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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
본문 <요6:32~46>
32~33절을 지난주에 공부했습니다만, 오늘 말씀과의 연결을 위해 잠시 더 언급하겠습니다.
과거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모세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갈 동안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서 약200만 명이 먹고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것은 모세의 실력과 능력으로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그때 만나는 모세가 준 게 아니라 ㅎ님이 주신 것이라고 정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내리던 만나는 역사적인 사실이지만, 그게 영적인 모형이고 그림자였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즉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하늘에서 오시는 IX에 대한 모형이었다는 것이지요. 만나가 당시에는 육신을 먹여 살렸지만 이것은 장차 도래할 IX의 십자가 피로 당신의 백성들을 살리는 영생의 양식에 대한 비유였다는 것입니다.
33절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생명을 주는 ㅎ님의 떡이라고 부연설명까지 하고 계십니다. 지난주에 나눈 성막의 5대 제사 역시도 IX의 십자가 사건을 함축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었듯이 구약의 모든 것들이 다 IX에 대한 비유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문자적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육으로 ㅎ님을 섬기다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 자들이 당시에 유대인들이었지요. 그래서 34절처럼 말 합니다.
<34~36>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육에 속한 자들은 세상 먹고사는 게 제일 큰 관심사임, 이것이 그들의 한계요 정체성임)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살까가 그들의 가치관이고 관심사항이죠. 그래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돈, 돈, 돈을 위해 동분서주 합니다.
주님은 영의 양식을 말하는데, 이들은 그저 썩어질 양식만 찾는 모습이( 주여, 이 떡을 항상..)
이런 경우를 뭐라 해야 하나요? 동상이몽?(한 침대에 누워 다른 꿈을?)/ 아니면 오월동주라고 해야 하나요?(한 배에 탓는데 서로 원수지간인 경우), 아니면 아무리 해도 못 알아듣는 벽창호라고 해야 하나요? 다 맞지만 벽창호가 가장 어울릴 것 같네요. 육은 죽었다 깨나도 영의 세계를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우이독경이지요. 그래서 성령을 보내서 하늘의 지혜를 주지 않으면 아무도 ㅎ님의 세계에 대해 감도 잡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과연 성경의 이면에 숨겨진 영의 메시지를 알고 신앙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주 소수만이 ㅎ님을 바로 믿고 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눅13장에서도 어떤 자가 주님께 질문 합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답했을까요? 가서 보시지요
<눅13:23~28>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뭔 말씀?)
-죄를 안 짓는 반듯하고 올바른 삶인가요? ㅎ님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선한 행위를..?
-마7장에서도 좁은 문이 생명의 문, 넓은 문은 사망의 문(많은 사람들이 거기로..)
=> 좁은 문이란 자기 가능성을 부인하고 오직 IX 십자가 피만 의지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25절~그래서 자기 가능성을 가진 인간은 절대로 십자가를 믿지 못함. 집주인이 안 열어준다는 말은, 심판 날에는 이미 끝난 상황이라서 번복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26절~27절: 마7장과 동일한 내용(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귀신을 쫓아냄, 많은 권능을..->자기 열심,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종교적 열심과 업적 쌓기에 올인 한 자들임)
=> 행악을 행한 자들, 불법을 행함(성경을 통해 영의 양식인 복음을 외면하고 자기 열심과 공로를 구원의 자격으로 알고 헛된 신앙을 한 자들은 불법한 자들이라는 말씀임/자기의가 악임)
‘28절~그래서 억울하고 분해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열심이 허사가 됨)
엊그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 되었습니다. 트럼프는 능수능란하고 임기웅변에 뛰어난 기회주의자 같은 자인데 왜 당선되었을까요? 이것이 말세지말 현상 중 하나입니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동맹도 필요 없다는 자이기에, 미국의 우방으로 지내오던 유럽과 일본, 그리고 우리 한국에서조차 꺼려하던 인물인데 기대와 달리 그가 당선됨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그야말로 혼돈과 불확실성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트럼프가 당선 되었을까요? 미국의 백인 노동자들의 표가 한 몫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중남미 불법 이민자들인데 그래서 이들 때문에 백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많이 빼앗겼기 때문인데, 트럼프가 이들을 추방시키기고 향후에도 엄격히 대처하겠다고 공약을 한 것이 표를 얻는 주요 요인이 되었답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 1호 공약대로 불법이민자 150만명을 추방한다고 실렸더군요.
