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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론에서본 여래장사상
序 論
1,문제제기 와 연구방법
2. 資料의 範圍
Ⅰ.如來藏思想의 佛敎史的 位置
Ⅱ, 如來藏思想의 展開
Ⅲ.『보성론』의 구조
Ⅳ.『寶性論』의 如來藏 思想
『寶性論』에 나타난 구제의 윤리
Ⅲ『보성론』의 구조
⑴ 보성론의 구성
1) 敎化品第一
2) 佛寶品 第二
3) 法寶第三
4) 僧寶品第四
5),無量煩惱所纏品第六
ㄱ) 如來藏의 3 自性
6),爲何義說品 第七
7). 身轉淸淨成菩提品第八
8),.如來功德品 第九
9).自然不休息佛業品 第十
10). 較量功德品 第十一
2)『寶性論』의 著者 成立年代
ㄱ) 智慧와 慈悲空性과 廻向
序 論
1,문제제기 와 연구방법
佛敎思想의 핵심은 心性說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는 根本佛敎에서 部派佛敎,
그리고 大乘佛敎로 발전함에 따라 心性도 많은 발전을 해왔다. 여기에 如來藏思想은
佛敎心性論의 終着點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이 如來藏思想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체계적인 이론으로써 성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經 論에 산재 되어 있다.
Buddha 에 의하면 善行과 惡行. 苦事와 樂事등 世間의 一切現象은 「心 」의
작용에 의하여 전개된다고 본다. 따라서 苦海 또는 極樂에로 나아가는 길도,
「心 」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大乘中期 에 이르르서는 苦樂.善惡등 萬行 萬有의
根源識을 論한 唯識論 과 해탈의 內的 主體로서의 「明識」을 論한 如來藏思想 이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經典의 성립역사나 그 사상의 발달로 볼 때
크게 初期,中期,末期의 3時期 로 나누어 고찰된다.
그 初期는 大乘佛敎의 형성에서부터 Ngriuna 前 까지이고,
이 시기의 사상적 경향은 원시불교의 주체격인 『俱舍論』의
「有」(三世實有法體恒存說)를 부정하는 (我空,法空) 般若 「空」思想에 의한
諸法의 實相을 고찰하는데 있었다.
大乘中期는 Ngrjuna 에서부터(無着) Vasubandhu(世親)까지이다.
이 時代의 사상적 경향은 대승 初期에서 정립된 「空 」思想에 입각하나
「空」에 집착하는 경향성(落空,滯空)을 부정하는 립장에서
「有」에도「空」에도 집착하지 않는 中道論 으로 般若「空」의 眞義를 밝히는 한편
解脫-般若「空 」의 체득-의 내적주체 의 究明에 힘쓴다. 이 단계에 등장한 사상이 如來藏思想이다.
즉 衆生心 안에 해탈의 心性으로서 如來性이 간직 되어 있다는 면과,
해탈의 내적 주체로서의 心 의 고찰에서 중생과 如來와의 등질성을 강조하고
거기에서 成佛의 근거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無 ’와 ‘空’ 의 개념을
정리해보자면 노장의 ‘無‘는 사물(有)이 그곳에서 발생하고 그곳으로 돌아가 소멸하는
시원적 환원적 실체로서 어디까지나 ’有 ‘에 대한 ’無‘로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空‘은 非有非無 라고 말해지듯이,
이른바 ’있다‘ 또는 ’없다‘ 고하는 사고형태의 양변을 초월한 것이다.
즉 有 의 범주와 無의 범주라는 일체의 한정적인
관념의 돌파 초월이 ’空 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시속은 「有」에서
「空 」으로 사상의 개념에 取,捨가 無常 했던가 本來本體에는 차별없는 덕성이나
의식전환 의 모델에는 시달림이라기 보다는 창의력있는 사고로 닥아 가게 하였다 그건
그시대의 인도 사회에서도 생태의 변화가 요구되었기 때문이였다. 불타의 입 멸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佛陀」를 절대시 하려는 동향이 일어나자 ,
그기에 반기를든 것이 般若空觀이었다.
「佛陀」라는 절대자를 만들어 거기에 속박되는 위험을 타파하기 위해서
空 만을 너무 강조한 般若空觀이 희론적멸의 차유성만으로 파악되지 않고
실천적인 행동성 으로서 표출되도록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如來藏思想이 었다.
如來藏思想은 般若空觀을근본으로 하면서, 실천적 행동을 전개시키기 위한
방편설이라고 할수 있다. 般若空觀이단순한 空無 인 듯이 잘못해석 되는 것을
막기위해서 “如來藏이 있고 말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어떤 實體로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如來藏“이 있다고 하는 것은
如來의 속성인 ”智慧“와 ”慈悲“라는”절대적가치“가 실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如來藏‘의 표현인「佛」도 또한 실제하는 가치로서 귀의의 대상으로서 강조하게된다.
물론, 여기에서 「절대적가치」가 실재 한다고 하는 것은 「佛陀」의 對機說法과마찬가지로 方便性을 띄우는 것이다.
“智慧” “慈悲”는 實際하는 가치라는 면에서佛敎의 특징이라고 말하지만, 더욱중요한 특징은 平等觀에 있다.
이 平等性을강조하여 一切衆生에게 “佛性”이 실유함을 주장하는 것이 如來藏 思想이 었다.
유신론적 종교에서는 神 과 人間과의 간격을 결코 뛰어 넘을수 없지만, 佛敎에서는그러한 간격이 없다.
또한 印度의 정통종교에서 보이는 사성제도와 같은 人間사이의 차별도 佛敎 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특히, 一切衆生이 如來의 本質을 갖추고 있다는如來藏思想은
佛敎의 平等觀의 극치라고 말할수 있다. 如來藏思想은 般若空觀의
「空」 을 根本으로한 ‘方便的 「有」 로서의 實踐的 사회사상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때, 如來藏思想은 佛敎史에 있어서, 理想과 現實을 접목시키려는의도를 지닌 思想 이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속의 종교로서의 불교의 약점인 ”사회성“을 보완시키려고,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사회교제 사상을
증장 시키려고 한 것이 ”如來藏思想“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스스로 自由롭고 타인의 自由와 평등과 각개인의
존재를 존중해주는 이상사회 건립을 목표로 하는 것이 如來藏思想이 지향하는 바이라고 생각된다.
2. 資料의 範圍
본논문에서는, 如來藏思想이 唯識說과 결합되기 이전의
초기 여래장사상 경전들을 중심으로 고찰함에 있어서, 경전의 성립순서를 따라서,
한역경전의 經 ,論과 다수의 문헌에 의거 하여 참조 범위를 조망하였다.
Ⅰ.如來藏思想의 佛敎史的 位置
⑴ 如來藏 思想의 기원
如來藏 사상의 기원은 원시경전의 ‘本性淸淨心 , 客塵煩惱說 ’즉 중생의 마음은 본래적으로는 청정하지만 우연적인
외래의 요소에덮혀 일시적으로 흐려져 있다고 하는 說이다. 如來藏 은 이 思想에 근거하여그청정한 중생의 心에서
깨달음의 가능성, 즉 ‘如來 이어야 할 원인’을 찾아내어 그것을 如來의 種姓이라 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을 갖는心 에 대해, 처음으로 이것을 여래장이라는 명칭을 쓰고 설명하는 경전이 『여래장경』이다.
즉 佛智의 편만 , 법신의 보편성의 思想과 『법화경』의 一乘說을 계승하여 衆生의 능력에 관해서도
또한 예외없이 최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능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중생은그 가능성을
간직할수 있다는 의미에서 如來藏 이라 한다.
또는 未來의 가능성으로서는 衆生이 여래와 같다고 말해져도 현실에 있어서의 중생은
그것에 대해서 無知 이며 번뇌에 사로 잡혀 윤회의 세계에 방황하고 있다.
이러한 중생의 현실에 있어서의 衆生은 그것에 대해서 無知이며 煩惱에 사로 잡혀
輪廻의 세계에 방황하고 있다. 이러한 중생의 현실에 있어서의 상태를 일반적으로
‘무량번뇌소전 의 如來藏 또는 ’在纏位의 如來藏 이라한다.
그래서 本性淸淨한 如來藏 이 이같이 번뇌에 덮혀 있으므로 이러한 무명번뇌에 의해서 우리들
중생의 현실태는 여러 가지 차별현상이 나타나는것이라 설명된다.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이 미혹의
현실태를 반성하고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여 열반이라고 하는이상태를 추구하는것도 또한
이 如來藏 에 의해서 설명된다. 如來藏 계통에서는 ‘一乘’사상이 설해지는데,
이것은 三乘의 중생에게도 성불의 性(일승) 이 있음을 설한 사상이다.
이 一乘 사상은 如來藏 思想 으로귀착한다.
삼승의 사람이 모두 성불할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實有佛性說 에의거하지 않을수 없으며,
이 실유불성설은 여래장 사상과 다른 것이 아니다『법화경』이나 『화엄경』의 일승사상도 이와같은
사상의 흐름속에 있다고볼수 있으며, 일승보살법여래성 자성청정심 등의 사상의 흐름을 생각할 때
여래장 사상은 유구하고도 풍부한 前史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자성청정심 객진번뇌의 교리는
이미 『아함경』에 나타나며,
부파불교의 논서를 매게로 하여 대승경전에서도 『반야경』을 비롯하여널리 설해지고 있다. ‘我 ’라함은 곧 如來藏 이다.
一切衆生들이 다 佛性이 있으니 이것이 곧 ‘我’ 의 뜻이다.즉, 佛性’(buddha-dh?tu) 이라는 것은 佛의 本質,本性이라는
의미 이지만, 모든중생 에게는 佛 과 동일한 本性이 있어서,장래에 중생의 成佛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佛 의 因 이라고 설명된다. (性 , dhtu = 因, hetu),
또한 동일한 言語가“如來의 胎兒”(tath= gata - garbha)라고 불리우는 ‘如來藏’ 이라고 한역된다.
이말은 원래, 한역이 말하 는 것처럼“如來를 藏 하는 것” 이라는 意味이며. 중생을 가르키는 것이 었다.
如來를 안에 감추고 있다는 것은, 중생의 마음속에 如來(佛) 가될要因(如來의 胎兒) 이 있다는 것으로서,
理論的으로 ‘佛 의 因’ = ‘佛性’이라고불리우게 되었다.(여래 =佛 ). ‘一切의 衆生은 如來藏 이다’ 라는 주장이
『여래장경』에서 처음으로 선언되고,
다음에 『열반경』에서는“ 一切衆生實有佛性” 이라는 敎說이 나타났다. 또한 이불성의( 性)을
설명하기 위해 『승만경』의五藏義를 살펴보면
「세존이시여 여래꼐서 설하신 如來藏은 곧 法界藏이고, 出世間法身藏이며 출세간 上上藏이며 如來藏입니다 1)
라 하고 있다. 또한 『불성론』에서는 如來藏 의 이 五藏義를
如來藏,
正法藏,
法身藏,
出世藏,
自性淸淨藏,이라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첫째, 如來藏이란 自性의 뜻이며,
일체의 諸法이 如來藏性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둘째, 正法藏이란 因의 뜻이며,
모든 성인 들이 正法性을 경계로 하여원만함을 증득한다는 의미이다.
셋째,法身藏은 至得의의미로
一切聖人이 正法을 믿고 즐겨함으로因해서 常樂我淨의
四德과 일체의 여래의 공덕을 증득하는 性이라는 의미이다.
넷째, 出世藏은 진실의 의미로
세간을 초월하여眞實不變 하다는 意味이다2)
물론이 性 대해서 유식학파 등 에서는 아뢰야식등으로 해석하지만
『보성론』에서는 이것을 순수하게 因의 뜻, 如來藏 의 의미로서 해석한다.
그래서 如來藏이 모든법의 의지가되고 또 이 如來藏을 의지해서 생사,열반이 있다는 것이다.
또, 이 因에 의해서 얻게되는 果는 佛 三身이다.
또한, 『보성론』은 여래는 “種姓이 眞如로부터 전개된 존재 즉,
”眞如로서 淨化를 至得한사람으로 “ 정의한다 여래의 자비의 작용을이세상에 시현하는 자는 보살이다.
이보살은 覺者性과 衆生性이 모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존재이다. 전자는 智慧의 本性을 後者는 慈悲의 本性을 가르키는말이다. 이와같이 菩薩은 智慧가 있으므로 生死에 머무르지 않으며,慈悲를가지고 있으므로 涅槃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그는 生死와 涅槃을 동시에 살아 가는 것이다. 이와같이 如來藏의 구조적 특징에서 볼수 있는것과 같이 중생이
근원적으로는 佛과 同一하다 해도 현실에 나타난 중생은 三乘이나 一闡提와 같은 중생들로 하여금 그 차별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如來藏 ’에는, 또한“ ‘여래’와 同一한 本質佛性이 숨겨져 있어서보이지 않는다
(所有者 自身이 아직 알지 못한다)” 는 뉴앙스가 있으며, 더구나 無知와 번뇌에 얽혀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중생의 現狀( ‘無量煩惱所纏의 如來藏’)을 나타내는 이러한점을 眞如의 무차별로서 설명한다.
如來藏을 좁혀보자면 여래장은 무시시래로 공존하고 더욱이 그 淸淨法과 본질적으로 결합하는 성질의 것이며
여래장은 번뇌의 復藏이라고 하는 不淸淨法과 무시시래 공존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결합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如來藏은 미래영겁을 지나도 항상 法性을 가진다. 그본질인 自性淸淨 방면과客塵煩惱에 쌓여 있는반면
心性淸淨 客塵煩惱와의 合體로서 一切法이 의지하는곳 이다.
즉 淸淨이라고 하는것은 밖의 煩惱와 뒤덮혀 있는것과 大悲의 측면에서 一切衆生이 如來藏 이어야 하는 이유는
如來의 法身이 두루 가득차 있다는如來의 慈悲的 종교적 사실과 眞如가 무차별하다는 智慧的 根源的 사실모두가
다佛 이 될 수 있는 種姓(因 )을 갖고 있다는 불도 실천에 있어서의 自覺的 사실로 요약할수 있다.
즉, 如來가 無垢眞如임에 반해 衆生은有垢眞如이지만, 眞如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같이如來藏思想 은 중생 으로서 如來가 됨을 ‘眞如의 同一性’으로 분석함 으로써인간을 無時間의 차원에서 논의하고 있다.
大乘佛敎의 근본적인 전재는 空性의 철학적사고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如來藏思想은 ‘如來藏의 存在’ 를 강조한다.
즉 이 存在의 의미는 如來라는 명제에서 그의미에 ‘如來’란 여래가 正覺으로 부터 涅槃에 이르기 까지 說한바
일체는 不如가 아닌 ‘如‘ 이기 때문에 如來라 일컬어지며,
說한 그대로 行하며,
행한 그대로 를 說함으로 如來라 한다.
그리고 一切를 볼수 있는 권위자 이기 때문이며, ’如 ‘라는 것은직접적으로는 言行의 如實을 意味하는데,
즉’ 그대로‘ ’眞實그대로‘ 라는 것으로 如實 또는 眞如의 뜻이다.
또는 緣起法의 眞實로서 해석하여,法은 ‘如’를 여의지도 않고
法은 ‘如’와 다르지도 않으며,분명한 眞實인 것으로 顚倒 되지 않는
緣起에 隨順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緣起의 여실한 知見은
緣起 그자체를 초월한 경지 이므로 眞如라고도 하며 ,
결국 如來는 緣起의 여실한 지경에 의해 緣起를 초월하는 것이다.
龍樹는 『십주비바사론』에서
「如來 라는 것은 如의 이름은 實이고,來 의 이름은 至가 되니,진실한 가운데 이르기 때문에 如來」라한다.3)
뿐만아니라
三解脫門.
四諦.
六度,
四功德處.
一切佛法.
十地.
八聖道分.
權智二足 등을 ‘ 如 ’라하여 이모두가 다 佛境地에 來至 하는 것을 ‘來’라고 해석 하고 있다.4)
‘如’ 로부터 오는 如來의 의미는 왜 如 로부터 오는가하는 여래출현의 그의미는 역사적사실이 아니라
사실의 배후에서 항상요구되는 종교적 현실인 것이다.空觀의 ‘자성청정 객진번뇌’의 철학은 如來藏思想의
형이상학적 볼륨의 거품을 정화하여 동일성과 차이성의同時成立을 제시하는 것 이라면 풀리지 않는 역설이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풀어야할 과제라고 한다면우리는 끊임없는 물음과 답변 모색의 과정에 있을
것이다.여기에서 진정한 종교적 수횅의 모습을 발견할수 있을 것이며.如來藏思想의 형이상학이 ,
그리고 그 ‘實存’은 如來藏思想의인식론, 실천론이 될 것이다.
⑵ 如來藏思想과 중관사상과의 관계
如來藏思想 과 般若 중관 사상과 의 관계는 『寶性論』 ‘爲何義說品第七 ’에 잘나타나 있다.
“眞實際 에 있어서는, 일체의 有爲는 遠離 되어 있다.그러므로, 煩惱?業?異熟 이라는 것은 구름과 같다고
비유되어 설명되는 것이다.
諸煩惱는 구름과 같고,
諸業 은 꿈속에서 받은것같고,
煩惱와 業 이 이숙된 五蘊은 幻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前에는 이와같이 설명 되었지만,지금의 「究竟要義論」에서는 五蘊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性 이 存在한다는 것이 說해진 것이다.
