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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에스라 원문보기 글쓴이: 이동기
성경의 힘 - 제121강 신학은 사랑학이다(2부)
하나님께서 말라기 안에서 대화, 천년의 사랑을 고백했는데, 일언지하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 말이 얼마나 하나님 마음에 상처를 입혔든지 400년간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어도 계속 하나님의 귀를 쟁쟁하게 하는 그 소리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이 말이 하나님의 마음에 그렇게 큰 상처가 된 거예요.
그런데 쉽게 답이 안 나와요.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도 사람들에게 납득할만한, 사람들이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도 쉽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최고로 어려운 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진정한 사랑을 상대방에서 납득시킬려고 하면 하나님이라도 목숨을 내 놓아야 할만큼 어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최고의 학문은 사랑학이라는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 크지도 않은 나라,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그런 나라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지를 나타내는데 1천년의 시간이 갔어도, 끝내 거의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400년간 고민이 ‘내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해 주면 내가 자기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내가 자기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고 이해하고 사랑으로 내게 응답하고 내 품에 안겨오게 할 수 있겠는가..’
이 고민을 하나님이 400년간 했는가 봐요.
그리고 그 대답이 예수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은, 물론 예수님 오신 목적이 우리 죄를 짊어져서 우리 죄를 담당하러 오셨다. 그것은 당연한 얘기죠.
그것만 아니고 가장 중요한 사명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느낄 수 있게 해 줄려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육체가 되어서 이 하나님이셨던 로고스가 육체가 되어서 인간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3년간 뭘 보여 주셨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보여 주신 거예요.
이러한 사실도 12제자가 다 일찍이 깨달은 게 아니라, 거의 깨닫지 못하고 순교 했어요.
그러다가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사실을 좀 깨달아야 돼. 12사도 중에 하나가..
그게 누구냐 하면 요한이예요.
이 요한이 비로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명제를 요한 1서에 새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다른 주제는 별로 안중에 없어요.
온통 그저 요한복음과 요한1서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로 꽉 차 있습니다.
여러분 12제자 중에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요한을 순교도 하지 않게 천수를 다 누리게 하셨는데, 여러 이유와 여러 목적이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12사도 중에 하나쯤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구원한 것 말고..
구원한 그것 하니까 맨날 구원파가 되잖아요. 구원파가..
맨날 그냥 구원 구원. 십원이 안 돼. 맨날 구원..
그래도 구원의 확신도 별로 없으면서..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구원이 문제겠어요? 복이 문제겠어요? 은사가 문제겠어요?
그래서 이런 것을 잘 몰랐는데, 하루는 다른 사도는 이미 다 퇴근하고 누워자러 갔고 늘 요한이 제일 늦게 퇴근합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 방에 불 꺼지는 것 보고 그렇게 늘 퇴근하고 그랬는데, 막 퇴근할려고 하는데, 똑똑똑 하고 누가 온거야.
국회의원이 찾아 오셨어요.
누구시죠?
네, 니코데모스라는 사람이 왔는데, 이 니고데모는 아주 신실한 사람이야.
모든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려고 상당히 노력을 한 사람이고, 함께 휩쓸려 다수를 따라서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야.
아무리 다른 의원들이 뭐라고 해도, ‘우리 법은 죄인을 물어 심문도 하지 않고 판결하느냐?’ 꼭꼭 의의를 제기하고 사람들이 당연시 하던 것도 반드시 의의를 제기하고 따져보고 이렇게 하던 사람인데,
왜 밤에 왔느냐?
많은 설교하는 분들이 이목이 두려워서 밤에 왔다고 하는데, 니고데모 만나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하는 거야.
제가 여쭤봤더니 이목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람 눈치 안 본답니다. 자기는..
뭐 때문에 그렇게 늦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낮에 오면 예수님이 바쁘시다는 거야.
그리고 심도있는 깊이있는 얘기를 못한다는 거야.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 해서..
그래서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다 물러간 후에, 정말 조용히 독대하고 싶어서 그래서 왔는데, 요한까지도 퇴근할줄 알았는데, 요한은 남아 있었죠.
