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시> 114호(2023.7)를 들고 "살육과 영광의 땅"으로 간다.
살육과 영광의 땅
-새남터
차용국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이 충만한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비록 목숨을 걸만한 위험천만한 고난의 여정일지라도 기꺼이 그 행로를 개척한다. 김대건(1821~1846)도 그러한 인물이다. 당진 솔뫼 출신으로 15세(1836)에 모방(Maubant)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그는, 부재(副祭, 1844)를 거쳐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Ferreol) 주교에게 사제의 서품을 받고(1845.8.17) 한국인 최초로 신부가 되었다.
김대건에게는 페리올 주교가 부여한 소임을 실행할 당면과제가 놓여있었다. 그것은 페레올 주교를 조선으로 모셔 가는 일이다. 기해박해(1839.3~10)로 의주 변문(邊門)을 통한 국경로는 발각되어 막혀버렸다. 동북 국경을 통한 입국 시도는 실패했고, 서북 국경로를 통해 가까스로 입국(1845.1.10)한 그는, 서울 석정동 돌우물골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선교하면서 새로운 입국로를 모색했다.
김대건이 주목한 새로운 경로는 바닷길이었다. 그는 배(라파엘호)를 구입해서 현석문, 임성실 등과 마포나루를 출발(1845.4.30)하여 행주나루를 거쳐 제물포 앞바다로 나아갔다. 그는 서울과 상해를 오가며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기도 했고, 금강 강경 황산포를 통해 잠입하기도 했다. 그렇게 난관을 극복하고 페레올 주교를 조선으로 모셔 왔다(1845.10.12). 25전짜리 나침반에 운명을 건 서해 횡단 모험이었다.
김대건은 선교사 입국과 극동대표부와의 소통로 확보를 위한 서해 해로 개척이 시급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강 하구와 서해안 일대의 해로를 세밀하게 연구했다. 그가 그린 「조선전도」는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새로운 해로 개척을 위해 임성룡과 어선으로 위장하고 다시 마포나루를 나섰다(1846.5.14). 인천 앞바다는 조기잡이가 한창이었다. 그는 백령도 해역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상해교구로 보내는 편지와 해로도(海路圖)를 탁송하고 순위도(巡威島) 등산진에서 머무는 중에 중국 어선 감시를 위해 출동한 등산첨절제사 정기호의 검문에 걸려 체포되었다(1846.6.5).
서울로 압송된 김대건은 40차례의 포도청 신문을 받았다(1846.6.21.~7.19). 병오박해(1846.6.5.~9.20)의 서막이었다. 이때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세실(Cecille)이 군함 3척을 이끌고 외연도 앞바다에 나타나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직자(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당 신부)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영의정 권돈인 중심의 집권 세력은 김대건이 외국 군함을 불러들인 역적이라며 사형을 주청했다. 결국 김대건은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받아 순교했다(1846.9.16). 당시 그는 25세였다.
김대건이 순교한 새남터는 ‘노들’이라 불렀고 한자로 음역하여 ‘사남기(沙南基)’라 부르는 모래벌판이었다. 조선은 이곳을 군사 연무장과 국사범 처형장으로 사용했다.
근대문명의 맹아기에 조선의 집권 세력은 새남터에서 수많은 천주교인을 학살했다. 봉건지배체제에 안주하여 권력 쟁탈에 혈안이었던 집권 세력의 시야는 도성을 넘지 못했다. 그들은 부패했고, 새로운 문명의 조류를 읽어내지 못했다.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고, 답답한 현실 밖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에 눈뜨기 시작했다. 수구와 개방의 민심이 충돌하여 요동치는 격변을 잠재우기 위해 집권 세력이 선택한 정치적 희생양이 천주교인들이었다. 천주교인들을 향한 집권 세력의 칼날은 무참했다. 새남터성지 기념관에서 발행한 리플릿에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적은 글이 실려있다. 샤를르 달레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따온 글이다.
참수 사형선고를 받고 다른 신부들과 함께 서로 머리를 묶인 채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였다. 사형장은 길게 구비진 한강의 넓은 새남터 강변이었는데, 이미 군졸들은 천막을 쳐놓고 죄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도착하자마자 귀에 화살이 꽂혀지고 얼굴에 물과 회를 뿌리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치켜들고 사형장을 한 바퀴 돌았다. 마침내 선고문이 낭독되어지고, 칼을 든 병졸들이 날뛰고 소리를 외치며 돌다가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주교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졌고,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높이 군문효수로 매달았다.
신유(1801)·기해(1839)·병오(1846)·병인(1866)박해 희생자는 정확히 헤아릴 수 없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죽이고 사후에 보고토록 하였으니, 적어도 8천 명에서 2만 명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산할 뿐이다. 무려 70여 년 동안 자행된 집단 대학살의 현장, 새남터는 순교자의 피와 영혼이 떠날 수 없는 살육의 땅이었다.
그곳에 성당 대성전과 순교자 기념관이 들어섰다. 성당 대성전은 1984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1987년에 완공 봉헌식을 거행했다. 콘크리트 건축물이지만 외형은 한옥 양식이다. ‘한복의 도련선을 본 따 치마를 겹쳐 이은 겹치마를 두른 형태를 구현하였다’라고 릿플릿에 적혀있다. 건축에 관한 나의 지식은 허약해서 이 문장 이상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다. 제단에는 방오석 화백이 그린 103위의 성인 벽화가 있고, 새남터에서 순교한 9인의 유해를 모셨다. 순교자 기념관은 2006년 9월 3일 개관하여 4대 박해사와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성지 마당 사형집행장 자리에는 모래터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하단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이런 글이 쓰여있다.
삶은 순교입니다.순교는 사랑입니다.
이곳은 새남터 형장입니다
나는 발을 멈추고 이 문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문장은 외치고 있었다. 새남터에서 생명을 잃은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순교의 정신을 기원한다고, 새남터에서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발아하여 성지가 되었다고, 새남터는 순교 성인의 피가 이룩한 ‘영광의 땅’이라고.
나는 문장의 전언을 들으며 몸을 떨었다. 살육의 땅을 영광의 땅으로 일궈낸 지난한 역사는 눈물겨웠다. 나는 새남터성지를 나와 절두산으로 이어진 순례의 길을 걸었다. 해빙의 강물은 평화로웠고, 노들강변에 봄버들 새싹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