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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갑(羅萬甲) 연보
나만갑(羅萬甲, 1592년 선조 25년 생~1642년 인조 20년 10월 11일 몰; 향년 51세)
조선 중기 문신
정5품 통덕랑∙홍문관수찬∙홍문관교리∙지제교 겸 성균관직강∙병조정랑∙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정3품 통정대부 병조참지∙안동부사∙형조참의∙공조참의∙증 종2품 가선대부 좌의정 역임
병자호란의 기록물 『병자록』(丙子錄)의 저자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仁祖)를 호종한 문신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호종하고 군량을 총괄했으며 『병자록』을 기록한 인물
안동부사를 자청해서 먼 조상 통일 신라 정승 나인(羅認)의 묘역을 사초하고 증축한 안정인
이이(李珥)의 직계 제자 수몽(守夢) 정엽(鄭曄)의 문인∙사위
김장생∙이정구의 문인
증광진사시 수석 합격자(1등 1위)
본관 안정(安定) 안정(安定) 나(羅) 씨
자 몽뢰(夢𧶘)
호 구포(鷗浦)
4대조 한성부참군 나계종(羅繼宗)
고조부 창릉참봉 나세걸(羅世傑)
고조모 대사헌 조익정(趙益貞)의 여식
증조부 설서∙적성현감 태사(太史) 나익(羅瀷, 1507년 중종(中宗) 2년~1537년 중종 32년; 자 명원(明源))
조부 성균관학유∙장령∙평산부사 나윤침(羅允忱, 1527년 중종 22년~1578년 선조(宣祖) 11년)
조모 별좌 이원기(李元記)의 여식
부 사직참봉∙상의원직장∙한성부참군∙병조좌랑∙성균관전적∙한산군수∙공주목사∙제용감정∙지평∙장령∙시강원문학∙보덕∙평산부사∙추증 도승지∙증 영의정 나급(羅級, 1552년 명종(明宗) 7년~1602년 선조 35년; 자 자승(子升), 호 후곡(後谷), 나주 출신, 아들 나만갑의 공훈으로 영의정 추증)
모 광산 김(金) 씨 한성참군 김호선(金好善)의 여식
처 초계(草溪) 정(鄭) 씨 문숙공 정엽(鄭曄)의 여식
자 4남 2녀
1남 진사∙세자익위사세마∙호조좌랑∙봉산군수∙이산현감∙종3품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 1614년~1663년; 장유∙정홍명의 문인, 자 우천(于天), 자호 기주(朞州), 경주 김 씨 김남중(金南重)의 여식과 성혼)
2남 나성한(羅星漢)
3남 나성원(羅星遠, 1628년~1649년; 송준길의 문인, 안동 권 씨 권순창의 여식과 성혼, 요절)
4남 막내 나성위(羅星緯)
5녀 이가상(李嘉相)의 처
6녀 박세주(朴世柱)의 처
손주
1남 나성두의 3남 2녀
1남 나명좌(羅明佐, 1634년~1651년; 송준길의 문인 겸 사위)
2남 희릉참봉∙동몽교관∙상의원주부∙평강현감∙공조좌랑∙충청도도사∙종친부전부∙삭녕군수∙장령 나양좌(羅良佐, 1638년~1710년; 윤선거의 문인, 윤증의 지우, 자 현도(顯道), 호 명촌(明村))
3남 나석좌(羅碩佐, 1652년~1698년; 이단상∙송준길의 문인)
4녀 김수항의 처
5녀 이사명의 처
3남 나성원의 1남 1녀
1남 무신 어영대장∙한성좌윤∙숙천부사∙영흥부사∙함경남도병사∙삼도통제사•증 호조참판 나홍좌(羅弘佐, 1649년 인조(仁祖) 27년~1709년 숙종(肅宗) 35년)
2녀 송준길의 손자 송병하의 처
1592년 조선 선조(宣祖) 25년 1세 전남 나주에서 부 병조좌랑∙공주목사∙증 영의정 나급(羅級)과 모 광산 김 씨 사이에서 출생
1602년 선조 35년 11세 부 증 영의정 나급(羅級) 서거
1613년 광해군(光海君) 5년 22세 증광시 진사시 장원 급제(1등 1위), 성균관 입교, 인목대비 서궁 유폐로 어머니와 고향 은거
1623년 인조(仁祖) 1년 32세 인조반정 당시 한양 복귀. 순릉참봉 제수. 정5품 통덕랑. 알성시 문과 병과 급제(3위), 승정원가주서, 9월 예문관검열; 거주지. 경기도 광주 북방리(선영 건지산)
1624년 인조 2년 1월 33세 이괄의 난 당시 한남도원수 심기원(沈器遠)의 종사관으로 군수 물자 공급, 6월 문신 겸 선전관, 홍문관수찬, 부교리 역임. 빙부 정엽(鄭曄) 사헌부대사헌 역임