다음에는 기독교인들의 표를 많이 얻었다고 합니다. 트럼프는 자칭 기독교 신자라고 해요. 그래서 선거 유세 때도 ㅎ님 얘기, 신앙얘기를 하면서 기독교인들의 표를 겨냥하기도 했어요. 우리가 점검해야 할 내용이 이것입니다. 자신이 기독교인 이라고 표방하는 자, 그리고 당선 후에도 소감을 묻자 자신이 대통령이 된 것은 신의 뜻이라고(ㅎ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트럼프가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믿는 자이고, 구원 받은 자일까요?
트럼프의 나이가 78세라고 합니다. 정말 트럼프가 복음을 아는 신자라면 늙은 노년에 다시 대통령을 하려는 욕망에 붙들릴 수 있겠어요? 대통령은 세상 부귀영화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욕심과 욕망이 이글거리는 자, 그래서 세상의 이목을 받고 추앙과 박수갈채에 목말라서 헐떡거리는 자들이 추구하는 자리입니다. 참고로 주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많은 무리들이 왕 삼고자 쫓아왔지만 피신하셨는데, 트럼프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자가 탐심에 눈이 멀어서 왕이 되겠다고 팔 걷어 부치고 권모술수로 다시 왕이 되었습니다. 어느 면으로 봐도 신자의 모습과는 거리감이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복음을 아는 자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확증하고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이 죽어야 마땅하지만 지금 사는 것도 ㅎ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고백하며 사는 자들이 신자의 정체성이지요, 그런데 트럼프는 어떤가요? 바이든이나 해리스처럼 약소국가를 감싸면서 미국의 힘과 역량을 나누고 도우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자국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을 펴기 때문에 우정도 의리도 다 필요 없고, 오직 미국이 잘사는 데 초점을 맞추어 통치 한다면 그가 과연 기독교 신자가 맞겠어요? 내면의 신앙적 가치관으로 봐도, 외적인 정책의 성격을 통해 봐도 트럼프는 신자가 아니라고 진단내릴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ㅎ님 이름을 부르고 교회를 다닌다고 다 신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ㅎ님을 찾고 교회를 다니는 목적성이 무엇이냐 이지요. ㅎ님 나라와 ㅎ님 영광을 위해서냐 아니면 육의 것, 땅의 것을 위해서냐가 중요한 관건 입니다. 그제나 이제나 예수님을 주여! 주여! 라고 부르고 있지만 죄사함과 영생을 위해서 찾는 이가 많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 세상 복주는 짝퉁 예수를 따르고 있는데 그걸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은 ㅎ님의 뜻대로 된 것은 맞습니다. 물론 트럼프가 ㅎ님 보시기에 예뻐서 대통령을 시켜 준 게 아니라, 종말의 시국을 조성하는 데에 ㅎ님이 쓰시는 도구로서 트럼프가 등용된 것뿐이지 그의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과거 세계를 주름잡던 애굽의 바로 왕이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또한 베벨론 포로에서 귀환 명령을 내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도 ㅎ님이 쓰시는 ㅎ님의 종이었습니다. 잠시잠깐의 ㅎ님 경륜을 이루는 데에 사용되는 도구라는 말입니다. 사단도 ㅎ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다 ㅎ님의 시나리오대로 세상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바벨론의 존재 목적은 ㅎ님의 선민인 남조 유다가 ㅎ님께 반복되는 죄를 짓자 남조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등장시킨 일시적인 도구 였습니다. 당시 대제국 앗수르의 변방에 있던 작은 부족국가인 바벨론이 갑자기 신흥국가로 커지더니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급기야는 남조유다까지 쓸어버리는 역할을 한 것이지요(앗수르의 역할은 북조 멸망). 그 때의 왕이 느브갓네살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벨사살 왕 때에 그 거대한 제국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됩니다(겨우 2대?). 일종의 토사구팽이지요. 네 역할은 다 끝났으니 사라지라는 ㅎ님의 일하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ㅎ님을 알지도 못하던 그에게 두 번이나 꿈을 꾸게 하시는데 두 번째 꿈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다니엘이 그 꿈을 해몽하기를 얼마 후에 왕은 치매에 걸려서 7년 동안 왕좌에서 쫓겨나 들에서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살 것이다. 그러나 7년의 때가 차면 다시 왕으로 복권될 것이라고 합니다. 꿈의 해몽대로 그렇게 실현 되었지요.