이내용은 나가라쥬나의 「中論」제칠장의 끝이나,「대지도론」의 ‘十喩 爲說空法’ 등에서 대표적으로 보이는 것이며,
그것은 반야중관의 뜻을 전형적으로 표시하는 말이다.
그 ‘반야중관’의 내용은 ”前에“ (purvam)설해진 것이며,지금의 ‘如來藏’ 은 ‘ uttara - taqntra'에 있어서 설해진 것이다.
’ uttara'는 ‘後’ (later, subseguent) 이기도 하지만,또한 ‘優勝,卓越’ 이기도 하므로,
즉 여래장사상이 ‘반야’보다 後 인 要義 속에,반야보다 탁월하고 구경인 要義속에 說 해져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purva-paksa (前宗, 問題의 提起),uttara-paksa
(後宗, 그것에의 回答)라는式의 意味도 聯想되어, 반야는 문제의 제기이며
「보성론」의 ‘여래장’은 그문제의 회답이기도 하는 의미가 된다.
‘반야공관’이 다만 ‘戱論寂滅이라는 遮遺性으로만 파악되는 일이 없이’如來藏설‘에 의해서,
그것이 실천적인 行動性으로서 表出 되도록 하고,특히그것을 智 의 작용의 전개에 의해서 해명 되도록 한다.
즉,般若空義 가 단순한 空無인 듯이 잘못해석되는 과실을 막기위해서 ’여래장‘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 라고한다.
그것은 ’반야공‘을 바르게了解 시키려는것이며,
空性에대한 나가라쥬나의 세가지 분류로, 즉 ’공용‘ ’공성‘ ’공의‘로 요약 할수 있다.
’공용은 모든희론 (분별적인언어)를 지멸하는것인데 ,
희론은 분별(사유판단)을 낳고, 분별은 업, 번뇌의 근원이므로,
공성의 쓰임(활동)은 분별이나 업, 번뇌를 희론과 함꼐 지멸하는 것이다.
‘공성’은 일체의 집착-주체와 객체, 유와무, 생사와 열반 등을
상대적으로 분별하여 각각 자체로서 성립 한다고 고집하는것-을 벗어난 것이다.
즉, 無分別智로서 空性이 그자신을 보는 智慧이다.
즉 모든 희론을 지멸하는 것이 공성의 쓰임이다.
또는 他에 의해서 아는 것이 아니며, 寂靜이며, 희론에 의하여 論해지는 일이 없으며,
無分別이며 잡다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또는 緣起가 空性이라고 설한다.
그것(空性) 은 가상적인 명칭이며, 그것이 바로 中道 이다.
왜냐하면, ”因緣으로 生하는 것은 不生이다. 그것에는 실체로서의 생기가 없다.
因緣에 의존하는 것은 空 이라고 한다. 空이라고 아는 사람은 태만하지 않는다.
이처럼 緣起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空性이라는 말의 意味인 것이지.
無 라는 말의 意味가. 空性 이라는 말의 意味 는 아니다. 라는점과
‘공의’는 무분별지에 의해서 분명하게 알려지는 것,
즉 無分別智의 대상인 眞如를 가르킨다.
『보성론』은 여래는 “眞如로서 정화를 至得한사람” 으로 정의한다.
결국 如來는 有垢眞如인 衆生이 그 번뇌에서 이탈하여 청정하게 될때, 無垢眞如로서의 여래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前 인 般若空에 대해서 갖는 역사적 사명이다. 이에비해 챤드라키르티의 해석에서는 ’공성‘은 희론이 지멸하고
분별을 초월한 眞如(法性)이다. 나가라쥬나 자신이 기술하고 있듯이 자각된것이며, 분별이나 개념(말)에 의하여
파악할수 없으며, 사유 를 초월한 平等一味인 진실로서 法界, 無爲, 涅槃, 法性, 佛性, 無上智 등과 같은 것이다.
즉 善과 악등의 상대혹은 대립을 초월한 인식이므로
즉 모든번뇌 가 空한 다음 나타나는 불덕으로서의 無量性功德 으로서의 一心이란 藏을 中觀思想은 정하고 있지않다,
인연소생의 일체법을 無自性이 성립하는 場으로 받아들이기는 한다.그러나 일체법은 그대로 무자성으로 받아 들여서,
무자성 이므로 空 이라고 결론 짓는다.5)
이상과 같은 사상적 한계 때문에 중관사상은 차후 如來藏 思想과 唯識思想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간과 해서는 안되는점은,
진과망,
染과 淨,
覺과 不覺의 관계는
中觀의 中道가 아니면 이해할수 없다는 사실이다.
⑶ 如來藏 思想과 唯識思想과의 관계
생멸심 이라는 것은 여래장을 의지하는 까닭에 생멸심이 있다.
소위 不生不滅이 生滅과 和合 하여 非一非異 이니 이름을 아뢰야식 이라한다.
여기에서 不生不滅은 如來藏 이며,
生滅心 은 唯識의 아뢰야식 이다.
사실 如來藏 思想과 아뢰야식 사상과의 交流는 대체로 세단계를 나누기도 한다.
第一期 로는 如來藏 이나 승만경등과 같이 여래장사상 만을 설하는 경전을 말한다.
第二期 로는 如來藏 과 아뢰야식의 관계를 설하면서도 양자의 관계를 명료하게 하지 않는 론서를 말한다.
第三期 로는 그후에 능가경이나 대승기신론 등이 나타나 如來藏과 아뢰야식 과의 융합을 설하고
兩者의 융합에서 迷 와 悟와 世界를 說하는 經論을 말한다.
如來藏과 아뢰야식을 설하면서도 ‘如來藏思想‘은 그 성립시기로 보아서는 ’유가행파‘의 ’유식사상‘보다 先行하고,
그것과 무관하게 전개 되었지만, 그 學說의 조직화에 있어서는 유가행파의 도움을 빌었다.
그것은 『보성론』에 있어서 『대승장엄경론』의 引用이나, 佛身論에 관계된 용어들과,
많은 중요개념이나 정의가 유가행파의 문헌들과 공통되는 것들이 많은 점으로부터 추정된다.
즉, ’有垢眞如, 無垢眞如, 自性淸淨, 離垢淸淨, 轉依 , 煩惱, 所知斷 ,智의獲得, 無分別智, 後得智,
如所有性, 盡所有性, 三種佛身, 解脫身,法身, 所證法淸淨法界 ,所說法(等流), 本性住種姓, 習所性種姓,
無住處涅槃등은 유가행파의 술어의 적용이다.
그러나 그술어의 정의가 반드시 유가행파와 일치 되지는 않으며, 더구나 유가행파에 있어서 중요한
‘삼성설’이나 ‘아뢰야식’등의 개념은 전혀 쓰고 있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보성론』의 독자성이 보이고,
또한 ‘여래장사상’의 독립성이 유지 되는 것이다. 유식설에 있어서의 깨달음의 세계는 淸淨法界,
혹은 轉依法身이라고 규정되고,
그것은 煩惱,所知障 의 斷 과, 無分別智의 證得을 내용으로 한다,
그경우에, 法身은 智를 뜨난 것이 아니며, 이 智 는 佛 의 삼신으로서 殺害를 한다.
이것은 여래장설에 있어서의 법신과도 일치한다.
‘여래장’은 ‘본성청정’이라는 이름으로 이학설에 짜넣으져 있지만, 그규정은 진여,법계라는 것과 같다.
그것이 無爲인점은 ‘여래장’설에서의 규정과 같지만, 거기에는 ‘智 ’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르다.
智 가 구별되고 더구나 迷妄이나 無知를 排除한(이것도 여래장설에서 말하는것이지만) 純粹한 법계만에는
사실‘如來藏 ’이라는 이름이 가치가 없게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기에서 迷悟가 일어나는 場 , 迷妄으로 부터 깨달음에로의 전환이 되는
場 에 불과하기 때문에, 깨달음에는 向하는 주체는 될수 없기 때문이다.
여래장이 깨달음에로 向 하는 주체를 의미할수 있었던 것은,
거기에 ‘여래의 智 ’를 본질적으로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식설이 갖는 理論的 염핍性 無爲와 有爲의 준별 은 곧 변화하여 청정법계에 관해서도,
거기에서 부터 지적요소를 별출하는 경향을 만들게 되었다.
여래장사상이 유식사상속으로 흡수된 시기의 경전인 『楞伽經』에서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同一視하고,
다른경전에는 보이지 않는 대담한 표현을 시도한 근거는 染淨 의 依止.場的 존재로서의 공통성에 있다고 생각된다. 6)
Ⅱ, 如來藏思想의 展開
⑴『여래장경』에 의하면, 일체중생이 煩惱身 中 에 있더라도 여래장이 있다는 사실은
佛의 出世와 不出世에 관계없이 상주불변한 法 이지만, 중생은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생사윤회에 표류하는것임을 알고, 여래는 중생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장을 개현시키기 위해서
출세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다. 如來는, 중생이 본질적으로 는 여래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敎濟할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중생에게 법을 설하며 번뇌를 제거하고 如來智를 정화 시킨다는 것은
곧 여래의 如來智가 衆生의 如來智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만일, 중생의 본성이 여래와 전혀 다른것으로서, 번뇌만으로 이루어 졌다면,
如來가 衆生에게 法을 說한다해도 衆生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구제도 있을수 없을 것이다.
如來를 如來로서 인정하는 것은 衆生의 如來智이며, 衆生의 如來藏을 發見하고 법을 설하는
것은 如來의 如來智이다. 불교윤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정신인 慈悲心은 여래와
모든 중생의 평등성을 인정하는 것을 전재로 해야 한다. 중생의 고통을 멸하게 해주는 것이 불교의 자비라고 한다면,
궁극적인 자비는 중생을 해탈시키는 것이다. 해탈한다는 것은 여래의 法身을 증득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여래의 因이 중생속에 내재해 있으야만 한다. 그 因이 바로 如來藏 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에게 如來藏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여래장사상에 있어서 여래가 중생을 구제한다함은 이타인 동시에,
그것은 如來智 가 如來智를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自利인 것이다.
『여래장경』에서, 如來智 는 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빛의 속성은 사방으로 퍼져나가서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이 經을 설하는 ‘佛‘은’常放光明王如來‘와 ’無邊光菩薩‘ (석가여래의 前身)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말하자면, 구제의 가능성은 언제 어디에나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빛도 장막에 갇혀진것의 속으로는
스며들수가 없기 때문에 구제는 여래의 힘만으로는 이루어 질수 없다. 즉 번뇌에 가리워져 있는 衆生內 의 如來藏이
번뇌를 뚫고나와 빛을 맞이 하려는 自發性이 있으야만 구제가 가능해진다.
그 자발성은 ’ 여래장‘의 본질인 ’如來智‘ 의 속성이며,
그것을 이끌어내는 힘은 如來藏 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智와 信 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게된다.
여래장사상에서 의 ’信‘이라는 것은,
’煩惱를 제거하면 본래의 자성청정한 如來智 가 나타나며,
煩惱는 한갖 客 이며 如來智가 主임을 ‘ 믿는 것이다.
主人이 客을 몰아내고 主人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如來藏思想 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은
중생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부증불감경』에서 더욱 발전되어 전개된다.
⑵『부증불감경』에 나타난 衆生界 의 淨化
『부증불감경』에서는,
「衆生界가 如來藏이며 如來藏은 곧 法身임을 밝히고 있다.」7)
“이법신이 無邊煩惱所纏하여 시작함이 없음을 쫓아 세간을 따라
파랑표류왕래생사함 을 ‘衆生’ 이라고 부르며, 이 法身이 세간의 생사
고뇌를 여의어 捨 一切諸有欲求하고 십바라밀을 행하고 팔만사천
법문을 포섭하여 보리를 수행함을 ‘보살’이라고 부른다.
이 法身이 일체세간 번뇌를 여의어
使纏過 一切苦 하고, 離一切煩惱垢하여 得淨得淸淨하고, 住 於彼岸淸淨法中하고, 到 一切衆生所願之地하며,
於一切境界中에 究竟通達更無勝者하며, 離 一切障離一切 하고, 於 一切法 中 得自在力함을 ”如來應正遍知“ 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衆生界를 떠나서 法身이 있는 것이 아니며, 법신을 떠나서 중생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법신이 곧 衆生界 이며, 그둘은 이름이 다를뿐이며 의미는 같은 것이다. (大正藏, 16, p.467中)
이 衆生界 卽, 여래장에는 3가지 법이 있다.
①如來藏 本際 相應體及淸淨法
②如來藏 本際 不相應體及煩惱纏不淸淨法
③如來藏未來際平等恒及有法이다.
“여래장에 상응인 청정법과 불상응인 법뇌장은
무시이래로 공존하지만 여래장 자체는 일체제법의 根本이며,
備一切法具一切法이며, 於世法不離不脫眞實一切法이며,
不生不滅常恒淸凉不變歸依하는 것이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 不生不滅常恒 淸凉不變歸依를 말한다. 8)
이와같이 如來藏은 ‘중생계’ 卽 ‘중생의 본질’ 혹은 ‘중생의 總體’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衆生界者卽是如來藏”이라고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界(dh?tu)로서의 여래장은 티벳역에서는 “여래의 정수 ”라고 표현되는것처럼, 일체의 중생은 여래의 정수를 가지고 있으며,
중생계 가 不生不滅常恒不變歸依해야할것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여래장 사상에서의 구제라는 것이 이세상과 동떨어진 초월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번뇌소전의 衆生身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혹은 중생계를 ‘중생의 總體’라고 해석할경우에는, 개인의 구제 뿐만아니라 衆生全體의 구제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며,
衆生은 개인이 아니라 중생전체이어야 비로소 중생이 되는 것이므로 ‘ 자기’라는 령역이 ‘衆生全體’로 확장되어 인식되기 때문에 개인의 이기주의는 용납 되지 않는다.이렇게 볼 때, 『부증불감경』에서의 중생의 구제라는 것은 중생의 질적향상과 정화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생이 번뇌장을 제거하고 法身을 증득했다하더라도 중생계가 멸하는게 아니다. 중생계와 법계는 同一界이기 때문이다.“一切愚癡凡夫不如實知一法界故, 如實見一法界故로 起邪見心하여 謂衆生界增衆生界滅이다.” 9)
중생계와 법계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멸견을 가진중생은 열반은 無 이고 空寂일 뿐이며 世間은 시종이 있다고 생각하여
法界를 실현시킬 노력도 하지 않게되며 중생 전체의 淨化에도 노력하지 않게 된다.또한 增見을 가진중생은, 涅槃이라는 것이
始生 이 있고 홀연히 생긴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於善法中無願慾心勤精進心이 되어 무명제혹근본이 된다.
따라서 增見과 滅見을 가진사람은 諸佛如來를 필경원리 하게 된다. 이것은, 중생계속에서의 自己의 淨化와 중생전체의 정화를
이룩하지 않고서는 달리 如來의 法身을 증득할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부증불감경』에 나타난 중생의 “자기정화” 라는 것은 自性淸淨心을 회복해서 중생과 여래법신의 아이덴티티(自己同一性)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중생계에는 增 도 없고 滅 도 없는것이라는 如實知見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부증불감경』에서의 구제의 의미는 본래적인 자아의 회복에 있으며, 그구제는 “중생에서 여래로” 라는 從的救濟일뿐 아니라, 모든 중생계 속에서의 자아의 회복이라는 ‘橫的救濟’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여래장사상은 ‘個人의 敎濟’뿐 아니라, ‘사회의 敎濟’라는 측면을 강조하게되며,
이러한 경향은 『승만경』에서 더욱강조되어 나타난다.
⑶ 『승만경』에서의 如來藏
『승만경』의 ‘자성청정장’중에서,
중생계가 곧 여래장이며, 여래법신이며, 그것은 증멸이 없다“는 『부증불감경』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더나아가, 『승만경』에서는 여래장의 자발적인 智의요소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苦의 滅이란 무엇인가?
“非壞法故名爲苦滅이다. 所言苦滅者名無始, 無作, 無起, 無盡, 離盡, 常住이다.
苦滅이라는 것은 모든 유위상을 떠난것이므로 常이고, 非虛妄法이며, 歸依할바의 眞理(諦)이므로, 滅諦는 第一義가 된다.”10)
滅諦를 第一義로 보는점에서는 空智를 의미하지만, 이 滅諦를 근본으로 하면서, 여래의 공덕이라는 면에서는 不空價임을 밝히고 있다. 즉, 중관사상이 空智만을 강조 했다면, 여래장사상은 空 智를 根本으로 하면서, 가치의 不空智를 力說한 것 이라고 할수 있다. 이렇게 가치면 에서의 불공을 강조함으로써 如來藏思想은 실천적인 행동을 요구하게 된다. “섭수정법은 즉 십파라밀이다,섭수정법을 위해서는 3가지를 버려야한다.
그것은 身,命,財이다, 身을 버린다는 것은 생사에 미래등에 있어서 老,病,死를 떠나고,불괴상주하며, 무유변이하며,
불가사의공덕인 如來法身을 얻는것이다. 生命을 버린다는 것은 生死와 未來등에 있어서, 필경에는 死를 떠나고,
불변상주 하며, 불가사의공덕과 통달일체심심불법을 얻는 것이다. 財를 버린다는 것은 生死未來 등에 있어서 일체중생에
比할 바없는, 무진무멸하고 필경상주인 불가사의구족공덕을 얻고, 一切衆生의 수승공양을 받는 것이다. 11)
즉, 有爲 의 身,命,財를 버림으로써, 상주무위의 여래공덕을 얻음을 말한다.