1625년 인조 3년 1월 34세 사간원헌납으로 인성공(仁城君) 이공(李珙)의 처벌을 주장. 성균관전적, 지제교 겸 기사관, 홍문관수찬∙부교리∙교리, 강동현감 제수; 홍문관교리 당시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체차(遞差)하자, 김류(金瑬)가 반발해 강동현감으로 좌천되었으며, 인조는 나만갑이 대신을 능멸했다며 멀리 유배 보내는 원찬(遠竄)을 명했고, 유배지를 아산에서 해주로 이배; 4월 빙부 정엽 사망, 5월 평안도 강동현감 좌천(이귀의 도움으로 복직)
1627년 인조 5년 36세 정묘호란 당시 종사관으로 인조 호종
1628년 인조 6년 37세 환도 후, 성균관직강, 지제교 겸직, 병조정랑, 홍문관수찬, 사헌부지평 역임
1629년 인조 7년 38세 이조정랑을 두고 김류와 당쟁으로 나만갑과 교유하던 문신 대사간∙대사헌∙이조참판 박정과 이조참판∙대사헌 유백증 등 지방 좌천. 전라 벽성∙아산∙황해도 해주 유배; 7월 16일 병조판서 이귀(李貴)가 인조에게 여러 신하들이 나만갑을 무죄로 생각한다는 인조의 질의에 전날 좌상이 말한 것은 너무 지나쳤다고 의견을 피력(『인조실록』 인조 7년 7월 16일 기사 참조)
1631년 인조 9년 40세 형조좌랑∙병조판서∙영의정 김류 파직 후, 배소 방면. 홍문관부수찬, 사간원헌납, 홍문관부교리 등 역임
1632년 인조 10년 41세 홍문관부교리, 정3품 통정대부 승품, 병조참지 임명. 모친 봉양을 위해 안동부사 자청. 경북 의성 비안 출신 선조 통일 신라 정승 나인(羅認)의 묘역 사초 및 증축
1633년 인조 11년 42세 안동부사 당시 성혼한 자식을 안동으로 데려갔다는 이유로 사헌부 탄핵으로 파직
1634년 인조 12년 12월 43세 이조에서 홍주목사로 추천했으나 인조가 거부
1635년 인조 13년 44세 정3품 형조참의 당시 좌의정 오윤겸 등을 비판하다가 파직
1636년 12월 인조 14년 45세 병자호란 발발로 관량사로 말을 타고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종. 정3품 공조참의, 병조참지 역임. 병자호란 후, 무고를 받아 영해(寧海) 귀양.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병자록』(丙子錄) 저술
1637년 1월 인조 15년 46세 병자호란 종전. 모친이 서산으로 피란 중 모친상. 충청도의 관선(官船)으로 운구해서 경기도 선영 안장
1639년 인조 17년 48세 영해 귀양
1640년 인조 18년 49세 사면 후, 경북 안동 영천(榮川) 은거
1642년 인조 20년 10월 11일 51세 유배지에서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서거. 인조가 관작 복작 및 예조 부조 지시. 병자호란 당시 인조 호종의 공훈으로 추증 종2품 가선대부 좌의정. 향년 51세
묘역
나만갑 묘(소재지.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산 163)
1642년 인조 20년 경기도 광주시 북방리 건지산 안장
1681년 숙종 7년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산 163 이장
1985년 9월 16일 발굴 조사
2008년 7월 25일 개축
구 묘비명: 가선대부 행형조참의 나공 만갑지묘(정경부인 초계 정 씨 부좌(柎左))
신 묘비명: 증 좌의정 구포공 나만갑지묘(정경부인 초계(草溪) 정(鄭);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가선대부 행형조참의 나공 만갑지묘)
종중 묘역 동남쪽 방향 맨 위쪽 위치
배위 초계 정 씨 합장묘
나만갑 묘지명(나만갑의 손녀 사위∙나성두의 사위 대사간 김수항(金壽恒) 서)
나만갑 선생 신도비(羅萬甲先生 神道碑; 소재지.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산 163; 1985년 6월 28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6호)
―1658년 효종 9년 조선 시대 중기 문신 안정인 구포 나만갑의 행적을 기록한 비 건립. 좌의정 김상헌 비문 글, 호조참판 송준길 글씨, 손녀사위 대사간 김수항 비의 제목(두전(頭篆)
―1683년 숙종 9년 둘째 손자 나양좌(羅良佐)가 묘역 이장 기록을 첨가해 새김.