그래서 예수님도 평소에 예수님 찾아오는 사람이 대체로 수준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다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오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 귀담아 깊이 있게 들을 만한 실력도 안 되고 하니까, 보통 깊이 있는 얘기를 안 했는데, 마침내 그래도 들을만한 사람이 오니까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는 거예요.
맨 처음에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얘기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때 그 요한복음 3장 16절, 3장에 있는 중생 그런 얘기가 다른 어떤 대화에서도 안 나오고, 다른 사람들이 와도 꼭 빈정거리면서 예수님께 말 시비걸려고 딴지나 걸고 말꼬리나 물고 늘어지고 예수님 말로 올무에 걸리게 하고 곤란에 빠뜨릴려고 그렇게 오지만,
이 사람은 그렇게 온것이 아니고, 정말 알아볼려고 왔는데, 깊이있는 얘기가 진행되는데 요한이 손님 갈 때까지 퇴근을 못하잖아요.
그 때 들었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거예요.
그것이 구원할려고 하는 것도 따라 나오지만, 그 구원하는 것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에 구원하는 거예요.
또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까지 새로 다시 봐야 됩니다. 이제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안목으로 우리의 신앙이 정말 사랑의 신앙으로 거듭나게 되면 전체 성경을 새로 봐야 됩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부 새로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음성이 다 사랑의 음성으로 들릴 때..
여러분 앞으로 보세요.
필기가 중요한게 아녜요. 필기하는 사람 치고 집에 가서 읽어보는 사람 없어요.
잘 보라고..
여러분 연애편지를 이렇게 두꺼운 것(성경책) 받아 봤어요?
거 봐.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느냐?
이처럼 사랑해요. 이만큼..
전부 사랑의 음성으로 들려질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는 거야.
우리는 그저 그런 것도 모르고 ‘아이고 징그럽게 두껍다’ 그러면서..
그래서 나중에 보면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그런 모든 사랑들이 전부 사랑으로 다 변환되어서 인식이 되면서 그런 사랑의 음성들 사랑의 메세지들 그런 것들이 그렇게 새로워지는 거야. 날이 갈수록..
그래서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던 그 밤에도 예수님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이런 말씀도 예수님이 하셨단 말이죠.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낸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 이같이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였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주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온통 그저 사랑 이야기로 꽉 찬 거예요.
그래서 요한 사도가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명제와 함께 사랑의 신학을 완성을 한 분이고, 또 성경의 뒷 뚜껑이 되는 종말론이 되는 마지막 성경 완결판도 요한이 만들어서..
기독교의 진정한 신학의 완성자는 사도 바울이 아니고 요한이라는 거예요.
아직도 아무도 요한 신학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사랑학이다’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맨날 ‘오직 믿음’ 그 차원에 머물러 있으니까 바울이 최고다 하는데, 물론 바울은 대단한 분이죠.
그러나 ‘오직 믿음’하고 있으면 그게 되는게 아닙니다.
제가 첫 시간에 얘기 했죠.
이번 구약 마지막 정리할 때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하면 된다 할 수 있다’가 아니라, 그것은 자기 최면 자기 암시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라는 거예요.
관계가 깨어지는 것이 불신앙과 죄로 말미암아서 깨어지는데, 그 회복될 때는 신뢰, 인격적 신뢰로서 관계 회복이 시작되고 그 관계의 완성은 소망으로 나아가서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마침내 사랑하는 데까지 가야 됩니다.
그리고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혹시 ‘아 나는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더 이상 못 받는다.’ 그런 사람 있습니까?
‘나는 너를 충분히 사랑했다.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무이지 의무..
사랑은 끝이 없어요.
그래서 천국이 왜 영원하냐 하면 사랑이 끝이 없기 때문에 영원한 거예요.
천국은 사랑의 나라이니까.. endless예요.
아무리 받아도 더 받아야 되고, 아무리 해도 더 해야 되는게 사랑이지..
사랑이 끝나버리면 인생도 끝나버리고 생명도 의미도 없는 거야.
생명이라는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구상에 살면서 박사 학위를 50개나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면 전부 다 헛거야.
그것은 고뇌에 불과한 것이고, 피곤한 인생의 지루한 노동에 불과한 거야. 사랑이 없다면..