본래 제왕의 자리란 정치적 반대 세력의 음모와 쿠데타에 의한 위협이 상존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삼엄한 경호를 위해 왕의 친위부대로 철통경계를 서게 하지요. 그런데 7년이나 왕이 치매 걸려 궁궐 밖으로 쫓겨나서 사는데도 그 왕좌가 그대로 지켜지다가 복권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기적이 벌어진 겁니다. 정말 ㅎ님의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왕은 뼈속 깊이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ㅎ님을 높이고 칭송하는 내용이 다니엘서에 상세히 기록됩니다.
한 번 읽어 보지요(단4:34~37)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이 구원?(NO!), 롬9(진노의 그릇임)
이런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세상만사가 다 ㅎ님의 손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성도인 너희들은 깨닫고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43장에서 ㅎ님이 그러시잖아요. 너 야곱아, 내가 너를 창조했고 조성하였다(가르쳤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두려워 마라(비록 불 속에 넣었어도 물속에 넣었어도 너를 지킬 것이다/ 즉 고난과 역경에 일부러 쳐 넣어도 망하는 게 아니라 훈련하는 것이니 안심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육신의 떡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생명의 떡을 구하라고 일침을 줍니다.
<34~36>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잠깐 트럼프로 예를 들었읍니다만, 주님의 말씀과는 트럼프의 행위는 완전히 상반되잖아요. 주님을 생명의 떡으로 먹은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다고 하는데, 트럼프는 세상 영광이 좋아서 다시금 그 영광을 찾아 육신의 영달을 추구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것에서 목마름을 해갈하고자 하나 갈증을 해소할 수가 없다는 게 세상의 영광입니다. 세상의 행복은 아무리 먹고 마셔도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마치 목마르다고 해서 바다 물을 들이키면 다시 더 큰 갈증을 느끼듯이 세상 것으로 행복함을 얻으려는 것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해갈 불가)
그런 인간의 대표주자가 요4장에서 공부했던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었습니까?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웠어도 갈등을 해갈하지 못해서 지금 6번째 남편과 살고 있지만 참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실토를 했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입니다. 그녀도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에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 물을 주어 마시게 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지요. 즉 자신에게 행복의 비결을 알려달라고 했던 것이지요. 여인에게 있어 남편은 행복을 주는 상징입니다. 행복을 위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가 지쳐있는 상태를 남편을 수 없이 바꿔본 것으로 비유한 것이지요,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탐심을 불태우며 사는 인간의 정체성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봐도 행복을 찾을 수 없던 여인은, 주님이 ‘그래 네 남편이 없다는 말이 맞다’는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듣고 자신의 탐욕에 눈먼 죄인이었음을 깨닫고, 참 된 예배란 성령 안에서 진리 되시는 메시야를 만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깨닫고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만난 자는 더 이상 갈증이 없습니다. 그러나 트럼프처럼 세상영광에 목말라서 죽음을 코앞에 둔 자가 노욕의 노예가 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면 분명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날 기독교인들이 많지만 다 트럼프의 아류들 아닙니까? 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예수 이름 부르고 교회를 넘나들지만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자는 없습니다. 35절 끝에 보세요. 나를 믿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그들의 기도 내용은 무엇들인가요? 새벽부터 철야기도까지 부르짖는 내용들이 다 세상 것, 땅의 것들 아닌가요? 목말라서 주여, 갈증을 해갈케 해 주세요, 내 소원 좀 들어 주세요. 하고들 있잖아요. 그 사람의 기도가 그 자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저는 어떤 신자를 만나서 그 사람의 신앙을 살펴보고 싶을 땐, 슬며시 물어 봅니다. 당신의 기도제목은 무엇인지 우선순위로 3가지만 대보시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냥 그 자의 신앙의 현주소가 다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가 육적인 자냐 영적인 자냐, 금방 노출됩니다.
