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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문제는 해결하려 말고 풀리게 하라>의 줄거리: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는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풀려야 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풀리고 녹아서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 삶 전체를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면 됩니다. 이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내 의식이 문제를 외면하고 예수님 십자가를 집중하면 됩니다. 인생 유일의 문제가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은 나 자신의 상실입니다.
문제는 해결하려 말고 풀리게 하라
(사도행전 19:8~20)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문제는 해결하려 말고 풀리게 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문제는 해결하려 말고 풀리게 하라’
인생을 살다가 문제에 부딪힐 때에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일반적입니다. 해결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문제시합니다. 그러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당연함 속에는 참으로 비극적이고 불행합니다. 실제로 문제가 해결 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일단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함이 하나님과 예수님과는 전혀 무관한 상태에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풀리는 것이고 녹아서 없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풀거나 녹이거나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풀려야 하며 녹아져야 하며 없어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는 믿음은 이 세상에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과는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믿음은 없어지고, 믿음이 있다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모든 문제는 풀리고 녹아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무대가 되는 에베소는 주술과 마술의 본고장이었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주술과 마술은 미신이고 미혹이지만 당시에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탁월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에베소에서 이러한 주술과 마술이 번창했다는 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가진 인생 문제에 대한 해결의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덴 즉 아테네 사람들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혜를 동원하고자 했다면, 에베소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마술과 주술을 동원하고자 하는 성향이 편만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문제는 운명도 아니고 피하거나 우회할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정면으로 부딪혀서 해결을 봐야할 대상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에베소는 교통의 중심지로 소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하던 도시였습니다. 무역과 상업과 문화가 번성하던 도시답게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도 해결을 향한 강한 의욕과 호기가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내가 해결한다!”라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 해결책으로 마술과 주술을 선택했다는 점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에서 마술과 주술이 어느 정도로 성행했는지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14절 이하를 보면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구약의 족보에 있지도 않은 가짜 제사장 집안이었습니다. 이들이 사도 바울을 흉내 내서 악귀를 쫓으려 했지만 오히려 악귀에게 씌우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자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마술책들을 모아다 불에 태우게 됩니다. 19절을 보면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책을 모아온 사람들은 마술 전문가만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의 일반 시민들은 인생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마술과 주술에 관한 책을 집에 두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 사건을 통해 마술과 주술의 무력함을 깨닫고 책을 다 불태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태운 책은 무려 은 오만에 해당하는 양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드라크마였습니다. 은 오만은 노동자 137명의 3년 품삯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현재 우리 돈으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20,000원으로 환산하면 약 40억이 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그 당시에 책이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값비싼 귀중품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태운 책들만 우리 돈으로 40억 원어치가 넘을 정도이니 마술과 주술이 얼마나 성행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가 그만큼 강렬했음을 반영해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에베소에서 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제까지 사도 바울의 전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8절을 보면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그동안 전도한 내용의 중심은 주의 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되 단순히 전도한 것뿐만 아니라 강론을 하였습니다. 강론을 하였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더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강론한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왜 하필이면 에베소에서 하나님 나라를 언급해야만 했던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와 연관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에베소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가 특별히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 마술과 주술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에베소에서 하나님 나라를 3년이나 강론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삶의 문제와도 직접적 연관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의 십자가 작정을 기억해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작정과 비교해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론은 범위가 넓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로부터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집중도가 약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바울의 십자가 작정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강론한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알겠다는 십자가 작정이 지속될 때에 나타나는 현상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3년이라는 긴 기간을 머물게 된 에베소는 앞서 2차 전도여행의 귀환 길에서 복음을 전했던 곳이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에 대해 더 머물기를 권할 정도로 순종적이고 우호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바울이 3년 동안 강론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내용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 이름으로 주어지는 세례의 연관성과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인격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통해 좋음과 기쁨을 추구하는 인격이 통째로 물에 빠져서 죽어야 하는 죄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세례의 의미를 반복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붙잡는 십자가 작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부림치는 십자가 작정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때에 삶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풀가동되고 있는 천국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신 곳입니다. 그리고 천군천사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좌하며 하나님의 좋으심에 관통되고 정복된 상태에서 탄성을 지르며 찬양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간 성도들이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곳에서 날마다 새롭고도 영원한 평강을 누리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고자 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천국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몸부림치며 십자가 작정을 지속할 때에 십자가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과 연결됩니다. 천국과의 연결 상태가 지속될 때에 이 땅에서 나타나는 현상 전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말씀을 나누고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을 갖는 이유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강론이며 십자가 작정을 매일매일 그리고 장기간 이어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십자가 작정을 통해 이 땅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영인 마음에 변화가 생겨납니다. 십자가 작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마음 다음에 있는 지정의와 또한 몸과 몸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일들과 언어와 행동에도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서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단번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작정이 장기간 지속될 때에 삶에서 나타나는 현상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것을 강조한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에베소 사람들의 성향에 기인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채택하여 성행하던 것이 마술과 주술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작정이 장기간 이루어지면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론은 에베소에 편만했던 인생의 문제 해결 방식과의 충돌이었습니다. 