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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언어로 그린 생명과 소통 의지
- 해랑 장근수, 시집 《사각형 밖의 세상이 더 아름답다》 소고
차 혁(車 爀)
Ⅰ. 서론
해랑의 네 번째 시집, 《사각형 밖의 세상이 더 아름답다 (이하 《사각형》으로 줄임)》는 전체 4부 79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편수는 많지 않으나 각 부의 주제가 서로 연관된 듯하면서도 독립적이어서 네 권의 시집을 하나로 합쳐 놓은 듯하다. 읽는 이는 적어도 네 번의 인고를 견뎌야 할 것이다.
각 부는 크게 4개의 주제로 나누어진다.
제1부는 소통 부재의 현실에 대한 시적 고뇌와 비판 정신이 담겨 있다. 해랑의 작가 정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다만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 사회적 역사적 측면보다는 개인적 심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참여시라고 볼 수는 없다. 해랑에게 사회 참여는 아주 절제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회시라는 용어가 가능하다면 사회시라고 볼 수는 있겠다.
제2부에는 시적 자아의 내면적 성찰을 통해 드러나는 생명과 소통 의지가 담겨 있다. 해랑이 현대시의 실존주의적 생명 전통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의의와 가치를 대상에 대한 내면적 성찰에서 시작하는 것은 ‘사회-시-개인’의 세 축에서 해랑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한다. 해랑은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 그에게 시는 개인과 개인은 물론 개인과 사회의 소통 통로로 작용한다. 해랑이 시를 쓰는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제3부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개의 삶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 즉 존재 이유에 대한 해랑 특유의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제2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제3부는 제2부와 비교해 두 가지 점이 다르다. 첫째 생명과 소통을 위한 인내 또는 인고의 가치가 제3부에서는 존재의 서술어로 나타난다는 점이 아주 독특하다. 해랑에게 인내와 인고의 시간은 목적적인 것이 아니라 다소 운명적인 것으로 고려된다. 그것은 주어라기보다는 술어에 가깝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가치는 그 어떤 경우에도 목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그 가치를 실현하고 또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가치는 절대 주어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해랑의 통찰력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실천적이다. 윤동주나 한용운에서 보이는 시적 지향이 해랑에게도 나타난다. 둘째 제2부와 제3부는 같은 주제와 문제의식을 다루면서도 제2부가 개인적 개별적 측면을 강조한 데 반해 제3부가 사회적 관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다소 맥락이 다르다. 다만 해랑에게 사회적 관계가 개인적 개별적 측면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점은 여기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이런 의미에서 제2부와 제3부는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
제4부는 시집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 제1부의 첫 시에서부터 던져진 숱한 질문들이 제4부에 와서 풀려나간다. 일종의 해소다. 제4부에서 해랑은 시의 전통적 주제인 개인의 운명을 다룬다. 여기서 생명과 생명 의지가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때로는 삶으로 때로는 죽음으로 표현된 운명에 관한 해랑의 해석에는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해랑의 관점과 시각이 담겨 있다. 개별적이든 사회적이든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존재이며 시간과 공간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운명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정의하는 기준이자 잣대다. 해랑도 이 점을 수용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운명을 다룰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을 신 또는 종교의 영역과 구분해야 한다. 신과 종교의 영역에서 운명은 개념적으로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는 결코 신화가 아니며 신화가 되어서도 안 된다. 19세기 이후 현대 시가 가지는 사실주의적 전통에 비추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시를 포함한 많은 글이 여기에서 숱한 오류와 함정에 빠진다. 이런 관점에서 운명에 관한 해랑의 해석은 대단히 타당하면서 설득력이 있다.
