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피는 조건
임덕기
양재동 꽃시장에서 만리향을 샀다. 향내가 만리萬里까지 간다는 꽃 이름에 잔뜩 기대감이 부풀었다. 베란다 창가에 화분을 놓았다. 그 옆에는 천리향과 터줏대감인 동백이 반려식물로 듬직하게 서 있다. 햇수로 치면 두 나무는 나이 차이가 꽤 되지만 함께 늙어간다. 동백과 천리향은 겨울 꽃으로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다가, 때가 되면 꽃이 핀다.
올해는 동백나무 꽃봉오리가 열댓 개 정도 달렸다. 해가 갈수록 기진한 모습이 역력하다. 나이든 주인을 닮아 가는지 해마다 꽃숭어리가 줄어들고 있다. 한창 때는 붉은 동백꽃들이 나무를 뒤덮었다. 불꽃처럼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요즘은 쉬엄쉬엄 꽃이 핀다. 꽃봉오리 개수를 조절 하며 느긋한 모습이다. 추운 날씨를 이겨내며 꽃필 날만 기다리는 동백이 애틋하다. 스무 해 동안 함께 해서 정이들만큼 들었다. 언젠가는 분명 기력이 다해 더 이상 꽃피지 않을 때가 찾아오리라.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릿하다.
천리향은 해마다 잊지 않고 꽃이 핀다. 혹한과 폭설에도 꿋꿋하게 제 소임을 다하고 있다. 꽃봉오리를 일찌감치 새부리처럼 뾰족하게 내민 채, 정월 끝자락이 되도록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금방 꽃잎이 열릴 줄 알았는데, 아직은 꽃 필 때가 아니라는 듯 단호한 모습이다. 식물들마다 꽃 피는 조건이 나름대로 다르다. 적절한 온도와 햇살과 맑은 공기를 가늠한 뒤에 꽃들은 비로소 피어난다. 겨울꽃은 여린 모습이지만 어딘가 굳은 결기가 엿보인다. 매서운 날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고 강인한 꽃들이다.
만리향은 하얀 꽃이 피더니 시들 때는 치자 꽃처럼 노르스름한 색으로 변한다. 꽃송이가 작고 빈약해 얼핏 보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꽃향기는 천리향보다 옅게 느껴진다. 향기보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잎사귀가 돋보여 실내에 두기로 마음먹었다. 베란다에서 거실로 옮겨놓았다. 겨우내 따뜻한 곳에 있으면 봄에 실한 꽃이 피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를 하면서 말이다.
다음 해 봄이 되어도 만리향은 꽃필 생각이 없는지 잎만 무성했다. 꽃 망울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하다는 생각만 하고 두해가 지나갔다. 꽃이 피지 않아 영양이 부족한가 추측 할 뿐이었다. 향내를 맡으려고 사온 꽃 나무를 봄이 되어도 잎만 바라보며 지냈다. 어느 날 유튜브에서 만리향은 겨울철 추운 곳에 있어야 꽃 피는 나무라고 하지 않는가. 그동안 꽃이 왜 안 피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동백, 천리향, 만리향, 영산홍 등은 차가운 겨울날씨를 견뎌야 봄에 꽃이 핀다고 한다. 베란다에서 지내야하는 만리향을 따뜻한 거실에 놓아두었으니 꽃필 생각을 하지 못했으리라. 위기의식이 사라져 안일해졌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잊은 채 말이다.
겨울철 만리향을 다시 베란다에 내다놓았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봄이 되자 꽃망울이 생겼나 궁금해 나무를 들여다보았다. 자잘한 씨알 같은 꽃망울들이 잎 가운데서 나오기 시작한다. 추위에 정신이 번쩍 들었나보다. 만리향이 뒤늦게라도 제자리를 찾게 되어 반갑다. 올봄 꽃이 피면 만리 까지 퍼지는 향을 다시 맡아보리라.
타사 튜더는 아침마다 손수 가꾼 넓은 정원을 살피러 다녔다. 정원을 돌보는 일 중에 시든 잎과 꽃을 따주는 일이 중요한 일과라고 했다. 식물들은 대부분 잎이나 꽃을 따주면 상처를 이기기 위해 더욱 강해진다고 한다. 긴장하고 위기의식을 느낄수록 새 잎이 나고 더 많은 꽃을 피운다.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겨울꽃과 닮았다.
계절이 바뀔 때면 꽃들은 질서정연하게 피어난다. 매화가 먼저 봄날의 테이프를 끊으면 뒤를 이어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 목련, 벚꽃이 차례로 피어나 자태를 뽐낸다. 어느 봄날 한꺼번에 꽃 사태가 났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상기후로 생체리듬에 혼란이 왔는지 봄꽃들이 허둥거렸다. 꽃 멀미가 날 정도로 사방에 지천으로 꽃이 피어났다.
봄이 무르익으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뒤이어 둥근 실타래처럼 생긴 겹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겹벚꽃과 벚꽃은 우애 좋은 자매지간 같다. 동생인 벚꽃에게 먼저 꽃피라고 등 떠밀고 겹벚꽃은 벚꽃이 화르르 지면 그제야 마음 놓고 활짝 꽃을 피운다. 아파트 단지 안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나무를 보면 겸양지덕謙讓之德이 떠오른다. 겹 벚꽃이 꽃피는 때를 벚나무에게 먼저 양보한 속 깊은 언니 같다. 그 옆을 지나다닐 때마다 흐뭇한 모습으로 올려다본다. 벌 나비가 오는 때를 서로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배려가 상생相生을 하지 않는가.
올겨울은 예년과 다르게 혹한과 폭설이 잦았지만 겨울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들은 힘차게 눈 녹은 물을 마시고 머잖아 천지에는 봄꽃들이 만개할 것이다. 화려한 봄꽃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제비꽃, 민들레, 냉이꽃, 꽃다지등 작고 소박한 꽃들이 먼저 피어난다. 생존을 위해 꽃피는 때를 서로 조절한다. 꽃피는 조건을 서로 달리하며, 서로 양보하며 조화롭게 피어나는 꽃들이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