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식민정책의 전환과 민족운동
1. 식민정책의 전환
(1) 문화정치의 표방
일제침략자들은 식민통치의 책임자인 총독을 현역대장으로 임명하여 정식군복에 각종 훈장을 패용하여 한국민을 위협하는 살벌한 분위기 마저 느끼게 했었다. 그러나 문화정치기에는 총독을 민간인도 임명 가능하게 개정했으며 군인총독이더라도 민간인 복장에 미소까지 띠면서 유연한 표정으로 총독으로 부임했다.
3․1운동 이후에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또(齋蕂)는 부임하면서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문화적 제도의 혁신으로 조선인을 유도하여 그 행복과 이익의 증진을 도모한다고 천명했다. 그는 해군대장이였으며 이후 임명된 총독으로 민간인 출신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총독을 민간인으로 임명할 수 있다는 규정이 얼마나 허구였는가를 보여 주었다.
다음으로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경찰에게 치안을 맡겼다는 점이다. 헌병대신 경찰로 대체하여 치안을 맡겼다는 것은 우리 국민을 군대식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경찰은 번쩍거리는 칼을 차고 위압적으로 국민을 대했으며 치안과 위생 및 질서를 유지한다고 하여 국민들을 위협하고 엄중하게 다스렸다.
그리고 관리나 교사들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던 제도를 그만두었다. 또한 한국인에 대한 대우에 있어서는 교육수준을 일본인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고 표방하여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으나 학생의 대부분은 일본인이 차지하고 조선인은 친일지주나 일본의 앞잡이들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조선인의 입학은 극히 제한되었다.
그리고 총독부의 관리에 한국인도 등용했으나 극소수에 그쳤고 면에나 군에 서기로 한국인을 채용하여 그들의 통치에 활용하였으며 한글신문도 허가했으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글신문이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느냐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조했느냐 하는 문제는 언제나 논의의 대상이며 시각의 차에 의해서 평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제침략자들의 문화정치는 몇 가지 달라진 내용도 있지만 그것은 결코 식민통치의 완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유를 통해 한국인의 반발을 줄이고 보다 철저한 탄압과 수탈을 위한 기만정책에 불과하였다. 총독에 민간인을 임명할 수 있다는 규정은 한번도 지켜지지 않았고 헌병대신 치안을 맡은 경찰은 그 조직과 인원이 대폭 증가하여 한국인에 대한 감시와 억압이 더해졌고 이에 따라 감옥이 증설되고 사상범도 증가하였다. 한국인의 총독부 관리 임용도 형식에 불과했고 학교가 증설되었지만 3개 면에 1개의 보통학교가 개설되었다. 이것도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하수인을 양성하기 위해서였고 일본인과의 차별교육도 여전했으며 민족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극심한 언론통제로 기사의 삭제, 압수, 정간, 폐간 등이 계속되었다.
결국 일제의 문화정치는 기만적 탄압정책으로 일본통지의 본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오히려 더욱 그 심도만 깊어갔던 것이다.
(2) 식량의 약탈
일제침략자들의 식민통치 제2기는 산미증산계획을 추진하여 한국에서 쌀을 증산하여 일본으로 유출시켜 일본인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어 갔다. 일제는 쌀을 증산한다는 명분 아래 산미증산계획을 시행하고 자기들이 필요한 만큼의 쌀을 증산량에 관계없이 수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이러한 쌀의 강탈은 곧 우리농민생활의 파탄을 가져 왔다. 식생활에서 쌀 소비량을 보면 일본인은 1인당 년 1.2석을 소비하는데 반하여 한국인은 0.4석에 불과하여 일본인의 쌀 소비량에 비하여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식량부족을 메꾸기 위해 만주로부터 옥수수, 콩, 등의 잡곡을 들여 왔으니 자기가 생산한 양질의 쌀은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만주에서 생산된 옥수수, 콩, 조 등의 잡곡으로 굶주린 배를 채웠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농민생활의 급격한 궁핍화에 따라 많은 농민은 영세한 자작겸 소작농이나 소작농으로 전락되어 갔고 한편으로 많은 토지가 일본인에게 점탈되어 갔다. 가령 장성의 경우만 하더라도 1931년 현재 일본인으로서 50정보 이상의 대토지 소유자는 다음에 든 바와 같이 일곱이나 헤아릴 정도였다.
