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성 신파도 없고, '시대적 아버지'에 대한 미화도 없고, 새마을 모자를 눌러쓴 민족구국열사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없어요. 배우 황정민이 있고, 그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있습니다. 희노애락이 한없이 너울거리는 우리 범부들의 저잣거리는 분명 범민족적이고, 범국가적이며, 범세계적이죠. 그래서 국제시장 맞습니다. 이건 그저 아주 평범한 우리들의 저잣거리에 대한 이야기에요.
주인공 덕수는 6.25 사변때 아버지와 막내동생을 잃고,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에 따라 가장이 되어 집안을 책임져나갑니다. 그는 해양대에 들어가 선장이 되고 싶은 꿈이 있지만, 그러한 꿈은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절대적인 당위명제 아래 늘 좌절되곤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수는 늘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하며 주변을 향해 웃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 덕수의 웃음에 대해 이 영화는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정말로 괜찮아요?"
───라고 물으면서 말이죠.
안 괜찮죠. 당연히 안 괜찮죠. 괜찮을리가 있나요. 덕수의 삶은, 전문용어로 '좆나' 힘듭니다. 탄광과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하지만, 아무도 덕수의 고생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이는 없습니다. 덕수 스스로도 단지 가장이라는 의무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고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걸요. 이처럼 덕수는 이 우주에서 아무도, 그 자신마저도, 알아주지 않는 실종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실종된 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유는, 그게 또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장의 책임에 대한 예찬도, 아버지의 복권에 대한 기획도, 특정한 신념에 대한 호소도 아닙니다.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 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를, 단지 보여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안 괜찮을 때마다 그대로 안 괜찮은 티를 내면 그게 인간이냐고요? 소중한 것을 위해 괜찮은 척 하루하루 버티면서 사는 게 삶 아니냐고요?
근데 왜 그렇게 늘 억울해하세요? 본인이 자신있게 주장하며 선택한 그러한 인간의 모습에 왜 스스로 100% 만족하지 않으세요.
근데 왜 그렇게 늘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세요? 본인이 자신있게 주장하며 선택한 그러한 삶의 모습에 왜 스스로 100% 만족하지 않으세요.
이건 헤라클레스의 시련의 문제입니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티는 삶은 영웅의 삶이에요. 그리고 영웅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삶을 진리의 언어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100% 만족하며 이미 살아냈기 때문에 부가적으로 주장할 언어가 전혀 필요하지 않거든요.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음모에 의해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억울해한 적이 있던가요. 자신의 위업을 다른 누군가가 좀 알아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던가요. 그는 그냥 주어진 100% 그대로를 100%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영웅인 것이죠.
그런데 아무도 우리에게 영웅이 되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가 영웅이 되기를 요구할 뿐이죠. 그렇게 본인이 영웅의 자아상을 실현하고자 스스로 선택한 꿈에 대해, 왜 그 꿈의 힘겨움을 바라보는 타자의 부당함을 호소하나요. 영웅은 원래 힘겨운 거잖아요. 힘겨움이 곧 영웅을 만드는 거잖아요. 힘겨움을 억지로 부정하면서 영웅의 꿈을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힘든 사실을 힘든 사실 그 자체로서 드러내고자 하는 목소리에 예민할 때,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 그 사실은 단 한 가지를 의미할 뿐입니다. 우리가 영웅의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즉 우리가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죠. 이 인정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영웅이 되려는 꿈을 당위적으로 느끼고 있다면 더더욱 말이죠.
영화 속 덕수의 영웅은 아버지였어요. 덕수는 듬직한 아버지가 되려고 했죠. 그리고 아버지라는 이름의 영웅이 되고자 한 그의 꿈이 덕수를 그토록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당위적인 자아상을 갖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그 삶에는 피로와 소진만이 만연하게 됩니다. 그러한 자아상을 목표로 설정하는 일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곧 스스로 만든 그 상과 자신과의 거리감이거든요. 무언가가 되고 싶은 자는 영원히 그것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스스로가 자신과 그것과의 관계를 분리시켰으니까요.
그렇게 덕수는 아버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아버지에 대한 영화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이상적인 자아상으로 꿈꾸는, 아버지가 아닌 자에 대한 영화죠. 이미 아버지인 자는 "아버지는 이러이러하게 살아야만 해."라고 결코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인 자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면 그게 곧 아버지니까요. 오직 아버지가 아닌 자만이 당위적인 실천목록들로 이루어진 아버지의 꿈을 꾸며, 그 꿈에 스스로를 맞춰가기 위해 현실 속에서 투쟁합니다. 그렇게 출현하는 것이 곧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 하며' 버텨야만 하는 고행의 삶입니다.
덕수는 분명 고독한 고행자예요. 고행자의 삶은 그가 강퍅한 옹고집 늙은이가 되더라도 완결되지 않습니다. 이건 시간과 발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요. 이 힘겨운 고행자의 삶이 끝나는 때는, 거기에 정말로 무엇이 있는가가 알려짐으로써 만나질 때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덕수가 만나게 되는 것은 꼬마 덕수입니다.
얼마나 아버지를 좋아했으면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시종일관 기다리며 아버지의 역할을 자신이 대신하고자 했던, 그렇게 아버지를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그런 선량한 아이가 늘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부지, 너무 무섭고 힘들었어요."라고 엉엉 울고만 싶었던 조그맣고 착한 아이가 늘 거기에 있었습니다. "우리 덕수, 그동안 고생많았지."라는 따듯한 승인에 이제 모든 짐을 놓고 푹 쉬고만 싶었던 고운 눈망울의 아이가 늘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덕수가 자신을 알아주기를요. 덕수의 모든 삶이 이 아이가 거기에 있음을 알리고자 펼쳐진 여행이라는 것을 알아주기를요. 덕수가 비로소 그 아이를 눈치채고, 자신이 바로 그 아이였다는 사실을 만나게 된 순간, 덕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니, 이미 그 아이와 늘 함께있었던, 단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었던 아버지가 또한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덕수는 아버지가 '되어야만 하는 자'가 아니라, 늘 아버지였고, 동시에 늘 아이였던 '이미 하나인 자'임을 알게 된 것이죠.
그렇게 덕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웅도, 범부도, 아버지도, 아이도, 그 모든 꿈들과는 아무 관계없으면서, 그 모든 꿈들이 다 담긴 그런 여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우주에서 홀로 실종된 자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제 그는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우주에서 스스로 충만함을 증거합니다. 그의 이름은 사람입니다.
보세요. 여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