여러분 사랑하면 수고도 즐겁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만 와서 앉아 있는지..
안 그래요?
참으로 사랑하면 먼길도 가깝고 수고도 즐겁고 그렇죠?
내가 아무리 봐도 서울 신앙에 회의가 있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대답 못하고 그런 거죠?
여러분 그래서 우리 남은 생애에 세상에 있는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세상에 있는 지식을 다 섭렵할 수가 없어요.
하면 뭐 합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은 덕을 세우는 겁니다. 맞아요?
그래서 남은 삶을 무엇을 배울 것이냐?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꼭 사랑한다 그것은 너무 추상적이야.
사랑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풀어서 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말도 부단히 찾아봐요.
요한이 이런 사랑을 깨달은 날로부터 요한 사도가 완전히 거듭나요.
잘 아시는 대로 요한의 별명이 뭐죠? 우뢰의 아들이야. 보아너게라고..
얼마나 성질이 급했는지..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들을 영접하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 불로 확 태워버리게 할까요?
이런 사람이 요한이었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것을 깨닫는 날로부터 그의 신앙의 완전히 사랑의 신앙으로 사랑의 사도로 거듭난 거예요.
딴 사람이 된 거예요.
그리고 이분은 연세가 많아서 100살쯤 되었을 때는 힘에 부쳐서 설교할 기력도 없었답니다.
그러면 그의 직계 제자가 폴리캅이라든지 파피아스라든지 익나티우스 이런 분들이 직계제자들인데, 초대교회 대단한 교부들인데, 자기들이 얼마든지 힘차게 설교를 멋드러지게 유창하게 할 수 있어도 자기들이 하지 않고 꼭 요한 사도를 강대상에 모시고 와서 서는 거예요. 같이..
그러면 세 사람이 섰어.
한 가운데에 요한 사도가 서고, 양쪽에 넘어지지 않게 부축하는 교부 제자 둘이 서면 사도요한이 두 제자의 손에 의지해서 강대상에 서가지고 몇 마디, 숨이 가빠서 몇 마디 한다고 해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그것 밖에 말을 못해도 안 교회는 울음바다가 되고 그렇게 피차 상대방을 위해서 대신 죽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교회가 요한이 섬기던 교회예요.
그래서 물론 우리도 뭐 기기묘묘한 미사여구 다 늘어놓을 수 있는데, 거기 사랑이 담기지 않았다면 그런 것 다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고, 더 심하면 성도들 그저 이론으로 선동하는 것 밖에 아무 것도 아니야.
사랑이 담기지 않은 메시지는 메시지가 아니야.
이 성경 말씀 전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또 따라서 그렇게 비춰놓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목적도 교리적으로 볼 때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 그러죠?
그렇게 안 배웠어요?
나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똑같이..
저라고 특별히 딴것 배운게 아니고 똑같이 배웠는데,
그러면 물어봅시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좀 받았습니까?
욕이나 안 돌렸으면 큰 다행이죠.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 여쭤봤지요. 하나님께서 이 속썩이고 애먹이는 것들 뭐할려고 창조해서 속을 썩입니까?
‘내가 사랑하고 싶어서 너희를 창조했어. 이것아..’
우리를 사랑하고 싶어서 창조하셨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은 대상을 필요로 하죠.
여러분 사랑하고 싶은데 대상이 없으면 미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 너무 사랑이 넘치는 분인데, 대상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할려면 사랑의 감각이 있어야 돼요.
사랑하는 분은 하나님은 구약이나 신약 똑 같습니다. 맞아요?
구약시대 하나님 다르고 신약시대 하나님 다르고 그런 것 아닙니다.
그래서 멍청한 사람들이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다. 그것 다 정신나간 소리야.
구약성경을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신약성경에 가도 못 만납니다. 결코..
여러분 이 율법을 이스라엘을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미워서 죄인 만들려고 주신 것 아닙니다.
전부 사랑하셔서 주신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지키지 않다가 얻어맞고 보니까 율법 때문에 얻어맞은 것이 된 거야. 멍청한 것들이..
그러나 그것을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사랑의 음성인줄 알고 우리를 복되게 하는 말씀인줄 알고 그것을 실천할려고 했던 사람들, 온전히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복주고 싶어서 안달 났어.
