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 2005. 5. 22
08:24:지막리 중촌마을-09:30왕등재능선-10:25왕등재 정상-12:40왕등재 습지-중식 12:00출발-12:30외고개-13:00세재-13:35임도-14:10오봉리-14:45방곡리
지난번 산행 때 오봉리에서 세재로 오르는 길을 놓쳐 이번에는 세재에서 오봉리로 하산하며 그 근처를 둘러볼 요량으로 산행 포인트를 맞추었다. 혹 하산 코스가 외고개로 될지 몰라 차량 1대를 방곡리에 주차한 후 남원O적의 차량을 이용하여 왕산과 필봉산을 돌아 지막리로 향한다. 지막리의 끝 중촌마을이 오늘 산행의 들머리. 중촌마을에는 계곡을 따라 몇 채의 전원주택이 새로 지어져 있는데 이 깊은 곳 지리산의 속살이 파헤쳐진다는 아픔에 기분이 썩 좋지는 못하다. 주차를 적당한 곳에 한다. 천광사 아래 커다란 바위. 그 위로 작은 지계곡을 따라 등산로가 빼곡 열려있다.
지금 우리가 오르고자 하는 곳은 동 왕등재와 서 왕등재의 중간쯤 위치한 능선. 왕등재 습지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를 즐기다가 세재나 외고개에서 하산을 하면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계곡을 따라 초입에는 울창한 수림과 조릿대 숲이 이어지는데 산꾼들의 출입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지 거미줄이 무성하고 숲을 헤칠 때마다 먼지가 풀풀 날려 곤욕을 치른다. 그러나 걸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차 길은 뚜렷해지고 계곡은 넓어진다. 곳곳에는 야영하기 근사한 곳이 있어 마음이 설렌다.
산행을 시작한 후 완만한 계곡 길을 삼십여 분쯤 걷다가 물이 끊기는 지점에서 수통에 물을 채우고 계곡을 좌측으로 버리고 능선을 따라가다 널따란 바위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좌측으로는 도토리봉과 웅석봉이 보인다. 어느덧 왕등재로 이어지는 능선이 가까워졌고, 우리는 그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느긋하게 마루금을 향하여 오름길을 계속하여 쉽게 주 능선 위에 선다. 이곳의 위치는 대략 왕등재에 가까운 능선 위. 남쪽 아래를 내려보니 유평리 마을이 보이고 대원사도 위치 파악이 가능하다. 정면에는 황금능선이 그 뒤 꼭지 위에는 장쾌한 천왕봉이 우뚝 솟았다. 왕등재를 향하다 조망이 트이는 바위에 올라 사방을 살핀다. 우리의 앞길에는 왕등재 정상과 고도를 낮춘 외고개 그리고 봉우리 넘어 세재, 새봉과 독바위가 병풍처럼 이어졌고, 천왕봉보다 높게 보이는 중봉과 하봉의 모습을 보며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오늘 날씨는 쾌청하다. 해는 점차 중천으로 이동을 하며 열기를 뿌렸으나 간간이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은 몸에 젖은 땀을 식히기에 충분하다. 습지를 향하여 걷다 보니 누군가 고맙게도 달아놓은 왕등재 정상 15m 표지기. 왕등재. 가락국 마지막 왕 구형왕이 오른 고개로 왕등치라고도 한다. 지리산 동쪽 자락에는 왕등재, 깃대봉, 망덕재, 망생이골, 수정궁 등 그 당시와 관련된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두지터, 성안, 얼음터 등도 그와 관련된 것이라고 전한다. 지리산처럼 이렇게 많은 전설과 설화를 가진 산이 어디에나 있을까.
왕등재 근처에 토성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곳곳에 축성한 흔적이 보인다. 지금의 시각이 오전 10시 반. 아침과 점심을 겸해 왕등재 습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습지를 만난다. 그 고요함 속에 만나는 이름 모를 새와 풀벌레 소리. 왕등재는 토성보다 '물의 고개'로 불릴 만큼 신비로움에 더 주목된다. 해발 1,000m의 이 고개 일대가 물의 고개, 곧 습지를 이루고 있다. 어디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아니라, 땅속에서 솟아 나오는 물이다. 왕등재에서 많은 물이 솟아나 일부는 남쪽의 외곡리로 흘러내리고, 나머지는 북쪽의 수철리로 내려간다. 지리산 주 능선에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터는 더러 있지만, 고개 전체가 늪지대처럼 질펀 질펀한 곳은 왕등재 한 곳밖에 없다. 나무들이 전혀 없는 풀밭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발목까지 질퍽거리는 물과 진흙인데 지리산 높은 고개 위에 큰 늪지가 있다는 게 불가사의한 노릇이다.
