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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가 진상용 원문보기 글쓴이: 진상용
추상표현주의(抽象表現主義 : Abstract Expressionism)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는 1919년에 O.헤르초크가 독일의 표현주의 잡지 《슈투름(폭풍)》에서 추상적인 표현주의를 구상적인 그것에 대치해서 사용한 것이다. 그 후, 미국에서 알프레드 바 2세가 웰스리대학의 강의(1929)에서 ‘칸딘스키와 독일의 추상표현주의’ 라고 했고, 그가 조직한 큐비즘과 추상예술전(1936)의 카탈로그에서 칸딘스키를 가리켜서 사용하였다. 그 후 1940년대에 《뉴요 커》의 기자 로버트 코츠가 이 용어가 부적당하다는 견해를 나타내어서 비평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란 술어를 대신 썼고, 또 막연히 뉴욕파라는 명칭이 쓰이기도 했다. Tashisme. Abshaction LWique. IJormel Art, Action Painting 따위가 이러한 명칭으로도 불려지고 있는데, 형식적으로 추상미술의 계보에 놓이지만 이십세기 초반에 보이는 기하학적 추상과는 이질적인 것이다.
새로운 미술은 그 시대의 사회적 변화에 따른 의식의 변천으로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 유럽문화의 모방과 연장이었던 미국의 정신문화는 양차 대전 중 유럽의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화가들과 부를 이룩한 미국의 문화적 위약을 보강하기 위해 미국적 양식을 주장하는 평론가들에 힘입어 20세기 후반부터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미술은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함으로써 독자적인 미국적 양식을 주장함에 이르른다. 그리고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써 연방미술정책(Fedral Art Project)이 미술을 공동체의 일상 생활과 통합시키기 위해 결성된다. 벽화작업은 공공작업을 통한 노동의 수요와 미국적인 미술의 한 특징을 짓는 계기를 마련한다. 멕시코의 리베라 등이 추진한 벽화의 영향으로 큰 규모의 초대형회화의 캔버스가 생기는 계기가 된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정부의 관심과 미국에 형성된 작가들의 자각이 함께 어울려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미국적인 주체성은 확보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고대 신화나 원형적이 의미, 또는 원시미술 특히 인디언의 제의에서 비롯한 숭고함과 비장감을 자신들의 이념을 세우는데 기꺼이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초현실주의 영향으로 원시적 주제에 의한 오토마티즘으로 연결된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미국 미술, 특히 추상표현주의에 있어 회화표현의 본질은 인간내면의 정신성에 두었으며, 그 표현양식으로써는 행위 추상과 색면 추상으로 나타났다. 그려지는 이미지보다도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주장하여 격렬함이나 생명감의 긴장이 강조되는 행위추상에서 화면은 현실적인 또는 상상된 대상을 재현하고, 재설계하고, 표현하기 위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행위하기 위한 장이 되었다. 즉 행위 추상은 자기창조, 자기 한정, 또는 자기 초월과 관련이 있으며, 행위는 넓게 뻗은 팔길이 만한 필획에 의해 충돌점에서 빚어지는 물질화된 속도화 에너지 자체이고, 표현 행위는 부단한 정신적 긴장에 의해 논리화 되었다.
추상미술이라 하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모든 조형예술 속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문양을 그 源流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 내재하는 일반적 능력으로써 이러한 문양화를 창조능력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 추상미술 존재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추상미술은 입체주의(Cubism)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와 같은 하나의 경향을 주장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미술이 갖는 內的 必然性에 의해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몬드리안(P. Mondrian)과 같은 기하학적, 구성적, 지적인 경향, 말레비치(K. Malevich)와 같은 신비주의적, 금욕적 경향, 칸딘스키(W. Kandinsky)와 같은 본능적, 표현적 경향 등은 내적 필연성에 의해 주어진 각각 다른 성향인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차가운 추상계열의 색면 추상과 뜨거운 추상의 액션 페인팅이다. 액션 페인팅은 잭슨 폴록과 윌리엄 드 쿠닝으로 대표된다. 잭슨 폴록의 회화 세계는 1948년 융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신화, 상징이 주요 개념으로 작용하고 원시미술에 주목을한 신화시기를 거쳐 48년 이후 액션 페인팅 시기에서 완숙하게 된다. 원시미술은 미국인으로서의 지각과 주체성, 유럽에 대한 의식 사이의 결정적인 수단이자 요인이었다.
