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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의 생애와 신학사상 / 노재양
들어가는 말 1 위클리프의 시대와 생애 2. 위클리프의 성찬론 3. 위클리프의 성경관 4. 위클리프의 성직자 상 나가는 말 |
들어가는 말
독일에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기보다도 약 150년 전에 위클리프는 이미 교황 중심적인 로마 교회와 그 성직자들의 타락과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로마 교회의 교리를 비판하는 생애를 살았다. 그의 사상은 100년을 지나는 동안 체코의 후스에게 전달되었고, 후스는 루터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로서 그의 중요한 의미를 간과하였다. 겨우 지난 세기에야 비로소 위클리프회를 중심으로영국과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 학자들이 그의 저작들을 엮어 내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역사가 개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면, 교회는 부단히 성서를 이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 소고는 부패한 교권에 대항하여 교회를 바로 세우려고 일생을 바친 위클리프의 생애와 그의 성경관, 성찬론 그리고 성직자 상을 통해서 그의 신학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1 위클리프의 시대와 생애
위클리프의 초기 생애는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옥스퍼드에서 보내었는데, 그는 특히 유창한 화술과 엄격한 논리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전혀 유모어 감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후에 "옥스퍼드의 스콜라파 학자 중에서도 뛰어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애국자이었으며, 신학적으로나 실제에 있어서 개혁운동의 권위자이며 또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초기에 그가 반대하던 걸식수도사들의 영향을 일소시키기 위하여 순회 전도단을 교육하여 각처로 파송할 계획을 세웠다. 1380년에 이르러 이른바 이 "미미한 신부"의 단체는 옥스퍼드 졸업생들로 조직되어 백성들에게 나아가 위클리프의 주장을전파하였다. 이 위클리프의 제자들은 후일에 롤라드(Lollards)파라 불렸었는데 얼마 후 런던의 감독은 이들을 정죄했다.
위클리프의 출생 시기와 그의 젊은 시절에 관하여서는 분명한 기록을 찾기 어렵지만 대략 1330년경 출생하여 그는 십 년 이상을 철학 연구에 몰두한 젊은 학자로서 1363년 옥스퍼드에 있는 발리올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철학적인 지식과 더불어 신학 연구에 몰두한 그는 9년 동안 더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면서 1372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레고리 ?세가 약속하였던 지위에 실망하여 루터워스(Lutterworth) 교구를 약속한 에드워드 Ⅲ세 치하의 영국왕실로 들어가 버렸다. 1374년부터 위클리프는 공식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는데, 존 왕이 교황에게 충성의 서약을 한 이후, 바쳐 오던 공납문제 등논쟁거리가 되는 일들에 대한 왕실 측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교황청 측의 대표들과 교섭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임무수행은 필연적으로 교황청에 대한 반감의 기초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위클리프의 눈에도 1374년 브뤼헤에서 상대하였던 교황청 사신들과의 협상경험과 교황청의 과도한 세금요구나 영국 내 성직에 대한 교황청의 무리한 운용 등등은 교황청의 문제를 직시하게 만들었고, 결국 교황을 향하여 형제적인 꾸짖음(마 18:15)을 시작하게 하였다.
위클리프의 두 작품 "신적인 통치에 대하여"와 "세속적 통치에 대하여"에서 교회권력과 세속권세라는 오래된 주제를 다시금 자신의 방식으로 접근하였다. 이러한 작품에는 2년 전에 참가했던 브뤼헤에서의 교황청 사신들과의 논쟁과 관련 있는 위클리프의 옥스퍼드 대학 강의가 배경이 되었다. 위클리프는 순수한 세속적 국가의 존재나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의 마음을 더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이상적이고 하나님의 질서에 합당한 기독교의 재건과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런던의 대주교인 윌리암 코트네이(William Courtenay)를 정점으로 하는 감독회의가 위클리프를 심문하려고 그를 런던의 성 바울 카테드랄로 소환하려 하였지만 랑카스터 공작에 의하여 무산되었고, 1378년 3월에 실행하려던 두 번째 심문계획도 왕의 개입으로 제지되었다. 교황 그레고리 ?세는 그의 "세속 통치에 대하여"로부터 찾아낸 18개의 문제조항을 들어서 1377년 5월 22일에 위클리프를 정죄하였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국회에 자신의 18개 항목에 대한 설명을 보내고 다시 33개의 새로운 내용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세상에서 온전히 청빈으로 살아가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데, 오늘날 성직자의 교만과 탐욕이 원인이 되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성서의 진리에 대하여"와 "교회에 대하여"는 교회를 비판하는 기본적인 그의 생각이 담겨 있는 작품들이다. 여기서 위클리프는 성서적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적인 미래의 교회 상을 피력하였지만, 그의 작은 소망은 결국 1378년 가을 교황청 대분열의 역사를 통하여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위클리프의 개혁정신에 확고한 의의와 개혁운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로부터 그의 개혁정신은 점점 더 날카로움을 띄게 되었다. 1378년에 저술된 "교회에 대하여"라는 작품은 이미 그 내용에 있어서 체코의 후스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교회론"을 통하여 위클리프는 다시 한 번 교회의 참모습에 대하여 그의 견해를 피력하게 된다. 교회란 하나님에 의하여 구원에의 길로 예비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서 유일한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황은 그의 전위대장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법에 따라서만 이끌어져야 한다. 그래서 위클리프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은 그리스도적인 청빈과 겸손, 그리고 자비를 갖춘 교회이다. 교회 안에 있는 교황의 권위에 대하여, 위클리프는 한 해 뒤에 그의 견해를 밝혔다. 교황은 교회교육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았음이 분명하지만, 고위성직자의 임명장이나 성례집행권이 그 증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위가 얼마나 적법한지가 더욱더 분명한 표지라고 하였다.