이렇게 유위상을 떠난 滅諦의 결과는 常樂我淨이라는 사파라밀의 불공덕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열반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열반경』에서는 佛의 아파라밀을 ‘眞我’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眞我라는 것은 ‘실체적’인 개념은 아니다. 번뇌에 의해서 생사윤회를 헤메이는 중생의 상태를 “我”의 實體라고 전도된생각을 하고 있는 衆生은 身命財에 집착함으로써 탐진치에 빠지고 고통울 당하는 것이다. 身 ,命,財 를 버린다는 것은 번뇌에 덮힌
“自我”의 장벽을 깨뜨려서, 본래의 자성청정을 回復 하는 것이며, 그 자성청정 한 “我 ”가 곧 “眞我”이며, 如來法身이며,
법계이다. 중관사상이 自我의 실체를 부정함으로써 ‘眞空無相 ’의 특징을 보이는데 반해서, 여래장사상 은 가치론적인
이상상 으로서의 ‘眞我’를 강조한다는 面에서 ‘實相’ 또는 ‘眞 德不空’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賢首法藏(643-712)이
『大乘起信論義記』에서 분류 여래장사상의 구제의 개념은 즉, 번뇌로 因해서 제한된 假我가 본래의 法界로 확장되어
眞我를 회복하는 것이 곧 ‘救濟인 것이다. 이점은 사회윤리의 근간 으로서 해석될수 있다 예를들어, 身命財를 버리게 되면 ,
’나‘의 身命財가 제한해놓은 ‘我’라는 번뇌의 울타리를 부수어 ‘我’의 영역이 확장되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個體의 我가
동일한 법계로 동화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개인의 구제인 동시에 사회의 구제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자타의 구별이 없으므로 이기심이 일어나지 않으며, 무한으로 확대된 眞我즉 法身의 無盡,無爲의 行 은
불교윤리의 이상적인 행을 시준 해준다. 이와같이 여래장사상 에서의 ‘구제’는 ‘終末論的’이거나 ‘미래의 어느시점에 준비된것’
이 아니라, 번뇌에 덮혀있는 假我가 ‘지금 여기서’(here and now)자신의 제한된 울타리를 벗어나서 무한한 법계를 향해서 自我가 확대될수 있으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 해야한다는 여실지를 갖춘 菩薩에게는 네가지 책임이 생긴다.
즉, 자신은 여실하게 깨달았다 해도,그것만으로는 완성된 구제가 아니다. 먼저 깨달은 자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생들이 청하지 않더라도 중생들을 깨닫도록 일깨워서, 중생계속에 청정법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보살의 사명인 것이다.
한편, 번뇌소전의 衆生身 속에 자성청정한 여래장 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衆生들은,
오직 佛陀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그 진리를 따르면, 결국에는 구경을 얻을수 있다고 강조한다 12)
⑷ 『寶性論』에 나타난 구제의 윤리
『보성론』은 여래장사상이 종합되어 발전된 論典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새경전에 나타난
‘平等性’ 과 ‘淨化’와 ‘菩薩行’ 의 사상이 여래장의 본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개되고 있다.
“佛智가 중생들속에 침투해 있으므로 , 그것의 無垢함이 本性上 不二이므로, 佛 의 性(種姓)에 있어서 ,
그果를 假說하므로 , 一切의 有身者(중생)들은 佛의 胎를 갖는다. (如來藏)이다) 라고 설해진다.
또한, 法身= 眞如 = 如來性 이라는 不可分無二의 구조가 바로『보성론』이 밝히는 여래장 의 본질이다.
이것은 『부증불감경』에서 衆生界 =如來藏 =法身의 不可分 不二性 과 같은 것이다.
여래장의 삼종자성은 各各의 자성을 갖고 있는데 ,
법신은 생각하는 것을 성취하는 위신력,을 自性으로 하고,
眞如는 ‘不變異性을 自性으로하여, 여래성은 중생에 대한 ’대비심‘을 自性으로 하고 있다.
즉 여래장 자체에 성취력과 不變異性과 대비심이 갖추어져 있고,
그것은 자성청정 不隨染性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승만경』에서 여래장의 智的要素를 인정한것에서 더나아가,
자발적인 의지력과 사회성(대비심)을 강조 했다는 점에서
『보성론』의 여래장설 은 적극적 실천사상임을 알수 있다.
특히, 『보성론』은 사회성을 중시하는 사상이라고 볼수 있다.
「누구라도 자신을 위해서만 戒를 지키고, 파계한 중생에 대한 연민도 갖지 않으며,
自身만을 이익되게하며, 戒財를 청정하게 하는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淸淨戒를 지닌 聖者라고는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戒를 지니고 火風水地 처럼 他人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사람,타인에 대해서 最上의 비민을 일으키는
사람이야말로 持戒者이며, 다른사람들은 像似者이다」 이게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개인의 구제와 사회의
구제를 불리시키지 않으려는 구제의 윤리가 『보성론』이 강조하는 지혜는 모든중생이 如來藏이라는 앎이며
이 如來藏 의 智慧는 이타의 성취와 대비의 현실 이외의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그것은 ‘一切衆生이 如來藏’ 임을 알게됨으로써 비로소 가능케 되는 것 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보성이 갖는 측면은 부사의 하고 如來만이 영역이라 하여 衆生은 알기 어렵고
오로지 ‘信’ 에 의해서만 해탈을 얻을수 있다고 한다. .
Ⅲ『보성론』의 구조
⑴ 보성론의 구성
梵本, 또는 티베트역인 미륵의(論 )및 무착의(해탈) 모두가 한論을 5品으로 나누고 있지만
漢譯은 근본게만의 앞부분이나 梵本, 티베트역을 합한 뒷부분 모두를 11품으로 나누고 있다.
즉 「法義의 總相을 攝한 품」이다. 곧 총설을 敎化品第一로 하고, 삼보를 別立하여
佛寶品 第二
法寶品第三,
僧寶品第四,如來藏과 如來藏에 덧붙여 설해져 있는「煩惱」와
「敎說의 目的」을 如來藏品第五,
煩惱所纏品第六,
爲何義說品第七,
거기에 菩提,佛德,佛業,較量信功德品을 첨가하여
第八,
第九,
第十,
第十一品으로 한것일 것이다.
梵本과 티베트역을 총설과 三寶와 如來藏의 義를 合하여
「如來藏에 관한 제일」로 하고 있지만, 三寶와 如來藏을 구별하여
品類를 세우고 있는 漢譯이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分品을 따르자면
1)敎化品第一
佛,法,僧,性(如來藏,菩提,佛德,佛業의 7종은 論 의 根幹이자 金剛句라고 하고 있다.
금강구의 金剛이란
所證의 義, 곧7종의 義가 自內證된 경지로 부수어 파괴할수 없는것의 비유이며,
句 는7종의 뜻에 통달하기위한 文字章句의 의미라고 하고 있다.
7금강구의 관계에대해서는 佛寶에서 法寶, 法寶에서 僧寶, 계속하여 三寶의 因인 如來藏이 있고
有垢如인 如來藏에서 垢가 없어진 智慧의 證得이 菩提,
보리에는 十力등의 諸功德이 本具하며,
衆生에게 利益이 되는 佛業을 짓는다라는 상호관계를 기술하며 금강경에서 설한
‘제상비상즉견여래’란 내용과 같이 즉 , 모든상을 상으로 보지 않을 때 如來를 볼수 있다란 내용과 같이
第一品에서는
이 일곱가지 金剛 글귀의 뜻은 여러經 가운데 널리說 한것과 같으니 . 알아두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하면, 부처님이란 뜻에
의지 하기 때문에 如來께서 經가운데 아난에게 말씀 하시기를, 『아난아, 如來라고 말하는 것은 볼수 있는법이 아니니
이 때문에 귀의 알음알이(耳識)로 써 듣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衆生의 경계라 말하는 것이
곧 如來藏 이며如來藏 이라고 말하는 것이 곧 法身 이라는,不二의 이치인 中道의 평등관에 안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2) 佛寶品 第二
「무릇佛은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없는 것으로 寂靜한 佛,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 깨달음을 다한후 깨닫지 못한자를 깨닫게
하기위해 두려움없는 常恒 의 道를 說하며, 지혜와 자비의 最勝의검과 금강으로 (名色所攝)의 苦 의 싹을 頓載하고
(有身見을 先導하는) 수많은 種種의 見解로 드러나 있지 않는 의심의 벽을 파괴하는 그(佛)에게 歸命하고 받들어 모신다. 」라
하고 있다.
불보엔 8종의 공덕을 구비 하고 있는 것으로 그내용을 보자면,
⑴ 有爲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無爲라 하는 것,
⑵ 一切의 戱論과 분별을 寂滅했기 때문에 無功用이라는 것,
⑶ 자제한 智慧에 의해 覺知된 것이지 다른것에 緣 하여 증지된 것이 아니라는 것,
⑷ 自覺智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한 지헤와,
⑸ 慈悲를 일으키고,⑹智 悲에 의해 苦와 번뇌를 단절하는 能力이 있다는 것 등이다.
無爲,無功用,自覺의 셋은 自利의 圓滿으로 이러한 自利利他의 8德을 갗춘 것이 佛寶이며,
無爲등6종의 如來의 공덕을 똑같은 순서로『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佛境界經』에서 廣說 하고 있다고 하며,
깨끗하지 않는 것이란「모든 범부들은 그 煩惱障 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가 있는 것 이란
「모든성문과 벽지불 로서는 그 智障이 있기 때문」이며.
티가 있는것이란
「모든보살 마하살은 저 두가지에 의지하는 習氣藏 이 있기 때문」이다.
떨쳐 일어나는것이란
갖가지 중생들은 교화할수 있는 그 方便의 갖가지 問에 들어가기
때문이며,큰보리를 이룩해 一切衆生 들에게 평등히 大慈大悲한 마음을 일으켜서
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증득하신 智慧처럼 같이 깨달아 큰보리를 증득케 하여
慈悲와 힘(力 )이라는 두가지에 의하여 自利利他의 큰법바퀴를 굴리는 智 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3)法寶第三
佛寶에서 法寶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에대해
「대체로 無에도 없고, 有에도 없으며, 有無에도 없고, 또 有無이외의 (분별에의해 이것 이다고 하는) 것에도 없으며,
思量할수 있는것도 아닌 것으로, 言語를 떠나, 각자 內證해야할 것으로, 寂靜이며, 無垢의 智慧光明과 빛남을 가지고,
일체의 所緣에 있어서(非如理作意을 先導하는) 貪,嗔,癡를 대치하는 法 이라고 하는 太陽에 귀명한다.」
法寶가 8종의 공덕을 섭수 하는 것으로서는
⑴ 乾慧 의 境 이아니며, 能說할수 없는 것으로自內證 해야 할것이기 때문에 不思義性이며 .
⑵ 業 과 번뇌가 없기 때문에 無 二 이며.
⑶ 業,煩惱를 일으키는 非如理作意가 없기 때문에 無二이다.
⑷ 業,煩惱를 일으키는 非如理作意가 없기 때문에 無分別 이다라 고
하고,이러한 不思議 , 無二, 無分別의 三德은
번뇌를 떠나 있기 때문에 滅諦이라고 하고,
이것을 획득하는 因은 無分別智의 具道位와 修道位인 것으로,
⑴ 隨 煩惱의 垢를 遠離하기 때문에 淸淨이다.,
⑵ 一切所知를 顯現한다.
⑶ 眞如를 보는 장애를 대치한다고 하고이러한 淸淨, 顯現, 大治의 셋은 道諦라 하고 있다,.滅諦는 離欲., 道諦는 離欲의 因으로,
法寶는
⑴ 不思議,
⑵ 無二,
⑶ 無分別 ,
⑷ 淸淨,
⑸ 顯現,
⑹ 能大治,
⑺ 離欲,
⑻ 離欲因의 8功德을 갖추는것이라고 하며모든 음산한장애와 감각과 탐욕. 진심, 우치등
일체 번뇌를 깨뜨림은 허망한 법의모양을 보지 않아야만 여실한 法이 바로 眞如의 法界인 줄을 여실히알아
보아 第一의 이치인 眞理를 보기 때문에 이를 平等히 證하는지혜 로서 (平等證智)라 하고 또는 일체를아는지혜
(一切種智 )의 智 로서 眞如와 如來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것이라 기술하고 있다
4)僧寶品第四
法寶에서 菩薩僧寶가 탄생하므로
「그마음이 自性光淨이라는 것에 의해,
모든 번뇌의 自性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一切世間은 (人法의 二 ) 無我인 것으로,
(처음부터) 寂靜 이라는 것을 正知 하고,
無障碍의 지혜를 갖추고,
일체중생 에게 正覺佛性이 살아 생존하고 있음을 보고,
중생의 마음이 自性淸淨이라는 것에 대해 무변의 경계를 소유한 지견이 있는 菩薩衆 에 귀명한다.」
불퇴전의 菩薩衆은
⑴ 마음은 自性에 의해, 光淨 인 것과 隨煩惱는 본래 멸진하여 있다고 보는것에 의해,
처음부터 二無我인 이세상이 적정한 법이라는 것을 여실히 覺知하고 (如實智),
⑵ 所知의 변제에 까지 이르는 반야에 의해 여래장 이 일체 중생내지 방취에 이르기 까지 있다고 보는 (遍智),
이 二因 에 의해 지견이 청정하게 되므로 불퇴의 보살중은 무상의공덕을 구족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不退地에 머무른 보살의 지견은 여래의 지견과 상응하는 것이 되고, 때문에 중생의 귀의처가 되는 것이다.
단지 聲聞僧 은 귀의의 가치가 없다고 하고 있다. 이상 三寶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다음 삼보에 관한 사항으로
⑴ 三寶를 安立하는 이유는 大乘?信佛의 보살을 위하여 佛寶를,
中乘信法의 獨覺을 위하여 法寶를,
小乘 信僧 의 聲聞을 위하여 僧寶를 설한다는 것,
⑵ 三歸依處를 施設한 것은 세속의 입장에서이고 진실한 귀의처는佛寶만이며, 法 과 僧은 귀의처가 아니라는 것,
⑶ 佛,法,僧을 함꼐 寶라고 이름붙인 것은 생하는 것은 희귀하다는등의 여섯가지의 相似함에 의해 보석과 닮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삼보는 불보에 섭수되며, 중생은 자리이타의 공덕을 갖추고, 無功用의 佛業을 이룬 불보에 귀의하여 자기의
如來藏의 자각을 환기하여 성불을 발원해야 할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삼보를 보배라 하는 연유에 여섯종류의 비슷한 것이 있다.
첫째는 세간에서 얻기 어려운것며,
둘째 더러움이 없는것이며,
셋째는 위덕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법이며,
넷째는 세간을 장엄할수 있는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 법이다,
다섯째는 수승하고도 미묘한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 되는 법이니세간을 뛰어난 법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고치거나 달라질수 없는 것이 서로 비슷하여 상대되는법이니번뇌없는 법을 얻었으므로
‘변하지않음’ 이라고 말한 것이 이때문이다.
또한 일체중생이 如來藏이라는 근거에 대해서
漢譯은 有垢 眞如를 詳述 함에 있어서
如來藏品 ,
無量煩惱所纏品,
爲何義說品을 들고 있지만
梵本藏은 각별의 품을 세우고 있지 않다.
그중 일체 중생이 如來藏 이라는 것에 대해 根本偈 에서는,
⑴ 佛智가 衆生聚 에 內在 하므로
⑵ 自性에 의해 無垢인 것은 無二이므로,
⑶ 佛種中에 그果를 시설 하므로 중생에게 佛藏이 있다고 설한다.
즉 「일체 중생이 여래장」이다고 하는 이유에
세가지 이유는 註偈 와 釋文에
⑴ 如來法身이 일체중생에게 편만하여 있다,
⑵여래의 진여는 무차별이다,
⑶여래의 種姓이 있다는 등의 세항목을 들고 있으며,
論 에서는 여래장을
⑴ 自性,
⑵ 因,
⑶ 果,
⑷業
⑸ 相應
⑹ 行悟入
⑺ 分位에 의한 차별,
⑻ 遍一切處,
⑼ 不變,
⑽ 무차별의 十義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5),無量煩惱所纏品第六
‘無量煩惱所纏如來藏’ 이란 여래장이 본질적으로 法身과 같으면서도 번뇌에 所纏되어 잇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無始時來에서 현재가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중생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중생이 如來藏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것은 如來藏 및 번뇌의 본질을 여실히 알게 되면 중생은 번뇌에 벗어나서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
그러므로 이 無量煩惱所纏如來藏 이란 결국 청정한 법신과 번뇌가 함꼐하고 있는
여래장의 구조적 특징을 나타낸것이라 할수 있다.
9가지 비유에 들어 설명 하고 ,
이9가지 비유를 통해 成佛의 가능성을 衆生의 마음속에서 ?O아 논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如來藏 그자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나 여래장과 번뇌와의 관게가 어떠한가 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9種의 비유와 여래장의 三自性, 즉 法身, 眞如, 여래성과의 관계에 관해서 인점을 본다면,
여래장이 無邊의 번뇌에 은복되어 있는 것을 『여래장경』의 9喩에의해 설명하고 있다.