그것 좀 지킬려고 했다 해가지고..
그것을 지켜보고 은혜받고 복 받은 사람들이 남긴 문서가 지혜의 문서 시가서예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와 감사와 지혜와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구약성경도 창조 목적부터 우리를 사랑하시고 싶어서 사랑하시려고 사랑의 대상으로..
여러분 사랑의 대상일 때는 ‘너’라고 해요. 너..
너라는 존재야말로 사랑의 대상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 자신을 ‘나’라고 하고 그 대상을 ‘너’라고, ‘하나님의 너’라는 존재로 창조했다는 겁니다. 사랑할려고..
그런데 그 하나님은 사랑하고 싶어서 죽겠는데, 이것들이 피하고 숨고 도망가고, 피하고 숨고 도망가고 계속 도망가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 아니야?
그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도망가니까 죽여버리고 싶죠.
그리고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면서 속을 썩이는 거야.
그래서 구약성경도 전부 다 하나님의 사랑이 질투로 나타나는 사랑이예요.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다 질투로.. 그렇게 죽여버릴만큼 사랑하는데, 끝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죽여버릴만큼 질투로 나타나는데 그런 이야기가 구약성경이라는 겁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서 구약성경을 보지 못하면, 맨날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다. 그런 수준에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 전체가..
무슨 말을 하셨든지 간에 하나님 하신 말씀은 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렇게 알아들으면 쬐끔 철이 들어가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아세요?
한마디로 아직도 우리 기독교가 철도 안 들었다 그 말이예요.
구약성경 율법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아직도 철도 안 든 신앙수준이야.
어때요? 우리도 철이 들어가면서 아버지 어머니가 자꾸하고 자주하고 반복하던 것이 잔소리가 아니고 다 우리 잘 되라고 하신 말씀이다. 알아지죠?
그러면 철이 든다고 하죠?
문제는 철들자 망령드니까 문제지..
그러니까 그런 것을 우리를 낳아서 길러서 안고 얼러주시고 길러주신 그런 부모 사랑도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깨닫겠어요?
흙집에 사는 인간이..
그래서 다른 길이 없고 하나님 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최소한도 자기 나이만큼 읽어봐야 돼요.
저도 저 나이만큼 읽어본 후에, 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저보다 더 명석한 사람은 저보다 덜 읽고도 깨달을 수 있겠지만, 제가 사람이 둔해서 그런지 제 나이수만큼 읽고 나서라야 계시록까지 끝이 났어요. 해석이 다 된거예요.
자,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좀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아요.
여러분 사랑이 뭐죠?
안 물으면 아는데 물으면 잘 모르죠.
초등학생도 사랑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국어국문학과 출신도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원초적인 것일수록 정의가 잘 안 나옵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도 쉽지 않지만,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 뭐예요? 어려워요. 아는 것 같으면 물으면 모른 다니까..
공간은 뭐예요?
인생이란 뭡니까?
다 어려운 거예요.
아마 제일 어려운 질문이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질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금 구약의 총 정리하는 마지막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랑이란 무엇인가부터 알고 가야 돼요.
이런 것을 모르고 구약도 모르고 신약 들어가면, 맨 그저 예수님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 죄를 사했다. 그것 밖에 아는게 없는 거예요.
또 신약성경에는 땅에서 복 받는 것 그런 얘기는 거의 없습니다.
실제로 땅에서 잘되고 복 받는 것은 구약에 다 있지 신약에는 잘 안 나와요.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리해야 되는데,
사실 똑바르게 말하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잘못된 거예요.
답이 안 나오는게 맞아요.
사랑은 명사형으로 하는게 아닙니다. 원래가..
가만히 있는게 아니고 사랑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동사입니다. 동사. 사랑하다. 사랑한다. 동사인데,
동태도 무슨 동태냐 하면 무슨 움직여서 움직일 동(動)자를 써서 동사가 아니라 문법적으로 어려운 말인데, 상태동사(狀態動詞) 예요.
어떻게 어떻게 하는게 사랑한다는 거죠.
어떻게 하는게 사랑하는 거냐? 이렇게 물어야 정확한 거예요.