성만찬의 떡과 잔의 본질적인 변화에 반대하여 쓴 "신앙의 회의에 대하여"에서 위클리프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만찬의 떡에 진정으로 계시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 성만찬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사제의 축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의 능력 때문인데, 떡 그 자체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을 베푸는 사제와 성만찬을 받는 자들의 관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올바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성찬론은 용납될 수 없어서 12인의 박사들과 10인의 수도승단으로 구성된 치리회에서 그의 성찬론을 비난하였다. 위클리프는 랑카스터 공작에게 주청하였고, 이제는 잠잠히 있으라는 요청과 함께 옥스퍼드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1381년 성만찬 신앙고백을 담은 "고백"을 출판하였고, 양자의 입장은 이제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1382년 5월 어느 날 소위 검은 수도사회(Blackfraier Synod)가 도미니크파 수도원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10명의 주교들과 43명의 신학자들, 그리고 20명의 교회법학자들이 모여서 위클리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그의24개의 문항이 이단적이라고 판정하였다. 결국 대주교는 당시 15세였던 리차드 2세 국왕을 설득하여 위클리프와 그 추종자들을 정죄하였고, 위클리프는 루터워스(Lutterworth)로 돌아갔다.
그가 교구를 소유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교구를 그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왕실로부터 하사 받았다는 사실은 개혁가들이 그토록 증오하였던 부패가 얼마나 교회 전체에 만연했었는가를 보여준다. 개혁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위클리프마저도 그가 임명되었던 성직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으로 옥스퍼드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또한 후에 그는 현금이 급히 필요하게 되자, 상당한 금전을 보상으로 받고 보다 수입이 적은 교구와 이를 교환하였다.
위클리프는 철학과 신학과 교회개혁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담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틀리알로그"(Trialogus)를 저술하였다. 위클리프는 1384년 12월 31일 미사를 드리던 중에 두 번째의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하였다. 그는 이 당시 교회에 속해 있었으므로 부속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 후 콘스탄스 회의가 그를 정죄함에 따라 유골이 파내어져 화형에 처해졌다. 그가 남긴 한줌의 재는 스위프트 강에 뿌려졌다.
위클리프의 강점은 학적으로 그와 비길 수 있는 이가 영국에는 없었다는 데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는 외국 교황청의 과세와 탐욕에 대한 일반의 분개와 보다 단순한 보다 성서적인 신앙에 대한 일반의 갈망을 대변했다. 그의 불행은 영국에서 그의 사업을 계승할 수 있는 두드러진 재능을 가진 추종자들이 없는 데 있었다. 그래도 리처드 Ⅱ세의 통치기간 중 롤라드운동은 성장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영국에서의 롤라드파의 정치적 의의는 비록 그 신봉자들은 종교개혁 때까지 지하에 숨어 있어 왔으나 끝장나고 말았다. 위클리프의 주요한 영향은 그의 모국에서보다 보헤미아에 있었다.
2. 위클리프의 성찬론
1381년 그가 옥스포드에서 추방된 이유는 그의 성찬에 관한 신학적 입장이 천주교의 교리와 극한 대립을 보였기 때문이다. 즉 당시 교황으로서는 위크리프를 이단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성찬에 대한 교리는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 주장한 내용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중요성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교리는 1379년에출판된 그의 논문 『배교에 관하여』와 1380년의 논문 『성찬에 관하여』에 잘 나타나 있다.
