. 교육 잘 못 시켰다. 이모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제가 그랬어요. 몬테리에 계신 이모부 이제 팔십인데, 팔십인데 이제 돌아가신다 말이죠. 그럼 돌아가시기 전에 나이 드신 이모님들이 조금 자기 자식들 다 모아서, 사촌들이 그래도 다 만나서 보고 그리고 세상 떠나시게 해야지, 도대체 삼십년이 지나도록 뭘 했기에 사촌들이 한번 보지도 못하고 이러고 사냐. 우리 집사람이 옆에 있었어요.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싸웠어요. 다퉜어요. 그래서 나올 때, 얼마나 화가 났으면, 어제 새벽에 비행기 타고 올려고 나오는데 나와서 보지도 않아요. 그래서 제가 노트를 다 적었어요. 죄송하다고. 주제 넘은 소리를 했고, 너무 건방진 소리를 했고, 다 적고 나왔어요. 그리고 전화 또 드렸죠, 이렇게 되었지만은 상처를 받은 거에요. 한번도 육십 평생에 누가 자기한테 와 가지고, 잘 사시거든요. 가족이 아니면 제가 누구한테 가서 그런 얘기를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아픔이 있는 거에요. 가족에게는 그런 아픔이 있고, 허물이 있는거에요. 그런데 가족이니까 그러죠. 남이면 제가 누구한테 가서 그런 소리를 합니까. 생각하고 보니까, 그것도 다 쓸데없는 일이고, 그러나 가족의 아픔, 이 아픔, 룻의 아픔, 보아스의 나오미의 아픔을 덮어줬어요.
가족을 통해서가 아니면 우리는 이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가족을 통해서 용서를 배우지 않으면, 용서 못 배우고, 가족을 통해서 허물 덮어주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우린 배울 데가 없어요. 죄송하지만, 진정한 어떤 그런 용서는 교회에서는 배우기 어렵습니다. 먼저 가정에서 배워야 해요. 가정에서 안 배워 가지고, 나중에 교회에 와서 배운다는 것은 순서가 바뀐 거에요. 고민이에요. 고통이 아니고, 고민이에요. 찢어지는 거에요.
세 번째로, 가족을 통해서 우리는 진실한 기도가 뭔지를 배웁니다. 첫째는 가족을 통해서 내 믿음을 확인하게 되고, 둘째는 가족을 통해서 용서하는 것을 배우고, 덮어주는 것을 배우고, 셋째는 가족을 통해서 진실한 기도, 정말 축복해준다는 게 뭔지 우리가 배우게 되요.
보아스는 룻을 축복했습니다. 여기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곡식을 줘서 보내요. 곡식을 치마를 올리라고 해서, 치마를 올렸더니 거기다가 보리를 퍼서 줘서 보냅니다. 사실 이 얘기를 들어 보면, 보아스가 이 보리를 퍼 준 것은 이것은 필요 이상의 친절입니다. 지금 룻이 필요했던 것은 기업 무를 자가 필요했던 거지, 보리 퍼 주는 것까지는 필요한 게 아니었어요. 보리 안 퍼줘도 뭐 먹고는 살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보아스는 보리는 퍼 줬어요. 이건 필요 이상의 사랑, 필요 이상의 친절, 필요 이상의 베품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정말 아무 이해 관계 없이, 정말 아무 타산적인 생각 없이 이세상에서 정말 전혀 시기하는 마음이 없이 축복해 줄 수 있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가족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정말 진심으로 축복해주기는 참 어려워요. 우리가 다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이 가족을 통해서는 그것을 배우게 하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정말 그냥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만 목적이라면 가족의 중요성을 얘기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영적인 가족 공동체만 얘기하면 되지, 뭐 우리 가족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뭐하러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냥 구원 받고 우리 다 같은 가족이니깐, 천국가면 됩니다. 이것만 만약에 강조한다면 가족의 중요성을 얘기할 필요가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족을 주심으로 이 가족을 통해서 도저히 다른 데서는 배울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용서와 친절, 순수한 것을 가족을 통해서 배우게 하십니다.