그런 물음을 물어본 사람도 없고 지금까지..
그래서 지금 제가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하고 답을 10가지 정도 정리해 드릴려고 해요.
이것을 배워가지고 우리도 이론으로 빨리 배운 다음에 반드시 실천해야 돼요.
실천의 대상은 두군데 세군데가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 둘째는 우리의 사랑의 대상자들에게, 그리고 생명있는 모든 것들도 사랑을 원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냐?
첫째, 관심(關心)을 기울이는 겁니다. 관심..
이 말은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람이 한 말인데, 사랑은 관심이라고 했어요.
여러분 사랑하면 관심이 있게 되죠?
사랑하지 않으면 무관심한거죠.
소가 닭 보듯이 무관심한 거예요.
소와 닭이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깊은 관심, 애뜻한 관심, 포기할 수 없는 관심, 지속되는 관심..
관심이 사랑이예요.
앞으로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느냐? 이만큼 관심이 있다고.. 맞아요?
이만큼 관심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누구를 사랑한다 만다해도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이만큼 미워하거나 이만큼 사랑해본 적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알려면 읽어보면 알 수 있어요.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인데 나의 모든 관심이 저에게 있도다. 이렇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둘째, 사랑은 이해(理解)하는 거예요. 이해하는 것..
여러분 사랑하면 다 이해할 수 있죠?
좀 못 생겨도 이해하고 누가 못 생기고 싶어서 못 생겼나..
강의가 조금 길어도 이해하는 것이고..
사랑하면 다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이해(理解)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게 풀어간다.’ 이런 뜻인데, 아마도 이해한다는 말은, 저는 원래 영어를 근본적으로 안 좋아하고 싫어하지만, 영어에서 한두마디 좋은 것이 있는데, 이해하는 것은 좋은 말 같아요.
이해한다는 말이 언더스텐드(understand) 밑에 서는 거예요. 맞아요?
사랑은 자기를 낮추는 겁니다. 언더스텐드.
영어에서 또 좋은 하는 말이 있는데, ‘새가 운다’고 하지 않고 ‘새들이 노래한다’고 해요.
내가 생물학자에게 알아보니까 새가 우는게 아니랍니다.
사랑의 노래하는 겁니다.
여러분 새가 일찍 노래하는 것은 4시에 노래합니다. 닭이죠. 닭..
여러분 닭 우는 소리 들어봐요.
들어보면 ‘어서 일어나라’ 그렇게 울죠.
수컷이 암컷을 깨우는 사랑의 노래예요.
새가 우는게 아니고 새가 노래한다는 말이, 노래가 무슨 노래냐? 사랑의 노래입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고함지르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발악..
발악입니다.
정말 노래라는 것은 사랑의 노래인데,
그래서 영어가 다 나쁜게 아니고 좋은게 있는데, 언더스텐드 라는 말이 좋은 말이예요.
여러분 사랑은 자꾸 자기를 높이는게 아닙니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에 말구유까지 음부에까지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상대방의 눈높이까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남녀 평등이니 여성상위니 그것은 꼭 여자들이 사랑 못받을 소리를 하는 거야.
옛날에 여성들이 그런 말 할 때 여성들은 사랑을 받았는데, 요즈음은 여성들이 사랑을 잘 못 받아요.
사랑 받을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 말고 딴데..
사랑은 자기를 높이는게 아니고 자기를 낮추는 겁니다.
여러분 옛날에 대통령이 작업복을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반바지를 입고 그리고 모내기 하는데, 줄서서 모도 심어보고 물론 TV카메라 갖다놓고 5분밖에 안 하는데, 그래도 백성들의 고충을 농민들의 허리의 아픔을 이해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곁에 와서 서 보고 하는 그런 제스쳐가 있었죠?
요즈음은 그것도 지루한지 안하더라고..
논두렁에서 농민들에게 막걸리 사발 기울이고,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를 쓰고 탄광 막장에 캄캄한데 내려가서 연탄캐는 데 가서 서 보기도 하고..
제가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제일 짧게 어쭙잖게 밀려난 최규하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대통령인데,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 분이 강원도 어느 탄광에 갔어요. 탄광막장에..
