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태: 색소폰
소 몰던 아버지
콩밭 매던 어머니
산딸기 따던 어린 누이
나란히 꽃속에서 걸어나온다
그리움이
패랭이꽃으로 피었는지
여름 들판이 지천으로 환하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즐겁다. 뜨락에 붉게 물든 패랭이꽃 만끽하면서 색소폰과 더욱 친해졌기 때문. 봄부터 날마다 색소폰을 불었다. 모악산 기슭에 터 잡은 나만의 공간에서 연습한다. 이름 모를 산새 지저귐은 맛깔스런 풍류다.
아파트에서는 연주가 매우 곤란. 색소폰 소리가 너무 큰 탓. 방음장치가 신통치 않은 상황에서 색소폰은 지독한 소음이다. 아무튼 희망원에 가면 마음과 머리가 맑아진다. 새들은 즐거운 노래로 반기고 나무들은 살랑살랑 몸짓으로 파란 손짓한다. 이토록 환대하니 어찌 희망원 오기를 주저하리오.
색소폰은 서양 목관악기다. 간혹 금관악기로 오해하는 경우는 몸체가 구리판으로 제작되기 때문. 하지만 리드가 아프리카 갈대잎으로 제작되므로 색소폰은 어엿한 목관악기다.
사실 나는 악기와 거리가 먼 사람. 청소년 시기 기타에 도전했다가 당시 유행하던 가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한 곡으로 접었다. 손가락도 아프고 음악적 감각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음이다. 재간 있는 사람은 코드 몇 가지만 익히면 쿵짝짝 연주도 잘 하던데 나는 어림없었다.
기타를 포기하고 얼마 뒤 전자오르간에 도전했다. 악보대로 건반을 누르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주 넣는 왼손이 따라주지 않아 포기. 그렇게 악기와 인연은 꽤 오랜 기간 끊어져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연주하는 색소폰 소리에 반해 알아 보니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부담스러운 가격에도 불구 프랑스제 알토색소폰을 즉시 구입했다. 손가락으로 키를 누르며 ‘도, 레, 미, 파, 솔, 라, 시’를 부는 것이어서 간단한 동요는 그리 어렵지 않게 연주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가곡이나 가요 팝송 등을 악보 없이 제대로 연주하고 싶어 개인 레슨 강사를 섭외했으나 간단치 않았다. 눈빛을 교환할 수 없어 힘들겠단다. 소리만 듣고도 충분할 것인데. 오히려 소리만 듣는 내가 더 유리할 수도 있는데. 다른 연주자들은 박자를 세지만 나는 귀만으로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바로 알아챌 수 있는데. 남들처럼 눈으로는 못해도 마음으로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는데.
곡절 끝에 교습이 시작되었다.
점자 악보가 필요했다. 내가 악보를 직접 점역했다. 점역이란 '말이나 보통의 글자를 점자로 고친다는 의미다. 틈만 나면 악보 짚어 가며 연주에 몰입했다.
절대음감 높이려고 음악감상도 자주 즐겼다.
"쇼팽의 '녹턴'을 감상할 때면 내면의 슬픔이 가득 담겼고, 멘델스존 협주곡 3악장은 즐거움이 넘쳤다. 생상의 '카프리스'는 설렘으로 가슴이 쿵쾅거렸다.
음악은 감정을 녹여내는 도구다. 아픔도 설움도 기쁨도 슬픔도 얼마든지 녹여낼 수 있다. 내가 색소폰을 부는 이유는 다른 이들의 감정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다. 아픔을 위로하고, 슬픔을 보듬고자 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색소폰을 배우는 게 즐거웠다. 입술과 양볼이 얼얼하고 숨통을 대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도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하루 다섯 시간이나 연습에 매진해도 마음에 새긴 목표 덕분에 힘든 줄 몰랐다.
정원 원두막이나 바위에 걸터앉아 색소폰을 불면 내가 한 마리 새가 된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특히 정원은 울림이 있어 좋다. 색소폰으로 마음을 울리고 영혼을 울리길 기도한다. 작은 소망이 울림으로 크게 결실하고, 큰 아픔이 울림으로 사리지길 기도한다. 그리운 얼굴 때문인지 오늘 색소폰은 내 가슴을 울린다. 붉게 피어난 패랭이 때문인지 오늘 색소폰은 들판에 환하게 울린다.
색소폰 /송경태
나는 새들을 좋아한다
흐린 날이나 맑은 날이나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나는 새 소리를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이
꽃을 빚을 때 나던 소리 같기 때문이다
나는 새가 되고 싶다
언제나 맑은 소리로
노래 부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울창한 숲에서
색소폰으로 노래하는
이름 없는 한 마리 작은 새다.
2021.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