항상 이상하게, 형제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죠. 항상 더 못해줘서 미안한 게 있어요. 여기 빈 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빈 손으로 가지 말라. 이상하게 가족 형제 부모 자식에게는 빈손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그런 특별한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번에 제가 가서 또 LA 가서, 저희 형님 댁에 가서 있었는데, 조카들이 있어요. 둘이 있어요. 제가 작은 아버지 인데, 작은 아버지 노릇을 못해서 그 동안, 이번에 가서 용돈을 줬습니다. 작은 아이에게. 용돈을 줬는데, 그 작은 아이기 고등학생인데 거절도 안하고 사양도 안하고 받아가니까 엄마가 옆에 있다가, 형수님이 옆에 있다가 자기 아들을 야단을 치더라구요. 그래도 괜찮다고 한 번 사양이라도 한 번 해야지 어떻게 그렇게 낼름 받아가냐 그랬더니 사양하면 다시 가져가면 어떡하냐는 거에요. 미국에서 큰 애들이라. 제가 조카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이모들에게 갔더니, 이모들이 저한테 용돈을 줘요. 조카잖아요. 아직도 용돈 받고 살아요 제가. 근데, 그걸 보니까 다 돌고 돌아요 그 액수가. 그 돈이 그 돈이에요. 이상하게 여러분, 가족은 그런 게 있어요. 그 돈이 그 돈이에요. 내 것 네 것이 없는 것이 바로 가정이에요. 저희 집에도 식탁에 20불 짜리 놔두면 아무도 안 건드려요. 20불 짜리 놔두면, 아무 말도 안하면 일주일 내내 거기 그대로 있어요. 아무도 집어가는 사람 없어요. 그거 다 엄마 돈이고 아빠 돈이고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쓰면 되지만, 필요 없으면 그냥 놔두면 되는 거에요. 여기 만약 20불짜리 하나 놔두면, 다음 주일날 와서 보면 아마 없을 거에요. 이상하게 형제와 부모와 자식은 더 못 줘서 안달이에요 더 못 줘서. 더 주고 싶은 데 없어서 못 주는 거지. 더 주고 싶은 거에요. 그리고, 또 서로 주고 받고 이래 가지고 서로 도는 거에요. 가족의 부족함을 통해서 진실한 축복을 배워요. 아 정말 진실로 축복해 준다는 것이 뭐냐 하는 것을 우리는 가족이 없으면 배우기 어려워요.
지난 주일날, 기쁨의 교회 박성일 목사님이 우리 청년들에게 와서 설교하면서 결혼 설교를 했는데, 청년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배우자를 고를 때, 정말 진정으로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을 배우자로 택하십시오. 진정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라 그런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런 배우자가 되라 그랬습니다. 진정으로 조건 없는 진실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병든 거에요. 그쵸? 병든 사람하고 결혼 하면 치료해줘야 해요. 그런 사람들 우리가 많이 보잖아요. 치료해줘야 해요. 교회에서 치료해줘야 해요. 나중에 이것은 치료하는 사역이지. 그 사람이 다 나은 다음에 다른 사람을 축복해 주지.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진실한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축복하지 못해요. 바로 가정을 통해서 축복이 뭐냐 하는 것을, 엑스트라로 더 해준다는 것을, 필요 없는 데도 부어주는 진정한, 거기에는 사적인 아무 이해 관계없이 아무런 욕심도 없이 아무런 동기도 없이 그냥 주는 이것은 하나님이 가족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 깨닫게 하십니다. 또 왜 나는 가족에게는 내가 조건없는 사랑을 배풀면서 타인에게는 내가 이렇게 이기적이고 요구하는 것이 많은가 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내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회개하고, 가족은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설교에요. 한편의 가장 아름다운 설교입니다. 가족만큼 훌륭한 설교가 가족만큼 훌륭한 거울이 없는 거에요. 가족을 통해서 우린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는 거죠.
