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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의 '보이지 않는 손', 미국 책임을 묻는다
오마이뉴스 김남기 2023. 4. 3. 14:58
올해 4월 3일은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제주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 한라산에서 유격대의 봉화가 울린 시점부터 1954년 9월 21일 제주경찰국장 신상묵의 명의로 포고문이 발표될 때까지 발생했다. 대략 6년이라는 세월 동안 제주도는 이 학살과 파괴·방화·약탈·기아 등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은 주로 1948년에서 1949년 사이에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로 수만 명의 제주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 시신의 숫자만 해도 최소 1만 명이 넘으며, 전반적으로 인구 1/10인 3만 명의 민간인이 무차별 민간인 학살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더 많게 추산한 경우도 있다. 미국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1949년 제주지사(임관호)는 6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며 미 정보국에 관련 자료를 전달했다고 한다("1949년 당시 제주지사, '4·3 희생자 6만명' 美 정보국에 전달", 연합뉴스, 2016.10.21일자 참고). 브루스 커밍스는 제주4.3평화포럼에서 '8만 명이 죽었다는 추정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발생한 학살로 희생된 대다수는 무고한 제주도 민간인이었고, 학살의 최소 85~90% 이상은 이승만 정권이 보낸 경찰병력과 군대, 서북청년단 등의 우익 성향 단체에 의해 자행됐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발생한 대학살에는 <국부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의 표현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다.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었던 회담이었지만
제주 4.3의 기원은 1945년 해방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이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제주도 지부를 결성했으나, 미군정이 설립되면서 이들의 친일경찰 우대 정책과 마찰을 빚었다.
해방 뒤 미군정 하에서 등용된 경찰인사의 최소 85% 이상이 일제시대 당시 친일경력 경찰이었는데, 제주도 그러했다. 1947년 3.1절 집회에서 친일경찰과의 마찰이 극대화됐으며, 이후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제주도민의 불만은 남로당의 무장투쟁과도 연계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중요한 점은 당시 남로당이 대중적 정당으로 제주도에서 상당 부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평등'과 '인민'을 강조하는 집단은 이상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고, 따라서 남로당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남로당은 단독정부 수립에 맞서 봉기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을 중심으로한 좌익진영의 봉기 뒤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세력들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병력을 제주도로 보냈다. 당시 진압군을 지휘한 김익렬은 인민유격대(남로당 조직)의 김달삼과 협상하고자 했다. 비극을 최소화시켜 평화적으로 끝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대화를 거부한 주체는 바로 미군정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 이른바 5.10 선거가 치러졌는데, 제주도는 4.3이 발생하면서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다.
미군정은 선거가 실패함에 따라 재선거의 성공을 위해 진압작전을 강화했으며,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 군사고문단과 외교관리들이 한국 정부와 군·경의 강력한 조력자로서 민간인 학살을 조장했다고 한다.
제주 출생 한겨레 기자인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에 따르면, 1947년 3.1절 집회 이후 미군정은 "제주도는 전체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의 동조자이거나 관련 있는 좌익분자들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는 우익들의 보고나, 경무부 차장 최경진의 입에서 나온 '제주도 주민의 90%가 좌익'이라는 발언을 실은 정보 보고서 등을 통해 제주도를 좌익의 근거지로 간주했다(책 126쪽).
토벌작전에 개입한 미군
1948년 제주 4.3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제주도 문제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948년 4월 29일에서 5월 1일까지 미군정의 작전명령에는 경찰병력과 군대가 어떻게 마을을 소탕할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 <4.3, 미국에 묻다>에 따르면, 1948년 6월 제주도 북촌리 집 앞 굴속에 숨어있다가 우익 진압군에 의해 붙잡힌 강서수씨의 경우 진압 현장에 있는 미군을 봤다. 아마도 우익들의 진압작전을 진두지휘했던 미군일 것이다. 아래는 책에 실린 강서수씨의 증언이다.
"밤에 숨었다가 밝아갈 때 붙잡혔는데, 나와서 보니 경찰관들이 죽 포위를 했더라고. 모자를 보니까 졸병들이 아니고 높은 놈들 같았어. 미국놈들 하고. 굴에서 나오니까 우리에게 수갑을 채워가지고 동쪽을 향해 엎드리라고 해. 사복을 입은 미국사람들은 키가 큰 놈들이었는데 세명인가 네명인가 돼. 따로 한 차를 탔으니까.
미국놈들이 '빨갱이' '빨갱이'하고 한국말을 하면서 총을 갖고 쏘는 시늉을 하는거야. 미국놈이 지시하면서 경찰관들이 같이들 막 모여들어. 우리는 경찰차에 타고 미국인들은 자기네 차에 타서 같이 제주시로 넘어갔지."
위의 증언으로 볼 때 미군은 우익 진압군과 더불어 토벌 및 학살 현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 책에 따르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제주도에 주둔한 미군들은 여전히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 발생하는 사태를 파악하며 토벌작전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미군은 연락기까지 띄워 토벌작전을 벌였다. 책에 의하면 이 시기 제주도에 주둔한 진압군은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에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미군 연락기는 중산간 지대로 피신한 제주도민들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줬다.
당시 미군 연락기가 진압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는 진압군 지휘관인 송요찬이 미군 사령관에게 보낸 추천서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송요찬은 10월 10일부터 임무를 수행한 정찰 조종사 에릭슨(Fred M. Erricson) 중위에 대해 "수차례에 걸친 제주도 정찰비행을 통해 반란군의 집결지, 사령부,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상황을 제9연대에 넘겨줘 (이들을) 진압할 수 있게 했다"고 보고했다(같은 책, 220~221쪽).