즉 보성론은 이9가지 비유를 통해 무시시래로부터 잡념의 객진번뇌에 心이 오염되어 있다는 것 과
또다른편에서는 무시시래로 자성청정의 佛性이, 즉 法身如來藏이 있다는 것을설명한다.
다시말하면 『보성론』에서는
이 9 喩에 의해서 無始時來 공존하면서도 如來藏이 煩惱藏 과는 본질적으로 같을수 없다는 것과.
그리고 無始時來 공존하면서 淸淨法 이 如來藏과 不可分으로 결합하고 있는관계를 또한 설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客塵煩惱란
9종의 예를든 9 종의 번뇌이다, 이9종번뇌란 9가지번뇌의 垢 의 비유에 의해서 나타나는 9가지 번뇌,
① 貪便煩惱 ②瞋便煩惱 ③癡便煩惱 ④增上貪瞋癡結便煩惱 ⑤無明住地所攝煩惱
⑥見道所斷煩惱 ⑦修道所斷煩惱 ⑧不淨地所攝煩惱 ⑨淨地所攝煩惱이다13)
이와같은 9가지 번뇌를 대치하는 법으로서는
①②③번은 出世間智에 의해 끊을수 있다고 하고,
④⑤는 不淨觀 의 智慧에 의해 끊을수 있다.
⑥은 有學의 凡夫가 가지는 번뇌로서 처음 出世間法을 보는 智慧에 의해 끊어진다.
⑦은 有學의 聖人의 번뇌로 出世間法을 보는 것을 修習하는 智慧에 의해 끊어진다.
⑧은 初地에서 七地에 이르는 보살의 번뇌이다. 이는 第八地에서 十地의 菩薩이修習하는 智慧에 의해 끊을수 있다.
⑨은 究竟의 菩薩이 가지는 번뇌로서 金剛喩定의 智에 의해 끊어진다. 14)
이와같이 9喩에 의해서 나타난 9가지 번뇌를 열거하고 그것을 대치하는 지혜를 설했으나
원래 이번뇌는 여래의 지혜와 마찬가지로 無邊無量한 것이므로 衆生은 無量한 煩惱에 所纏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보성론』에서는 이렇게 9가지 번뇌와 그대치를 말하고 있을뿐
왜여래장이 번뇌에소전또되는 가에 대해서는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여기9가지 내용의 비유를 보면
⑴ 시들은 연꽃속의 부처님,
⑵ 군봉속에 있는 美密,
⑶ 단단한 껍질속의 부처님,
⑷ 더러운 것이 묻은 黃金,
⑸ 땅속에 묻힌 珍寶,
⑹ 과일속의 씨앗,
⑺ 더러운 헝겊에 쌓인 眞金像,
⑻ 빈천한 여인이 회임한 轉輪王,
⑼ 진흙속의 寶像등을 들고, 不淨,地, 賤女는 번뇌의 더러움,
그리고 佛, 黃金, 王 寶像은 여래계와 유사 하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이9종의 번뇌는 중생의 行에 의해 8만 4천의 번뇌로 구별 되지만,
如來의 지혜와 같이 무변이기 때문에 如來藏은 무량의 번뇌에 의해 덮어져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일체중생계에 대해서는 無始의 시간 으로 부터 지금까지 마음에는 잡염의 객진성이 있다는 것과,
무시이래의 心淸淨의 法 이 俱生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9종의 번뇌는 중생의 行 에 의해
8만4천의 번뇌로 구별되지만,如來의 지혜와 같이 무변이기 때문에 여래장은
무량의 번뇌에 의해덮여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ㄱ) 如來藏의 3 自性
法身은 9유중의 諸佛, 美密, 中實의 3喩에서, 眞如는 황금의 1喩에서,
그리고 種姓은 伏藏 , 樹芽 , 寶像 , 轉輪王, 金像의 5유에 의해 알수 있다고 하고 있다.
먼저 법신에는 2종이 있는데,
하나는 무루의 법계신 으로 無分別智의 경계이며, 연꽃속의 여래와 비슷한것이고,
둘은 그것을 얻는 因 인 所說의 법으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즉 승의체 에 관해
보살장의 법을 설하는 것은 蜂密喩에, 世俗諦 관해 經 등을 설하는 것은 內美喩 에, 의해 비유하고 있다.
다음에 眞如는 자성이 불변인 것, 妙善인 것, 청정인것이기 때문에 황금에 의해 비유되고 있다.
그자성청정심은 邪定聚의 중생에 이르기 까지 차별이 없는 것이지만,
객진 번뇌가 청정하게 되었을 때 이를 如來法身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래의 종성은 뒤의 5유중 伏藏喩를 2種姓 중의
住 自性種姓에, 수목은 習所性 종성에 상응 한다고 하고,
주자성종성에는 寶像으로 비유되는 自性身,습소성 종성에는
전륜성왕에 비유되는 변화신의 3身 이 설해져 있다.
佛身說에는 開應合身說의 삼신설과 開眞 합응설의 삼신설이 있으나
이3종의 불신설은 참된 이치와 智慧를 열어 보살을 교화하는 수용신과
二乘凡夫에 시현하는 변화신을 합하는 후자의 삼신설에 속하는 것으로 후의 佛身論에 큰영향을 주고 있다.
이와같이 여래장은 법신처럼 廣大하고 眞如처럼 무차별한 것 으로 항상 衆生界 중에 존재 한다는 것이다.
無眼의 사람은 태양의 빛을 보지 못하는것과 같이 범부는 유루의 五蘊등 제법을 我 와 我所로 설정하고 그것에 집착하며,
二乘은 無常 苦 無我 不淨의 想에 애착 한다고 하고,여래장의 常,樂,我,淨을 修習해야한다고 하고 있다.
또 初發心 菩薩은 여래장의 空性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물이 멸괴 하는 곳에 공성의 해탈문이 있다고 생각 한다거나,空을 色 과 다른 것으로 보고 공을 증오 하려고 한다고 하고 있다.
이는 그어느것도 空性 이취의 여래를 이해 하지 못한 것이다. 본래 법성 청정한 여래장은 객진의 垢를 떠나 있기 때문에
제거해야 할 잡염의 相이 없으며, 청정의 법성이 自性이기 때문에 취해야할 청정의 상도 없다.
여래장은 유와 무의 二邊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공성의 상이 나타나게 된다.논에는 여래장의 뜻이 잡해한다는 것
을 『열반경』을 들어 설명하면서 十地에 있는 보살들 까지도 여내장을 조금 보는데 지나지 않다고 결론 짓고 있다.
6),爲何義說品 第七
앞에서 기술한바와 같이 如來藏 의 의미는 만약 十地의 보살들까지그경계가 되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범부에게 說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된다고 하고 이에 대해 論하고 있다.
「處處經中說 內外一切空 有爲法如雲 及如夢幻等 此中何故說 一切諸衆生 皆有如來性 而不說空寂」
내외 일체가 꿈과 환영과 같이 모든경에는 일체의 所知는 空이라고 설하고 있다.
여기에 또 佛이 衆生에게 如來藏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에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而有法弱心 經慢諸衆生 執若虛妄法 謗眞如佛性計身有神我 爲令如是等 遠離五種過 故說有佛性」
法弱한 마음을 가지는 자와,
下劣한 중생을 경멸하는 자와,
허망의에 집착 하는자와,
진실의 법을 비방 하는자와,
강한 아집을 가지는자 등의
다섯 가지 허물이 있는 자들에게 그것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如來藏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다음, 『보성론』에서는 다섯 개의 허물을 버리게 하기위해
如來藏이있다고 설하는 것 이라고 하는 것이며,
⑴ 如來藏이 있다는 것을 듣지 않기 때문에 자기에게 佛이 잇는因이
있는것을 알지못하고 스스로비천에 빠져서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⑵ 보리심을 일으켜도 그것을 자부하는 사람은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은 자에게 하열의 생각이 생긴다.
⑶ 慢心이 있는 사람에게는 正智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진실의 義를 알지 못한다.
⑷ 衆生의 과실은 객진의 것이므로 참다운 것이 아니지만自性淸淨의 공덕이 있다.
⑸ 참다운 것이 아닌 허물에 집착하여 진실한 공덕을 알지 못하므로如來藏을 갖추고 있는것에 의해서
平等한 慈悲를 얻지 못한다. 등의 다섯 개의 잘못을 들고 있다.
다음으로 衆生이 如來藏을 갖춘 것을 듣는 것으로 인해
⑴ 자기의 길을 成就하는 용맹과,
⑵ 다른 衆生을 스승과 같이 공경하는 것 ,
⑶ 諸垢는 본래 부터 淸淨하다고 아는 般若와,
⑷ 功德은 自性에 의해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아는 智慧와,
⑸ 自他가 平等하다고 아는 大慈悲가 생하는五德이 생긴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7). 身轉淸淨成菩提品第八
如來藏, 즉 有垢眞如에 대해서 설했으므로
다음에는 無垢眞如, 곧 雜食身에서 淸淨身을 얻은 전의에 대해
⑴自性, ⑵因, ⑶果, ⑷業 , ⑸相應,⑹行, ⑺常住, ⑻不可思議八義를 들고 있다.
주게 석문에서는 自性淨光 인 佛體가 번뇌와 所知의 二障을 사리하여 청정해 졌을 때를 전의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의해 청정은 自性淸淨과 離垢淸淨임을 알수 있다.
자성청정에 대해『보성론』에서는
「淸淨者略有二種 何等爲二 一者自性淸淨 二者離垢淸淨 自性淸淨者 謂性解脫無所捨離
以彼自性淸淨心體 不捨一切客塵煩惱 以彼本來不相應故
자성청정은 본래 解脫한 것이지만 번뇌를 여의거나 버리는 것이 없음이니,
저 자성인 청정한 마음의 체가 일체 객진번뇌를 버리지 않는것은
그것이 본래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라한다.
또한 離垢淸淨에 대해서
「離垢淸淨者 謂得解脫 又彼解脫 不璃一切法
如水不離諸塵垢等而言淸淨 以自性淸淨心遠離客塵諸煩惱垢更無餘故
이를태면 해탈을 얻는것이고, 또저해탈이 일체법을 여의지 않는
그것이마치 물이 모든먼지와 때를 여의지 않음으로써 청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自性의 淸淨한 마음도 모든客, 塵과 모든번뇌의 때를
아주 여윔으로써 다시 남음이 없기 때문이다. 또 저과(果)를 의지해
때를 여의어 청정하기 때문이다.」 라하며 ,
無垢의 일체공덕을 구족하고, 常住, 堅固, 不滅의 佛
그것은 無分別智後德智에 의해 얻을수 있다한다.
즉 탐과 객진번뇌를 벗어난 청정은 무분별지의 果,
일체 최승의 남김없는 공덕을구비한 佛身을 얻은 것은 後得智의 果 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佛 에대해 즉(상응) 佛 은 不可思議, 常住, 恒久, 淸凉, 永久,寂靜, 周遍, 分別을 떠나있어
허공처럼 無着하고 一切處 에 막힘이 없으며,
粗惡한 촉감으로 부터 벗어나 있고,
不可見,
不可取,
善淨,
無垢이며,
첫째는 법몸의 여래 이시고,
둘째는 형상몸의부처님이시라 고 설한다.
8),.如來功德品 第九
비유하자면 마니보주의 빛과 색깔과 형태처럼
여래에게 十力, 四無畏,十八不共法, 三十二相등 64 種의 매우 無垢한공덕이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自利와 利他는 第一義 (法身)과, 그것에 의지하는세속의 (色 )身이다.
즉 32대인상은 변화신과 수용신에 의한 것으로 달그림자가 물속에서 빛날때,
허공에 있는 달의 형체를 보는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며 불삼신과 64種 功德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원만히 하는 所依는 第一義身 이며,
세존의 세속과 言說身 은 타인의 이익을 성취시키는 의지처이라 는 것,
第一義身 에는 十力등의 所斷을 遠離 함으로 만이 얻을수 있는 제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그 要義 는 十力,四無畏,十八不共法 등 32는 法身에 의하여 나타나는 공덕으로,
비유 하자면 마니주 에 있어서의
광명(十力),
색채(四無畏)와
형체(十八不共法)와 같다고 설하고 있다.
또 보는자로 하여금 환희를 주는 공덕인 32大人相 은
변화신과 수용신에 의한 것으로 달그림자가 빛날 때,
허공에 있는달의 형체를 보는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며
불삼신과 64종 공덕의 관게를 설명하고 있다.
9).自然不休息佛業品 第十
중생구제를 위한 佛業이 無功用 自然이면서 相續不斷하게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게 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調伏되는 界(교화되어야할 중생)와,
조복하는 (種種)이 방편과,
조복되는 界에대한 (진실을 보는 등의) 교화의 所行과,
(조복 되는자 가 머무르는) 장소와 시기와 거기에 가는데 있어서,
遍滿主 (인 等正覺者)는 항상(無功用) 任運대로 행한다.
最勝한 공덕의 보배를 갖춘 지헤로운 물의 바다,
복덕과 지혜의 햇빛을 감추고,
乘을 남김없이 성취하여,
邊도 中도 없는 광대한 허공처럼 주편하고,
無垢의 공덕을 갖춘 보배로운 복장과 같은 佛,
그것이 일체중생에 차별없이 있는것을 보고,
번뇌, 所知藏 의 구름의 그물을
제불은 자비의 바람으로 불어 흩어버리는 것이다.
佛業의 상속부단에 대해서 8偈를 언급하며,
⑴ 果地에出離하는 因인 十地,
⑵ 복덕의 2資糧,
⑶ 그果인 最勝菩提,
⑷ 중생은 보리의 性을 섭취하고 있다는것,
⑸ 그러나 무변의 번뇌와 습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⑹ 그장애를 끊는 緣 은 佛의 대자비 이다는 것 등의
6義를 들고 있다.
佛의 自在에 대해
⑴ 帝釋,⑵ 太陽,⑶ 雲 ⑷ 梵天, ⑸ 太陽, ⑹ 摩尼寶,⑺ 反響.⑻ 虛空,
⑼ 大地의 9喩를 들고 있다 또 佛業은 어떠한 비유로서도 언급할수 없다는 것을,
佛은 帝釋의 영상과 같은 것이 있지만
제석에는 佛과 같이 설법할수 있는 音聲論 이 없다는 등의 9喩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0). 較量功德品 第十一
이품에서는 論의 결론으로서 이상의 佛界, 菩提. 佛功德, 佛業은 여래의 경게이기 때문에 信解해야 할것임을 설하고 있다.
지헤를 갖춘자가 如來의 경게인(佛界등)을 신해함에 의해 이해 한다면 如來의 功德을 모은 그릇이 된다.
그는 불사의한 공덕을 즐겨 구하기 때문에 일체 모든중생의 모든 복덕 보다도 수승 하게된다.」
보리를 얻는 禪定을 닦는 것 보다도 이論의 1구만이라도 듣고, 또 들어서 信解 한다면,
施 ,戒 ,禪의 이논의 三福 보다도 한층많은 복덕을 얻는것이라고 하고 있다. 곧이논의 1구를 듣는 것,
즉 如來藏 義를 듣고 신해할것이 강조되어 있다.
如來藏義를 듣고 信解 하는 것 과 煩惱滅과 의 관계에 대해서는
보시에 의해서는 (조금의) 수용만을 (이루고),
(지)계에 의해서는 천상(의 낙)을 (얻으며)修禪으로는 (現前의)번뇌를 (滅한다) 그러나
반야는 일체의 번뇌와 소지(障)을 捨離함으로 반야가 최승이다.
그(반야의) 因 은 이(佛界등의 四句)를 듣는일이다. 고 하고 있다.
곧 諸障을 멸하는 최승인 반야의 因 은 如來藏義 의 聞信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護法의 방편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을 스스로의 지혜로 분별하여 잘못 해석 해서는 않된다.”
“지혜를 견해에 집착하는 잘못속에 빠뜨려서는 안된다” 고 하고 있다.
또 재謗法 의 원인으로는 지혜가 비천하기 때문에 不了義를 진실이라고 집착하는등의 十因을 들고 있고,
謗法 의 果 에 대해서 는 智者는 독사나 살해자 보다도 謗法을지옥 으로 가는길 이라 하여 두려워 한다.
삼악도의 사람이라도 법의 뜻을 사유 한다면 해탈에의 길은 열려있으나
방법자에게는 어디에도 해탈은 없다라고 엄하게 謗法을 경계하고 있다.
끝으로 저자는 칠금강구를 해설하여 얻은 공덕으로 사람들이 무변광의 무량수불을 뵙고
無垢의 法眼이 생기며, 最勝菩提에 통달할 것을 願樂 하고 있다.
2)『寶性論』의 著者 成立年代
『보성론』梵本의 論名은 Ratnagotravibhāga-mahāyānôttaratantraśstra)
이다.범본은 Dr. EH. lohnston 과 Dr. T. Chowdhry 에 의해
1950년 빠드나의 Bihar Research Society 에서출판되었다.
티베트와 네팔에서 두종류의 범본 寫本을 발견하고 필림에 담아온 것이다.
10세기 무렵의 ?arada 字 體의 A寫本을 저본으로 하고.