결론을 먼저 적는다면, 해랑은 개인과 사회, 주관과 객관, 의지와 운명, 이성과 종교의 대립 지점을 끊임없이 오가며 위험한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줄타기에서 해랑은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보인다. 《사각형》으로 이름 붙여진 작은 시집 한 권이 서점가의 숱한 시집들 사이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이다. 다만 시의 수월성과 읽을 가치에 비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한 점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각 부에 실린 시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시를 중심으로 몇 마디 덧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필자의 해석이 시인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른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어떤 부분은 시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고 필자의 생각을 솔직하고 냉정하게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것이 시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Ⅱ. 제1부 : 소통 부재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
현실을 비판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비판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들어가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해랑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시, <핸드폰·1>과 <핸드폰·2>는 그가 현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고 또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두 시는 시집 전체의 서론이자 문제 제기에 해당한다. 시는 구체를 추상으로 추상을 구체로 바꾸어 나가는데 능숙한 거의 유일한 문학 영역이다. 문학과 예술을 통틀어 가장 변증법적인 것이 바로 시이다. 이 과정을 해랑은 일상의 소품인 핸드폰에서 시작한다. 핸드폰은 이중적 성격을 띤다. 도구적 관점에서 핸드폰은 소통의 수단이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소통을 단절시키기도 하다. 소통 부재의 현실을 핸드폰이라는 일상의 도구에서 시작해 비판해 나가는 해랑의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대단히 전략적이다. 시가 일상의 사물을 다룰 때 독자는 적지 않은 친근감과 긴장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해랑은 친절하기까지 하다. 부연하면 해랑은 핸드폰이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소통 부재라는 추상적 요소를 아주 사실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소통 부재의 현실은 <핸드폰·1>에서는 ‘삶의 정지’(4연), <핸드폰·2>에서는 ‘휴식의 박탈’로 나타난다. <핸드폰>은 1과 2 둘로 나누어져 있으나 사실 하나의 시이다. 관점을 1에서는 사람에게서 사물로, 2에서는 사물에서 사람으로 바꾸어 표현했을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물 사이의 긴장을 유지함은 물론, 상이한 관점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음을 적절히 논증하고 있다. 시인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두 개의 비평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소통 부재 현실에 관한 시인의 안타까움과 절박함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인의 오래된 글쓰기 습관으로 볼 수도 있다. 해랑의 시집 전체를 보면, 중요한 주제일 경우 그가 다른 시어를 사용해 같은 주제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통 부재의 현실에 대한 비판은 다음 시에서도 계속된다. <소통>의 첫 행은 ‘얼굴 보자’로 시작한다. ‘얼굴’은 소통의 부재 또는 단절의 현실을 단칼에 끊어내는, 다시 말해 현실 문제를 해결하여 존재의 원형을 회복하는 결정적이고 파괴적인 수단이자 매개로 등장한다. 현실에 대한 시인의 절박한 호소와 문제 해결의 모든 열쇠가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시가 할 수 있는 모든 실천적 기능을 한 마디로 보여준다. 이래서 시를 쓰고 시를 읽는지도 모른다. 오직 시만이 할 수 있고 시인만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 해랑은 이 모든 걸 단 네 음절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까닭에 <소통>을 읽는 독자는 짧은 첫 행을 읽은 후 쉽사리 다음 행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산문으로 말하면 두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산문의 주제 위치는 두괄식과 미괄식이 대표적이다. 현대 영미권의 산문은 두괄식이 주류다. 시간과 비용의 경제성과 실용주의적 사고의 반영이다. 이에 반해 한국, 중국, 일본의 산문은 여전히 미괄식이 주류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두괄식이 미괄식보다 더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닌 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소통>은 두괄식이다. 시는 독자를 움직일 수 있어야만 한다. 냉혹한 말이기는 하지만 독자를 움직이지 못하는 시는 서점 한구석에서 먼지만 먹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의 첫 행, ‘얼굴 보자’는 독자를 움직이기에 충분하다. <소통>의 나머지는 첫 행에 모두 빨려 들어간다.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 적어도 독자를 움직이려면.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얼굴 보자’를 하나의 연으로 독립시켰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한다. 강렬한 만큼 독자가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독자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니까. 시인은 독자를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해랑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 하나의 행을 독립시키기도 한다. <소통>의 3연이 그렇다. ‘그것이 인생인 거야’는 하나의 독립된 연을 구성하고 있다. 시인의 강조가 여기에 있다. 다만 이 대목에서 지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시인은 ‘그것이 인생인 거야’를 강조하고 싶겠지만 독자는 ‘얼굴 보자’에 더 많은 감흥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시인과 독자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그 거리가 여기에 보인다. 어떻게 할까. 타협이 필요하다. 시인의 강조와 독자의 감흥을 모두 존중하는 시 쓰기의 전략이 필요하다. 둘 다 독립된 연으로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벽>은 소통 부재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벽>의 제1연은 소통 부재의 실상을 아주 친절하리만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1연의 2행부터 7행까지 사용된 세 개의 대구를 통해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전형적인 시적 강조다. 대구는 대단히 성공적이다. 2연과 3연에서도 대구가 사용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 4연에서 ‘선생님은 그 벽을 아십니까?’를 왜 썼을까 하는 점이다. 꼭 써야 했나. 만약 4연을 뺀다면 어땠을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뺀다면 시를 쓰다가 만 느낌이 든다. 시인도 그 점을 계산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 줄 덧붙여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니까 독자로서는 시를 잘 읽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긴장하게 된다. 물론 이런 긴장 효과를 노린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의 의도야 어찌 됐든 필자의 생각에는 한두 줄을 넣되 다른 표현을 넣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에게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린다면 그때는 물음표를 빼주기를 바란다. 물음표를 쓰지 않아도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된다면 굳이 물음표를 넣을 필요는 없을 것이며, 때에 따라서는 물음표보다 마침표가 독자들을 더 긴장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는 마이너스의 예술이지 플러스의 예술이 아니다. 독자를 움직이려면 뺄 수 있는 건 다 빼야 한다.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시인의 탁월한 예술성이 담겨 있다. 분명 현대 시이면서도 시조의 전통적 운율을 반영하고 있다. 흔히 내재율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음악성이 담겨 있다. 소통 부재의 냉엄한 현실의 <벽>을, 해랑은 하나의 음악으로 회화하고 있다. 무서우리만큼 놀라운 시적 예술성과 전략이 담겨 있다. <벽>을 읽고 이 시 속에 담긴 음악성을 찾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이 시를 다시 읽어야 한다. 시는 그림이기도 하고 노래이기도 하다. 해랑의 시에서 음악적 부분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필자에게 <벽>은 반갑기까지 하다.
