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59
세신사 모집 요강
정치권의 소음이 끊이지 않는다. 곧 있게 될 총선 공천권을 누가 거머쥐느냐가 잡음의 근원이다. 그들에게 국가의 번영이나 국민의 삶은 언제나 뒷전이었으니 기대도 없다. 누구 말대로 삼국지 따위를 많이 본 탓인지 권모술수에만 능한 그들의 언어가 혐오스러울 뿐이다.
여야는 입만 열면 혁신이란 단어를 남발한다. 얼마 전에는 거대 제1야당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혁신위원회가 도리어 혁신의 대상으로 입방에 오르내리다 조기 폐업했다. 혁신위원장이란 사람의 구설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그의 왜곡된 사고체계가 문제의 본질이었다.
혁신이란 단어는 조직에서 쓰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기업만큼 혁신을 입에 달고 사는 곳도 없다. 하루 다르게 소비자의 니즈와 경영환경이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은 매일 묵은 때를 벗겨야만 한다. 물론 혁신 목욕탕의 때수건은 올이 굵고 거칠다. 몇 번만 문질러도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난다. 혁신(革新)이란 단어의 뜻이 그렇다.
기업의 때수건이 정당 목욕탕에 걸린 지도 꽤 되었다. 다만 한국 정당사에 수많은 혁신 테이블이 만들어졌지만, 성공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자신들의 권력에만 집착했을 뿐 소비자인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탓이다. 개혁의 이름으로 개악하고 혁신을 말하며 퇴행적 망동을 일삼아서야.
혁신 목욕탕에는 세신사 모집 요강이 벽에 붙어있다. 때를 미는 사람은 자기 몸에 때가 없어야 한다. 세신사는 언제나 0도의 심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세신사의 입술은 천금보다 무거워 혓바늘 돋는 말이 없어야 한다. 세신사는 어떤 피부를 벗겨내야 하는지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세신사는 때수건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세신사는 수고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세신사의 손을 거치면 새살이 돋아나고 눈동자가 맑아져야 한다. 마지막 요강이 핵심이다. 세신사 목욕탕을 동네 사람들이 좋아해야 한다.
정치인은 말로 먹고산다. 정적을 공격할 때도 고사성어를 들먹이거나 비유법으로 에두른다. 노련함을 더하려면 때때로 유머를 섞어 여유를 부려야 한다. 그들은 시민을 열정과 희망으로 들뜨게 하고 증오와 분노의 용암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정치를 언어의 예술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영국 총리를 지낸 처칠은 1953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것도 평화상이 아니라 문학상이었다. 당시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자는 헤밍웨이였으나 스웨덴 한림원의 평가는 달랐다. 처칠의 문학상 수상작은 그의 회고록 『2차 세계대전』이었고, 한림원이 이를 최고문학으로 선정한 이유가 이렇다. “역사적이고 전기(傳記)적인 글에서 보인 탁월한 묘사와 고양된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빼어난 웅변술”
웅변술이란 말이 재미있다. 사실 처칠은 젊은 시절 말을 더듬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사람에게 빼어난 웅변가의 칭호가 내려진 건 그의 부단한 언어 구사 노력과 필력 덕분이었다. 말과 글이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말과 글에는 그 사람의 사상이 담겨있다. 말과 글은 사상의 그릇에 따라 크기와 모양을 달리한다. 말은 질그릇이지만 글이 청자인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생각이 삐뚤어지면 그의 말과 글은 깨진 옹기에 담긴다. 그것은 지식과도 상관없다.
설화나 필화로 곤욕을 치른 정치인이 수없이 많다. 그들이 뱉은 말과 글은 처칠의 가래침보다 탁하다. 순화되지 않은 언어는 폭력적이고 적개심이 가득하거나 분열적이다. 그들의 감투가 높고 말총이 촘촘할수록 사회는 갈등이 고조되고 파편화한다.
언어의 폭력성은 문화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사회 공동체가 신뢰와 상생의 관계에서 불신과 상극관계로 바뀌면 구성원들은 긴장하게 되고 사회적 비용이 늘어난다. 이것만으로도 지도자의 언어는 정제되고, 생산적이며 품격이 있어야 한다.
소방수로 데려온 제1 야당의 혁신위원장이란 사람이 불을 질렀다. 여명에 따라 투표권을 줘야 합리적이란다. 선거권을 재산권에 연동시키자는 로크 주의자와 다름없는 망언이다. 그는 독일에서 공부한 법학 전공자다. 독일은 성문법 국가다. 독일의 어느 법전에 그런 조항이 있는지 묻고 싶다.
혁신위원장은 명색이 교수다. 생물학적 수명이 짧을수록 국가의 미래를 잘못 결정한다는 전제에 어떤 이론적 배경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쥐도 늙은 쥐가 낫다는 속담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가 쌓인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노인들에게 더 많은 투표용지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고(思考)나 인식체계에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투표권에 여명을 들먹이기는 어렵다. 교수라 철없이 지내서 정치 언어를 잘 몰랐다는 해명에서는 귀를 의심케 한다. 그 말이야말로 얼마나 왜곡된 정치 언어인지 정말 모르는 모양이다. 그런 수준의 언어 감각이라면 정치판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야당이 없으면 여당도 없다. 시민의 바람은 단순하다. 권력의 독점을 견제하는 야당, 비판만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바른 비전을 제시하는 야당을 기대한다. 무엇보다 상식의 틀에서 작동되는 야당을 보고 싶어 한다. 조금은 무능하더라도 정직하고 도덕적이며 지도자의 말에 품격이 있는 진보정당이라면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여당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야당 혁신위원장이 대한노인회를 찾아 멍석말이를 당하자, 여당 의원들이 경로당을 찾았다. 십만 원씩 추가하여 냉방비를 지원한단다. 때다 싶어 쪼르르 달려가는 모양새가 말 그대로 구상유치다. 그런 보수정당이라면 포퓰리즘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
대한민국은 이제 풀죽으로 연명하던 나라가 아니다. 산책길에 널린 똥강아지도 족보 칩을 목에 걸고 다닌다. 그 공은 머리에 서리 내리도록 밤을 낮 삼아 일한 어른들의 몫이다. 위로와 경로는 못 할망정 동물의 왕국을 만들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