전후 미술의 두드러진 특징은 뉴욕을 중심 무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인데 1930년대 미국의 예술계를 주도하던 미학적 관심은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변동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29년의 경제 침체, 대외적으로는 나치즘의 등장과 스페인 내란, 모스크바 분쟁, 나치-소비에트 불가침 조약,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의 유발 등이 사회적, 정신적 불안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 하에서의 미국 미술의 주된 양식들은 여전히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와 지방주의(Regionalism)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의 매너리즘, 조잡한 삽화나 진부한 반복, 부정직한 주제 등에 혐오감을 느낀 미국 미술가들은 때마침 물밀 듯 밀려온 유럽 추상미술을 환호하게 되었다.
특히 R.코츠가 H.호프만(1932년 이후 피카소의 드로잉과 마티스의 색채수업, 예술의 사회적 목적보다 자율성 주장)의 전람회명(1946)에 추상표현주의를 전용한 이래 미국의 화가에 적용하게 되었고 일반화된 것은 40년대 후반∼5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프란츠 클라인, 폴록, 뉴먼, 로드코, 스틸, 윌렘 드 쿠닝, 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윌렘 드 쿠닝은 1948년 흑백회화를 충격적으로 전시하여 등장한다. 드 쿠닝은 자유롭고 거의 광란적인 붓질로써 격정적인 모습의 형상에 집중한다. 그의 유명한 <여인 연작>은 오만하고 비속한 여인을 그린다. 폴록의 회화가 고상한 추상의 고뇌라면 그는 속물적인 근성과 블랙 유머러스한 조소를 담은 형상적인 것을 담는다. 그에게서 형상은 이미 재현을 떠났으며 그는 인체에서 찾을 수 있는 격렬함과 폭력을 형상의 과정적인 붓질로 제시하는 것이다.
잭슨 폴록의 푸어드(poured:그림물감을 뿌리듯이 그리는 방법)와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색면회화 : Color-field Painting)은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과 ‘바탕’의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점, 올오버(전면을 덮는),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그림이라는 점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후에 M.루이스의 작품에 의해 계승, 통합된 이 용어는 D.스미스를 중심으로 금속을 소재로 한 조각에도 사용되었다.
한편 미술 컬렉터였던 페기 구겐하임도 도미하여 '금세기 예술'이란 화랑을 경영하였는데, 이 곳에서 화가 지망생들 간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그후 미국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미국 전위미술의 중요한 산실이 되었다. 1943년에서 1946년의 기간동안에 잭슨 폴록, 한스 호프만, 로버트 머더웰, 마크 로드코, 클리포드 스틸 등의 개인전이 이 화랑에서 계속해서 열렸다.
유럽에서의 추상표현주의자로서는 장 포트리에, 장 뒤뷔페 등을 선구로 들 수 있다. 이들에 있어서의 마띠에르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물감을 두껍게 발라 올린 화면을 긁거나 파는 것처럼 그렸다. 포트리에는 석고나 석회를 굳게 화면에 발랐으며. 뒤뷔페는 물감에 모래나 유리조각 같은 것을 섞어 두껍게 발랐다. 이들은 마띠에르란 물질성을 강조한 것이고.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습관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라는 점을 강하게 의식했다. 마띠에르를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동향을 미치에르 다비에는 '앙포르멜'이라 이름붙였는데, 이것은 추상미술의 새로운 전개가 아니라 실로 '또 다른 예술(L'artautre)' 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약동적 필촉과 거친 마띠에르의 비구상화가 오십 년대의 유럽 미술을 의미했다. 오십 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행위 마띠에르의 원초적 관계가 고정화되어 신선함을 많이 잃게 되지만. 기왕의 회화이념을 탈피. 육십 년대 회화의 새 장을 열었다.
미국은 미국 나름의 독자적 세계를 개척했는데, 잭슨 폴록은 그 대표적 작가다. 그는 멕시코 벽화의 또는 비유럽적 프리미티브 아트라 일컬을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바닥에 큰 화폭을 놓고 그 주변에서부터 물감을 흘려 그리는 드리핑 페인팅을 시도했다. '나 자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회화의 일부가 된 느낌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는 회화가 화가의 자아표현이라는 기왕의 관념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액션 페인팅"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화폭은 현실이나 사용의 대상을 재현. 구성, 분해, 표현하는 공간이 아니고 행위를 위한 경기장 같이 보인다'고 말했다. 종래의 회화와는 근본적인 이질성을 지적하여 이를 액션 페인팅이라 부른 것이다.