―안정 나 씨 종중 소유 및 관리
1658년 효종 9년 조선 시대 중기 문신 안정인 구포 나만갑의 행적을 기록한 나만갑 선생 신도비 건립. 좌의정 김상헌 비문 글, 송준길 글씨, 김수항 비 제목 새김.
1683년 숙종 9년 둘째 손자 나양좌(羅良佐)가 묘역 이장 기록을 첨가해 새김.
1894년 나만갑 저 『병자록』, 발행처 미상 간(고서)
1921년 나만갑 저 『병자일기』, 국역본, 자유토연사 간
1947년 4월 15일 나만갑 저 『병자록(병자호란)』, 윤영 역, 정음사 간
1972년 나만갑 저 『병자남한일기』, 서문당 간; 나만갑 저 『호란일기』(병자록), 신형 역, 한국고전총서 1, 익문사 간
1974년 나만갑 저 『병자록』, 정음문고 169, 윤재영 역, 정음사 간
1985년 6월 28일 나만갑 선생 신도비(소재지.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나만갑 묘역 하단)가 6월 28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126호로 지정; 나만갑 원작 『나만갑의 병자록』, 이현희 편, 다락원문고 11, 다락원 간; 나만갑 저 『병자록』, 윤재영 역, 세계고전전집 7, 삼경당 간
1987년 12월 나만갑 원작 『병자록』, 한국고전명저정선 8, 명문당 간
1992년 나만갑 저 『병자록』, 정구창 편∙이순재 그림, 교학사소년문고 9, 교학사 간
1996년 나만갑 저 『병정록(丙丁錄) 1~5』, 필사 영인본 5권(권1~4 병자호란일지, 권5 강도록, 병자일기), 국립중앙도서관 간
2010년 1월 9일 나만갑 원작 『남한산성의 눈물―나만갑 기록 병자록』(샘 깊은 오늘고전 12, 나만갑 원저∙유타루 편∙양대원 그림, 알마) 간
2011년 10월 20일 최정용 기자, 「京畿, 민족의 얼을 담은 大器―9. 구리 나만갑 선생 신도비」, 『기호일보』 보도; 나만갑 저 『병자록』, 마이크로 자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015년 나만갑 저 『역주 산성일기: 정자본』, 지성룡 글씨, 한글서예연구총서 18, 다운샘 간; 나만갑 저 『역주 산성일기: 흘림본』, 지성룡 글씨, 한글서예연구총서 19, 다운샘 간
2016년 7월 나만갑 원작 『호란일기―남한산성이 알려주는 병자호란 이야기』, 김종윤 편•김예진 그림, 노루궁뎅이 간; 나만갑 저 『병자록―45일간의 기록』, 전자책, 온이퍼브 간
2017년 11월 나만갑 원작 『병자년 남한산성 항전일기―왕은 숨고 백성은 피 흘리다』, 서동인 역, 주류성 간
2018년 1월 나만갑 원작 『남한산성: 호란일기―남한산성이 알려주는 병자호란 이야기』, 개정판, 김종윤 편•김예진 그림, 노루궁뎅이 간
저서
1636년 『병자록』(丙子錄)(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저술한 호란일기)
―1636년 12월 12일 청나라 침공에 의한 병자호란 발발부터 병자호란이 종전하고 청나라 군대가 철수하기까지 57일간의 호란일기
―나만갑의 『병자록』은 『병자남한일기』 등의 다른 제목으로 여러 종의 고서가 전래되고 있다.