성찬에 관한 그의 신학적 입장이 시종일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 그는 화체설을 주장하였으나 도중에 바뀌었고 또 여러 종류의 다른 학설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위크리프가 그리스도의 몸이 빵에 물리적으로 함께 한다고 해석한 것은 화체설 교리를 받아들였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가 「성찬론」 논문에서 말하였듯이 초대 교회의 견해가 당대의 견해와 대립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화체설을 초대교회의 교리에 맞추어 설명하려고 고통을 겪었다. 그의 견해를 바꾼 것은 신학적 이유 때문이지만 그렇게 된 것은 15년 전 그가 연구한 형이상학 철학 원리가 원동력이 된 셈이다.
여기에서 잠깐 그의 형이상학을 소개하면, 위클리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존재인 물질적 존재로부터 그 보다 높은 잠정적 존재(potential being)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안에 영원히 내재하는 최고의 지성적 존재(intelligible being)에 이르는 여러 단계의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위클리프가 특이했던 점은 영원한 존재의 속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원형에 속한 것으로 생각한 점이다. 그래서 사실상 모든 존재의 영원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철학 작품 전체를 통하여 그는 현존하는 모든 사물은 과거, 현재, 미래 구분 없이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는 전재로 돌아간다.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것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있다. 그래서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은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것이요 나아가 하나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위클리프는 이 이상한 논리를 그의 성례관에 적용시켜 떡과 잔이 봉헌 된 후에도 변하지 않는다 하여 화체설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만약 떡이나 잔 같은 어는 물체의 폐기는 원형의 파멸을 뜻함이요 이는 곧 피조물 한 부분의 파손이 하나님의 존재가 파멸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화체설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래서 존재의 사슬은 하나님과 모든 존재하는 사물들을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시키고 개별자의 지성적 존재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러한 철학이 논리상 약간 이상하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이 철학적 이론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200년 전에 종교개혁의 원리를 소개하고 가르쳤다는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위클리프의 형이상학철학에 의하면, 하나님 존재의 일부로 존속하는 빵이 파괴되어지거나 없어진다는 논리는 불가능하다. 위크리프는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사닥다리처럼 계단식으로 서로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물건은 하나도 파괴 되어질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피조물의 파괴나 훼손이 없이는 화체설 성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크리프는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찬 선언을 한다. 화체설은 물질의 외적 모형들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반면 본질은 완전히 다른 하나의 존재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사물의 재료나 존재의 외적 형태는 파괴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이것은 논리상으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에는 위클리프가 문제시한 것은 화체설 교리 즉, 사제의 성축이 있은 후 빵과 잔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누구나 그러했듯이 위크리프도 받아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점에 있어서는 그가 이교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변화의 과정이 문제다. 즉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도전을 한 것이다.
문제는 빵과 포도주가 되는 본질 요소인 실체가 없어져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모양과 맛, 냄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느냐가 문제이고, 더 구체적으로 외부적 형태가 본질이나 속성이 되는 원실체로부터 어떻게 분리되어질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체는 변화되었으나 현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위크리프는 화체설을 받아들였으나 이런 문제가 풀리지 않는 숙제로 그를 괴롭혔고 결국 이것 때문에 화체설을 믿을 수 없는 교리로 결론짓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거듭 거듭 주장하기를, 물체나 사물의 모양이나 색깔, 무게, 냄새와 같은 외부적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속성 즉 본질만 변형된다는 것은 철학적 논리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빵의 외형은 그대로 있으나 빵의 본질만 없어진다는 것은 모순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위클리프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을 중요하게 취급한다. 어거스틴이 화체설 교리를 배격하교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을 인용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눈으로 불 수 있는빵과 잔이다. 그러나 믿음은 빵을 그리스도의 몸이요 잔은 그의 피로 가르친다는 사실이다. 한 요소는 눈으로 보아 알 수 있으나 다른 하나는 이해함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성례라 부른다. 눈으로 보는 것은 물질적 형태를 갖고 있으나 우리의 이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적 열매이다.
위클리프는 어거스틴의 이 글이 화체설과 반대되는 영적 임재설 혹은 상징설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글들 가운데는 화체설의 요소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클리프는 베랜가르(Berengar)가 1058년에 발표한 칙령(Nicholas ⅡEgo Berengarians)에서 자신이 처음에 주장한 화체설은 오류임을 깨닫고 그것을 취소했다는데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제단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는 사제들의 성축이 있은 후에도 단순한 성물(sacrament)일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요 피라고 믿는다. 이는 성례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제들의 손에 의해 잡히고 부러지며 신자들에 의해 부서짐과 동시 감각에 위해서도 지각될 수 있다.
