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진 어떤 계절이 있을 겁니다. 굳이 낡은 일기장을 꺼내 들추지 않아도 말입니다. 나에겐 1980년 늦봄부터 여름까지가 그러합니다.
1980-05-18│이재명의 일기
1980년 5월 18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누군가 나라를 도둑질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도둑인지 분간하기에는 너무 어리석은 때였지만 말입니다. 그날 저녁 권투경기 중계가 있었습니다. WBC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 5차 방어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해온 챔피언 박찬희 선수와 일본의 도전자 오쿠마 쇼지의 경기였습니다. 통쾌한 승부를 기대했지만 경기는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무기력하던 박찬희 선수는 9회 초에 KO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도둑놈 같았고, 경기는 엉터리 같았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삶도 엉터리었습니다. 공부를 점점 멀리하게 됐고, 마음은 점점 싱숭생숭했고, 나의 팔은... 통증이 날로 심해져만 갔습니다.
이른 새벽마다 시장 청소일을 도우라는 아버지의 재촉에 잠을 깼습니다. 몸도 성치 않고 미래도 불투명했던 나는 이런 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위로를 건네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헛된 바람일 뿐이었습니다.
왜, 왜, 왜, 내가 아버질 피해야 하는가? 원수도 아니다. 적도 아니다. 아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친구란 아버지가 아닌가. 하지만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1980-07-06
어디든 다시 취직하길 바라시는 아버지의 등쌀에 못이겨 입사 서류를 내러갔다 그냥 돌아온 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서류는 제출했지만 탈락했다고 말입니다. 오직 공부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시간을 벌어 공부하고 싶은 마음과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내 마음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였습니다.
1980-06-03│이재명의 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