『구포집』(鷗浦集)
『침과지(枕戈誌)』 필사본 2권 2책(권1 나만갑 저 『병자록』, 권2 찬자 미상 저 『강도록』(江都錄) 합본 2권)
―병자호란 일기와 강화도 사건 기록, 미 버클리대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고서
1996년 『병정록(丙丁錄) 1~5』, 필사 영인본 전 5권
―권1~4 『병자호란일지』, 권5 『강도록』, 『병자일기』), 국립중앙도서관 간
* 안정인(安定人) 나만갑(羅萬甲): 재주가 있고 효성이 깊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성격이 분명해서 당파 갈등에서 화를 입거나 당파 싸움에 능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괄의 난 당시 심기원(沈器遠)의 종사관으로 있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관량사로 인조를 호종한 공로가 인정되었다. 광산 김(金) 씨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안동부사로 자청해 내려가기도 했으며, 병자호란 당시 서산으로 피란 중이던 모친이 사망하자, 충청도 관선으로 운구해서 경기도 선영에 안장했다. 5대조 이상이 연속해서 과거 문과에 급제한 명문의 가문 출신으로서, 전남 나주에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관향 경북 안정으로 낙향해서 안동부사로 노모를 봉양하고 먼 조상의 묘역을 관리했으며, 말년에도 경북 안동 영천으로 은거해서 생을 마감했다.
* 통일 신라 정승 의성 출신 선조 나인(羅認)의 묘역 사초 및 증축: 1631년 조선 시대 중기 홍문관부수찬, 사간원헌납 등으로 관직에 복귀한 구포 나만갑은 1632년 노모 공양을 위해서 스스로 안동부사를 자청해 낙향했다. 1637년 병자호란 피란 당시 서산에서 모친상을 당하기 5년 전의 일이다. 1632년~1633년 사이 안정(安定) 나(羅) 씨 후손 구포 나만갑(羅萬甲)이 안동부사로 근무할 당시에 경북 의성 해망산(현 자하산)에서 의성 출신 선조 통일 신라 정승 나인(羅認)의 묘역을 사초하고 증축했다는 옛 기록이 있다. 이 사실로 안정 나 씨 후손들이 서기 800년대 통일 신라 부자(父子) 정승 경북 의성 비안 출신 군위인 나인과 경북 의성 사촌마을 출신 안정인 나천업(羅千業)의 묘역을 관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 인조(仁祖)와 나만갑(羅萬甲): 1625년 홍문관교리 당시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체차(遞差)하자, 김류(金瑬)가 반발해 강동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또한 김류는 나만갑의 빙부 대사헌 정엽(鄭曄)과도 사이가 나빴다. 찬성, 병조판서 이귀(李貴) 등이 나만갑의 좌천에 대해 김류를 비난했다. 인조는 나만갑이 대신을 능멸했다며 멀리 유배 보내는 원찬(遠竄)을 명했고, 유배지를 아산에서 해주로 이배했으며, 대제학 장유(張維)를 나주목사로 좌천시켰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나만갑이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했다. 1629년 인조 7년 나만갑과 교유하던 문신 박정과 유백증 등을 지방으로 좌천시키기도 했다. 1631년 인조 9년 김류 파직 후, 나만갑이 유배로부터 사면되었고, 홍문관부수찬, 사간원헌납으로 관직에 복귀했다. 1632년 노모 봉양을 위해 안동부사로 자청해 낙향했고,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직접 말을 타고 인조를 호종했으며, 남한산성에서 형조참의로 조선의 병자호란을 일지로 기록한 『병자록』을 작성했다. 1642년 증 좌의정 나만갑 서거 후, 나만갑의 장자 나성두(羅星斗, 1614년 광해군 6년~1663년 현종 4년)가 인조조에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나성두는 진사, 세자익위사세마, 호조좌랑, 봉산군수, 이산현감, 종3품 해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나성두는 장유∙정홍명의 문인으로 자는 우천(于天)이고 자호는 기주(朞州)였으며, 경주 김 씨 김남중(金南重)의 여식과 성혼했다. 인조는 나만갑의 큰아들 나성두를 세자익위사세마 때부터 알고 있었으며, 나성두는 호조좌랑을 지내고 종3품 해주목사를 역임했다.