장성에서 50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명단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세천농장(細川農場), 덕천농장(德川農場), 고교농장(高橋農場)
전중농장(田中農場), 길전직량(吉田直良), 부등(富藤)
한편 장성군의 농민이 얼마나 영세화되어 갔는지 1931년 현재 계층별 농가호수를 살펴보면 다음 <표 231>과 같다.
<표 23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 소작이 전체의 약 60%에 이르고 있고 자작겸 소작까지 합치고 보면 전체의 약 92%나 된다.
<표 231> 장성군 계층별 농가호수
지주 | 자작농 | 자작 겸 소작농 | 소작농 | 합계 |
392 | 941 | 4,854 | 9,113 | 15,200 |
위와 같이 격증된 소작농들은 생산고의 50%가 넘는 소작료 외에도 비료대, 수세, 지세, 곡물운반비 등을 부담하였으니 그 생활은 파탄상태가 될 것이다. 이에 일부는 화전민 또는 유이민이 되었지만 많은 농민들은 살기 위해서 싸워야만 했다. 즉 일본인 지주들의 횡포나 수탈에 대해서 일방적인 소작권 이동을 반대하고 소작료의 경감을 요구하는 소작쟁의를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작쟁의는 농민들의 생존을 위한 심각한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항일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러한 농민의 항일운동은 비단 소작농만이 아니라 지주들에 의해서도 전개되었다. 가령 장성군의 경우를 보면 일제침략자들이 주민의 의사에 반하여 수리조합을 만들고 조합이 일방적으로 수세를 결정한데 대하여 장성 황룡면 수리조합관계 지주들은 황룡면사무소에서 총회를 열고 수리조합의 해산과 조합비 거부를 결의한 후 끝까지 저항했던 것이다.
한편 장성읍의 독립운동지도자 정선유도 수세불납운동에 참여 한 바 있거니와 또한 농민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인촌의 방직공장에서 생산한 광당목이라든가 별표 고무신 등을 공장도 가격으로 매입해다가 염가로 농민에게 제공하는 가운데 농민운동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3) 산업의 침투와 자원의 약탈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대외무역은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그것은 일본에 의한 무역독점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1910년의 경우 수출의 77% 수입의 64%가 일본과 교역한 것이었으며, 1919년에는 수출의 90% 수입의 65%를 대일무역이 차지했다. 1920년대에는 한일관세제도 마저 철폐함으로써 일본과의 무역량이 더욱 증가하였고 따라서 무역의 대일의존 역시 더욱 심했다.
그 뿐 아니라 무역의 내용에 있어서도 수입품은 일본에서 제조된 일용품이 수출품은 한국에서 생산된 원료나 식료품이 각각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이는 한국이 일본의 상품시장 및 원료공급지로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한편 1차 대전의 전쟁경기가 지나가자 일본 자본가들은 한국을 투자 시장화하는 가운데 불경기를 타개하려했다. 장시간 노동과 저렴한 임금이라는 노동조건과 값싼 자원은 유리한 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자본의 진출이 차츰 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침략자들은 1910년에 내렸던 회사령을 1920년에 폐지하여 회사설립이 허가제에서 계출제로 고쳐서 일본자본의 진출과 일본인 회사설립을 활발하게 했다. 장성군의 1931년 현재 일본인 회사를 살펴보면 다음 <표 232>와 같다.