영적인 두 흐름이 부딪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제시해주십니다. 본문 11~12절을 보면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울을 통해 여러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천국과 땅에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시각 연결될 수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마음이 천국과 연결될 때에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몸에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가져다가 대어도 병든 사람이 나았던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10세기경부터 성인들의 유품들을 신성시하고 초월적인 능력이 깃든 것으로 여겨 숭배하는 미신적 일들이 기독교 세계 안에서 편만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이러한 일을 일으키신 이유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는 마음과 지정의의 활동이 있고 말과 행동이 나타나고 겉으로는 몸과 관련된 일들에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단계적으로 천국의 기운이 확장되어가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천국과 연결되자 손수건이나 앞치마까지도 천국의 기운이 닿게 되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의 마음이 천국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중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몸으로 관계하는 모든 대상들에게도 천국의 기운이 미치게 됩니다. 다만 바울의 3년 동안의 활동이 의미하듯이 몸부림치는 십자가 작정은 장기간 지속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는 계속해서 확장되어 가고 농도가 짙어지고 분명한 윤곽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에서 있었던 말씀이나 사건을 개별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포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은 문제의 해결이 아닌 문제의 풀림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바라는 이유는 좋음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어야 좋음을 느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세례의 의미를 건너뛴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가 마음의 좋음과 기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좋음과 기쁨은 이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여 마주하고 계시는 하나님께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주님 안에 들어감으로써만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좋음과 기쁨은 동기입니다. 당면한 문제와 마음의 좋음과 기쁨이 연관이 없다면 문제를 해결해야 될 동기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문제를 무시하고 외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의 외면은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문제야, 너는 좋음과 싫음,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직 좋음과 싫음, 기쁨과 슬픔은 천국에 계신 아버지만이 결정하실 수 있다. 아버지만이 나의 기쁨이기에 아버지와 분리되는 것이 슬픔일 뿐이다. 너는 나에게 기쁨이나 슬픔을 줄 수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 직장 문제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문제든지 성격은 같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문제가 나의 좋음과 싫음을 쥐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주어질 때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철저하게 외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붙잡고 문제를 외면하는 동안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께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태우고 하늘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잡는 과정은 물세례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이 세상에서 좋음을 찾고자 하는 내가 죽어야 되는 당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과 동일시하면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님을 통해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마주하는 동안에 손수건과 앞치마에까지 천국의 기운이 미치게 된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동안에 이 땅의 모든 문제가 풀려가는 하나님 나라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인생에서 문제를 만나면 문제는 외면해야 합니다. 문제가 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괴로움은 커집니다. 제가 예전에 신석증을 앓았습니다. 신석증은 신장에서 방광으로 이어지는 요로에 돌이 생기는 병입니다. 얇고 부드러운 요로에 거친 돌이 박히니 통증이 엄청납니다. 요로에 돌이 끼면 신경과 근육이 긴장하면서 더 힘을 주게 됩니다. 힘을 줄수록 돌에 대한 압박이 커지면서 통증은 더욱 심해집니다.
문제에 대한 반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에 집중할수록 걱정과 근심과 괴로움은 더 커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몸부림을 쳐서라도 의식으로 문제를 외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몸부림은 예수님 십자가에 집중하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 집중을 통해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문제가 생겼을 때 믿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운데 어느덧 하나님 나라는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몸에 대었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까지 하늘의 기운이 임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고작 손수건과 앞치마에 천국의 기운이 닿을 수 있다면 우리 삶의 문제에 천국 기운이 닿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십자가 집중을 통하여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문제에는 천국의 기운이 닿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풀리고 녹아서 없어집니다.
돈 문제가 걱정이라면 몸부림치며 십자가에 집중함으로써 외면하시기를 바랍니다. 돈 문제를 외면하고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함이 유지되면 천국의 기운이 내려와 돈 문제에 닿을 것입니다. 돈 문제가 더 이상 문제로 느껴지지 않을 상황으로 바뀌어 가며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이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문제가 풀리고 녹아서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십자가 집중을 통해 외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집중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면 십자가를 수단으로 삼은 것이고 다시 세상을 향하게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수단으로 삼아 시험해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는 임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족보에 있지도 않은 제사장을 자칭하던 스게와와 그 일곱 아들도 마술을 전문으로 하던 자들이라 추측됩니다. 이들은 바울이 전하던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아 악귀를 정복하려 하다가 오히려 악귀에게 정복을 당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도 교훈을 줍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마음을 죽이지 못하고 유지한 채로 예수를 믿고자 한다면 오히려 문제에 정복당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마술사나 주술사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채택하였던 것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어떤 문제 앞에서도 몸부림치며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를 외면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달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나의 마음의 좋음과 싫음의 근거가 된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이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외면하는 것이며 성령님을 외면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모든 은혜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외면하는 무서운 일입니다.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지를 그대로 유지시켜 갈 때 삼위일체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께서 문제에 대해 갖고 계신 뜻과 모든 은혜를 외면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하고자 몸부림치며 문제를 외면하시기를 바랍니다. 문제에는 마음의 좋음과 싫음을 결정할 권한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요한의 물세례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몸부림치며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문제에 대한 외면으로 일관하기를 지속할 때에 어느덧 하나님 나라 안에서 모든 문제들이 풀리고 녹아서 없어질 것입니다.
진짜 인생의 문제 해결은 십자가를 집중함으로 외면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천국의 주권과 기운이 모든 문제에 닿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가 문제일 수 없도록 만드시는 역사가 삶 전체에 팽배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문제 해결에 관한 올바른 입장입니다. 십자가 작정을 몸부림치며 하시고, 모든 문제를 외면함을 통해 문제들이 봄바람에 눈 녹듯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끊임없는 문제와 장애와 변수가 속출하는 인생에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작정을 몸부림치며 이루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문제를 외면하게 하시고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럼으로써 인생의 모든 문제는 천국의 기운이 닿아서 풀어지고 녹아서 없어지는 참으로 희한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