습지를 건너는 다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어간다. 지금은 철쭉의 계절. 지리산 주능의 세석평전과 서북능의 바래봉은 철쭉을 보고자 산을 찾은 산님들과 관광객들이 무척이나 많을 것이다. 하지만 동부 쪽은 이렇게 너무나 조용하다. 오로지 숲과 바람 소리, 새소리의 순수한 자연만 있을 뿐이다. 시원한 냉 막걸리를 한 대접 들이키고 간단하게 준비한 김밥으로 점심을 먹는다. 시큰한 김치 맛이 좋다. 그리고 습지 주변을 산책하다가 다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한기를 느껴 재킷으로 몸을 덮었다.
짐을 꾸려 습지를 빠져나오다 삼거리를 만난다. 몇 차례 지나쳤건만 그전에 이곳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모호하다. 길을 잘못 들어 수철리 방향으로 내리치다가 길이 옹색해지자 아니라 판단되어 오던 길로 다시 후진한다. 길의 상태를 보니 상당한 헷갈림이 있을 수 있겠다. 특히 세재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면 매우 유의해야 할 것 같다. 기상이 좋지 않은 날에는 헤맬 수 있겠다. 그 오름길이 곧 내리막길이 되어 남쪽 외곡리 쪽으로 진행되어 길을 잘못 들었다고 느낄 수 있으나 정확히 능선을 따라 세재 방향으로 길은 이어진다. 외고개. 외고개는 외곡리와 수철리를 잇는 고개이다. 지리산 동쪽에는 정겹고 근사한 고개들이 많이 있다. 쑥밭재, 새재, 외고개, 왕등재 등등. 공통점은 지리산을 남북으로 가르며 북쪽으로는 계곡이 깊고 가파르며, 남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등짐을 메고 생활을 위해 이 고개들을 힘겹게 넘나들었을 것이다.
작은 봉우리를 하나 넘어 외고개를 출발한 지 삼십여 분 만에 세재에 섰다. 아래쪽으로는 윗세재 마을이 가깝다. 이곳에서는 비둘기봉 산장이 가장 잘 보인다. 이것을 보면 윗세재 마을이 얼마나 지리산 깊은 심산유곡 속에 있는지 판단이 될 것이다. 잠깐 서서 조갯골쪽으로 조망을 즐기다가 오봉리로 치고 내려간다. 입구에는 표지기가 보이지 않는다. 급경사의 희미한 옛길이 이어지며 원시림을 이루는 이곳은 지리 산꾼들조차 외면하는듯하다. 앞에는 잡목과 조릿대 숲이 가로막고 있어 하산길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아마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역으로 오봉리에서 계곡을 따라 세재쪽으로 붙기에는 무리인 듯싶다. 표지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하산길을 잃어버리고 그냥 물줄기를 따라 편히 내려서기로 했다. 세재를 출발한 지 삼십 여분 되었을까. 광속단과 포에버님의 표지기가 보인다. 그리고 곧 오봉리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난다.
지난번 산행 때 오봉리에서 임도를 따라 올랐었다. 임도의 오름길을 멈추고 내리막길을 향하는 곳 등산로 입구가 가까운 거리에 나란히 2개가 있었던 거로 기억되는데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서서 계곡을 따르다 능선을 붙어 세재 위의 봉우리를 올라타게 된 것이었다. 임도를 이어 계속 그 길을 따르기로 한다. 얼마 되지 않아 임도는 완전히 끊기고 그 끝자락 아래 오봉마을 아래로 계곡이 또 이어진다. 당혹스러웠지만 우리는 다시 또 계곡을 치고 내려가기로 한다. 그런데 이 작은 계곡은 예상외로 비경을 간직한 곳이 많았다. 수량도 많았고 야영할 만한 훌륭한 곳도 봐두게 되었다. 물길을 따라 바위를 건너 횡단하기도 하며 우리는 계속 계곡의 풍광에 취해 내려서다 삼십 분 후 오봉리 마을의 별장에 도착하였다. 바로 보름 전에 주차했던 곳이었다.
우측에 있는 아기자기한 오봉계곡 포장도를 따라 풍광을 즐기며 방곡리까지 걷기로 한다. 여름 휴가철이면 지리산의 계곡들은 어느 곳이나 할 것 없이 몸살을 앓을 텐데 이젠 오봉계곡 또한 피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널따란 암반과 석실. 풍부한 수량. 깊지 않은 수심. 도로가에서 인접하여 내려서기 쉬운 계곡. 게다가 도로포장이 말끔히 되었으니 오토갬핑을 즐기는 휴가객들의 입맛에 딱 맞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