36절을 다시 봅니다.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이게 주님의 진단입니다. 지금 오병이어를 보고 예수를 임금 삼으려고 쫓아온 자들은 분명히 주님을 믿는 자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한다고 잘라 말씀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다는 말이지요. 내가 내 필요에 의해서 ㅎ님을 찾는 것은 가짜 믿음이고, 내 필요가 아니라 ㅎ님의 영광을 위해서 ㅎ님을 찾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ㅎ님의 영광을 위한 믿음을 가진 자입니까? 한마디로 죄사함의 은혜를 아는 자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죄 밖에 나오지 않는 태생적 죄인임을 성령을 통해 알게 된 자가 IX의 십자가 복음을 영접하여 죄사함 받을 때에, 그 망극하신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자는 자기 필요를 위해 예수를 찾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주님을 찾고 ㅎ님을 찾는 것이지요,
이런 상태에 있는 자가 ㅎ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더 이상 갈증이 없기에 목마르지 않지요. 항상 행복 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있지요. 생활 형편이 형통해서 기쁘고 행복한 게 아니라, 육신은 불편하고 삶은 문제투성이로 꽉 막혀 있지만, 심령에서 솟구치는 구원의 즐거움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도 기뻐서 찬송을 했다니까요. 이게 이해가 되세요? 베드로 역시 몸은 쇠사슬에 감기고 발은 착고에 차였는데도 옥에서 깊은 잠을 잔 것 이구요. 이게 주를 만난 자들의 모습이고 믿음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처럼 육신의 것을 위해서 주님을 찾는 자들은 그게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같이 자기 욕심의 발로에서 신을 찾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ㅎ님을 찾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충성봉사하고 헌금하는 모든 행위들이 우상숭배인 것을 알까요? 그들이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ㅎ님을 찾나요? 아니지요. 미래에 얻을 구원을 위해서 찾고, 복을 위해서 찾지요.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 얻을 구원을 위해서 ㅎ님을 찾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마치 부자청년이 주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질문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하기 나름이라는 발상이 이미 성경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ㅎ님이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행위로 따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ㅎ님은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시나요? 이 부분이 중요 합니다. 다음 구절 37절을 읽어 봅니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 스스로 예수에게 나오는 자”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를 찾아와 예수와 대화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병자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 이적을 보고 예수를 임금 삼고자 예수에게 나아온 자들입니다. 이들을 예수에게 이끈 것은 신비한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보내 예수에게 나오는 자”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모습은 동일합니다. 전자에 속한 자들이 예수에게 나오는 배후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에 속한 자들이 예수에게 나오는 배후에는 아버지의 이끄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정확히 구별하십니다.
오늘날 지상 교회에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줄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서 보내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처음부터 밝히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에서와 야곱입니다.
땅의 사상과 하늘의 사상을 가진 자로 나누어집니다. 가인은 자기 힘과 열심으로 ㅎ님께 나아가는 자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사의 특징은 땅의 소산물로 ㅎ님께 제사를 드렸지요. 땅의 소산물이란 하늘의 것과 대비되는 용어로서 사람이 만들어 내는 온갖 것을 함축하는 말이지요. 종교적 열심과 충성, 종교적 교리에서 나온 정신사조를 망라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ㅎ님은 인간의 것을 일체 받지 않으십니다. 죄인에게서 나온 것은 아무리 선으로 치장 했어도 거짓에 불과하니까요.