총리시절에 갔는데, 그렇게 힘겨운 연탄 산업도 이제는 기름에 밀려서 사양길로 들고 있다 그렇게 할 때, 자기들의 앞길이 막막하다고 하니까, 최규하 대통령이 그 때는 국무총리인데, 알았다고 나라도 끝까지 연탄을 쓰겠다고..
얼마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연탄을 쓰셨어요.
그리고 고무신, 고무신 평생 신으시고, 그리고 선풍기가 지금 얼마나 좋은 것 많이 나오는데, 옛날 35년전에 나온 나쇼날 선풍기..
그것 쓰고 계셨어요. 고쳐가지고..
그래서 평생 그의 비서로 계셨던 분이 최규하 대통령의 삶을 지켜본 수기처럼 몇 마디 쓴 것을 보고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높고 높은 데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세 번째, 사랑은 책임(責任)을 지는 겁니다.
죄가 있든지 허물이 있든지 내가 다 책임진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
내가 다 책임지겠다.
사랑은 끝까지 책임을 지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으면 무책임한거죠.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놓고 생활비도 안 갖다주고..
몸을 망쳐놓고 그냥 무책임하게.. 이것은 사랑이 아니죠.
다윗의 아들 암논 같은 욕정이지 사랑이 아니야.
진정한 사랑은 끝까지 책임을 지는 거야.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어서 책임을 지겠다는 거죠.
사랑하니까..
또 이스라엘 백성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니까, 그 대답을 예수님 안에 준비 시켜서 내려 오신거죠.
네 번째, 사랑은 대상을 존중(尊重)히 여기는 겁니다.
이 사랑 중에서도 이런 사랑이 있어요.
앞으로 보세요.
동물적 생물학적 본능적 사랑이 있어요.
그런 것은 동물도 해요.
성관계나 하고 말아버리는 그런 사랑은 생물학적 동물적 본능적 사랑 그런 것은 동물도 하는데, 사람이 되어가지고 사랑을 기껏 그저 성관계로 끝나는 그것으로 사랑으로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랑 말고 의무적 사랑이 있어요. 의무적 사랑..
남편이니까 아내에게 의무적 사랑 도덕적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넘어서 정말 아름다운 온전한 사랑일 때는 상대방을 최소한이라도 자기와 동등한 데까지 끌어올려야 사랑이 되는 거야.
진정한 낭만적 사랑은 인격적 사랑이라는 거예요.
아니면 자기를 낮추든지 상대방을 끌어올려야 낭만적 인격적 사랑이 되는 것이지..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까지 끌어올려야 되는데, 도저히 타락해서 안 되니까, 예수님께서 내려 오셔가지고 우리를 존귀한 자같이 성도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우리를 격상시키고 자기를 낮추어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는데, 얼마나 소중히 여겼느냐?
자기 피로써 우리를 샀다는 거예요.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산게 아닙니다.
얼마나 소중했으면 자기 피로써 우리를 사겠어요?
그리고 얼마나 소중하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의 피를 주고 우리를 샀겠어요?
그만큼 우리를 존중히 소중히 여겼다는 거예요.
그게 사랑이라는 거죠.
막대하고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녜요.
저는 결혼식 주례를 자주 하는 편인데, 그런 경우에는 둘이 둘러앉혀 놓고 철저하게 교육을 합니다.
아무리 결혼한지 오래 되어도 함부로 하고 막대하고 너무 편하게 그렇게 하면 예절이 사라지면 사랑도 함께 사라지니까 죽는 날까지 조금은 어렵게 살아라. 서로..
남자도 여자에게 어렵게 정중하게, 여성도 남편에게 항상 새롭게 정중하게, 마치 처음 만나은 사람처럼 조금은 어렵게 살아라. 예절을 잃지 말고..
말도 함부로 하지 말고..
그 지도를 받아서 그대로 하는 사람들은 권태기 그런 것이 없고, 매일같이 신혼초 같이 그렇게 유지되는 거예요.
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는 거예요. 소중히 귀중히 여기는 거예요.
그게 안 되면 동물적 사랑 내지는 의무적 사랑은 될지라도, 참 낭만적 온전한 숭고한 사랑은 안 된다는 겁니다.