위클리프는 이 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하게 주장한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또 읽고 아무리 읽어도 성축한 후에도 빵과 잔은 그 전과 같이 변하지 않고 동일한 물질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백하다. 그리고 교회는 이 진리를 계속 믿어 온 것이 분명하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정통교리를 버리고 나쁜 신앙을 갖게 한 책임은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있다고 보았다. 1215년 제 4차 란트란 종교회의(The 4th Lateran Council)에서 인노센트 3세는 자신의 교황권 확립을 위해 그는 어거스틴이 가르쳐 왔고 교회가 믿어온 정통 교리를 버리고 이교적인 화체설 교리를 천주교 교리로 확정했다고 맹렬한 비난을 가하고 있다.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출현하기 전 1,000년간은 교회가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오류가 없이 올바로 설명하였으나 인노센트의 도그마가 교회에 이단을 소개시키고 경건한 하나님의 교회가 오늘의 불행으로 인도되도록 하였다.
위클리프는 기독교 역사에서 당시 그가 생활하던 시기를 중심으로 하여 100년 전과 과거 1,000년간의 교리적 변화를 비교하고 있다. 즉 과거 1,000년간 교회는 화체설을 가르치지 않았으나 1215년 제 4차 란트란 종교회의에서 인노센트 3세가 교회 전통에 역행하는 교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위클리프의 다음 논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성찬 빵의 물질적 요소로 전락시키는 결과는 참람한 일이요, 그리스도의 피를 포도주와 같이 생각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물질에 종속시키는 모독죄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몸이 물질이나 물건의 외형 혹은 썩어질 빵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은부당한 가설이다. 흰 것이 검은 것으로 변화될 수 없음 같이 빵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만약 사제가 빵을 뗄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을 쪼개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신성 모독죄라고 위클리프는 주장한다. 화체설이 가능하면 성찬을 동물이 먹을 때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고양이나 개와 같은 동물도 먹을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주장한다.
그러면 성찬 교리에 대한 그의 신학은 무엇인지?
첫째 그는 잔존원리(Remanence)를 가르친다. 즉, 물리적 빵의 실체는 성화된 성찬에 그냥 빵으로 남아 있다는 견해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복음서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빵은 성축된 후에도 바로 그 빵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것이 나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후에도 여전히 빵이다. 어느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빵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보겠는가?"
위클리프는 물이 얼음으로 변화되듯 외형은 변형될 수 있으나 실체나 본질은 변형이나 변화될 수 없다고 자연원리를 이용하여 성축 후에도 빵은 빵으로 그냥 남아 있다는 원리를 주장한다. 두 번째로 위클리프는 빵은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의 몸이 더해진다(the body of the Christ was added to it)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을 볼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그곳에 숨어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가운데 현존하며 가려져 있다고 믿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경배할 수 있다. 변화는 빵이 없어지거나 파괴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공재(coexitence)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지금까지 고백하여 왔고 다시 확언하거니와 동정녀에게 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으며 3일간 장사되어 무덤에 계셨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사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 가셔서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영원히 않자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 바로 그 성스러운 몸이 성찬 빵의 실체다. 즉 사제의 손에 있는 빵을 믿음의 눈으로 볼 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빵에 그리스도의 몸이 함께 한다는 주장이 위클리프의 근본적 성례관이다. 빵과 잔은 그리스도의 몸도 아니요 피도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성례적 방법으로 빵과 잔에 숨어 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몸이 무덤가운데 숨기워 있었던 것 같이 성찬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찬에 그리스도의 육적 임재를 주장한다. 그러나 빵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육신적으로 그 가운데 숨어 있을 뿐이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임재 혹은 공재설과 현존설과의 긴장은 위클리프가 풀어야 한 난제이다. 만약 현존설을 주장하다 보면 화체설과 같이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우상숭배의 배교적 요소가 된다. 반면 그리스도의 현존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임재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거부하지 않으면서 또한 화체설을 배격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의 최종적 결론은 그리스도께서 성찬 제단에 임하시지만 육적 현존은 아니라는 견해를 가르친다. 즉, 그리스도는 성찬에 영적으로 함께 하신다. 그는 물리적 임재설은 천박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교리를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날카로운 구분을 시도하였다.
