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문제와 관련해서 불가피하게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할 또 다른 존재는 영유아와 지적 장애인들이다. 자의식이 형성되기 이전의 영유아나 성인이 되더라도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전혀 없는 지적 장애인들의 구원 문제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성경에 명시적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여기서 가장 큰 난제는 영유아들이 인격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과 책임이 없다는 점에 있다. 정신지체장애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유아들이나 정신지체장애인들은 인격적 결단을 통해 믿음을 보유할 수 없음에도 구원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만하다. 왜냐하면 기독교신학에서는 구원이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나 능력이 주어지지 않은 아이들에게 과연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입장이 칼뱅주의냐 아르미니우스주의냐에 따라 이 문제를 푸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입장에 서든지 영유아나 정신지체장애인들의 구원 가능성은 긍정적으로 접근될 수 있다. 다만 칼뱅주의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 원인을 하나님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여전히 이 문제는 결국 이중예정의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신자의 자녀는 구원을 받고 불신자의 자녀는 받지 못한다고 말하든지, 모든 영유아는 구원을 받는다고 해야 될 것이다. 반면에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그리스도의 선행은혜로 모든 영유아들이 원죄의 죄책에서 벗어났다고 하든지 아니면 원죄의 죄책이 직접 전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의지를 행사하지 못하는 영유아는 그 책임에서 제외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런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물론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 해석의 단초를 발견할 수는 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라고 강조하셨다(마 18:3, 4, 10, 14; 19:13, 14). 이 구절들은 간접적인 성경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어쩌면 하나님은 분명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대비를 해 놓으셨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정서에 더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다만 만일 영유아기에 죽은 아이가 구원을 받는다면, 이것은 어린아이에게 죄가 없는 완전한 존재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는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입장에서처럼 영유아들은 잠정적 죄인이지만 아직 죄를 의지적으로 짓지 않았으므로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칼뱅주의의 설명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의 자녀 모두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요나서의 관심(4:11)에서도 확인된다. 로마 가톨릭은 이런 경우를 위해서 세례 받지 않은 유아들이 수용되어 있는 지옥이나 하늘의 변방에 있는 장소인 림보(Limbo) 개념을 내세우지만, 여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영유아와 지적 장애인의 구원은 불가불 원죄와 유전죄 문제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데일 무디는 “유아에게조차 저주를 내리는 유전죄가 한 번의 은혜의 주입에 의해 제거된다고 가르치는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은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는데, 그 까닭은 그 견해가 “언약적 믿음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인격적 차원”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밀러드 에릭슨은 죄책의 문제에서 유아와 도덕적으로 무능한 자는 죄와 죄책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의의 전가와 죄책의 전가 문제를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하게 단언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처럼, 죄책도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단지 죄책의 전가는 조건적이다. 고로 우리가 책임을 질 나이가 되기 전에는 정죄란 없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2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