11세기 경의 Nepali 字體 의 B 寫本 校合 한 것으로 합하여 漢譯,티베트역,
英韓을 참조하여 근세 출판 한 것이다.
티베트 傳 에는『보성론』의 「게송」, 즉 「논」은 彌勒의 作 이고,
「釋文」, 곧「논해설」은 無着의 著作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티베트의 전승은 A와B를 彌勒의 著作으로 그리고 C를 無着의 著作으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전승은 티베트어의 역의 『보성론』을 영역하였던 오버밀러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는 그의 영역본의 해설에서
소위 彌勒의 5부논서
『大乘莊嚴經論』
『中邊分別論』
『法法性別論』
『現觀莊嚴論』
『寶性論』을 검토하면 그들의 문제와 유사성 을 지적 함으로써 이들이 모두동일인의 저작인 것으로 결론 짓고 있다.
그리고 『보성론』의 주석부분이 무착의 것임을 논증 하기 위하여 그는무착의 개인적 사상의 발전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즉 무착은 철저한 관념론인 유가행 유식학에서 출발 하였으나.
『현관장엄론』의 주석에 나타나 있듯이 중관철학의 일원론에 접근하고 있으며,
후에는 『보성론』의 주석에서 확인 되 듯이 순수하고 철저한 일원론을 취 했다는 것이다.15)
그러나 범본에는 저자의 이름이 없다. 梵本의 출판자 존스틴은 1935년에
대략8세기 말로 추정되는 우정문자의 『보성론』의 단편에 대해 발표하고,
그무렵 우전에는 이논을 彌勒에게 귀결 시키고 있다고 하고 있다.
또 존스틴은 1950년에 출판한 梵本의 緖言에서 安慧(Sthiramati)가 『보성론』의 저자라고 하고 있다.
漢譯『보성론』은 508년에 중국에온 勒那摩提 에 의한 것이지만 저자 名 이 없으며,
經錄에도 이논의 저자 이름은 찾을수가 없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전통적 으로 堅慧의 저작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제운반야에 의해 『大乘法界無差別論』(691년역) 이 번역 될 때,
筆受의 역할을 맡았던 賢首法藏이 그에 대한 주석서
『대승법계무차별론소』 속에서
『대승법계무차별론』과 함꼐
『보성론』이 모두 견혜의 저작이라는 이야기를
提雲般若로부터 들은것이라고 기록 한데에서 유래 한다.
당시 證義의 역할을 맡앗던 西明圓測의 『해심밀경소』 에도 같은 이야기가 등장 한다는 16)점과
견해는 佛滅後 700 년경의 사람 이라는 것을 기록하며,
중국에서는 이에 앞서 천태지의 의 『마하지관』 권3하(594)년에는 「堅意의 ‘보성론’」이라고 하고 있어
보성론이 堅意의 作 이라고 이야기 되고 있다. 17)堅意와 堅慧가 같은 인물이라는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보성론』의 저자가 견혜라는 전승은 일찍부터 유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堅意에 대하여 唐의 慧祥은 『法華經傳記』 제1에서 眞諦 의 相傳으로 하면서 용수를 佛滅 500年의 마지막으로,
堅意를 600 年의 시작으로 하고 있다. 經錄에는 堅意에게 北凉道秦 이 번역한 『入大乘論』2권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堅慧에 대해서는 法藏, 圓測의 기술외에도 玄裝의 『大唐西域記』 卷 9?11에서 堅慧는 德慧와 함꼐 저명한 유식10대 論師라
하고 있다. 이에 의한다면 佛滅 900年에 出世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世親의 후배라는 것이 된다.
근래『보성론』 의 根本偈, 註偈, 釋文에 의해서 본 구조적 사상의 연구 如來藏史上 인접해 있는
『法界無差別論』『無上依經 』,그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이 제시될수 있을것으로 생각한다.
1) 『보성론』은 佛身論에서 二身說 , 三身說을 동시에 거론하고 있다.지나친 단순화의 오류일수도 있지만,
前者는 中觀의 입장을 그리고 後者는 唯識의 입장을 반영하고 잇는 것으로 간주 할수 있다.
또『보성론』은 空性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中觀,唯識과는 구별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보성론』은 사상사적으로 독자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할수 있다.
그러면서도 『보성론』에는 유식학의 용어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러나 유식학의 가장기본적인 개념이라고 할수 있는 알라야식 (識 ), 三性說 등의 용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따라서 『보성론』은 유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는 있지만, 유식의 이론이 확립되기 이전의 문헌이다.
즉 世親 以後가 되면, 부정적이라도 알라야식등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성론』은 세친과 는 무관계하게 世親 同時代에 성립된 문헌으로 간주 된다.
2) 내용의 발전에 층이 있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편집서라는 관점에서 著者는 어느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점은 『보성론』의 본송과 주석게 사이에 思想的인 중관이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말하자면 『보성론』은 복수의 저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위의 관점에서 『보성론』은 5세기초, 유가행 유식학의 영향아래에서 堅慧를 주측으로 하는
일단의 그룹에서 성립 되었을 것이다.19)
3) 『寶性論.』에 나타난 如來藏 의 意味
ㄱ) 智慧와 慈悲空性과 廻向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大乘’ 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는 ‘菩薩乘’ 이라는 말이 이를 대신 했던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점은 소위 ‘原始大乘’ 경전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는 『금강경』에서 ‘大乘’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지않은 점에도 확인
된다. 그런데 보살의 보살 다음은 일반적으로 지혜와 자비의 구족인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그는 깨달음을 지니므로 생사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도, 자비의 마음을 지니므로 열반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다. 소위 보살의 無主處 涅槃이 그것이다.
이와같은 보살의 두특징, 나아가서는 ‘大乘’의 두수레바퀴 라고 할수있는 두지혜와 자비의 문제는
『보성론』의 문제에서는 이문제를 僧寶에 관한 언급 가운데에서 거론하고 있다.
『보성론』은 僧寶를 ‘菩薩乘 ’의 ‘寶 ’로 규정하면서,
그보살은 自性淸淨을 여실히 아는 무장애 의 ‘慧 ’와 무변한 일체 중생을 그대상으로 하는 ‘智’를 갖는다고 한다. 20)
그리고 이러한 菩薩의 앎은 각각보살의 如實修行과 編 修行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그런데 『유가사지론』의 이해를 바탕으로 할대, 여실수행이 ‘진실성’에 이르는 현상적 有,無 의 대념을 파기하는
부정적 의 앎의 형식이라면, 편수행은 그러한 앎이 소위 별도의 영역으로 격리되지 않고 현상적인 일체의 존재에
편만되어 있다는 ‘일체성’ 즉 보편성의 긍정적인 앎이라고 할수 있다. 또『해심밀경』은 이들을 각각 眞如,변제로 부르고 있다21)
이러한 대응은 결국 보살 나아가서는 여래의 지혜의 증득과 자비의 실천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보성론』은 이를 ‘궁극적인 無我性 과 ’如來藏 의 存在‘ 의 대응으로 설명하면서,
특히 후자에 대해 다음과같이 말하고 있다.
「편수행은 알려지는 대상의 극한에 까지 이르는 지혜에 의해 일체의 중생에 一切智의 法性이 존재함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편수행이란 것은 일체의 앎의 대상의 극한에 까지 이르는 출세간의 지혜에의해 일체의 중생에,
축생의 상태 에 있는것에 이르기 까지 ‘여래장이 존재함을 알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앎은 보살의 初地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오직그단계 에서만] 法界(法 의 本質)는 편재 (遍一切處)의 의미로 깨우쳐 지기 때문이다. 」22)
여기에서 우리는 여래장 의 존재가 慈悲와 관련되어 설명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할것으로 생각된다.
즉 여기에서 중생은 지혜와 관련하여 無我의 존재로 간주 되지만, 자비의 영역에서는 모든중생이 여래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말하자면 無我로서의 중생이 여래장 일수있는 것,
여래장 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근거는 여래의 자비에 있다는점,
如來藏 은 여래의 자비적 전개라고 하는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보성론』이 大乘의 두수레 바퀴로서의 智慧와 慈悲를 다함꼐언급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如來藏 思想의 성립기반은
慈悲의 측면임을 확인할수 있다. 이러한 점은 ‘교설의목적’을 설명하는부분 (第 7 爲何義說品)에서 현시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處處의 經에서 一切의(境)은 空이며 구름 번개.꿈메아리,환영과 같다고,
이와같이 설해 져 있는데,다시 왜 불성은 개개의 모든 중생에 존재한다고
여기에 諸佛이 설하는 동기의 인연은,
첫쩨 겁약한마음,
둘째낮은 중생에 대한 경시,
세째 허망한것에 대한 집착,
넷째 진실된법에 대한 비방,
그사람들이 이를 단멸 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설하는 것이다. 23)
여기에서 언급되고 잇는 ‘처처의경’은 반야경등을 지칭하는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야경들이 空性을 주제로 하고 잇다는 점도 잘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면 위에 게송에서도 제기되고 있듯이 일견공성의 哲學과 모순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如來藏 ,佛性의 存在를 새롭게 주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보성론』은 그이유, 교설의 목적은 중생의 다섯가지 허물(五過 )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보성론』은 五過 의 제거에 의해 획득된 ㅡ 五法(大勇猛 스승에 대한 尊敬,般若,智,大悲)
여기에서 般若와 智는 엄격하게 구별되고 있다.
즉 前者는 과실이 없는상태,
後者는 功德을 지닌상태로 설명된다.
이것은 般若가 法 에대한 空 의 개념,
智가 性에 대한 不空의 개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般若는 空의 體得이며,
智 는 不空의 證得으로서,
여기에서 智 는 부정적 기능의 般若에 대해 비판적이며 긍정적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다.
나아가 『보성론』은 자신에 대한 애착의 과오에 대해, 衆生과 자신을 평등하게 사랑 함으로써
佛陀의 本性을 성취하는 大悲 의 功德을 설하고 있다. 이와같이 般若,智,大悲가 나란히
거론되는 것은 『보성론』이 般若를 부정적인 것으로,
智를 긍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준다.
大悲는 현실긍정 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는것이라고 한다면,
현실 부정적인 般若로서는 직접대비 로 연결되기 어려우며,
현실 긍정적인 智를 매개를 하지 않으면 않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智가 般若에 대해 비판적 이라고 하였는데 般若가 비판되는점은
“大悲를 수반하지 않는 般若”
“이세게에 활동하지 않는 般若” 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般若와 智 의 구별은
‘如來藏의 열가지 意味’
가운데 ‘無差別’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곳에서 般若는 出世間의 無分別의 앎,
智 는 그후에 얻어지는 一切智者의 앎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前者는 ‘어둠의 소멸’ 後者는 ‘빛의 편만’ 으로 비유되고 있다.24)
이것은 根本無分別智, 後得世間智, 의 구별과 一致한다.
前者는 내용이 없는 순수한 앎그자체라고 한다면,
後者는 世界의 구석구석에 대한 남김없는 앎이라고 할수있을것이다.
결국 智 는 衆生하나하나의 처지에 대한 앎이고 또 그들에 대한 배려인 것이다.
이러한자의 성격은 佛寶에 대한 언급에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보성론』은 佛寶의 특징으로
無爲性 -
不變性,
無功用性 -
인위적 노력의 결여.
不依他知 -
다른 사람에게 依存하지 않고 이룬 깨달음.
智 ,
悲,
力-
번뇌를 제거하는 힘, 을 거론 하면서
앞의 셋을 自利의 成就,
뒤의 셋을 利他의 成就로 분류하고 있다.25)
여기에서 智 는 他者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것으로서, 智 의 完成은 곧 利他의 成就로 간주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智 는 “一切法을 그대로 깨우쳐 衆生들의 本性 = 法界를 관찰하여 그들이 不淨, 不離垢 有汚点 임을 아는 것” 이다. 『보성론』은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곧 일체중생이 如來藏 임을 확인하고 닛다. 즉 『보성론』이 강조하는 智慧는
모든중생이 如來藏 이라는 앎이며, 이 如來藏 의 智慧는 利他의 成就, 大悲 의 실현이외의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즉 일체중생이 여래장임을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가능케 되는것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大乘佛敎의 두수레바퀴, 두날개는 智慧와 慈悲라 고 하였으며,
『보성론』은 지헤를
般若와 智 로 구별하면서
前者보다는 後者를 강조하고 있는점을 보았다. 그것은 초월적인 지혜보다는
慈悲로 귀결되는 智慧를 강조 하기위한 것이며, 사상사의 관점에서는 반야경의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지양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지양을 가능케하는 근거는 大悲 이다. 그러나 대비는 동시에
그지양의 귀결점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般若,智 는 대비의 안에서만 그존재의 意味를 가질수 있고,
또 그의미는 대비로 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보성론』 의 답변은
‘一切衆生이 如來藏 ’ 이라는 說法을 통하여 衆生救濟의 활동,대비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大乘佛敎일반에서는 대비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은 廻向의 문제로
생각된다. 淨土界 經典 의 원형이 初期의 般若經典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성립되엇다는 지적도 있으며 淨土經典中
핵심적인 내용중의 하나가 아미타불의 本願 즉 廻向 이기 때문이다. 회향은 일반적으로 業 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면 業의 어떠한 성격이 그러한 결과를 낳는것인가?
業 은 물리적 필연성과 자기책임의 원칙을 갖는다. 자연의 인과 율과 같이 어떠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그결과는 바로 행위자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업이 숙명론적인 성격만 있는 것만은 아니다. 業 은 과거로 부터의
규정에서는 하나의 결정론이 지만, 未來로 나아 갈때에는 명확히 의지의 自由를 인정하는 일종의 창조론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즉 業 은 現實을 설명하는 경험론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未來를 향한 救濟論 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業說은 佛陀가 이를 수용 하였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문제를 떠나 그성립당시로부터 現實을 설명하고 未來를
설게하는 이론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修行 하였을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설은 기본적으로 개체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수 는 없다. 26)
그래서 업설은 개인의 전체체로 향한 개방적인 삶을 설명하는데는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닫힌 실존만을
반영할 따름이다. 따라서 그자체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業의 법칙을 초월하는 구제의 원리, 회향의 이론을 설정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업설이 일찍부터 제식의 논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전되어 왔던점에서 확인된다.
제식은 일찍부터 제식의 논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전되어 왔던점에서 확인된다. 제식은 일직부터 業 의 논리의 경직서를 완하 하는 것으로 기능하여 왔다. 회향의 논리에는 A가 쌓은 공덕이 A에게만 이 아니라 B에게 또는 C에게, 나아가서는 아무런 제한없이 누구에게라도 귀결될수 잇으며 (방향의 전환), 인간의 인위적 노력?닦음이 무한한 結果 즉 개달음으로 귀결될수 있는 것이다(내용의 전환).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놓여있던 울타리가 제거되고 모든사람이 동일한 기반위에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나아가야 할방향이 따로 없고 바뀌어야할 내용이 따로이 없다. 大乘佛敎는 궁극적인 동일성 또는 不二性 의
이러한 상태를 空性이라 表現한다. 이 空性과 廻向이라는 개념 自體는 오래전에 성립된 것이다. 그말들이 지니고 있는 깊은
의미는 大乘佛敎 이르러서야 충분히 발현 되고 있는것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空性이 大乘佛敎의 철학적 기초 라고 한다면,
廻向은 大乘佛敎의 종교적 실천 이라고 부를수있을 것이다.
또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智慧와 慈悲의 문제와 相應하는 것이다.
大乘佛敎의 廻向의 이념은 阿彌陀佛의 本願에 지극히 명료하게 형상화 되어 있다.
『無量壽經』에서 말하고 있는 아미타불의 제1원을 에로 들어보자. “세존이시여, 만약 저의 불국토에 지옥에 떨어지는자,
동물계에 테어나는자, 아귀의 처지에 빠지는자, 아수라의 종류로 빠지는자, 아수라의 종류로 되는자가 있다면,
그동안 저는 이위없고 올바른 깨우침을 깨닫는일이 없을것입니다. 여기에서 네가지 그릇된 무리(四惡趣 )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法藏菩薩의 修行功德 즉 阿彌陀佛의 功德의 轉移 가
이루어 지고 잇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공덕의 轉化에 의해 ‘위없고 올바른 깨우침’(無上正等覺)을 얻게된다. 또 아미타불의 제18원 ‘臨終來迎은 아미타불의 적극적인 구제의 본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잇는 것으로 後에 아미타불의 信仰의 기초가 되고 있다. 27)
이제까지 大乘佛敎의 智慧와 慈悲, 空性과 廻向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보성론』이 前者를 배재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後者를 강조함을 살펴 보았다.
이것은 『보성론』의 주장, 즉 如來藏의 실재성이 如來의 慈悲, 廻向과 관련하여 설명되고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보성론』은 자신의 위치를 ’ 교설의 목적‘을 설명하는 주석게에서
”이 究竟의 논에서 5種 의 허물을 끊기 위하여 佛性이 존재함이 가르쳐 진다. 28)고 할때,
『보성론』은 이 如來藏의 存在에 관한 理論이 大乘의 규격적 입장이며,
나아가 그것은 如來의 慈悲에 의하여 우리에게 알려지고 또 如來의 廻向 에 의해
그 存在가 확인된다는 점을 강조 하고 있는 것이다.