또한 추상표현주의에 있어서 오토마티즘(Automatism)은 초현실주의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성에 의한 통제가 없는 것"이 아닌 "의식의 조정을 거치는 자발성의 표현방법" 이라는 새로운 조형의식으로 나타난다. 로젠버그에 의하면 표현으로서의 공간을 모두 행위하는 場과 사건이라는 하나의 시간 속에 회화를 흡수시킨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스케치나 데상의 개념을 수정하고, action으로써의 동일성을 가지며 행위의 회화는 예술과 생활사이의 모든 구별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즉 새로운 회화는 한 마디로 행위의 흔적으로써 작품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행위의 결과로써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Action Painting이라고 붙여진 호칭은 추상표현주의 보다는 훨씬 더 본질을 파악한 용어이었으며, Action Painting은 사건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린다는 행위의 연속을 말하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 제작 방법은 누구보다도 폴록의 방법이 우수한 Action Painting이라고 로젠버그는 주장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195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추상회화·조각전"을 계기로 강력하고 주도적인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951년부터 1961년 사이에 이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세계 각국으로 파급되었다. 1940년대 와 1950년대에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던 작가들 중에서도 이 경향으로 화풍을 바꾼 경우가 많았다. 본래 추상표현주의자는 폴록, 뉴먼, 로드코, 스틸 뿐 이었다. 이에 대해서 호프만, 고르키,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등은 다른 경향의 작가들이다. 왜냐하면 로젠버그가 지적했듯이 형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들어와서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아쌍블라쥬 예술이라는 국제전이 개최되었는데. [아쌍블라쥬(집합, 조럽)J란 용어는 뒤뷔페가 처음 사용했다. 명칭에서처럼 기성품, 폐품, 가공품, 기타 여러가지 물체를 긁어모아 만들어낸 전시회이다. 그리는 대신 긁어모은다는 행위까지 확대된 것이다. 현대 도시문명의 생활 양식이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누보레알리즘 흑은 팝 아트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이 경향은 주관적이며 유동적인 추상예술로부터 떠나서 환경과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한 것으로 해프닝과의 관련도 주목할 만하다. 잡동사니 물체로서의 작품에 관객이 끼어 든 삼차원의 살아 있는 아쌍블라쥬는 해프닝에서 말하는 환경과의 새로운 결합과 유사한 것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운동은 1960년을 그 정점으로 폴록, 클라인, 로드코, 톰린, 바넷 뉴먼, 라인하트 등이 차례로 작고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남은 작가들, 드 쿠닝, 머더웰, 필립 거스튼, 고틀리브, 스틸, 브룩스, 마카렐리 등은 그들의 이미지를 더욱 확대해 나갔으며 프랑켄살러, J.존스 등의 네오다다이즘, 팝 아트 등을 거쳐 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추상표현주의에 갖는 의의는 피상적으로 미국미술의 국제화 분위기의 최조의 반영이자 미술메카로서의 상징적 첫발이다. 또 내용면에서는 추상이되 그 내용이 갖는 주제성은 몬드리안의 추상이 추구한 신지학적인 질서와 다른 철학적인 성찰이 따른다. 그것은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작가의 실존적 문제의 적나라한 과정이 모두 공개되면서 고민의 흔적을 대중이 함께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는 매우 지적인 미술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기하학적 추상
기하학적 추상의 뿌리는 세잔느의 탐구적인 정물화나 풍경화,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최초의 진정한 기하학적 추상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장방형으로 1913년경 카시미르 말레비치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는 이어 일련의 보다 복잡해지는 기하학적 構圖를 그려나갔으며 원이나 사각형, 경사진 장방형, 평행사변형, 그리고 사다리꼴들은 非대칭적으로 그리고, 대각선 위치에다 정리 배치했다. 말레비치는 기독교적인 신비주의자였고 그가 1915년에 절대주의자라고 부른 그의 미술은 모두 외부세계의 모방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느낌에 관한 것이었다.
말레비치의 개념은 1920년대초 엘 리시츠키를 통해 西유럽에 전달되었는데 西유럽에서 피에트 몬드리안, 테오 반되스버그, 그리고 데스티일派로부터 나온 유사한 기하학적 개념과 통합되고 바우하우스에서 회화敎科의 핵심을 이루었다. 기하학적 추상은 바우하우스의 화가, 교사들에 의해 그후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리스즐로 모홀리스나기도 1937년 시카코에서 新바우하우스를 열었고 조세프 앨버스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블랙마운틴大와 예일대학에서 색채와 인식 이론을 가르쳤다. 또다른 전달자인 몬드리안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5년(1940~44)을 뉴욕에서 보냈으나 그의 名聲은 대단하여 1930년대에 버고인 딜러같은 몇 안되는 견실한 미국 기하학적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기하학적 스타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그 회화적 表面 밑에는 기하학적 구조가 깔려있다. 더욱이 추상표현 前의 기하학적 추상과 1960년대의 '하드 에지'파, 변형된 캔바스, 옵 및 미니얼派 사이에는 수학적인 체계나 원, 장방형 또는 사각형 같은 기본적 형태들을 공통적으로 사용한다는 명백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나 밀도 있게 느껴지는 원래의 정신적 내용은 일반적으로 後期작품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끝으로 1980년대의 新기하학파 미술가들이 있는데 그들도 컴퓨터의 최소한을 바탕으로 기하학을 형성하는 피터 헬리 같은 작가들이다.