우리는 사제들의 손에 있는 빵과 잔을 우리 육신의 눈으로 바라 복 될 때 그것은 참되고 몸인 줄 알고 경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외적 눈에 나타난 것들은 눈으로 보든지, 귀로 듣거나 코의 냄새 같은 방법으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고 단지 교회의 참된 신앙에 의하여 마음이나 믿음의 눈을 떠서 보이는 사물에서 보이지 않는 사물로 우리의 생각을 바꿀 때만이 그것의 참된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우리의 육적인 눈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으나 마음과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뜻으로 생각할 수있다. 가견적인 것과 불가견적인 것,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은 감각을 통해 세상을 점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에는 자연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례를 문자적으로 가시적으로 인식하는데도 자연히 따르는 귀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에 영적으로 임재하기 때문에 빵은 빵으로 남아 있을 뿐이며, 믿음으로 그것을 받을 때만이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약속하신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위클리프는 가르쳤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주장과 같이 성찬은 영적 은혜의 상징적 물질의 본질이요 내적 은혜를 나타내는 외적 표현의 상징이라 함이 좋을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 마가의 글보다 더 분명한 설명이 없다. ......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셨고, 그들은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런데 그는 "이것이 나의 피라"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마태의 글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구절의 표현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잔이 피로 변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 이곳의 말씀은 문자적 해석보다는 상징적 교훈이기 때문에 잔과 빵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클리프의 성찬론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 빵 가운데 숨어 있어 빵에 함께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이 육신으로 빵에 함께 함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임재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성찬론은 처음은 화체설을, 다음은 그리스도의 육적 공재설, 그 후는 상징설 혹은 영적 임재설로 변하고 있다. 성찬을 상징으로, 영적으로, 표로 이해한 것은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그리고 이것은 16세기 쯔빙글리와 칼빈의 견해와 동일한 뜻에서 그의 성찬론의 중요성을 갖는다.
이러한 위클리프의 성찬론에 대해 그의 견해를 연구한 웍맨(Workman)은 공재설로 보았다. 그가 그리스도의 몸이 빵과 잔에 숨겨져 있다고 주장할 때는 공재설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루터도 그리스도의 몸이 빵 가운데 숨어서 함께 한다고 가르치면서 공재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고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임재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공재설로 보기는 어렵다.
어떻든 그는 처음 한 번 화체설을 인정한 후 끝까지 화체설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코트네이 대주교로부터 고소를 받아 1382년에 그의 성찬론에서 10개의 이단적 요소가 있는 것으로 정죄 받았다. 루터도 중세 교황청의 모순과 부조리의 제일 큰 원인은 위클리프가 느낀 바와 같이 화체설 교리에 있다고 보고 화체설 공격에 총력을 기울였다. 위클리프에게도 공재설의 요소가 어느 정도 있다. 그러나 루터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공재설을 가르치고 있다.
칼빈의 영적 임재설과 상징설은 많은 점에서 위클리프의 견해와 동일하다. 그 이유는 양자 모두가 상징설과 영적 임재설을 주장할 때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도 화체설을 공격했으나 이 부분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와 대담에서 실패하였다. 루터는 문자적 해석을 했으나 쯔빙글리는 상징적 해석을 하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화체설을 믿으면 천주교인이요 부인하면 신교인으로 표시하는 분수령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중요한 교리를 루터나 칼빈보다 200년 앞서서 공격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당시 학자들은 위클리프의 고명한 신학에 동의한 자들도 있기는 했으나, 다수가 그를 공격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415년 콘스탄스 종교회의에서 다시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내어 시체를 불에 태워 뼈는 가루를 만들어 강물에 뿌렸다.
3.위클리프의 성경관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는 자들에게 위클리프는 성도의 생활에서 성경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영원한 진리를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성경이 갖고있는 권위는 교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한 권위이다. 성경에서 이성은 신적 생각의 요약인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위클리프에 있어 성경 해석에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는 기록된 모든 말씀은 과거에도 진리이었을 뿐 아니라 미래에도 항상 진리로서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법 아래 있으므로 교회의 공적 해석이 없이도 그 뜻을 모두가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모든 고용인은 타인의 법 해석의 도움 없이도 매사에 고용주의 뜻을 따라 일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단언하였다.
1) 성경과 전통(Scripture and Tradition)
위클리프는 당시 교회의 모습이 성경과는 멀리 있다고 보고 그 원인을 콘스탄틴 대제라고 생각했다. 비록 콘스탄틴에 의해서 교회가 자유를 얻고 풍요로워졌으나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인간의 법으로 옮겨가서 그 영적인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과 같이 필립샤프도 중세 신학자들이 성경의 내용과 교회의 가르침인 전통을 혼합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켰다는데 위클리프의 입장을 동의한다. 샤프는 말하기를, 위클리프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된 근본적 동기는 그의 끊임없는 성경 연구의 결과로 보고 있다. 위클리프의 모든 신학적 사상은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고 성경은 교회의 전통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위클리프는 절대적 권위를 갖는 성경의 영감을 믿었다. 실재론의 철학의 영향으로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적으로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신적 원형의 물질화이며 실재화 된 형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른 권위에 우선하는 위치에 있다. 즉 성경은 역사적 시간 속에서 기록되어지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던 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말씀의 물질적 형태로의 변화이다. 그래서 성경은 음절 하나 하나 모두가 참되고 진리이다
또한 위클리프가 주장하기를 만약 성경 안에 모순이 있다거나, 오류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의 이해 부족일 뿐이지 하나님의 계시의 잘못이나 성경 안에 나타난 내재적 불완전의 결과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파르(Farr)는 다음과 같이 위클리프의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기독교인의 삶을 측정하는 표준으로서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완전한 말씀이며, 나아가 일점일획까지도 그리스도의 법의 원인과 효과가 있다.
