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청 기독신우회 메시지(준비 자료)
일자: 2024년 3월 13일 수요일
주제: 십자가의 의미 2
목적: 지난주에 십자가의 의미에 대하여 첫번째 설교를 했다. 그 내용은 십자가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느끼는 위로에 대한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나는 십자가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톰 라이트의 강연에서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켄우드침례교회에서 강연한 영상에 자막을 달고 몇 번 들었는데 그 강연에서 받은 몇 가지 인상과 깨달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십자가는 그 의미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준다. 그리고 삶을 돌이키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아마 사랑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고해성사로 신부를 놀리려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톰 라이트는 소개한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하여 전통적인 서구신학은 이 세상에서 건져내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은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종말론을 정반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론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로잡으시고 새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우리를 데리고 어디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는 어떤 것이라고 보면 좋을까? 톰 라이트는 십자가의 의미를 혁명으로 이해한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이 세상을 주관하는 세력을 몰아내고 그의 통치를 종식하며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 새로운 일은 새로운 창조이며 새로운 출애굽이다. 톰 라이트는 신약성서의 기록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새 창조와 새 출애굽의 의미로 그려준다고 이해한다.
특히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창세기의 처음 부분처럼 서술하는 것이 그 예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성경이 그려주는 하나님의 창조는 이 세상을 관리할 대리인이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즉,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인간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새 창조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게 되고 그의 은총과 지혜를 힘입어 세상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요한복음의 이야기 안에 창조를 상징하는 은유들이 담겨 있다고 여러 예들을 제시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문제는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것이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난 것이 모든 불행과 재앙의 원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악 때문이었다. 그 죄악이란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 것을 외면하고 자신을 의지하여 하나님 아닌 것을 섬김으로 그것에게 권세를 넘겨준 것이다. 그런 행동을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는데 아프로디테나 비너스 같은 우상, 그리고 맘몬 같은 우상, 그리고 아레스 같은 우상들이 인간들로부터 힘을 넘겨받아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살도록 종살이하게 한다. 인간에게 죄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죄는 우상숭배의 결과일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구를 섬기느냐 하는 것이다.
죄로 인한 인간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떠나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며, 우상숭배로 인하여 다스려야 할 존재의 다스림을 받는 처지에 빠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다시 창조의 원형을 회복하는 것이며, 출애굽의 구원과 같이 묶인 데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새 창조이며 또한 새로운 출애굽이다. 그리고 인간을 묶고 있는 악한 권세들을 꺾으시고 그 백성을 해방하셨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왕의 혁명이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복음의 의미를 이와 같이 정리하면서 톰 라이트는 서구 신학이 세 가지 오류를 범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먼저, 성경의 종말론을 플라톤의 철학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They platonized biblical eschatology.). 즉,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는 성경의 핵심 이야기를 왜곡하여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론에 대한 왜곡이 발생했다. 인간을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덕적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애써야 하는 존재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도덕적 시험 앞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맡기시려고 부르신 소명적 존재다. 서구 신학은 인간을 소명적 존재가 아니라 도덕적 시험대 앞에 있는 존재로 전락시켰다(They moralized biblical anthropology). 그리고 그 결과 구원론에 왜곡이 발생했다. 즉, 구원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예수님이 그 진노를 대신 받으셨다는 식으로 이해하게 한다.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희생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이교도의 생각이라는 것이 톰 라이트의 주장이다(They paganized biblical soteriology).
십자가가 새로운 창조이며 새로운 출애굽이라면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이 이미 시작하신 혁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 혁명은 하나님의 새 창조에 동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본래부터 우리에게 위임하신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왕 같은 제사장의 일이며,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다(요한복음 10:10). 그것은 창세기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축복선언이며 하나님의 의도이며 최종 목적이다.
예수님은 세족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셨고 동시에 그것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전신의 씻음을 받았음을 확인해 주셨다. 그것은 그들이 이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뜻이다. 사실 성경의 메시지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면, 최종적으로는 모든 세상이 다 하나님의 성전처럼 거룩하게 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것이 예언자들이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성산의 모습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바로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동시에 빌라도에게 진리에 대하여 설명하셨다. 또한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에 대해서도 창조주로부터 위임받은 대리인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의 어그러짐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혁명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과정이다. 이 세상 임금으로 표현된 세력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리에서 하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들을 이기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을 때 혁명이 시작되었고 승리가 선포되었다. 부활은 그 승리를 확증한 사건이다.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톰 라이트의 강연은 설교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강의라서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거기에는 신학의 사조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성경 전체의 흐름에 대한 정리, 그리고 유머와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개략적인 주석이 있다. 거기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곱씹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 몇 가닥의 줄기로 모아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