형태적 추상
이 형식의 추상은 아르프, 마송 및 미로의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우연 또는 다다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적 드로잉 방식에서 연유되었다. 이는 특히 1930년대에 유행했고 이때 이들에 의한 有機的탐색에 피카소, 칸딘스키, 브랑쿠시 및 마타 등이 합류했다. 변형되는 아메바같은 형태나 덩굴손 모양의 선, 그리고 환각적인 색채가 애욕적, 植物性的, 그리고 꽃이나 水草를 연상시키는 유형의 構圖를 위해 사용되었다. 아쉴 고르키가 뉴욕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제일 먼저 사용했으나 곧이어 초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된 바시오레스, 고틀리프, 스틸, 폴록, 그리고 로드코 등이 이에 참여했다.
고르키 ( Arshile Gorky : 1904.4.15~1948.7.21 )
미국의 화가. 본명은 Vosdanig Manoog Adoian. 아르메니아 출생. 15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디자인 및 공예를 배우고, J.미로의 작품과 R.마타, A.콜더 등과 알게 되어 초현실주의에 접근하였다(1929). 한때 W.데쿠닝과 아틀리에를 쓰면서 유기적인 추상양식을 확립하였다(40). 자연물의 원형을 조합하여 내적인 세계를 표현한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이다. 만년에 화재와 교통사고의 불행이 겹쳐 자살하였다.
그는 세잔느(Paul Cezanne)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관찰한 뒤 입체주의를 연구했고, 1930년대에는 피카소(Pablo Picasso)에 매료되어 그는 초현실주의를 향해 방향전환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날 무렵에는 보다 대담한 탐구를 시작했다.
고르키가 갖는 특이한 이미지에 대한 표현은 은유와 연상이 과장되고 야릇하고 부드러운 유기체를 가지며, 깊고 어두운 가는 틈, 얼룩거리고 흐물거리는 신체부위 등의 표현은 미국에서 가장 초현실주의에 밀접하게 접근하였다. 그가 큐비즘에서 배운 구성적이고 구도적인 것에 대한 기본 개념은 그의 후기 미술에까지 지속적으로 남아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그의 이미지들은 '생물형태학적 형상'의 성격을 갖는데, 이는 고르키의 큐비즘에 대한 재해석이며, 초현실주의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큐비즘과 초현실주의의 옛 거장들에 대한 모방과 창조의 과정을 통하여 큐비즘의 이성적 요구와 초현실주의의 비이성적인 꿈을 결합함과 동시에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이루어진 정확한 스케티에 있어서 추상표현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즉 과거의 거장들과의 접촉으로 자신의 예술적 기둥을 세웠고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하여 자연을 구상에서 자신의 예술적 기둥을 세우고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하여 자연을 구상에서 추상으로, 외부세계에서의 영역에서 내부의 상상력으로 이동한 기억과 추상을 통하여 여과하였고, 심리적 드라마를 표현하는 장으로써 자연을 창조하였다. 그는 그의 아르메니아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시적인 은유로 자연과 융화하여 독특한 새로운 영역의 예술을 창조하였다.
고르키의 독특한 형태는 자연계에서 유래한 것이 많고 그 현상들은 때가 되어 봉우리 맺어지고 꽃피고 결실 맺는 것과 같은 자연의 섭리를 암시하고 있다.
고르키는 그의 회화 세계에 대한 '놀랄만한 정서적 섬세성'이라는 평론을 들을 만큼 섬세하고 예리하게 자연을 통하여 화가의 심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고 이러한 심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연을 시적 암시로 다루었으며, Automatic 기법을 사용하여 관람자들로 하여금 혼성물적인 인상을 받게 하였다. 이 Automatic 기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한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의 독특한 형태들은 자연계에서 유래할 뿐이고 그가 자연을 심화시킬수록 그림은 특정한 모티브로부터 떨어져 나와 특정대상이 아닌 화가의 심리적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