위클리프는 주장하기를, 어느 왕국이나 사회가 법 없이는 살아갈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왕국도 법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황제가 시민법을 세우고 그 나라의 규정들을 만들 듯이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백성을 위하여법을 제정하셨다. 허레이(Hurley)는 다음과 같이 위클리프의 글을 번역하였다. 교리는 명확한 언어로 표현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법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그의 법을 신구약 책의 기록을 통하여 완전하게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첨가하거나 빼야 할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그래서 이 성경의 법의 권위는 최상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것은 그 법이 입법자가최고인 것처럼 법으로서 완전한 최고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와 필적하는 권위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법을 하나님의 법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신성모독죄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은 명확하면서도 간략하기 때문에 그 조직과 유용성도 다른 어느 것 보다 우월하다고 위클리프는 생각하고 있다. 그는 신앙이 성경에 의존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성경에 근원을 둔다고믿었다. 그런데 위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당시 교회가 그리스도의 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서 인간적 전통에만 얽매여 있는 일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킬 것을 명하지 않은 모든 인간적 전통은 무용하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는데 방해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들의 유전을 인하여 하나님의 법을 거슬리느냐고 책망하셨다.
역사 과정에 나타난 사건들 가운데 위클리프는 그리스도의 법과 로마 교황청의 교훈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꼬집어 열거하였다. 그러므로 위클리프에 있어 성경의 권위는 최상의 것이며, 하나님의 법이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성경의 권위 절대주의자라 할 수 있겠다.
2) 성경 해석(Interpretation of Scripture)
성경관을 연구함에 있어 성경해석상의 문제가 자연히 대두하게 되고 따라서 위클리프는 이에 대해 적지 않은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의 중요한 관심사는 성경 그 자체의 논리적 법칙과 언어에 따라 읽기만 한다면 성경에서 어떠한 오류에도 빠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원리에 의해 해석되어져야 한다.
한 구절의 성경에서도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질 수가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 신학적 체계를 다르게 세워 사회와 교회에 상이한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하여는 그 잘못이 독자의 지식에 있으므로 기독교인들에게 참된 성경의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한동안은 그 자신도 당시 다른 스콜라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훌륭한 안내자는 이성과 교회의 교법사라고 생각했으나 후일에 그의 사상을 바꾸어 성령에 호소하였다. 웍맨은 위클리프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신약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은 절대적 권위가 있으며 나아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 그리스도께서 그의 법을 서판이나 동물의 가죽 위에 쓰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 쓰셨기 때문에 단순한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진리의 뜻을 그의 사도들에게 알려 주셨듯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위클리프는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사도들에게 개방하셨듯이 성령께서 성경의 참 뜻을 우리에게 조명하여 준다고 주장한다. 성경 전체의 내용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조명하시면 교회의 공적 해석에 의존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성령에 의해 기록되었고 성경을 기록한 그 성령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법은 모든 크리스챤이 직접 자기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위클리프는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처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직접 나온 완전한 말씀으로 믿었을 뿐만 아니라 평신도의 성경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것이 곧 루터가 주장한 오직 성경의 사상과 다를 바가 없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성경만이 모든 성도들의 유일한 규범이 된다는 사실이다.
3) 성경번역(Translation of Scripture)
필립샤프는 다음과 같이 위클리프가 성경 번역사임을 칭송하고 있다. "위클리프가 영국 백성을 위해 행한 중요한 업적은 성직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그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조국 교회를 위해 봉사한 것과 더불어 성경의 권위를 회복한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 자신의 언어로 선물한 것이다. 성경이 구원의 방편으로 충족할 뿐만 아니라 문자적 의미 그 자체가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그의 가르침은 긍정적이면서 분명한 사실임에 틀림없다." 위클리프가 성경을 번역하게 된 가장 근본적 동기는 그가 항상 주장한 성경의 권위에 의해서이다. 처음에는 그가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성직자들과 함께 상당한 교육 수준에 있는 평신도들을 위하여 성경을 번역하였다. 초기에는 위클리프가 성직자와 상류 계층의 평신도들을 마음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클리프의 "통치론"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사이에 어떠한 중재인의 도움도 필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크리스챤 사이에 개인적 유대관계가 되고 또한 청지기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법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은 성경 뿐이요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려면 성경 번역은 필수적이 된다. 만약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원리에 따라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려면 중재인은 필요 없이 개개인이 하나님의 법을 직접 연구하고 배워야만 한다.