태극기 휘날리며 라는 영화가 있죠.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라고 블록버스터로 굉장히 히트를 쳤던 영화인데, 지금 나왔어요. DVD로. 여러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에 소망회 분들과 같이 봤죠. 우리 소망회 회원들 지하 친교실에서 점심 먹으면서 같이 태극기 휘날리며 같이 봤어요. 결국 형제 얘기 입니다. 형은 동생을 집으로 보내기 위해서 동생을 위해 싸우는 거에요. 자기가 훈장을 타면 그 훈장 가지고 동생을 집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전쟁에 나가서 싸웁니다. 그런데, 동생은 형을 보면서, 형이 점점 악마처럼 변해 가는 모습을 보고 형을 증오하기 시작합니다. 형이 저런 형이 아니었는데, 전쟁에 나가더니 완전 짐승처럼 변해가요 형이.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여요. 그러면서 형을 증오해요. 근데, 형은 그게 아니었어요. 형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동생을 살려 보내기 위해서 그렇게 싸운 거에요. 나중에 동생이 그것을 이해하고 형을 찾으러 가요. 그런 얘기에요. 뭐 이념적인 거, 사상적인 거 떠나서 그 영화의 어떤 포인트는 사상보다 이념보다 더 형제의 사랑이 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런 주제 였던 거 같은데, 그걸 보면서 눈물 나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가족의 부족함을 통해서 신실한 축복의, 축복이라는 것이 뭐냐 하는 것을, 그 풍성함을 가족을 통해서 우리가 배웁니다. 세상은 다 우리의 것을 가져 가려고 하고, 여러분, 세상은 다 이해 관계 속에 얽혀 가지고 타산적으로 우리를 대하지만, 진정한 가족 만큼은 그렇게 대하지 않습니다. 빈손으로 보내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가정을 통해서 우리는 진실한 열정을 배웁니다. 열정. 여기 보니까 나오미가 룻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18절에,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 하리라 그랬어요. 쉬지 아니하리라.
한 3주 전에, 제가 잘 모르는 한 한인 가정에 9학년짜리 아들이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우리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분인데, 근데, 우리 교인 중에 그 분을 아는 분이 있어서, 제가 그 집에 한 번 갔었습니다. 근데 아들이 갑자기 없어진 거에요. 그냥. 9학년 짜리 아들이 그냥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서 이게 지금 가출인지 유괴인지도 몰라요. 그것도 모른 채 지금 한 달이 지났어요. 그 집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해 드리고 왔는데, 2주전부터 우리 교회에 나옵니다. 1부 예배에. 그런데, 지금도 몰라요. 소식을. 그 분들은 밤에 잠을 못 자요. 여러분, 자식이 집 나가서 아무 소식이 없는데, 이게 무슨 가출인지 유괴인지도 모르고 잠이 오겠어요. 쉴 수가 없는 거죠. 여기 쉬지 않는다. 이 일이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못한다. 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쉬지 못한다는 것은 열정입니다. 이건 마치 집 나간, 가출한 그 아들을 기다리면서 쉬지 못하는 부모의 그 마음으로 보아스가 룻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이 열정이라는 것은 쉬지 못한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쉬지 못하는 거에요. 쉴려고 해도 쉴 수가 없는 거에요. 쉬어지지가 않는 거에요. 그게 열정이죠. 쉴려고 해도 쉬어지지 않고 쉴 수도 없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이 열정입니다. 마치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에 나오는 그 탕자의 비유,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그 아버지의 마음, 너무 가슴이 아파요. 오늘 아침에도 같이 친교실에서 밥 먹으면서 얘기 했는데, 두 분은 지금 말이 아니에요. 어떻게 되었는지, 한달 동안 소식이 없어요.
