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학 계간평>
시간적 세계와 경험적 간극이 주는 자아의 변주 / 박지현
..... 전략
뾰족한
내 안을
두드리고 두드리다
물마루 딛고 선 듯
발 구르며 우는 뜻은
당신께
접안치 못한
치사량의
내 눈물
- 김덕남 「몽돌] 전문 (시와소금』 2017 가을호)
이 작품은 단수 한 편으로 명쾌한 여운을 맛보게 한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행간 하나하나 곱씹어보게 한다. 행간의 여백을 일깨우고 두드린다. 빈틈의 여지가 없고 있는 그대로의 끄덕임도 허락하지 않은 깐깐한 공간의 부피를 느끼게 한다. 김덕남 시인은 단순하면서 빈틈없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독자에게 던져줌으로써 단수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이미 지나간 시간에 형성된 내 안의 나, '뾰족한 / 내 안을 / 두드리고 두드리다'를 만난다. '물마루 딛고 선 듯 / 발 구르며 우는 뜻은'을 통해 시적 자아와 대상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음을 본다. 현재의 시간은 일방적 시간으로 바뀌면서 현재의 시간과 지난 시간의 교차를 보여준다. 일방적으로 어찌해보고 있는 간절한 행위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을 변명하고 결코 포기할 수 없음도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자아의 행위에 어찌 보면 무의미할지 모른다. 반복적 행위는 비록 그 곳에 가닿지 못할 것이나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절실하고 간절한 행위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을지라도 지난 시간과 현재의 시간 그리고 미래의 시간에 아무리 두드리고 또 두드려도 성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변명까지 해야 하는 이 패배적 인식은 '당신께 / 접안치 못한 / 치사량의 내 눈물'임을 고백해야 한다.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있는 그대로 열어보여야 한다는 것은 거의 운명적일 수밖에 없다. 시적 자아는 '뾰족한 내 안'과 '치사량의 내 눈물'의 결과가 결국 미래의, 현재의'돌'임을 말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연마된 지난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만들어낸 경험적 자아의 '몽돌'이다.
마음이 종착인 날은 터미널로 가보자
보따리에 실려 온 고향 내음도 맡고
설렘과 아쉬움이 빚는 풍경에 젖어보자
그래도 못내 허전커든 국밥집에나 들어
소박한 허기가 부른 맑은 식욕을 느끼며
어느새 어깨에 내린 어둠까지 말아보자
마른 생도 젖은 생도 밥보다 뜨거울까
쩔쩔 끓는 국물에 눈물 다 쏟아내고
마지막 한방울까지 삼키고 돌아오자
- 류미야 「터미널 국밥집 전문 (시와소금 2017 가을호)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는 곳, 지나간 시간과 현재의 시간 그리고 오지 않은 시간이 확연히 그어진 곳, 그곳은 주로 '역'이거나 '터미널'이다. 필요에 의해서 떠나고 필요에 의해서 돌아오는 곳. 여기서 시인은 기차역보다 버스터미널에 주목한다. 만나고 떠나는 공간으로는 기차역보다는 소박한 버스터미널이 더 적합할 터이다. '마음이 종착인 날은 터미널로 가보자'라고 시인은 청유형으로 말한다. '마음이 종착인 날'은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지난 시간의 경험적 자이는 곧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저쪽' 미널'로 이동하게 된다. 중간기착지일 수도 있는 터미널은 출발이거나 도착하는 것으 로도 종착의 공간이 될 것이다. 그러니 터미널은 늘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난 시간과 현재의 시간은 미래의 시간을 견인한다. 경험적 자아는 그곳엔 '보따리에 실려 온 고향 내음'도 있고 '설렘과 아쉬움이 빚는 풍경'을 만나고 싶다. 내가 떠나지 않아도 움직이고 떠나는 타자가 있으므로 떠나고 돌아오는 설렘과 보내는 아쉬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터미널은 시간의 공간성, 공간의 시간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은 끊임없는 이동으로 현재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시인은 떠남과 돌아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생명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래도 못내 허전커든 국밥집에나 들기를 권하는 이유가 된다. '어깨에 내린 어둠까지'함께 먹어보기를 권하는 것은 그곳엔 펄펄 끓어 넘치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국밥은 생명을 생명이 게 확인시켜주는 집합체이다. 국밥집에서 '마른 생도 젖은 생도 밥보다 뜨거울까 / 쩔쩔 끓는 국물에 눈콧물 다 쏟아내고 /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고 돌아오자'하는 것은 미래의 시간을 꿈꾸기 때문이다. 시인은 터미널 국밥집에서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힘을 보았다. 반복적 어구를 써서 강조하는 시인은 지금 내 삶은 지난 시간에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현재 살아있음을 간절히 욕망함으로써 미래가 채워지기를 간절히 희 구한다. 살아 펄펄 끓고 있는 국밥집에서 생명의 재확인은 미래를 만나는 것이기 때 문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과 이미 당도한 시간, 아직 당도하지 않은 시간 속에 시적 자아 는 끊임없는 미로를 헤맨다. 때로는 자아의 존재확인을 위해 체험된 시간을 다르게 감 각하기도 한다. 시적 자아에게 일어나는 끊임없는 개인적 경험은 시간 속에 이루어지 지만 때때로 우주적 시간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지금 현재를 가꾸고 이 쩔 않희 때 자아 키감 어지 꾸고 르지 않으면 이미 지나간 시간 속에서 발견되어진 미래의 나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 불투명성을 받아들일 때 미래의 시간은 내 것이 될 것이다.
■ 박지현 1996년 ≪시와시학≫ 시 등단, 2001년 서울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아주대학교 대 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어문학과 졸업(문학석사), 지용신 인문학상, 수주문학상, 이영도신인문학상 등 수상, 시집 '그대, 빈집이었으면 좋겠네」, 「바닥 경전」 외 다수, 시조집 「미간」, 「저물 무렵의 시 외 다수, 시조평론집 우리시대의 시조, 우리 시대의 서정, 시평론집 『한국서정시의 깊이와 지평, 현재 계간 ≪시와소금≫ 부주간
- 《시조시학》 2017.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