ㄴ) 轉依 개념의 문제
唯識學派와 如來藏思想의 空性에 의한 이해의 차이는 空性을 바탕으로 하는 다른개념들에 대해서도 相異한 해석을 가능토록
하였다. 그중의 한가지 예가 轉依 의 개념이다. 轉依는 전통적으로 ‘所依 의 전환’ 즉 存在기반의 質的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여기에서 所依는 어떤사물이 성립하기 위한 근거?토대?기반을 意味 하는 말이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은 각각의 佛敎傳統 에서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所 依 는 原始佛敎에서 名色, 五蘊,으로 파악 되엇다. 이것은 결국 修行者의 신체적 정신적 존재기반을 말하며 ,
轉依는 이와같은 存在 기반의 전환?정화를 意味한다. 즉 轉依는 修行者의 전 人格的 자기 변혁의 論理인 것이다.
所 依가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은 아비달마에 이르르 보다 細密하게 분석 되었다.
所依는 六根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 되엇던 것이다.
이것은 육근이 육식을 낳는 근거로 생각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와같이 아비달마 불교에서 보다 분석적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所依가 修行者의 존재기반을 가르키고 있는점에는 변함이 없다.
세친의 『唯識三十頌』 제29송은 이러한 점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것(唯識性)은 [인식주체로서의] 마음이 없는것(無心)이며 [인식대상 에 대한] 지각도 없는것(無所得) 으로서,
그것은 곧초세간적 지식이 다. [또그것은 ]所依 의 전환이니, 두종류의 속박(麗重)이 제거 되었 기 때문이다.」 29)
그識들 가운데 최심층의 기반이 되는 것은 알라야식이다. 즉 개채의 존재기반이며 동시에 世界를 유지하는 기체로서 이해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알라야식은 인간 및 그가 살아가는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는 理論들로서 중요한 意味를 갖는다.
轉依가 알라야식의 根本的인 전환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간주 될 때 미망의 근거로서의 알라야식은 轉依의 논리를 빌러
깨달음의 바탕으로 작용하게 된다. 轉依의 理論은 衆生의 미망의 삶과 깨달음의 삶이 異質的인 것임을 전재하면서도,
그사이를 격절된 것으로 간주 하지 않는다. 오히려 轉依의 理論은 개달음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말하면서 자기구원의 길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다. 구원의 상향도 轉依의 論理를 빌려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점은 轉依를 廻向,
특히 菩提廻向 (내용전환의 회향)과 상통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如來藏 思想에서는 轉依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보성론』이 佛,法,僧,性,菩提,功德,業의 일곱가지 주재를 설명하고 있음을 지적 하였다.
이가운데 佛 ,法,僧은 三寶로서 궁극적으로 佛寶로 귀일된다.
그리고 菩提,功德,業은 깨달음, 깨달음의 속성, 그리고 그 活動을 意味한다.性 ,
즉 如來藏은 生死輪廻하는 미망의 衆生의 본질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망의 衆生으로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은 제4의 주재인 性과 제5의 주재인 菩提의 관게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보성론』은 이들의 관게를 所 依와 그 轉換의 문제로 說明하고 있다. 즉 『보성론』의 所依는 如來藏 이다. 이러한점은 『섭대승론』에서 알라야식을 논증하는 것으로 인용되고 있는 『대승아비달마경』의 다음과 같은 게송이 『보성론』에서는 如來藏을 論證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에서 所依가 무엇인가에 대한 유식파와의 이해의 차이를 확인 할수 있다. 『보성론』에 인용 되고 있는
『대승아비달마경』은 다음과 같다.
「無始世來性 作諸法依止 依性有諸道 及證涅槃果」
「시작도 없는 옛부터 의 性은 一切法 모두의 所依이다
그것이 있 을때에.一切의 윤회의 길이 있고, 또 열반의 증득도 있다」30)
『보성론』은 이게송을 분절하여 각각을 주석 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혀 『승만경』의 인용으로 일관 되고 있다.
1) ‘性 ’(界) 에 관해서는 『승만경』의 “世尊이시여, 이 如來藏은 出世間의 胎兒이며, 自性淸淨한 胎兒입니다. 라는 구절이,
2) ‘所依‘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世尊이시여, 如來藏 은 [그것과 본래]結合 되어 있고,불가분리이며,
智를 이탈하지 않고 無爲인 諸法의 의지, 지지,기반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본질적으로] 결합하지 않으며,
분리되며, 智에서 이탈된, 有爲인 諸法에게도 世尊 이시여, 의지,지지, 기반이 되는 것은 如來藏입니다. “가,
3)‘일체의 [윤회의] 길에 대해서는 世尊이시여. 如來藏이 存在할 때윤회가 있다는 것 은 이말에 있어 타당합니다의 부분이,
4) ’涅槃의 證得에 대해서는 만약 世尊이시여, 如來藏이 存在하지 않는다면, 괴로움을 염오하는 일도 없고 또 涅槃에 대한
욕구도 바램도 원망도 없을 것입니다.31)라는 구절이 인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보성론』이 如來藏 思想의 기본적인 체게에서
이탈된 모습을 發見한다. 『보성론』의 다른부분도 그러하지만 如來藏 思想에서 如來藏 은 적극적으로常 ,樂,我, 淨으로 규정되며 상주불변의 존재로 설명된다.
如來藏 은 法身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변화되고 염오 될 수 없는 것이다.
‘自性淸淨心 客塵煩惱’ 이라는 如來藏思想의 기본적인 입장도 바로이러한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승아비달마경』『승만경』은 淸淨함뿐만아니라 染汚도 그에 의거하여 실제하게 되는 공통의 기반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섭대승론』의 설명에도 잘드러나 있듯이 唯識學의 알라야식의 체계와 相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성론은 이것이 如來藏
이라고 함으로써 如來藏 은 그 순수성을 잃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如來藏 思想의 일반적인 체제에서 일탈된 모습이 나타나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여래장은 그 意味가 강조됨에 따라 一種의 궁극적 실재로 간주 된다. 그렇다면 如來藏 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무의미한 것,
실재하지 ?榜? 것이 된다. 어떠한것이든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이라 하면 그것은 如來藏 에 의지하여 존립하고, 여래장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생사 윤회의 미망에 세계도 如來藏 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지극히 일반적인 추론이지만 煩惱의 存在가 부정될수 없는 현실로 자각될 때 如來藏 의 절대화는 역설적으로 煩惱의 기반도 되으야하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의 如來藏 思想 및 보성론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입장을 택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성론』은 唯識의 여러 용어들을 사용 하면서도
왜 알라야식 및 三性說 에 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지를 이해 할수 있을 것이다.
轉依에 관해서 타카사키는 前者는 ‘비실재 의 소멸’ 또는 ‘혁명’ 으로 , 後者를 如來藏 思想에서의 轉依 개념이라고 한다.
또한 깨달음과의 관계에서 煩惱의 기반 이었던 알라야식은 질적으로 전환 되으야하며, 煩惱와 질적으로 다른 如來藏 은
有垢에서 無垢로의 변화라고 할지라도 본질의 전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변화는 客塵의 煩惱가
제기되고 깨달음으로서의 본질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後者와 같은 轉依가 如來藏 思想 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즉 如來藏 사상 에서의 轉依의 개념은 ‘마음의 轉依’ 또는 ‘ 眞如의 轉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유가사지론』의 경우 無餘依涅槃 이라는 개념의 도입과 밀접한 관계로 있는 것 으로 지적되고 있다.
즉『유가사지론』 「本生分」 의 無餘依地에서는 무여의 열반에서 전의에의해 존재하게되는 상태를 變移함이 없는
不滅의 궁극적 진리 (眞如) 의 정화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해석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쿠마는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즉 종래의 轉依사상은 정신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그완성이 이루어 지는 기반은 ‘감각기관을 갖춘 신체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무여열반이 고려되는 경우, 신체를 所 依 라고 하면 아라한의 죽음과 함꼐 所依자체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의
성과인 轉依를 아라한의 死後에도 존속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죽음과 함꼐 소멸되지 않는 所依가 필요하게 되엇고
이조건을 충족 시켜 주는 것이 眞如라는 것이다.
『보성론』은 여래장과 보리의 관계를 所依와 그 所依의 전환의 관게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 이다. 32) 『qhtjdfhs』은 이것을 有垢眞如?無垢眞如로 설명하기도 한다. 즉 有垢眞如에서 無垢眞如의 발전을 轉依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물론 如來藏思想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唯識學派가 轉依에 있어서의 所依및 그轉依의 동일성에 관한 논의가 個人의 실존적 관심에서 비롯된것이라면 如來藏思想 에서의 동일성의 강조는 如來로부터 확인되는것이라는 차이는 여전히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Ⅳ.
『寶性論』의 如來藏 思想
1)寶性論에 나타난 如來藏의 체계
如來藏 思想은 이미 지적된바와같이 空性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如來藏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唯識佛敎가 空性의 삼분법적 이해를 통해 알라야식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맥락의 것이다. 『보성론』은 이와같은 사유구조에서 확인된 如來藏 의 존재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보성론』의 저작동기, 『보성론』의 요어로는 ‘교설의 목적’도
바로 여래장의 존재를 선포하기위한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33)
『보성론』은 또여래장의 實有性 ,可能性,有功德性에 대한 믿음 에 의하여 여래의 지위에 도달할 자격을 획득한다고 말함으로써
如來藏의 존재가 단순한 객관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구재론적 실천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 시켜주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如來藏思想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고찰할수 있겠지만 『부증불감경』에 의하면 ,
法界를기초로 하여 衆生界가 있고, 이 衆生界는 바로 如來藏 이라 하여
중생계인 이 如來藏은 여섯가지 방면에서분석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첫째. 如來藏은 淸淨法과 무시시래 공존해서 本質的으로 결합하는 성질의 것이다.
둘째, 如來藏은 번뇌의 복장 이라고 하는 불청정법과 무시시래 공존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결합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셋째, 如來藏은 미래영겁을 지나도 항상 法性을 가진다.
넷째 자성 여래장의 본질인 自性淸淨의 방면과,
다섯째 여래장이 客塵煩惱에 쌓여 있는방면.
여섯째 心性淸淨과 客塵煩惱와의 合體로서 一切法이 의거하는 곳이라는 방면으로 고찰한다는 것이다.
『보성론』에 있어서 여래 tathagata 란 개념은 眞如와 동일시 되고, 또 여래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는 여래의 법신과 동일시 된다.바꾸어 말하면 『보성론』에서는 이법신을 진여, 법성,법계로서의 佛,如來라는의미로 使用하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이 법신이 일체중생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부증불감경』을 인용하여
「사리불아 第一義諦 이것은 衆生界 의 다른 이름이다.
사리불아, 生界 라는 것은 如來藏을 가르키는 이름이다.
사리불아, 如來藏 이란法身의 異名이다」35)라고하여,
第一義諦, 衆生界 , 法身, 如來藏. 을 동의라 보고, 衆生界를 떠나서는 法身이 있지 않고.
法身을 떠나서는 衆生界 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보성론』에서는 또 이 法身에는 두종류가 있다고 한다.
즉 「法身에는 두종류가 있다.
淸淨한 참된 法界와 또 그習氣에 의지한것이어서 깊고 얇은 이치로써 說明한다. 」
2種 의 法身이란
본성청정한 지혜 그자체로서의 法身과그智慧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교법으로서의 法身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법신편만 하다는 것은 法界를 현관한 진실증지 로서의 如來의 智慧와,
그리고 如來法身의 주체적 작용으로서의 설법이 중생에게 두루미치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法界의 등류 로서의 如來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一切衆生에게 항상설법이 되고 있다는것이며,
그리고 중생들은 언제라도 그 설법을 들을 수 잇는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法身의 慈悲的 전개이다. 그래서 이러한 如來의 慈悲가 실제로 일체중생 에게
항상 무량하게 작용하고 있다는것과 일체중생은 如來의 慈悲의 작용한가운데 있다는
이것이 法身遍滿의 뜻이며,또한 여래의 지혜가 편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如來智는 衆生이 어떠한 상태에 있어도 恒常作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신편만은 法身의 작용, 즉 지헤의 작용인 자비가 중생계에 항상 미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지혜의 획득을 의미하는반면, 자비의 전개를 의미하되 그세게관은 “自內證의 법에 대한 것임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法界로서의 法身은 등류에 대한 원인, 근거. 기반을 의미 한다. 즉 깨끗함과 더러움이 상응한곳,
또는 더럽히지 않아서 청정한 것은 그것이 본래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서로가 법을 버리지 않는곳,
자연히 分別이 없는그곳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 구족한 法身이며,
고요한 法界의 몸이나 分別없는 智慧의 경계 부처님여래 의 몸은 다만 속몸(내신)의 法界로부터 證得할수 있는것이다,
法身이 처음없는 세계로부터 衆生들의 利益을 위해 항상쉬지 않으신 그것으로서, 일체의 곳에 나무랄수가 없기 때문 三世가
平等하여 三寶와 種子를 끊지 않기 때문이며, 解脫이 一切法을 여위지 않는 것이 마치물이 모든먼지와 때(垢)를 여의지 않음으로서 淸淨自性의 淸淨도 客塵煩惱의 때(垢)를 아주 여윔으로써 다시 남음이 없기 때문이다.
즉 大乘은 이 法身의 淸淨한 因이며, 부처님 智慧를 모은 因의 자리다.
遍滿함이란,
그 淸淨한 法界의 等流로서 所化의 근기에 따라 다른중생들에게 알려주는것이다. 또한이것은 설 한바의 法임을 알아야한다
菩提의 갈래에 의지해. 아는것과 菩提의 갈래로 敎化 하느냐을 통해 중생들이 菩提를 깨닫는 것이다.
즉 그 菩提의 탄생은 平等性智의 발로인 大悲의 實現을 通해 서이며, 菩提의 앎은 남을 의지 하지 않고 증지하기 때문이며,
남을 의지해 나지 않기 때문으로, 如來의 함이 없는 法身의 모양에 의지하기 때문에 일체불사가 처음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자연히 行하여 항상쉬지 않으며, 부사의한 부처님의 경계는 남을 따라 듣지 않고서 慈悲로운 智慧와 말없는 몸으로 스스로가 깨달아 아는 것이다.
부사의하고,
둘이아니고(不二),
分別이 없고,
淸淨하고,
顯現하고,
대치하고,
結果를 여의고,
原因을 여윔이 그것으로,
그러므로 논하건데,
없다고 하겠는가.
있다고 하겠는가,
둘이라 하겠는가,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니라하겠는가,
저것에 나아가는것도 아니고 저것을 여위는것도 아니라 하겠기에
心의본성은 바로 法性법계 와 같은것이며 ,
이것이 擬. 人的으로 표현될 때 法身이며
또한 衆生界의 本質이라는 意味에서 法身이란 衆生界와 同義語 가 된다.
2)眞如의 無差別
眞如가 차별이 없다는 것은
如來와 衆生(佛 과 凡夫)의 本性이 無差別 다는 意味이다.
「일체중생의 평등한 여래장과 眞如淸淨法을 如來의 體라 한다. 이뜻에 의해서 一切衆生은 모두 如來藏 이 있다고 說 한다.」 38) 라고하여, 眞如如來의 性品이나 邪定聚 衆生들의 마음은 본성상 동일 하고 차별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연기적 존재인
一切衆生을 眞如空空性이라는 본래적 근원적인 사실에서 볼대는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다시말하면
如來란 無垢의 眞如이고
衆生은 有垢의 眞如라고 볼 때,
眞如라는 점에 있어서는 差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一切衆生에 있는 有垢의 眞如가 그 垢를 없애고 淸淨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如 來와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無差別性의 意味에서 볼대 一切衆生은 實 有佛性하다고말할수 있다. 이것은 본질적인 如實한 자세에 있어서는
如來와 一切衆生이 差別이 없다고 하는 如來의 智慧的인 根源的 事實에 대한 表現이다. 그러나 人間側의 事實에서 볼 때
人間은 自身의 分別妄想에 의해서 三乘이나 一闡提와 같은 差別相이 나타나는 것이다. 39)
本性淸淨說 客塵煩惱說을 근거로 하여 성립된 如來藏思想은 일체 중생에게 如來의 本質로서 眞如無差別 (平等) 法身遍滿 如來性이 있다고 한다. 眞如平等은 반야「空.」사상을 基盤으로 해서 일체는 연기이면서 空性이라고 하는 근원적 사실에서 말해진다.
여기서 眞如는 있는 그대로의 本性,法性이다. 그래서 이 眞如平等은 如來의 本性과 衆生의 本性이 眞如上 에서는 平等하다는,
즉 眞如法界와 衆生界가 본질적으로 同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 眞如의 무차별성을 토대로 해서 如來의 법신을 더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중생은 다 如來藏이 있다는 것이다.
3) 如來性 - 종성의 존재
如來性이란일체중생에게 如來의 種性 이 모두 있다는 意味이다.
如來의 種性이란 如來의 家族 혹은 同流라는 意味이다.
즉 佛 의 집에 테어난 佛子라는 意味이다.
그런데 이 佛 의 種性이 일체중생에게 모두 있다는 것은 일체중생이
모두다 佛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成佛에 대한 확신 의 표현이며,
수행자 에 있어서는 실천상의 근거에 대한 확신이라 할수 있다.
『보성론』에서는 이러한 如來의 種性 에 두가지가있음을 밝히고 있다.
