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속의 힐링(경북 상주 밤원 마을)

[이상호]

잠자는 숲속의 힐링(경북 상주 밤원 마을)

농민신문 : 2021-07-19 

밤원마을 황토방에서 잠자고 있는 이문수 기자. 황토방에는 천연 가습기 역할을 하는 물 먹은 솔방울과 숙면에 도움이 되는 누에고치 전등이 놓여 있다. 상주=이희철 기자
경북 상주 밤원마을
상주 ‘와잠(와서 잠자)’ 치유 프로그램 운영
솟대·순례길·에코백 염색 다양한 체험 즐길 수 있어
‘향 은은’ 물에 담근 솔방울 ‘잔잔한 빛’ 누에고치 전등
황토방서 꿀잠이 스르르
 
여름휴가철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고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욕망마저 누그러뜨릴 순 없다.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지친 심신을 위로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농촌은 최고의 휴양지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고, 전통문화를 통해 옛 추억에도 빠질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신선한 농산물·임산물이 지천에 널려 있으니 건강한 식탁 앞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도 농촌에서의 낭만이다.
 

경북 상주시 내서면 서원리 밤원마을은 곳곳에 산책할 수 있는 길이 많다. 본지 이문수 기자가 장승들이 우뚝 서 있는 마을길을 산책하고 있다.
13일 오후 3시, 서울에서 200㎞ 이상 떨어진 경북 상주를 찾은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내서면 서원리 밤원마을에서 ‘잠이 보약’이라는 주제로 ‘상주 와잠(와서 잠자)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짐을 싸 한달음에 달려갔다. 사실 무더위가 찾아오면서 최근 들어 불면증이 더 심해지기도 했다.

솟대만들기,

‘샤인머스켓’ 포도 농장.
주민수가 160명 정도인 밤원마을은 과거 밤이 많이 난다고 해 마을 이름에 ‘밤’자가 붙여졌다. 지금은 오디·포도 농사를 많이 짓는데, 가을이면 곶감을 만드느라 마을 전체가 바빠진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들쑥날쑥한 키의 장승, 바람도 쉬어갈 것 같은 오두막, 볏짚 모자를 쓴 듯한 노란 황토집이 낯선 이방인을 먼저 맞이했다. 잠시 후 배영진 마을 사무장이 인사를 건넸다.

“2010년부터 50여명의 주민이 체험마을을 운영하고 있는데, 황토집을 지을 때 무진장 고생했어요. 예산이 부족하니 주민들이 직접 벽돌을 나르고 황토를 발랐죠.”

배 사무장을 따라 마을 구경에 나섰다. 처음으로 발길이 닿은 곳은 ‘진또백이 솟대 체험장’. 동그란 나무판에 얇은 대나무를 세우고 손가락 크기만 한 나무줄기와 Y자 형태의 나무조각을 조립하니 새 모양을 한 솟대가 뚝딱 완성됐다.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은 솟대를 보며 ‘오늘 밤 깊은 잠에 빠지게 하소서’라는 소원을 빌었다.

배 사무장이 그다음 안내한 곳은 ‘구도자의 순례길’. 가는 중간에 고구마·옥수수·고추·포도·들깨·가지 등이 심긴 밭을 지나쳤다.

“여기 있는 밭은 대부분 체험장이라고 보면 돼요. 농가와 다 얘기가 된 터라 관광객이 사전에 예약만 하면 언제든지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어요.”

1.5㎞ 정도 걸었을까. 숲으로 둘러싸인 구릉에 십자가가 달린 작은 건물이 나타났다. 이곳은 1996년 세워진 ‘상주 가르멜여자수녀원’이다. 나뭇잎 사이로 하강하는 직선의 빛줄기가 성모 마리아상에 닿은 모습에 마치 천상의 세계에 발을 디딘 느낌이다.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한 마을청년의 차를 빌려 타고 다시 밤원마을로 향했다. 때마침 다목적실에서는 마을주민을 대상으로 한 ‘에코백 염색하기’ 교육이 한창이어서 기자 역시 동참했다. 가방에 그림을 그린 후 오디즙에 담가 물들이는 체험이다. 색이 골고루 배도록 반복적으로 주무르는 작업이 고됐지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연보랏빛 가방이 완성되니 저절로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솔방울에 고기를 굽는 ‘꾸버스’,
“기자 양반, 밥 굶고 싶지 않으면 소나무숲에서 솔방울 많이 주워 오세요.”

사무장의 호령에 영문도 모른 채 노역에 동원됐다. 20여분이 지난 뒤 그가 불판과 돼지고기, 갖은 밑반찬을 준비해왔다. 솔방울로 굽는 ‘꾸버스’ 요리를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꾸버스’가 스페인 요리인지 물었더니 ‘구웠어’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란다. 은은하게 타는 솔방울 위에 올려 속까지 촉촉하게 익힌 고기는 씹으면 씹을수록 소나무향이 입안에 감돌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오후 9시가 훌쩍 넘은 시각. 간단하게 씻고 황토방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하자 배 사무장이 물에 담근 솔방울과 누에고치로 만든 전등을 건넸다.

“황토는 습도를 조절하고 공기 중 유해물질을 걸러주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어요. 물 먹은 솔방울은 아침까지 은은한 솔향을 낼 겁니다. 누에고치 전등은 반딧불처럼 잔잔한 빛을 내 숙면에 도움이 될 거예요.”

황토방 특유의 쾌적함에 포만감까지 겹치니 졸음이 스르르 밀려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깥에서 반복해 들리는 풀벌레 소리와 시냇물 흐르는 소리는 엄마의 자장가처럼 정겨웠다.

어느덧 아침. 격자무늬 창호에서 햇살이 와르르 쏟아지지 않았더라면 정오까지 깨지 못할 뻔했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해서 그런지 산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침식사는 구수한 누룽지였다. 직접 담근 아삭한 마늘장아찌와 김치를 누룽지에 얹어 먹으니 고급호텔 조식 부럽지 않았다.

대기업 중국 주재원 출신으로 견문이 넓어서인지 배 사무장은 아이디어가 넘쳤다. 8월초에는 족욕체험, 라벤더눈베개 만들기, 옹달샘 물멍(물을 보며 멍때리기) 프로그램을 새로 선보인다고 자랑했다. 야외에서 잠을 잘 수 있는 누에 모양 수면방도 마련할 예정이다.

밤원마을이 보여준 농촌은 회복과 치유의 공간이었다. ‘쉰다는 것’은 거창하거나 번잡한 게 아니다. 인위적인 것과 결별하고 자연과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앓던 불면증이 눈 녹듯 사라졌으니 말이다.


이문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