<표 232> 장성군의 일본인 회사
소재지 | 회사명 | 사장 | 사업내용 | 자본금 |
장성읍 영천리 | 장성합동운송주식회사 | 길전(吉田) | 운수, 창고, 금융, 자동차 | 10만원 |
사거리 | 사거리 합동운수합자회사 | 유생(柳生) | 운송, 보험대리, 금융중개, 물품위탁매매 | 1만원 |
장성읍 영천리 | 주식회사 환육상점 | 진전(津田) | 장유, 양조 판매, 금융, 물품 판매, 보험대리업 | 5만원 |
반면 한국인에 의해서 설립된 회사를 들면 다음 <표 233>과 같다.
<표 233> 장성군의 한국인 회사
소재지 | 회사명 | 사장 | 사업내용 | 자본금 |
장성읍 영천리 | 장성곡자주식회사 | 유인수 | 곡자제조판매, 곡자원료구입판매, 금융, 토지임대 | 2만원 |
사거리 | 남선흥업주식회사 | 성진영 | 토지개간, 수리사업, 금융 | 50만원 |
사거리 | 오가식산주식회사 | 전동섭 | 동산 및 부동산 매매, 영농, 금융, 운송, 보험대리업 | 10만원 |
이와 같은 일본자본의 계속적 침투는 필연적으로 민족자본의 성장을 저해하고 일본자본주의의 한국지배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장기간 노동으로 혹사하고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동쟁의를 전개하기도 했다. 장성에서는 1925년 6월 13일에 장성노동조합을 창립하고 같은 해 12월 9일에는 장성정미노동조합이 창립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든가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는 노동쟁의를 전개하면서 자본가의 횡포에 끈질긴 저항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생존권투쟁인 동시에 항일민족운동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4) 민족실력양성운동
거족적인 3․1운동의 전개는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하였으니 그 하나가 민족실력양성 운동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소위 문화정치라는 기만적인 유화국면으로 접어드는 틈을 이용하여 우리민족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사회, 문화, 경제의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한글신문인 동아일보과 조선일보는 언론을 통해 국민교육과 민족계몽에 앞장섰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각종 문화, 체육행사를 주최하여 사회, 문화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들 신문들은 1933년에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국민들에게 홍보하여 한글 보급에 압장섰다. 그리고 1936년에 동아일보가 베를린 올리픽의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살하여 보도한 사건은 당시 언론기자들의 민족적 항일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민립대학설립운동은 1920년에 이상재 등이 일제의 차별교육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의 대학을 세우기 위해 설립했는데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총독부의 방해로 결국 실패하였고 오산학교,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을 대학으로 승격시키려 했으나 당국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또한 종교계의 민족운동도 활발했으니 천도교에서는 제2의 3․1운동을 계획하여 1922년 3월 1일에 자주독립선언문을 발표했고, 문화운동에도 참여하여 1919년에 개벽사(開闢社)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인 「개벽」과 「부인」, 「어린이」, 「학생」 등을 발행하여 민중의 자각과 근대문물의 이해에 이바지했다. 불교계에서는 한용운이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하여 친일승려의 배척과 일본불교의 침투저지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근대적 교육기관(동국대의 전신)을 설립하기도 했다. 기독교계는 민족교육운동과 각종 문화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신사참배에 저항하여 폐교되거나 순교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다. 그 밖에 대종교는 만주 등지에서 전개된 독립군투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원불교는 장성의 이웃인 영광에서 창시되어 개간사업과 저축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역량을 배양하는 데 노력하였다.
경제계에서도 한국 경제인들에 의해서 민족산업의 육성과 민족자본의 형성을 통한 경제자립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한국인이 경영하는 기업들이 생겨났는데 그 가운데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찬했던 대기업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영세기업들이었다. 당시의 민족자본은 일본의 재벌들에 대항할 수 없는 미약한 것이었고 민족적 뒷받침이 없이는 성장하기 어려웠다. 이에 민족산업의 육성과 경제자립을 위한 대중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한말의 국채보상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1923년에 조직된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자급자족, 국산품애용, 소비절약 및 금주, 금연 등의 운동을 전개했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