「佛性에는 두가지가 있으니 그하나는 땅속의 광(地藏)과 같고,
다른하나는 나무의열매(樹果)와 같아서 自性淸淨한 마음과 修行하여 無上道를 이루는 것이다.」 40)
自性淸淨한 心은 본래 가지고 있는心 의 本性으로서 存在하는 것으로 眞如 그자체이다. 즉 그것은 法身이며 如實知가
거기서 생긴다. 그리고 修得完成된 種姓은 色身(報身?化身)이 거기서 얻 어지고 如量知 가 거기서 생긴다.
이것은 聞 과 思를 緣 으로 해서 修得된 種性 이다. 이같이 일체중생 에게 如來의 種 性이 모두 있다 는 事實은 佛道를 遂行하는자에 있어서는 如來의 種性 이 자신에게도 存在하며 (本性住 의 完成된 種性 ) 그리고 修道에 의해 나타낼수 있다고 하는
(修得 완성된 種性)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볼때 일체중생이 如來藏 이어야 하는 理由는 如來의 法身이 두루 가득차 있다는 如來의 慈悲的 宗敎的事實과
眞如가 無差別 하다는 智慧的 根源的 事實, 그리고 모두가 다 佛이 될 수 있는 種性 (因 )을 갖고 있다는 불도실천에 있어서의 자각적 사실로 요약될수 있다41) 또한 여래성은 중생이 최고 완전하게 깨달음을 얻을수 있는 能力, 즉 如來性이 衆生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 져 있으므로 중생은 모두 예외 없이 여래의 種姓에 속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一切衆生의 成佛근거는 如來의 智慧의
보편성과 그지혜 作用으로서의 慈悲의 恒常性, 그리고 佛道를 닦으려고 하는 중생의 主體的,自覺的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信과 如來功德
지금가지 여래장의 의미, 여래장의 본질과, 여래장의 삼자성에서 여래의 특징을 고찰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如來藏의 意味는 오직 如來만의 경계이어서 중생들은 알기 어렵다고 한다. 즉
「自性淸淨心이 汚染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알기 어렵다.
첫재, 자성청정심을 了知하기가 어렵고.,
둘째, 그心이 煩惱에 물든다는 것을 아는것도 역시 어렵다.」42)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은 如來藏을 信,樂해서 전심으로 修學하면 해탈을 얻을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를 『보성론』에서는
『부증불감경』을 인용하여 如來藏 을 如來만의 行境이라고 하고 있다.
즉 『부증불감경』에서는 중생게와 法身을 말하는중에
「이 깊고 깊은 뜻은 곧 如來의 智慧의 경계이다. 또 이는 如來의 마음이 행하는 곳이다. 사리불아, 이와같은 뜻을 일체의 聲聞과 緣覺의 지헤로는 알수 없는 것이며 볼수 없으며 관찰할수 없다.. 하물며 어찌 一切의 어리석은 凡夫로서 헤아릴수 있겟는가, 오직 부처와 如來의 지헤만이 이뜻을 관찰하고 知見한다. 사리불아, 일체의 聲聞과 緣覺의 지혜는 이러한 뜻중에서 오직 우러러 믿으야만 하며 如實하게 知見하고 관찰할 수는 없다.」43)
또한 『승만경』에서는
「일체의 阿羅漢과 벽지불의 깨끗한 지헤로도 일체의 온갖 지헤의 경계와 如來法身은 본래부터 보지 못하는 것이다.
혹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까닭에 常想 ,樂想 ,我想,淨想을 일으키더라도 이것은 결코 잘못된 견해가 아니다.」44) 고
하여, 객진번뇌에 쌓여잇는 자성청정심은 如來藏 ,如來法身,如來智이고, 이것은 오직 如來만의 경게이므로 土地의 菩薩도 조금
밖에 볼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凡夫는 如來에 歸依해서 자기에게 如來藏 이 있다는 것을 믿을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如來藏은 不可思議하기 때문에 如來에 歸依해서 그것을 믿는 것만이 大乘道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大乘法을 믿지 않는 일천제 등의 衆生들이 淸淨하게 될 수 있는 첫것음도 먼저 大乘法에 대한 信解라고 하여,
信解가 大乘道 에 들어 眞理의 智慧를 얻는 유일의 道라 하고 있다.
즉 믿음에 의해 一切의 智慧와 福德을 얻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덕은 六波羅密의 修行에 의해서 얻는 공덕보다도
如來藏에 대해서 설하는 一句만 듣고 그것을 信解하는 공덕이 훨신 뛰어나다고 하고 있다. 즉 如來나 如來藏이라고 하는 眞實의 世界에 대한 信解가 최고의 功德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최고의 공덕이란 佛의 十力, 四無畏,十八不共法,三十二相등의 六十四功德으로서 이러한 공덕을 衆生도 가질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一切衆生이 如來藏이 잇다는 것을 믿고 如來에 歸依해서 修行할대 衆生도 如來가 될 수 잇는
가능성, 즉 如來와 동일시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Ⅴ 如來藏 緣起說
1. 如來藏 緣起의 根源
1)緣起의 起源과 目的
불교에 있어서 緣起佛敎의 기원은 佛敎의 발생 기원과 같다. Buddha 바로 이 緣起의 原理를 자각하므로써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 緣起의 가르침은 外敎의 세계관에 대한 불교의 기본적 立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原始佛敎에서부터 大乘佛敎에 이르기 가지 여러 가지 형태의 緣起說이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그여러가지
緣起說이 說하는 중요한 目的은 모두 인생에 있어서 苦 의 眞相을 觀察하고,
그 苦 는 실상에 대한 無知에서 온 貪 瞋 癡 가 융결된 상태인 無明에 있는것임을 밝히고,
그리고 또 그實相에 대한 自覺에 의해서 無明된 상태를 벗어나 淸淨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것이라 볼수 있다. 즉 다시 말하면 緣起의 가르침은 佛敎的立場에서 의 현실세계에 대한
설명의 원리임과 동시에 불교의 目的인 인생의 苦 의 眞相을 관찰하고, 해탈의 길, 즉 苦를 滅하는 道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佛敎史的으로 볼 때 緣起는 상관관계 理論으로서 두가지 局面을 가지고 있다. 『화엄경』性起品 은 如來의 출현을 뜻하는것으로서 여래출현의 異名이다. 지금 문제되는 것은 不改와 眞理이다. 그야물론 不改이므로 眞理요, 眞理이기 때문에 不改이다.
그러나 不 改는 果上現 의 如來라는 佛格, 즉 人格에 대한 說明이며, 眞理는 如來의 業用, 즉 德用인 性起法 즉 法格에 대한 설명이다. 一은 佛에 중점을 두고, 一 은 法에 중점을 두고 설하는것이다.不改는 여래의 體性을 나타내고, 眞理는 如來의 法을 示現하는것이다.어느것이나 다 性起라는 거울(鏡)을 통해서 보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如來는 不改며 ,
이 不改인 如來의 眞理顯用이 性起法이다.
그러므로 性 起는 如來의 性起며, 如來를 性起 로 하는데 그것은 不改 의 顯用이며,
眞理의 顯用인 까닭이다. 故 로 연기상유의 대원리의 體用의 同異有無에 의하여 相卽相入하는 것이다.
一이 多를 섭할 時에 현이 되므로 ,
一이 多 에 入할時는 隱이되는것이다,
도 用에 대하여 말하면 相入은 顯 이 되어 ,
體 에 대해서 相卽을 隱 이 되게 한다.
또 異體卽入이 顯 이 되면 同體의 그것은 隱이 되며,
同體卽入이 顯이 되면, 異體의 그것은 隱이되는 것이다.
또 異體를 同體중에 攝入시켜 相入의 義가 있으므로 微細相容해서 또安立 의 義 가 있으며,
異體相入은 同體相入을 연체해 있으므로 제망중중무진한 것이다.
이 대 연기법이 여래의 일체의 관련사상에 중점을 두는것이나,
性起는 개물의 자체성 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즉 연기는 一切多의 관련성을 말하는것이요,
性起는 一切一 의 자체성 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一切一 이 없이, 어찌 一切多 가 成立할수 있겠는가.
또한 구테여 染 淨 二法을 설한다면 일체 染淨 法은 同一하게
眞性에 의하여 現起 했다고 하지만 ,
染은 眞에 違背 하는 것이요.
淨은 眞 에 隨順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染은 無明에 속하고,
淨은 性起에 屬 하는 것이다.
그런데 染은 眞에 위배 되므로 眞을 떠날수도 없고,
따라서 眞用 에 屬 할수도 없다. 中道의 理는 바로 이것으로서,
染 은 眞體를 떠나지 않으므로 衆生卽如 라하고,
또 眞用 에 隨順하지 않으므로 性起 에 섭할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기법은 分齊있는 것이 아니라,
眞如性 이 거체수연 해서 一切에 편만하므로,
저 所起도 역시 一切를 具有하여 分圓 의 제한이 없으며,
分處에도 다 圓滿해서 無盡法界를 具有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이 眞如法 은 一切時, 一切處, 一切法 에 편만하여,
因陀羅網과 같이 主伴 具足하고 重重交映 하여,
一切卽一,
一卽一切,
一切卽一切,
一入一切,
一切入一,
一切入一切, 해서互相交澈하는 것이다.
念劫圓融하고 法性融通해서 堅으로는 終始가 없고,
橫으로는 十方을 該攝 하여, 塵塵遍滿하고 있다.45)
두가지 측면이란
첫째.主體的側面 에서의 緣起한 無明에 의해서 苦가 생기는 연관
관계와 그 無明이 滅함에 의해서 苦가 滅한다는 關係를 나타내는
것으로 十二 緣起說이 여기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苦集의 연기로 가거나
또 苦滅의 연기로 가거나 하는 문제는 主體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련관관계는 主體的 연기설이 되는 것이다.
둘째, 客觀的緣起란 양자의 상관관계가 일반적인 현상세계에 적용되어,
‘이것이 生함으로 저것이 生 하고,
이것이 滅 하므로 因해서 저것이 滅 한다’ 는관계가 객관적인 생기관계에 적용될 때
이것을 客觀的 연기라 한다. 이객관적 연기의 대표되는 것이 후기 『화엄경』에서 강조되는 無盡緣起이다..
이것은 一般的으로 心을 主體로한 불교적세계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여래출현의 의미에 관하여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계 성립의 상황에서 , 즉 전인격적 사유에서 규명할 수가 있엇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영원의 如來가 자기자신에게 또는 자기를
포함한 세게에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전 인격적인 감지 였다.
그감지의 내용은 如來는 우리들의 心 ,意., 識 과는 전혀 다른것이며,
허공과 같이 무량한 것이며 , 일체 만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며 게다가 우리들의 광명이 되어 교화하여 마지 않는것이었다.
그러나 영원의 여래라고 생각되는 것은 실은 무량겁에 있어서 보살의 행을 거듭하여 정각을 성취하여 如來出現으로 나타난 것이다. 如來는 본래 영원적인 것이 아니며 무량겁이라고 하는 時間의 흐름가운데 영원성을 성취하여 如來가 된 것으로 如來는 그대로 필연적으로 衆生에 관련하여 如來出現이 되고 있는 것이다. 如來로하여금 영원케 하는 것 그리고 如來로하여금 如來답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法 이다. 그렇게 보면 法 과 如來와는 일체가 된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46)
2) 如來藏 緣起思想의 根源
如來藏 연기설은 自性淸淨한 중생의 여래장심 이 어떻게
이 煩惱를 벗어나서 본래 갖추고 있는 如來를 개현하는가를 천명 하고 있다. 즉 生死苦海의 유전을 밝히는 동시에 如來本然의
상태에로의 환멸의길을 說明하는 것이다. 이러한 如來藏 연기의 사상적 성립에 관한 직접적인 기원이된 思想은
『화엄경』十地品 의 一心性起想 , 즉 “三界唯一心 十二因緣分 皆依心”47)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말하는 心은 如來藏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衆生心중의 자성청정심을 法身,眞如의 위치에 까지 끌어올려 佛과 衆生의 일치를 설명 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心性思想에서 유심연기설 이나 如來藏緣起說 이 나타났다고 보여진다. 사상사적으로 中觀 唯識 如來藏思想은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불교에 있어서 如來藏 연기사상은 中國唯識을 모두 융합하는 근원적이고 수승한 사상으로 교환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 불교에 있어서 唯識이나 如來藏 思想은 서로가 中觀의 空思想을 傳承 했다고 말한다. 어느쪽이건 中觀思想은 大乘佛敎의 가장 근간이 되고 根源이 되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如來가 설한 모든가르침은 그의 깨달음인 연기설을 근간으로 하는것이므로,
여기서 空 과 상응하는 것, 즉 空相應性 이란것이란, 곧 연기의 속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초기경전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泡 沫(水泡) 아지랑이, 파초,환영 등은 무소유,공허,무실체 라고 정의 되는데 그러한 정의는 연생적 존재 즉 정신 물리적 존재요소 의 空性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물질은 泡沫과 같고, 感受는 물거품과 같고, 지각(想) 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行) 은 파초와 같고, 意識은 환영과 같다, 의 哲學은 단지 無 를 설해서 存在를 부정 하는 것이 아니다. 본다란 사실이 일어 날때는 그보는것의 生起의 원인은 무수한 사건과 연관되어 변화 하는 것으로 어느하나 또는 aucauv 결정자를 분리하여 원인으로 삼을때는 이미 그원인 들은 존재론적으로 허구이다. 現在 存在 하는 것은 단지 허구적 존재이다.
즉 因緣에 의해서 있는존재이다. 假名 또는 가호라고 불리우는 것은 空을 근저로건립 되어, 더구나 空 인것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어날대는 일어 나더라도 또한 來處를 모르고, 소멸 할때는 즉 소멸 하더라도, 역시 그 滅處를 알지 못한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緣生的 存在의 因果的 연속성도 역시 空性으로 정의 되고 있다. ‘이것(五蘊)의 相續 도 이와같다. 이것은 환영이여, 愚說이며 살인자 라고 불리오며, 여기에 實體는 없다.여기서 相續이라고 表現된 因果的 連續性 은 緣生 뿐만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연기 자체의 空性을 잘 대변하는 것이다. 48)
중관사상은 이세계와 저세계의 일체사물을 연기하기 때문에 無自性 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緣起論 이다. 그것은 「인연에 의한 가명」으로 이것(空性)은 실로 中道이다. 또한 如來藏 思想에 나타난 如來藏의 槪念과 <기신론>에 나타난 如來藏 과는 다르다. 여래장사상의 如來藏은 緣起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신론>의 여래장은 緣起한다. 이와같이 기신론 의 유식은 唯識思想과는 다르고 기신론의 여래장은 如來藏과 다르다. 그러나 如來藏과 아뢰야식의 관계는 中觀의 否定卽肯定으로 먼저 『화엄경』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如來藏界 경전의 하나인 『승만경』에서도 나타난다.
즉 『승만경』 에서는 空 ,不空如來藏 과 그리고 如來藏 染淨依持說을 말하여 如來藏을 佛性과 煩惱와의 關係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空,不空 如來藏은 앞에서도 說明하였지만, 空 如來藏 은 煩惱가 空無하다는 意味에서 이고, 不空 如來藏은 佛性에 일체공덕을 갖추었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이 空?不空 如來藏說에 이어 『승만경』 에서는 如來藏이 염고구낙열반의 원리이며,
또 如來藏 이 生死有爲法의 의지라고 하고 있다. 즉 「세존이시여, 生死란 것은 如來藏을
의지 하는것입니다. 如來藏을 의지 하기 때문에 그 本際를 알수 없다고 합니다. .......
세존이시여, 죽는다, 테어난다 하는 이두법은 如來藏입니다.
世間의 말로 說 하는 까닭에 죽음이 있고 테어남이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根이 무너지는것이며, 테어난다는 것은 새로운 여러根
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如來藏에는 테어남과 죽음이 없습니다.
如來藏 이란 것은 유위의 相을 떠나 있고, 如來藏 은 상주불변 합니다.
이 때문에 如來藏은 귀의할곳이며, 지킬것이며, 건립하는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如來藏 이 없다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히 구하는 일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49)
이것은 生死 및 涅槃과 如來藏 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生死 및 열반이 如來藏을 근원으로해서 생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즉 시간적 연기의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여래장에 의지해서 生死 및 열반을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如來藏 은 一法界 自性淸淨心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에 迷하면 生死고, 깨달으면 涅槃이다. 그것은 전인격적 사유가운데 에 法 (담마), 혹은
여래가 직접관게되는 것은 이와같은 인격적 신체에 현현되어 삼투하고 또한 通徹할 때, 자기도 세게도, 없으며 다만 허공과 같이 無量하다.
바꾸어 말하면 이순간에 여래성취는 실현하엿다고 말할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격적 신체는 끝없이 지속하여간다.
그것이 화엄경에 무량겁은 순간이며 순간은 무량겁이라고 설해진 까닭이다. 즉 法 과 佛은 일체가되어 衆生에 顯現하고
있는것이며 그러므로 불다운 것이라는 본뜻은 여래출현에 귀착한다고 말할수 있다.50)
이렇게 볼 때 『승만경』에 나타난 緣起의 基本的形態는 일체현상 生起의 原因에 대한 說明이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과
如來藏 과의 상관 관게를 내고 있는것이라 보여진다. 이상과 같이 『슴만경』에 나타난 空?不空如來藏 如來藏染淨 依持說 은
如來藏을 中心으로 迷悟의 緣起를 說明하는 如來藏 緣起說의 원초적인 思想이라 볼수 있다. 『승만경』에서원초적 形態가
나타난 이러한 如來藏 緣起說은 『대승기신론』에 와서비로소 새로운 교리조직을 잦고 설명되어 진다.