반면에 이것은 또한 정치적 중요성도 없지 않다. 성경 번역은 성직자들을 대항하는데 있어 평신도들의 손에 무기를 들려주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성경 자체가 기독교의 교리나 성경도 모르는성직자 보다 훨씬 훌륭한 교사가 될 것을 믿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깨닫는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의 무지와 그들의 방탕한 생활에 상당한 도전이 될 것으로 여겼다. 우리가 위클리프의 성경 번역을 연구할 때 제기되는 의문은 이 번역본이 정말 위클리프 자신에 의해 번역된 성경인가 라는 문제이다. 웍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는 그 번역을 누가 하였나 라는데 있지 않다.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번역은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그의 추종자들이 작업을 하였다.
캐맥(Cammack)의 연구에 의하면, 1411년 존 후스(John Hus)는 위클리프에 의하여 번역이 완성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 사람들은 위클리프가 성경 전체를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였다고 믿고 있다.그러나 이에 대한 반증도 있다. 레크러(Lechler)는 기술하기를, "위클리프 번역의 초판에는 위클리프나 그의 추종자들이 번역하였다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번역한 사람들이 번역은 누구에 의해 이룩되었는가에 대해 침묵만 지킬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추정하기를 위클리프가 직접 번역 작업을 하지는 않았으나 뒤에서 계획하고 고취하였다. 그래서 번역의 전문적 작업에 위클리프 자신은 중요한 역할을 별로 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으나 그의 영향력과 노력이 없었다면 번역이 불가능하였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그 번역은 위클리프의 번역본으로 알려져 있다. 위클리프의 영향 아래 완역된 영어 성경이 두 종류로 우리에게 전수되고 있다. 첫 번 번역은 라틴어 벌게이트(Vulgate)에서 영어로 번역한 것인데 대부분을 니코라스 헤러포드(Nicholas Hereford)변역 하였다. 이 번역판은 좋은 번역판이 못된다. 두 번째 번역도 역시 벌게이트에서 번역된 것으로 첫 번째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번역은 푸베이(John Purvey)에 의하여 추진되었는데 첫 번째 것의 많은부분을 손질했다. 로마 교황청에서 벌게이트 성경이 거룩한 영감된 성경으로 귀하게 여겨졌듯이 로라드(Lollards) 단체들은 이 두 번째 번역판을 귀한 책으로 사랑하였다. 캐맥은 지적하기를 로라드 단체들과 그들을 좋아하였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영국의 많은 사람들은 틴데일(Tyndale) 번역판이 나타나기까지 위클리프 성경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4) 하나님의 법의 선포(The Preaching of God's Law)
위클리프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성경 권위 절대주의 사상에서 복음은 백성에게 반드시 선포되어져야 한다는데 까지 나아갔다. 선한 생활로 인도하는 최선의 방법은 성경 지식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내용을 바로 이해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설교임에 틀림이 없다.
위클리프는 교회의 제일 우선되는 임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직자들은 자유로이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를 제한하는 것은 청지기가 주인의 법이 선포되는 것을 제한하는 행위이며 나아가 인간의 삶에 성령의 감화를 억제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설교의 자율권을 강조하면서 당시 천주교회의 외부적 의식에만 집착된 형식주의를 반박함과 동시 설교의 자유를 빼앗은 교황을 공격하고 있다.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새로운 창조를 산출하는 씨 뿌리는것으로 보았다.
성직자에게 설교의 능변은 중요하다. 성직자의 의무 가운데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 다음으로 중요한일은 거룩한 설교를 효과 있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의 동기는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크리스챤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사랑하는데 두어야 한다." 위클리프는 과장된 문장이나 화려한 형용사를 나열하는 스타일보다는 평이하고 단순한 논리 스타일의 설교를 좋아했다. 가난한 설교가 운동(the poor preachers movement)은 위클리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4. 위클리프의 성직자 상
위클리프는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을 모든 성직자의 모범으로 삼는다. 특히 그 직분이 높을수록 청빈은 더욱 중요하다. 그는 구약성서에서(민 18, 신 18, 겔 44) 레위인에게 기업을 나누어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성직자들은 세속적인 재산에 제한을 받아야 하며 오로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고 하였다.마찬가지로 신약성서에서도 그는 이에 관한 삼중적인 증거를 발견하였다.
첫 째는 누가복음 14:33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 속에서 위클리프는 신약과 구약성서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것은 성직자가 세상 물질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의 말씀은 누가복음 22:25인데, 세상의 집권자들은 다스리지만 사도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을 통하여 소위 물질적인 것과 사도직과의 연관성을 끊는 가르침을 주셨다는 것이다. 셋 째는 마태복음 20장에서 제자의 어머니들이 자기 아들을 하늘에서 높은 자리에 앉게 하여 줄 것을 부탁 받고 하신 말씀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고난의 종이 되심을 가르치신다.