반면에 아벨은 자기 자신에게서는 선과 의가 없음을 아는 자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한 자라는 자기 무능과 무가치함을 토로하는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를 비유 합니다. 아벨이라는 이름 값이 그 자의 정체성을 말해 줍니다. 아벨은 허무함, 공허함, 비어짐을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양의 첫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ㅎ님의 어린양이신 IX의 십자가 피를 근거로 ㅎ님께 나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의 제사를 ㅎ님은 받아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아벨의 실력이겠습니까? 선악과 따먹은 아담과 아담의 후손들이 추구하는 속성은 자기 확장, 자기발전, 자기자랑이라는 죄성을 본성으로 갖고 태어납니다. 다른 말로 자기사랑의 탐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에고이즘의 덩어지들이지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젊잖아 보여도 속으로는 욕망이 이글거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아벨에게 스스로 자기부인이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ㅎ님이 안배하신 사건과 환경 가운데서 깨지고 부수어져서 존재감이 가루가 되어있기에 가능 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세월이 흐른 후에~'라는 문학적 기법으로 은유했습니다. 많은 고난을 통해 자신이 빼박 죄인 인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 이지요. 그래서 인생의 배가 파선되는 것이 육신으로는 감내하기 힘들어도 궁극적으로는 이게 복인 것입니다.
그들의 대표가 세리와 창기 아닙니까? 아까 예를 들었습니다만, 요4장의 수가성 우물가의 6남편을 갈아치운 여인이 창기와 같은 자이고, 마태나 삭개오가 세리 아닙니까? 누가 창기가 되고 싶고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가 되고 싶겠습니까? 누구나 어릴적에는 꿈이 있고 야망이 있지요.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남의 칭찬을 듣는 자가 되고싶다는 소망을 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살면서 자기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는 게 인생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그 방향을 틀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이미 출생 전부터 ㅎ님은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답니다. ㅎ님이 야곱을 사랑하신 것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작동 됩니까? 에서는 장자권을 우습게 여겼지만, 야곱은 장자권에 목숨을 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장자권에 대한 애착은 ㅎ님 축복에 대한 기대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ㅎ님을 앙망하는 마음이 야곱의 심령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장자권 때문에, 즉 ㅎ님의 축복을 사모하였기에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을 살게 됩니다. 물론 야곱도 처음에는 ㅎ님의 축복이 이 세상의 풍요와 형통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라반의 집에서 노동을 하면서도 온갖 권모술수를 부려서 소유를 탐했습니다. 사기꾼 야곱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나 점차 ㅎ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옛사람이 으깨지고, ㅎ님의 참 복에 대해 눈뜨게 되고 장성한 자로 세워져서 마침내 바로의 머리에 안수까지 하는 경지에 오릅니다. ㅎ님이 보시기에 ‘합격’이라는 사인이지요. 고난이 온 인생은 뒤덮었지만 그래도 그 결과는 천국 아닙니까? 이게 성도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입니다. 탄탄대로 일취월장을 꿈꾸십니까? 얼른 버리십시오. 그건 우리에게 주어진 노선이 아닙니다. 에서의 길, 이스마엘의 길입니다. 에서는 마귀의 도움으로 세상에서는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내세는 음부가 기다리고 있지요.
다음 본문을 봅시다.
<요6:38~39>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자기 뜻은 완전히 접어두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뜻을 행하러 왔다면 예수님 자신에게 득이 되는 자들을 형제로 삼으시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겐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보내신 자들이 누가 됐든 자기 형제로 맞아주십니다.