여러분, 우리의 전도의 열정이나 우리의 선교의 열정도 사실 따지고 보면, 형제가 잘 되기를 바라는 열정에서 나온 거에요. 정말 이 열정, 선교의 열정, 전도의 열정이라는 것은 바로 쉬지 못하는 열정, 이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 복음이 그 사람의 인생을 변화 시키기 전에는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행복할 수 없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행복할 수 없다는 그 쉬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열정으로 불타오를 때, 전도의 열정과 선교의 열정으로 퍼지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가 전도하기 힘들고, 선교하기가 힘든 것은 열정이 부족한 것인데, 그 열정이 부족한 이유는 우리에게 쉬지 못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정말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쉬지 못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전도와 선교의 열정으로 이어질 텐데, 그런 쉬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사실 따지고 보면 전도가 어려운 것이고, 선교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을 통해서 그 쉬지 못하는 열정을 우리가 배우면서, 아 바로 이런 것이구나. 내가 내 자식을 보면서, 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그대로 고스란히 그 열정을 가지고 사역을 하고, 봉사를 하고 교회를 섬기고 전도하고 선교한다면 얼마나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겠어요. 자식에게 쏟는 그 열정을 가지고 형제에게 쏟는 그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 LA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형하고 같이 새벽기도 나가는 그 열정 가지고 만약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내가 사역을 하고 그렇게 열정을 쏟는 다면, 그런데 그렇게 안 되니까 하나님 앞에서 공고한 사람이 되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이중적이구나 형제와 자식들 위해서는 이렇게까지 하면서 내가 타인을 위해서는 이렇게 못하는구나 하는 제 자신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너무나 내가 참으로 이중적인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 가정을 통해서, 형제를 통해서 그 열정이 뭔가 하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한 것이나, 바울이 골육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다 쉬지 않는 열정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쉬지 않는 열정, 쉴 수 없는 열정, 쉬려고 해도 안 되는 그런 열정이 우리에게 있을 때, 그 열정이 단순히 혈육이나 자식이나 형제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어지는 열정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번에 형님하고 같이 새벽기도를 갔다 오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이제 형도 자신을 위해서 이제 울지 말고, 그리고 우리 형제를 위해서 울지 마세요. 나도 이제 내 자신을 위해서 울지 않을 거다. 또 형제를 위해서 울지 않을 거다. 이제 그만 울고 그 울음을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도 몇 년 울었으면 됐지, 하나님 보시기에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몇 년 울었으면 됐지, 그거 뭐 수십 년씩 울 것 있나, 그만큼 울었으면 되었으니까 이제 우리 형제도 이 열정 가지고, 자기 형제를 위해서 우는 눈물 가지고, 자기 가정을 위해서 우는 눈물 가지고 이제 다른 사람 섬겨야 되지 않나. 형제가 그렇게 감동적인 얘기를 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하고 만나 식사를 하는데, 제가 식사기도를 했는데, 기도 끝나고 저희 형이 거기 장로님도 계시고 다 계셨는데, 왜이리 기도를 길게 하냐고 해요. 저는 얼마나, 여러분 거기 가서 기도할 게 얼마나 많아요. 목사님 위해서 기도해야지 장로님 위해서 기도해야지. 형 위해서 기도해야지, 한참 기도했는데, 저희 형이 듣기에 기도가 너무 길대요. 저더러. 짧게 하래요. 이제 말이 통해요. 이제 말이 통하기 시작해요. 형제가 말이 통하기 시작해요.
여러분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우리 이 찬송 한번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우리 기쁨으로 찬양 311장. 물이 바다 덮음과 같이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보아스가 쉬지 않았던 것 처럼. 지금도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 쉬지 않은 열정이 우리에게도 생기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우리 찬양부르겠습니다.
여러분, 보아스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정에 기업 무를 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