위클리프는 당시의 성직자들이 어떠한 이유로 세속적인 물질에 대하여 집착하였는가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성직자들은 세상권세와의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권력과 재산에 집착하였다. 그들이 물질축적에 대한 변호하는 말로 "초대교회가 집사들을 통하여 물질을 나누어주었던 것처럼 행하며,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서 감독은 충분한 물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성직자들의 주된 수입원은 십일세였다. 위클리프는 십일세와 여러 자선금들을 재산 축적의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는 성직자들을 비난하였다. ...... 십일세를 구약에 근거하여 강제로 징수하는 일은 두 가지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첫째는 구약에 나오는 다른 요구사항들을 동등하게 지적하지 않으면서 십일세만 강요하는 문제이고, 둘째는 교구 담당 성직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모범을 실천함으로써 교구민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지 못하고 오히려 출교와 견책이라는 박해를 사용하여 십일세를 징수한다면 이것은 성직자의 본래적인 직분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당시의 성직자들이 십일세나 기타 자선 기부금에 이러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이러한 교회 교구 수입의 일부를 고위성직들에 대한 상납금으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교구 사제 뿐 아니라 교황, 추기경, 주교, 부주교 등등 고위성직자가 오히려 앞장서서 요구하는 것이었으므로, 위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이러한 엄청난 신성모독과 불신앙이 신실한 성직자가 정의를 지키려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 참으로 교회는 무법한 동료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수많은 일 때문에 신실한 사제가 그에게 부여된 사명을 수행하려고 할 때에 그 사명을 빼앗는 수천의 악마적 방해가 있게 된다. 결국 이제는 더욱 과감하게 주의 헌신적인사람들을 자신들의 간교한 맹세에 따라 약탈하고 있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예수 그리스도의 법과 다르게 행동하는 성직자들에게 계속 기부금을 제공한다는 것은 위클리프의 생각에 적그리스도의 아들들을 양육하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수도사이든지 교구 성직자이든지 그들이 성실하게 맡겨진 사명을 다한다면 십일세는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기본적인 명제가 잘 지켜질 것이라는 것이 위클리프의 생각이었다. 십일세와 기부금들은 성직자의 물질적인 욕구를 채우는데 이용되거나 고위 성직자를 향한 상납금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위클리프는 이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하며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목적에 사용되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황과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있는 네 가지 성직자 그룹, 주교(bishop), 수도승(monks), 일반성직자(canons)그리고 탁발수도사(friars)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위클리프는 이들 성직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조건을두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그 첫째는 자기 자신의 원천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목회자의 기능인데 다음과 같다.
목회자는 삼중직이다. 첫째, 그의 양들을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양하는 것인데, 늘푸른 초장을 통하여 저들은 하늘의 축복에로 인도되어져야 할 것이다. 두 번째의 목회직분은 자기와 다른 이들에게 감염된 지도 모르는 병에 걸린 양들을 지혜롭게 치료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간에 약탈하는 늑대로부터 그의 양들을 보호하는 일이다.
위클리프는 이러한 목회자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 대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양들 가운데 머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목회자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방식이 함께 할 때에만 그의 설교는 양들에게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은 단순한 설교보다 더욱 효과적이며, ...... 선한 목회자의 삶은 무리들이 따라하는 필수적인 거울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위클리프는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누가복음 11:28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포는 삼중적이어서 우선 말씀이 설교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이것을 들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이것을 정말로 실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당시 설교가들이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도 않을뿐더러 일반 신도들은 복음의 참된 소리를 들을 통로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복음은 분명히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 또는 다른 그 어떤 것을 사랑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마10:37)고 가르치고 있는 데 반하여,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추구를 위하여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위클리프가 유모어 감각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저돌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형이상학은 범신론에 가까웠으나 "빵은 그냥 빵이다"29),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다", "불결한 성직자들아 회개하라! 거룩한 것에 손대지 말라"고 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성경을 절대적 권위로 삼는 신학 사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약속하였던 지위에 실망하여 루터워스(Lutterworth)교구를 약속한 에드워드 3세 치하의 영국 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개혁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위클리프마저도 그가 임명되었던 성직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으로 옥스퍼드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또한 후에 그는 현금이 급히 필요하게 되자, 상당한 금전을 보상으로 받고 보다 수입이 적은 교구와 이를 교환하였다." 그래서 그는 샛별이었는가? 그렇다고 이 시대에 그 누가 위클리프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나는 십자가 그늘 밑으로 가노라(471).
첫댓글 글이 길고 학문적이라서 조금 딱딱합니다. 여유가 되시는 분들만 보셔도 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시간 나는대로 틈틈히 읽어 볼게요. 좋은 글 편히 읽을 수 있어서 좋네요.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글입니다. 연휴 중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시간 내서 읽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