* 나만갑 선생 신도비(羅萬甲 先生 神道碑): 나만갑선생신도비(羅萬甲先生神道碑)는 구리나만갑선생신도비라고도 하며,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산 163에 소재한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6호로 1985년 6월 28일 지정되었으며, 경기도 구리시의 주요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관례상, 신도비는 종2품 이상 대신(大臣)의 묘역 부근 길가에 세우는 비석이라고 한다. 나만갑선생신도비는 비신 높이 242cm, 너비 104cm, 두께 29cm이며, 신도비 전체 높이는 355cm이다. 1658년 효종 9년 조선 시대 중기 문신 안정인 구포 나만갑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건립되었다. 좌의정 김상헌이 비문을 썼고, 호조참판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손녀사위 대사간 김수항이 비의 제목, 곧 두전(頭篆)을 썼다. 1683년 숙종 9년 둘째 손자 나양좌(羅良佐)가 묘역 이장 기록을 첨가해 새겼다. 현재 안정 나 씨 종중이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 호란일기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의 일지를 기록한 호란일기이다. 일기의 총 기록 일수는 45~57여 일이다.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 기록이자 스토리이기도 하다. 여러 종의 고서가 전래되고 있다. 국역본은 1947년 정음문고본 이래로 여러 국역본들이 출판되고 있어 어린이부터 청소년까지 필독 역사서가 되었으며, 일반인들에게도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역사서로 전해지고 있다.
* 나만갑(羅萬甲) 가문: 병자호란의 호란일지 『병자록』(丙子錄)을 남기고, 말을 직접 타고 인조를 호종한 공로로 경기도 구리시 선영에 나만갑선생신도비가 건립된 증 좌의정 구포 나만갑의 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과거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안정 나 씨 명문 가문이다. 특히, 안정 나 씨는 정치적으로 소론의 성향을 보였으며, 나만갑이 정엽(鄭曄)의 사위가 된 것처럼 조선의 여러 가문들과 성혼을 이루어 가문의 뿌리를 넓혔다. 나만갑의 4대조는 한성부참군 나계종(羅繼宗)이며, 고조부는 창릉참봉 나세걸(羅世傑)이고 고조모는 대사헌 조익정(趙益貞)의 여식이다. 증조부는 설서, 적성현감 태사(太史) 나익(羅瀷, 1507년 중종 2년~1537년 중종 32년; 자 명원(明源))이다. 조부는 성균관학유, 장령, 평산부사 나윤침(羅允忱, 1527년 중종 22년~1578년 선조 11년)이며, 조모는 별좌 이원기(李元記)의 여식이다. 부는 사직참봉, 상의원직장, 한성부참군, 병조좌랑, 성균관전적, 한산군수, 공주목사, 제용감정, 지평, 장령, 시강원문학, 보덕, 평산부사, 증 도승지, 증 영의정 나급(羅級, 1552년 명종 7년~1602년 선조 35년; 자 자승(子升), 호 후곡(後谷), 나주 출신)이며, 특히 아버지 증 영의정 나급은 아들 나만갑의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모는 광산 김(金) 씨 한성참군 김호선(金好善)의 여식이다. 나만갑의 처는 초계(草溪) 정(鄭) 씨 문숙공 정엽(鄭曄)의 여식으로서, 나만갑은 빙부 대사성, 대사헌 정엽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자녀 4남 가운데 맏아들은 진사, 세자익위사세마, 호조좌랑, 봉산군수, 이산현감, 종3품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 1614년 광해군 6년~1663년 현종(顯宗) 4년; 장유∙정홍명의 문인, 자 우천(于天), 자호 기주(朞州))이며, 경주 김(金) 씨 김남중(金南重)의 여식과 성혼했다. 안정인 나만갑 가문은 선조들뿐만 아니라 후손들도 대대손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이어가며 명문가(名門家)를 유지했다. <끝>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나만갑』, 민족백과; 「나만갑선생 신도비」, 경기문화재단, <https://ggc.ggcf.kr/>; 기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