이런 사실에서 미군의 개입이 제주 4.3 당시 벌어진 학살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군 수뇌부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인식은 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을 합리화한 것을 넘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자체적으로 조사를 통해 2003년 정부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만 보더라도 "미군도 진압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어느 정도 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통해 미군의 역할을 일부 엿볼 수 있다"며, 미군의 개입을 서술했다(307쪽).
미국 정부, 민간인 학살에 책임 없나... 제대로 규명해야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 정부가 이 학살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놀랍게도 당시 미국은 제주 4.3사건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주한미군사령부와 주한미대사관 등이 본국에 보낸 각종 정보와 보고서를 통해, 제주도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위 책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제주도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 일어난 공산반란으로 최소 15000명 이상 공산주의자들이 살육되었다"고 알고 있었다(책 261~262쪽). 트루먼을 포함한 미국 지도부에게 있어 제주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이었을 뿐이었다.
제주 4.3사건에서 우리는 현재까지도 미국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그리고 후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선 이러한 역사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개입을 조명하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다.
출처; https://v.daum.net/v/2023040312180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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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 직접 ‘제주도 작전’ 내려…사령관 “내 사명은 진압뿐”
한겨레신문 2023-04-03 07:54
미군 대령의 진압 책임자 부임…경비대·경찰 통솔
정부 수립 이후 군사고문단·미사절단 등으로 개입
제주4·3이 발발한 때는 미군정기(1945년 9월8일~1948년 8월15일)다. 2003년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결론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제주도에 다녀온 진압 주체들의 책임과 함께 미군정 당국과 미군사고문단에도 책임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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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미국이 생산한 각종 문서는 미국이 4·3의 진압 과정에 깊숙하게 개입했음을 보여준다.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딘 군정장관은 제주도 민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에게 ‘제주도 작전’이라는 제목의 전문(1948년 4월18일)을 보내 경비대(국군의 전신)를 작전통제하에 두고 진압작전에 사용하도록 했다. 열흘 뒤에는 주한미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슈 중령이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함께 있던 미 6사단 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내린 ‘경비대 즉각 활동 개시’ 등의 지침을 전달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미군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10일 총선거에서 제주도 내 2개 선거구의 투표가 참여자 과반 미달로 실패하자 미군정은 같은 달 중순께 브라운을 제주도 군·경을 통솔하는 진압 책임자(최고 지휘관)로 파견했다. 그의 파견은 한달여 전 ‘미군 개입 금지’를 지시한 하지 사령관의 명령과 배치됐다. 미군 대령이 진압 책임자로 나선 것은 제주도 사태에 대한 미군의 직접 개입을 의미한다. 당시 국내 신문들은 “하늘에는 미군 정찰기, 연안에는 미군함, 육상에서는 미군 지프가 질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브라운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토벌작전을 강화했다. 경비대는 5월22일부터 6월30일까지 주민 5천여명을 검거했다. 신문들은 ‘제주도는 울음의 바다’라며 제주 상황을 전했다. 브라운 대령의 작전결과는 주한미군사령부 정치고문관을 통해 미 국무부에 보고됐는데, 엄격하게 비밀로 취급해야 하는 육군 문서 사본으로 국무부 안에서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회람하도록 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미국의 직간접적 개입을 보여주는 기록은 곳곳에 나타난다. 주한미사절단 특별대표 무초는 11월3일 국무부에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을 뿌리뽑지 못하는 (한국) 정부의 무능력으로 긴장감이 남아 있다”는 긴급전문을 보냈다. 뒤이어 11월17일 제주도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4·3 시기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이범석 국무총리에게 서한(1948년 9월29일)을 보내 “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로버츠는 초토화 작전이 한창이던 같은 해 12월18일 국무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제주도 주둔 송요찬 9연대장을 “제주도민들의 적대적 태도를 우호적이고 협조적 태도로 바꾸는 데 상당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언론과 대통령의 성명을 통해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추천한다”고 했다. 이에 국방부 총참모장 채병덕은 사흘 뒤 로버츠에게 답신을 보내 “송 중령과 미 고문관이 힘든 임무를 수행하는 데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었다”며 “로버츠의 건의에 따라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할 수 있도록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주한미사절단 관리들은 로버츠에게 “제주도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1949년 3월10일)고 했고, 다음날 로버츠는 “한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제주도 작전에 대한 강력한 서한을 보냈다”고 회신하는 등 의견을 조율했다. 이 과정에서 사절단 대표 무초 특사는 국무부에 “소련 에이전트(스파이)들이 큰 어려움 없이 제주도에 침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전문(1949년 4월9일)을 보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무초는 같은 해 10월13일 “제주도 작전이 엄청나게 성공적이어서 공산폭도들이 어떤 방식으로도 회복 불가능하게 됐다는 것을 보고하게 돼 기쁘다”고 타전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미국 관리들은 제주도 사태의 전개에 관심을 가져 제주도를 시찰하고 경찰 내 미고문관의 배치, 정찰초소 설치와 즉각적인 공격을 건의했고, 상당 부분 수용됐다.
4·3 관련 석·박사 논문을 쓴 존 메릴 전 미국 국무부 동북아국장은 “4·3은 미국 역사상 잊히고 알려지지 않은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라며 “미군은 당시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하 생략)
출처; https://www.hani.co.kr/arti/area/jeju/10862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