다섯 번째, 사랑은 희생(犧牲)입니다. 희생..
나를 깨뜨려서 나를 희생해서 대상을 채우는 겁니다.
내 욕정 내 기쁨을 채우는게 아니고, 상대방을 기쁘게 상대방의 빈 곳을 채워서 상대방을 만족시키는게 사랑이야.
그게 희생이죠. 희생..
나를 깨뜨려서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고, 나를 깨뜨려서 대상을 채우는게 이게 사랑이예요.
사랑이 곧 희생이다. 그런 말 많이 들었죠?
나를 희생해서 대상을 채우는 거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거예요.
여섯 번째, 사랑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예요.
여러분 사랑하면 함께 있고 싶죠?
이상한 동네가 되어가지고 여기는 안 그런 모양이야.
함께 있고 싶어서 자주 만나도 안 되어가지고 아예 결혼해버리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로 말하면 함께 있는 것 갖고도 만족이 안 되고, 사랑은 하나가 되어야 돼요.
안아보는 정도 갖고는 안 되고..
그래서 둘인데 세상에 어떻게 하나가 있겠는가..
예수님께 여쭤보니까 간단해.
둘인데 하나되는 길이 있어.
그것은 네가 내 안에 내가 너 안에 있으면 하나가 되는 거야.
맞아요?
곁에 정도가 아니고 안아보는 것도 안 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속에 집어넣어버리든지, 아니면 자기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든지..
하나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렇게까지 진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와 함께 하나가 되고 싶을 정도로 이렇게 진한 사랑의 고백을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일곱 번째,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내가 차지하겠다는 것도 차지하는 것이지만, 자기를 주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자기 살을 주셨어요. 살을..
맞아요?
자기 피를 주셨어요.
이것은 내 피다. 내 피가 네 속에서 흐르고 싶어.. 내 피야.
이것은 내 살이야. 내 살이 네 살 속에 있고 싶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면 영으로 내가 네 안에 들어가겠다.
그래서 완전히 주는 것은 나를 너희에게 주는 거예요. 너희에게..
이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상대방을 가지겠다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는 거예요.
나는 당신것이다 하고 자기를 내 놓는 것이 사랑이예요.
여덟 번째, 사랑은 끝까지 믿는 마음이예요.
여러분 사랑은 중간에 가다가 그럴줄 몰랐다느니 속았다느니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속지 않습니다.
또, 진정한 사랑은 속아도 속은 줄 모르는 거야.
그럴 줄 모르기는 뭘 몰라. 예수님은 알았어요.
베드로가 닭 두번 울기전에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는 것 다 알았잖아요. 다..
그런데 속아도 예수님은 또 찾아가요. 눈치도 없이..
그리고 전혀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을 보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가지고 윽박질러 절 받기야. 그냥..
예수님이 꼭 한번은 듣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창세 이후로 단 한번이라도 한 사람에게라도 한번이라도 들어보고 싶은..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꼭 한번이라도 들어보고 싶었어요.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그 말 한번 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윽박질러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는데, 베드로가 자신이 없어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그 말 못하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 상당히 아쉬웠어요. 그래서 한번 더 물었어요.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도 대답을 못하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그런 거야.
한번만 더 물어보고 싶어서 한번 더 물어 봤는데, 똑 같애..
근심하면서 더 두려워하면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한 그렇게 시원찮은 사랑고백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누가 믿은 거요? 베드로가 믿은 거요? 예수님이 믿은 거요?
예수님이 믿은 거예요. 끝까지 믿은 거예요.
믿었으니까 자기 피로 산 교회를 맡기는 거죠.
사랑은 끝까지 믿는 겁니다.
속아도 속은 줄 모르는 거야.
아홉 번째, 사랑은 대상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는,
나의 기쁨이 되느냐? 하나님이 나의 기쁨이냐?
나의 기쁨이요 나의 사랑하는 면류관 사랑하는 자들아.
나의 기쁨이 나의 사랑하는 자.
생각만 해도 기쁘고 음성조차도 즐겁고 그래야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기쁘지 않고 상대가 계속 부담만 된다. 그것은 사랑한게 아니야.
