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 1,1-4 4,14-21
찬미 예수님!!!
오늘은 ‘말’에 대해서 다같이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말, 그 말을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로 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아무래도 형제님들보다 자매님들이 말을 더 많이 하시며 살 것 같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4-6세 정도의 취학 전 아동의 경우, 여자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 단어의 수가
남자아이들의 2배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말을 더 빨리
배우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여러 매체의 발달로 인해 아이들이 영악스럽게도 말을 잘하는 것을
보고 느낍니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말하는 것이 어눌하기도 했지만, 요즈음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도 또박또박 자기 표현을 잘하는 것을 봅니다. 매체를 통해 어른들의 표현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안 한다고 해도 말을 많이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을 잘한다’ 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자신이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을 잘하고 못하는 것의 차이는 단어를 많이 구사하고 안하고의 차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말을 듣긴 했지만 기억에 남는 말은 하나도 없는 경우가
허다히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본 사람인데, 말을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그 말이 평생 잊혀지지
않고 곰곰이 되씹게 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말을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의미 있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처럼 말을 많이 하고 쓸데없는 말만 많이 하는 경우, 그것은 ‘의미 없는’ 소리만
많이 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비하시켜서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거의 짖음에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과학이 밝혀내는 진실에 의하면, 동물들도 Communication을 한다고 합니다. 즉 의미 전달
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보다 못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말은 도구가 아닙니다. 말을 내 생각의 표현 수단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말은 그것보다 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와 견줄만한 금세기
최고의 독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1889-1976)는 말에 관해서 의미 있는, 참으로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라고 했습니다.
쉽게 풀이하자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평상 시에 독설을 퍼붓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우울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짜증 어린 소리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햇살이 이렇게 좋은 날도 짜증나게 햇살이 났다,
자외선을 걱정하며 짜증부리는 사람 또한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집에 살고 있는가?
아마도 차갑고 고통스러운 존재의 집에서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이고 또한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재의 아름다움,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맑은 물이 샘솟는 깊디 깊은 사유의 샘이 있습니다.
‘언어는 그 사유의 샘의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 이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말을 하며 사십니까? 어떤 말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릴 때,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는 분들은 자신 안에 그 깊은 사유의 샘이 있긴 하지만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을 제가 대신하니, ”아, 그래 맞아.”하시며 그렇게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만 제 사유의 샘에서, 언어의 두레박으로 샘물을 길어 올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말을 자꾸 하다 보면-물론 안하고 살 수는 없죠- 마음에도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직업이나 처해진 어떤 상황에 따라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차원이 아닌
내 삶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을 생각해보고, 그것을 묵상하고 또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아니라면, 한주간 동안만이라도 그렇게 실천해보도록 합시다.
그런 좋은 말들을 생각해보았는지, 묵상해보았는지, 그런 좋은 말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면
참으로 잘하신 것입니다. 묵상하셨다면 더욱 잘하신 것입니다.
‘사랑한다, 괜찮다, 너를 믿는다, 당신을 존경한다’… 사람을 살리는 말들입니다.
남을 살리는 말들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사는 말들입니다. 나를 옹호하기 위해 남을 비하하는
여러 말들은, 사실 남을 죽이는 것 같지만 오히려 나를 죽여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바로 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망가지면 내 삶이 망가지고, 내 삶이 망가지면 결국 나는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엄마,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세상 그 누구도, 남편도 아내조차도 이해해주지 않고 세상에 지쳐 힘들고 어려울 때 그분, 엄마만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를 생각하면 왜 마음이 아립니까?
그것은 경험- 엄마에 대한-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게 엄마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엄마라는
그 소리가 나를 울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언어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기억에도 남지 않습니다. 역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언어는 역사입니다. 존재의 역사입니다. 우리 삶의 역사입니다.
말해지지 않는 것은 의미화되지 않고 언어로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을 조심해야 되고, 말을
함부로 다루거나 함부로 하지 말아야 되며, 말을 묵상하고, 말을 잘 쓰고 잘해야 되며, 쓸 말만
해야 됩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결국 신앙생활 잘못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은 위대한 역사를 쓰고 싶지 않습니까? 아마 모두 그런 욕심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역사를 쓰십시오. 지인들에게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그렇게 사랑의 역사를 쓰십시오.