(히2:11절)을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자란 IX를 지칭하는 말이고,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란 성도인 우리들을 지칭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들도 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IX의 십자가로 죄사함 받은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가 ㅎ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ㅎ님의 영이신 성령으로서 거듭났기 때문에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거룩을 이루기 위해 뭔가를 해야하는 게 아니라 영원하고도 온전한 거룩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히10장14절에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IX의 십자가 피로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었노라구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주저치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은혜 이런 복이 이데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형제라는 말은 나의 형제라는 의미 이전에 예수님의 형제라는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칭호입니다.
39절을 보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 중에 그 어느 누구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속에는 아버지의 뜻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를 이루어가십니다.
여기서 마지막 날이란 물론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지만, 영적인 의미는 더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롬6장을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장사되었고 함께 부활했다고 선언 합니다. 나의 옛사람은 이미 죽었다는 말입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우리는 물로 세례받아 죽었고, 다시 성령으로 세례 받아 살아났습니다. 지금의 나는 옛사람과는 상관없는 새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지막 날을 해석한다면, 나의 옛사람의 죽음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4절을 봅니다.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아주 중요한 교리적 단서를 주는 구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이끄는 자만 주님을 믿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까 37절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아버지가 예수님께 주시는 자, 아버지가 주님께로 이끄는 자가 별도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누구이겠습니까? 창세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를 말합니다. 이것을 말하면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 ㅎ님이 그렇게 공평치 못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은데 이게 왜 문제가 되고, 이게 왜 성경의 복음과 충돌되는가 하면, 만일 ㅎ님이 택하심을 따라 구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인간 자신들이 열심과 노력으로 구원을 따낼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리는 것이 됩니다.
인간이 그런 가능성을 지녀서 선과 의를 행할 수 있다면 왜 예수님이 세상에 성육신하여 오셔야 했을까요? 그리고 그 참혹한 십자가를 왜 굳이 지셔야 했을까요? 인간이 별짓을 다해도 구원을 스스로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라는 지옥 같은 고난을 감수하시고 죄사함이라는 ㅎ님의 긍휼과 자비를 통해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택한 백성들에게만 믿음을 주셔서 그 IX의 피 흘리심을 믿고 구원 받도록 은혜를 선물로 주신 것이구요. 그렇기에 구원 받은 성도는 거저로 은혜로 받은 구원이라서 너무도 감사하고 감격에 겨워 세세토록 ㅎ님께 경배 드리며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지요. 만일에 인간 자기가 단 0.0001%라도 힘쓰고 노력해서 자신의 구원에 보탬을 주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손가락질 하면서 ‘저 놈들은 지옥가도 싸다 싸, 나 좀 봐라 그래도 열심을 내어 충성 했더니 구원을 얻었잖아~’ 하면서 자기자랑에 취해서 목을 뻣뻣이 세울 게 아닙니까? 그런 자가 천국에 있다면 거긴 천국이 아니라 마귀의 나라겠지요. 이처럼 자기 공로가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면 필연코 자기자랑을 할 수 밖에 없기에, ㅎ님은 인간의 의를 완전히 배제시키고 오직 은혜, 오직 복음, 오직 예수로만 구원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엡2: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마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ㅎ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은혜로 주신 믿음을 통해 십자가 복음을 영접하여 구원 받았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듯이 인간의 종교적 열심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 집사님 ‘믿음 좋아’라는 말을 많이들 하듯이,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을, 좋은 믿음으로 알고들 있습니다만, 번지수가 전혀 틀린 말들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자기믿음 임)
ㅎ님이 주신 믿음에 대한 증거를 찾아보고 마치겠습니다.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믿음의 출처를 밝히고 있네요. ㅎ님이 주신 거라구요.
ㅎ님이 주신 믿음인지라 보배로운 믿음(이 믿음을 받은 자가 주를 믿게 됩니다.)
이런 믿음을 받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ㅎ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란 창세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었답니다. 너무도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요?
이들이 역사 속에서 복음을 믿게되는 것은 아버지가 주께로 이끄시기 때문이라고 밝히시고 있습니다.
즉 인간 자신이 복음을 믿은 게 아니라, ㅎ님이 믿게 하셔서 믿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허락하신 ㅎ님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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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