Ⅴ『보승론』 의 法身과 믿음
法身으로 法界의 等類라는 점에대해 『보성론』의 法身에 관한 說明이 잘나타나 있다. 이것을 이른바 ‘여래장의 세가지 뜻’
또는 ‘여래장의 3가지 自性’을 설명하고 있는가운데 法身의 설명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우선 如來藏 의 3가지 自性이
무엇인가 알아볼 필요가 있다. 如來藏 의 3가지 自性이란 如來의 法身?眞如?種姓이다
「부처님의 法身 두루가득하고眞如는 차별이 없는것이어서
다진실로 佛性이 있는지라이 때문에 항상 있다고 설함이네」51)
이 때문에 如來꼐서 어느때 어떤 衆生이건 다 如來藏 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게송의 그의미를 살펴보면,
첫째. 如來의 法身이 一切衆生들의 몸에는 두루 있는것이니 「부처님의 法身이 두루가득하다」 고 말한 것이며,
그것은 有垢 眞如에 대해(제5 一切衆生有 如來藏品 )에 一切衆生은 다 如來藏이 있는지라, 그것은 어떠한 意味인가?
중생의 무리에 佛智가 침투하기 때문이며 이미그것은 발하 되지 않은 종자처럼 이미 은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생이 무리가 無垢인점이 本來[佛] 들과 不二이기 때문에 佛의 種姓에 그果 =佛 을 설정하기 때문에 모든 衆生은
佛의 胎 =如來藏 이라고 설해졌다. 즉 如來와 眞如가 차별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眞如는 차별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일체중생이다. 실지로 眞如의 佛性이 있는 것이 나니 「다 진실히 불성이 있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즉 正覺者 의 身 이편만 하기 때문에 眞如가 무차별하기 때문에 種姓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有信者 는 항상 佛 의 胎 라고 설해져 있다. 이세가지 의미에 의해 세존은 “一切衆生은 항상 如來藏 ” 이라고 설하였다.
즉 그것은 一切衆生에 ⑴如來法身이 편만하다는 意味에 의해 ⑵如來의 眞如가 무차별하다는 의미에 의해 ⑶如來의 종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에 의해서 이다. 이것은 無垢眞如, 菩提를 有垢 眞如, 如來藏과 同一한 本性을 가진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轉依를 특질로 하는 如來의 法身” 으로 설명하고 있다.
如來藏 思想에서의 轉依의 개념을 ‘顯現’ 의 意味로 이해 하였을 때 여기에서 말하는 法身은 衆生의 가난으로서의 如來藏의 顯現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세가지 뜻은 단순히 평면적으로 認識하지 않고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설명하면서 항상 如來와 결부시켜 이야기되고 있다는점이 주목 된다. 따라서 여래장의 세가지 뜻은 如來로부터 비롯된것임을 넌지시 나타내고 있다. 이제 이여래장의 세가지 自性중에서 다음과같이 말하고 있다.
「法身은 두가지 임을 알아야 한다. ‘순수한 無垢의 法界’와 그 등류로서 오묘하고 다양한 교설이다.
諸佛의 法身은 2가지 임을 알아야한다.
⑴ 지극히 청정한 법게로서 이것은 무분별지가 적용하는 영역이다.
또 그것은 모든여래의 自內證法 = 깨달음에 관한것임을 알아야한다.
⑵그[청정한 법계]를 획득하는 원인이며, 도한 지극히 청정한 법계[=깨달음의 세계] 의 등류로서 교화될 근기에 따라 다른 衆生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소설법임을 잘알아 야 한다52). 또한 저진여 如來의 성품과 또한 사뙨무리(私聚 ) 衆生들 몸속에 자성청정한 마음은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음을 밝힘이다. 그광명이 밝아서 客 과塵의 모든 煩惱를 여의었기 때문에 後에 如來의 法身인 이러한 것을 하나의 참된금 비유로써 설하고 眞如의 차별없음을 의지해 부처님의 法身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중생을 다 如來藏이 있다고
설함이니. 自性의 청정한 마음을 비록 청정이라고 말하지만 본래 두가지 法 이 없기 때문이다.」 53)
所說法이란 본래 부처님 말씀이다. 여래장사상에서 부처님의 말씀이란 ‘모든중생은 여래장이다’ 라는 것을 가르킨다. 즉 자신이 如來藏임을 어떻게 아는가?
간단히 말해 이것은 如來의 說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 되는 것이다. 如來의 法界가운데 一切法을 밝히되 淸淨함은 모두가 같은 모양임을 밝혔으니 이는 ‘ 반야바라밀’의 分別 없는 智慧법문 등에 의지하여 모든 보살마하살 들을 위해 설한 것이다. 그기에는 여실히 보지 못하는 凡夫이와 , 여실히 보는 聖人으로, 즉 필경 여실함을 성취한 如來의 법신이다. 그러므로 不淨한 그때를 衆生이라 하고 不淨을 淸淨케하는 그때를 보살이라 말하며 淸淨함을 일러 如來54) 라 말한다.
또한 法身의 體,相,用이란다면
먼저 함이( 나고, 머무고, 사라지는 것) 없어,
자연스러워 남을 의지 하지 않아,
부사의 하여 둘이 아니고,
分別이 없어 淸淨하고 ,
현현하고,
대치하여 결과를 여의고,
원인을 여윔이어서,
일체에 두루하여 ‘변하지 않음이’ 그것이다.
그것이란 法身,種姓모두가 어떠한 측면 에서는 원인이면서,
또다른 측면에서는 결과의 기능을 갖는 것임을 말한다.
『보성론』에서는 청정에대하여
「지혜의 장애를 여의 었기 때문이며, 자성 그대로를 淸淨」55)
이라 말했는데, 즉 客 , 塵 번뇌가 바로 두가지 장애이다. 그번뇌를 여윔을 無學들이 몸소 법을 섭수한 것이다. 번뇌가 없는법 가운데 저것과 이것이 공통되어 서로가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차별하지 않아 그것은 법게의 평등한 그것이 마침내 서로 걸고가는 상관 관계 뜻이라한다. 56)그러므로 실상을 보는이는 범부와 다르고, 여실히 여실히 뛰바뀌지 않으신 모든부처님은 희론을 여의셨다 함이다.
그측면으로는 大乘佛敎의 날개라는, 즉 智慧와 慈悲를 상기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지혜는 자신안에 여래장 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으로 오직 여래의 종성만이 존재한다는점에서
자신의 종성은 凡夫, 三乘의 種姓이 아니라 여래의 종성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발할 때. 자신은 성불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지헤는 종성에의해 因位에 있는것이지만 ,如來 있어서는 果位가 달성된 것이다. 자신이 如來藏 임을 아는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간단히 말해 이것은 如來의 설법을 통해서만 우리가 如來藏 임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佛性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地藏과 같고, 둘째는 樹果와같다.
無始世以來자성청정심 無上道를 수행하고 이종에 불성에 의하여
삼종의 몸을 나타낸다. 57)
이상의 引用句에 의하면 地中의 伏藏 으로서 , 여래장을 비유로 나타내는것인데,어느경우에든지 地藏이라는 이름이 근간이 되고 잇다. 따라서 이 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성숙시킨다는 일반적인 의미보다. 오히려 더욱 근원적인 상징이 있음을 보개된다. 즉 이보살은 法身如來藏을 의인화 한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래제가 다하도록 一切衆生을 성숙시키려는 願은 곧 본각불성의 內的活動을 비유로 설한것이요, 동시에 그인격화의 시도라고 할수 있을것이다58).
이와같이 여래장사상의 이론적 체계는 본질과 현상의 구별을 전재로 하면서 본질론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본질과 형상이 구별될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한한 자비광명이 여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는점이다. 동시에 번뇌가. 현존함도 부정될수 없는 동시 통찰의 세게관일대 본질과 현상이라는 양자성에서 인식을 가진다. 원시불교의 본성청정심은 本性不染을 여래의본질 또는 여래이어야할 因 으로 보고,
본성으로서의 자성은 무시시래 상주하는 것으로 설명한다.『보성론』은 여래를 전의를 특징으로하는 法身으로 규정한다. 轉依는 유식불교와 달리 ‘그본질의 顯現을’ 의미한다 전의를 특징으로한다는 것은 법신이 因.으로서의 여래장에대해 동질적 결과 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여래가 결과로 규정되는 것은 여래장사상의 근간을 이루는것이면서 동시에 불교일반에 있어 중생에게 주어진 궁국적 과제 즉 성불의 성취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여래는 유구진여인 중생이 그번뇌에서 이탈하여 청정하게 될대 무구진여로서의 여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래장의 구조적 특징에서 볼수 있는것과 같이 중생이 근원적으로는 佛 과 동일하다 해도 현실에 나타난 중생은 三乘이나 一闡提등의 중생으로 그 차이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一闡提 등의 중생들로 하여금 불법에 눈을 돌리게 해서 불도에로 나아 가기 위해 여래의 자비의 작용을 이세상에 시현하는자는 菩薩이다. 이와같은 보살의 전형적인 예는 大悲闡提 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중생구제의 본원을 가지고 악취에 테어나 활동한다. 그의 자비의활동은 세간이 존속하는한 휴식 없이 지속 될 것이다. 성불하지 못하고 있는 衆生이 존재하는한 이러한 사상적 내용을 갖고 잇는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발달함에 따라 心 의 문제에 바탕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뢰야식 사상과 조화, 융합하려는 사상적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즉 아뢰야식과 여래장사상은 처음에는 같은 경전에서 서로 存存 되어 설해지다가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서로조화 융합된다.
그래서 여래장과 아뢰야식은 결국 同一視되고 여레장 사상은 유식설의 부속적 위치로 전락하게 되어 유식설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까지 『寶性論 』의 문헌학적 성격, 사상사적의미. 이론적 체계, 실천의 문제들을 요약하면서 『보성론』이 문헌학적 성격, 사상사적의미, 이론적 체계, 실천의 문제들을 요약하면서 『보성론』이 5세기초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 하였다. 그런데 이시기는 인도의 역사에 있어 굽타왕조시대에 해당된다. 굽타왕조는 서력기원후 320년에 시작되어 5세기후반까지 극히 융성하였던 왕조로서 , 6세기초 이후지방 정권으로 몰락한 다음에도 8세기 중반까지 존속하엿다. 『승만경』『열반경』『해심밀경』『능가경』『금강명경』 등의 경전이 성립되고. 인도대승의 무학과 즉 중관학파와 유가행파가 체계를 갖춘것도 융성기의 굽타왕조 시대 였다.
結論
여래장사상의 이론적체게는 본질과 현상의 구별을 전재로 하면서본 결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래의 본질,구조, 그리고 그발전등을 고찰하려노력했다,
이를요약하면 여래장 사상은 중생과 여래와의 본질적 等質的을 강조하여 거기에서 成佛의 원인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즉 여래장사상의 이론적 체계는 본질과 현상이 구별되지 않을수 없었던 이유는 무한한 자비광명이 여래를 온몸으로 받아 들이지 않을수 없는점이다. 동시에 번뇌가 현존함도 부정될수 없는 동시 통찰의 세계관 일 때 본질과 현상이라는 양자성에서 한파장으로 녹아들어가는 법신변만(평등) 으로서, 여기에서 한가닥의심의 여지도 없는 여래의 존재를 체험할 것이다.그리고 무한한 자비광명의 如來를 온몸으로 게합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일때. 그본질에 청정함이 틀림없지만 , 현실적으로 염오되어 있는것도 거부 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여래장의 실천은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하나 합리적 기술과 주체적 실천의 두측면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즉 철학적 분석과 종교적 수행의 두측면이 동시에 고려될때에만 여래장사상의 참다운 의미가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론은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것이며, 실천은 이론을 일종의 지침으로 삼지 않을수 없다.는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상에서와 같이 여래장 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근원이 된 사상적 입장을 밝히고 ,
여래장 사상의 본질, 구조 그리고 발전등을 고찰했다 이를 요약하면 여래장 사상은 衆生과 如來와의 本質的 等質性을 강조하여
거기에서 成佛의 원인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즉 여래장사상은 원시불교 이래의 ‘본성청정심’ ‘객진번뇌’설을 이어 받아서 번뇌로 덮힌 중생심속에 자성청정한 여래의 因 인 여래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밝히는사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성청정심, 객진번뇌설
을 근거로하여 성립된 여래장 사상은 일체 중생에게 여래의 본질로서 진여무차별(평등) 법신편만 여래성이 있다고 한다.
첫째 진여평등은 반야(空)사상을 기초로 해서 일체는 연기이면서 空性이라는 근원적사실에서 말해진다.
여기서 진여는 있는그대로의 本性, 法性이다.그래서 이 진여평등은 여래의본성과 중생의 본성이
眞如上에서 는 平等하다는 ,즉 진여 법계와 중생게가 본질덕으로 同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법신편만은 여래의 지가 편만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여래지는
깨달음의 지로서 여래의 본질 본성이다.이여래지는 중생이 어떠한 상태에 있어도
항상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신 편만은 법신의 작용 ,
즉 지혜의 작용인 자비가 중생계에 항상 미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셋째, 여래성은 중생이 최고 완전하게 깨달음을 얻을수 있는 능력.
즉 여래종성이 중생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으므로 중생은 모두 예외없이 여래의 종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일체중생의 성불,근거는 여래의 지혜의 보편성과 그 지헤의 작용으로서의 자비의 항상성 ,그리고 불도를닦으려고 하는
중생의 주체적, 자각적,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여래장 사상은 중생심 안에 해탈의 심성으로서 여래성이 간직 되어 있다는 사상이다.경,론에서 중생이 자기안에 있는 여래성을 인식만하면 번뇌를 벗어나서 열반의 길로 나아갈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 중생의 현실에 있어서 는
眞如에의 지향성보다 無明의 性向이 강하므로 眞如의 이상화라 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여래장은 이와같이 중생이 여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지만 번뇌로 덮혀 있다는 주조적 특징을 갖는다 자성청정심으로 발상된 진여 평등의 여래장은 반야
(空 )사상을 바탕으로 이후엔 인도로부터 중국,한국등 한역 불교권에서 는 여래장 이란 훨씬더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여래장사상에 있어서 불성이라는개념의 <變換>은 여래장 사상이 번뇌 소전이라는 구조에 시종 국한되지 않고 그것의 본질의 규정으로 展開될 때 즉 처음에는 일체중생에 있어서의 여래의 胎兒, 여래이어야할 가능성을 여래장이라고, 그러나 그안에 있는 본질 究明으로 전개될 때 불성buddha-adhatu 이라는 개념은 이론적이고 교리적으로 유용한 개념이된다고 볼수 있다. 佛 이어야할 因또는 본질이라는 2가지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一切衆生有如來藏’ 이라 는 句는 비로소 ‘一切衆生實有佛性’
설로 된다. 어원적으로 佛性은 ‘佛이 될가능성 ’ 또는 ‘佛을 깨닫기 위한 因‘을 의미 하고 있음을 본다.
불성은 여래장 관게의 초기문헌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槪念이며 『열반경』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개념이다.
사상적으로는 중국, 한국등 한역불교권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개념이다.
이후 여래장사상은 중생심안에 해탈의 심성인 여래성이 있다고 하는입장이고 그리고 유식사상은 心 이 만행만유의 근원이라는 근원식 입장에서 心의 현실적 기능분석에 치중한다. 이와같이 실천의 내적 주체로서 心의 究明에서 출발하는 유식사상과 여래장 사상은 대승불교가 발전할 때 따라서 점차적으로 양사상간에 교류, 조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식사상은 자기심리적면을 ‘一切迷妄’ 의 근원이라 되서 출발하는 반면,
여래장사상은 자기의 본성이 本來佛性覺體 라고 본다. 이미 깨달음이 열려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출발점을 갖는다. 이러한 차이점은 있어도 이양쪽 사상은 모두 동일한 心 의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불교사상이 발전전개됨에 따라 점차 이양사상의 교류가 나타나게되고 융합 통일시키려는 사상적 경향이 나타나게된다.
나타난시기는 여래장사상 제2기의 경,논 에서는 여래장과 아뢰야식이 동시에 설해지나 그관계가 명확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여래장사상 3기에 오면 兩思想의 調和,融合이 이루어져 아뢰야식과 여래장이 동일시된다.먼저『대승장엄경론』은 두사상이 병행 해서 설명되는 최초의 경론으로 여래장사상은 아뢰야식사상과의 교류과정에서 유식사상에 흡수되면서 여래장 사상의 독자적인 학파가 정립되지 못한 것이 여래장의 시대사이다. 여기에 『보성론』은 여래장을 주체로하는 논서임을 익히 알려져 있다, 여래장의 존재가 단지 맹목적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불도를 닦으려고 하는 중생의 主體的, 自覺的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그구조는 佛法僧性菩提功德業 의 七種金剛句 로 요약된다. 그앞의 셋은 삼보로서 궁극적으로
불보의 하나로 귀결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유식학설 과 융합 이전의 여래장설이 란점에 그의가 있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성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