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잘 아는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왕으로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행적들과 그의 시편들은 많은 내용들에 있어서 메시아에 대해 미리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다윗의 왕으로서의 행적들 가운데에는 언뜻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열왕기상 2장에서 아들 솔로몬에게 “요압 장군”과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에 대하여 각각 응징할 것을 당부한 사건이 포함된다.
얼핏 죽음을 앞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나라의 화해와 평안을 위해 용서를 원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하면서 담대히 그들을 응징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하지만 왕상 2:3절에서 다윗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라고 말함으로써 아들 솔로몬에게 한 명령이 바로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즉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자, 다윗의 명령인 것이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전쟁의 상황이 아닌 평화시에 무방비 가운데 있는 상대를 죽이는 계략을 실행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하여 요압은 이스라엘의 군장으로서 지녀야 할 권위와 명예를 크게 더럽히고 말았다. 그러므로 출 21:14절의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는 율법에 따라 마땅히 응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 18:22절에서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대답하시기를,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시어, 철저히 용서할 것을 말씀하셨지 않은가?
사실 예수 그리스도 뿐 아니라 그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 그리고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은 거의 항상 용서할 것을 말하고 있다. 롬 12:18절에서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까지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열왕기상 2장에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요압을 반드시 응징하도록 한 것은 구약적 상황에서, 혹은 당시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왕상 2:3절과 4절 말씀에 곧장 모순되는 말을 다윗이 한 것이니, 결코 정치적 계산이나 구약적 특수성 가운데서 그렇게 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분명히 다윗은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늘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도록 명했던 것이다.
그러면 다윗이 죽어가는 마당에 그처럼 요압에게 응징할 것을 명령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와 관련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말씀이 바로 왕상 2:6절과 9절에서 언급하는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과,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는 말씀이다.
창 42:38절을 보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야곱이 하는 말이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이는 창 44:31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어 기록되는데,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의 총리인 요셉에게 이르기를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42장과 44장의 그러한 표현들은 저주나 응징의 표현이 아니라 비탄의 표현으로써, 42장에서는 야곱의 인생 가운데서의 비탄의 심정을, 44장에서는 아버지 야곱의 심경이 어떠할 것인지를 통해 오히려 아들들이 갖게 될 비탄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42장과 44장의 문구들은 속임과 욕망에 끌렸었던 야곱, 그리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혔었던 요셉의 형들이 느끼는 비탄의 심정이 참회에 가깝도록 이끌려 있는 것이다.
이로 보건데 왕상 2:6절과 9절이 나타내는 바는, 요압과 시므이에 대한 응징이나 보복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비탄에 잠겨 참회토록 하는 ‘권징’의 성격이다. 그들이 분명 율법을 범한 이상, 그들은 반드시 권징을 통해 그 마음을 통회하며 되돌려야만 하기 때문에 다윗은 죽음을 앞둔 마당에까지 그들에 대한 권징을 명령한 것이다.
한편, 롬 12: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 모든 사람들과 화평할 것을 말했지만, 아울러 19절에서 이르기를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곧장 말했다. 이는 신 32:35절의 “그들이 실족할 그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는 말씀의 인용으로서, 다윗은 이를 실천하여 당장에 요압을 응징하지 않았던 것이며, 솔로몬 또한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곧장 그에게 응징한 것이 아니라 “지혜대로 행하여” 그가 실족할 그때에 비로소 시행된다.
물론 요압이 죽임을 당하면서 그 심정이 비탄에 빠져서 통회하며 자복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없으므로, 일반적으로는 그가 마땅한 응징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솔로몬에게 대장부가 되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그를 처벌하도록 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보복이나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그것은 권징을 시행한 것이었으니, 그 마음이 비탄 가운데서 회개하며 돌이킨다면 좋은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마땅한 판결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주 만이 아니라 의의 왕이요 마지막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