기껏 그저 의무적으로 하다가 본능적인 것도 시들해져버리고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배우지 못하니까 하나님 배울 길이 없는 거죠.
어떤 자매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결혼하고 아이가 있고 한데, 여학생이 얼마나 존경하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취직하러 도시로 못 가는 거예요. 중학교 3학년 졸업하고..
제발 도시로 가라.
갔다가 매주 올라와. 그 먼 길을..
참 큰일이다..
그래서 나중에 몇번 그랬더니 어느 교회에 가서 등록을 했다고 해요.
잘했다. 어떻게 등록했느냐고 하니까, 이 교회 가도 안 되고 저 교회 가도 안 되고 하더니, 어느 교회에 가 보니까 목사님 이름에 ‘우’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등록을 했다는 거야.
열 번째, 사랑은 대상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야.
섬김을 받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줄려고 왔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보고,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렇게 하면, 오늘 제가 드린 이 말씀 이 열가지를 가지고 예수님 안에서 보라고 예수님을 보내었는데, 보고도 몰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하는 거예요.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영을 안 주셨는지..
불감증 환자인지..
전혀 예수님을 보고도 그 예수님이 사랑의 메시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담아 보냈다는 사실을 인식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것을 제일 먼저 누가 인식을 했느냐 요한이 인식을 한 거야.
여러분 러시아 민요중에 ‘백만송이의 장미’라는 노래가 있어요.
백만송이의 장미.. 아세요?
집에 가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세요.
러시아 민요중에 백만송이의 장미라는 노래가 있다니까..
여러분 누가 누구에게 백만송이의 장미를 보냈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글쎄 사랑하니까 보내지..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해가지고 장미꽃 백만송이 보낸줄 아세요?
봄부터 진달래 억만송이, 개나리 수억만송이, 장미 모란꽃부터 가을에 국화꽃까지 계속 보내어도 내다보지도 않고 싸가지 없는 것들이 말이야..
하나님도 그 받지도 않는 것을 내다보지도 않는 것을 해마다 보내. 그래도..
지칠줄도 모르고 보내고, 과일 나무채로 통채로 보내는데도, 아작 아작 먹으면서도 감사 안하고..
우리가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사랑의 대상으로 아내도 보내보고 남편도 보내보고 자식도 보내보고 온갖 것을 다 줘도 도무지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그러고 인생을 헛살다가 가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이 성경과 우리의 삶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처럼 사랑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랑을 믿을 때 참 믿음이예요.
여러분 사람이 어디를 가고 있느냐? 사랑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곳 소망이 있는 곳 사랑이 있는 곳으로 사람이 가게 되어 있어요.
지금 마치면 다 어디를 갑니까?
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다 돌아갈 것 아녜요?
사랑이 있는 곳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가고 싶은 것이, 지옥가는게 겁나서 천당간다 그것 골치아픈 신앙이야.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사랑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간다. 그래야 하나님 기쁘지 지옥가는게 두려워서 천당간다고 해봐..
그런 사람은 바깥 어두움에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러분 우리가 다시 한번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새롭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또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이런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렇게 가정에서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사랑
-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말에 충격을 받으신 하나님께서 400년간 침묵 하셨다가, 그 대답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 사도 요한의 신학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는 명제하에, 사랑의 신학, 최고의 신학, 완전한 신학을 이루었다.
- 창조하신 목적 : 사랑하기 위해서
- 구원하신 목적 : 사랑하기 위해서
- 율법을 주신 목적 : 사랑하기 위해서
- (그렇게도 두꺼운) 성경책 : 사랑의 메시지
- 죽여버릴만큼 질투하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
◎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느냐?
-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어 인간으로 오심
- 낮은 우리를 존귀한 자로 성도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격상시킴
- 얼마나 소중했으면 자기 피로써 우리를 사겠는가?
◎ 사랑이란?
1. 관심(關心)을 기울이는 것이다.
2. 이해(理解)하는 것이다.
3. 책임(責任)을 지는 것이다.
4. 대상을 존중(尊重)히 여기는 것이다.
5. 희생(犧牲)하는 것이다.
6.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다.
7. 주는 것이다.
8. 끝까지 믿는 마음이다.
9. 대상을 기뻐하는 것이다.
10. 대상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