그러면 역사가 됩니다. 또한 그것은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평생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신부가 되어 대구 근교의 중고등학교에 4-5년간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신부님이 학교를
세웠습니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처음에 닭 농장을 하시면서 고생 고생하여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학교에 교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가서 보니 교정에 한 할머니(율리안나)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교정에 무덤이 있는 것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신부님이 학교를 세우기 위해 그렇게 고생하실 때, 대구 교동시장에서 어렵게
고생하며 번 돈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어 하시던 할머니께서 신부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뭔가 의미 있는 일-다음 세대를 위한 인재 양성-을 하시려는 신부님을 위해
할머니는 평생 번 많은 재산 전부를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 그 지역에서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신부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신부님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늘 오르내렸습니다.
그분들은 사랑의 역사, 위대한 역사를 썼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언어가 되어 사람들의 말 속에 계속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되어야 진정으로 신앙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제게 뭘 원하십니까? 저한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늘 한번 여쭈어보고 싶었습니다. 미사 드려주는 것?...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신앙, 그 신앙을
가르쳐 드리는 일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가진 그 신앙을 더욱 성숙시켜 드리는 일입니다.
바로 그 일을 하라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된 사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대부분은 저의 생각, 뜻과는 달리 적당주의를 원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을 멀리하고 그냥 적당, 적당하게 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여러분의 뜻대로 적당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고 또한 여러분들에게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짖는 소리’ 만 하고 지나칠 것이 아니라, 참된 진실을 이야기를 하고 싶단 그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 진실된 사랑의 역사를 쓰십시오…
처음에 말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했는데, 두 가지 의미로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씀 드렸고 두 번째는, 서양 언어에서는 ‘word’ 라는 말이 대문자 ‘Word’ 가 되면
말씀이 됩니다. 즉, 주님의 말씀으로 표기됩니다. 이 의미로운 주님의 말씀을 묵상합시다.
우리가 하는 말 뿐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성서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고
또한 실천하도록 애씁시다. 여기, 성서를 자주 읽고 묵상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분들이 더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가정 한가운데에 독서대를 만들어 성서를 펴놓고, 오며 가며 가족 구성원들 모두 그날의 말씀이나
펼쳐진 성경 구절을 읽고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으로 인해, 우리 생활 공간의 중심에서 보이지 않는 성화의 기운이 넘쳐나길 바랍니다.
제발 성서를 펼쳐놓으십시오. 펼쳐놓지만 말고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키도록 노력하십시오. 현실화(Realizing)시켜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바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복음서의 말씀을 읽으시고,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서운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신께서 내가 읽은 이 말씀을 실천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실현하셨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모두 불사르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대로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고, 우리 죄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으시고
이룩하셨습니다. 곧 현실화(Realizing)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도 늘 이 말씀을 묵상하시던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최후의 말씀을 현실화시키시려는 그 분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늘 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생명의 말씀인 성서를 늘 가까이 하시고, 그것을 현실화 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늘 이것을 해야 합니다. 오늘 돌아가셔서 이 루카복음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그리고 말을 의미 있게 쓰고, 의미 있게 사는 연습을 하도록 합시다. 생명의
말씀을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한주간을 살다 보면, 우리의 삶은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마치 벼락치듯 그렇게 하느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그런 노력들 없이 방언을 한다거나, 병을 낫게 한다거나, 희한한 일을 벌리는,,,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주에 어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니 쫓아갑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건 우리에겐 필요 없습니다.
왜? 우리들은 이미 넘치도록 큰 은총을 받고 있고, 그것을 현실화시킬 숙제만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하면 됩니다. 우리 모두 그런 노력을 기울이며 진지하게 살다 보면, 그분을 참으로 올바로 뵙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믿습니다.
한주간 그 확신 속에서, 그 믿음 속에서, 은총의 말씀 안에 살아가는 복된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