<시가 하는 말>은 하나의 긴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로 표현된 일종의 수필 같다. 재미있다. 시인의 유머 감각이 한층 돋보이는 시이다. 이 시의 7행에도 ‘벽’이 등장한다. 다만 ‘우리와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지 마세요’라고 풀어 줌으로써 독자들이 한 마당 쉬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시인의 배려가 있다. 시 전체는 앞의 <벽>을 무너뜨릴 방법으로 가득 차 있다. 오히려 그 방법을 너무 쉽게 쓰다 보니 독자에게 내가 혹시 뭔가 빠뜨린 게 있지는 않나 하는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일종의 반전이다. 시인의 놀라운 전략이 감추어져 있다. 우리는 쉬운 질문에 익숙하지 않다. 모든 것을 어렵게 생각하고 어렵게 찾으려 한다. 바로 이러한 현실이 소통 부재를 더 악화시켰는지도 모른다. 해랑은 이 점을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게다. <시가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고, <시가 하는 말>이 쉽게 쓰인 이유이기도 하다. 해랑의 필법이 잘 드러나는 시이다.
<동행>은 한 마디로 소통의 시적 승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시는 3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의 1연과 3연에 꽃이 등장한다. 여기서 꽃은 소통의 승화를 실현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1연의 이슬 맺힌 꽃에서 시인은 마음이 숯이 된 현실의 비애를 표현하고 있다. 2연의 ‘살얼음 언 다른 세상’은 마음을 숯이 되게 만든 현실의 표현이다. 특히 여기에서 ‘다른’ 세상이라는 표현이 독자를 울린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고 또 그러려니 자포자기 심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며, 문제 제기하는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해랑은 이러한 현실을 피하지 않는다. 아주 직설적으로 ‘다른’ 세상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현실을 대하는 전사(戰士)적 용단을 보여주고 있다. 해랑의 실천적 의지가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 시인은 현실의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대할 때 때로는 이와 같은 용기와 의지를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시인이 필요한 이유이다. 3연의 꽃은 ‘동행꽃’이다. 동행과 꽃을 붙여서 씀으로써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 만약 떨어뜨렸다면 이 시는 죽은 시가 됐을 것이다. 소통 부재의 현실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꽃은 ‘동행꽃’이다. 다른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한 절박함이 아주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동행꽃’이다. 1연의 이슬 맺힌 꽃이 3연의 동행꽃이 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과 의지가 독자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시가 교육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한다.
<말 한마디>는 다소 여성적 색채를 지니는 시이다. 필자의 개인적 생각이지만 시집 전체를 통틀어 제일 잘 쓴 시 다섯 편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 가운데 하나가 <말 한마디>이다. 1연과 2연은 시적 함축이 아주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다. 시의 언어는 함축적이어야 한다. 구구절절이 늘어놓아서는 시가 될 수 없다. 또 목적과 행위를 거꾸로 서술함으로써 시상(詩想)을 아주 냉정하면서고 군더더기 없이 전개하고 있다. 4연의 ‘세상이 세상 같지 않아서’에는 해랑 특유의 필법이 담겨 있다. 해랑이 다른 작가들의 시와 다른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건 우리의 일상 언어와 사물을 시 속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담는다는 점이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것인데, 해랑은 바로 이것을 시 속에 그대로 담는다. 그런데도 전혀 어색하거나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세상이 세상 같지 않아서’라는 말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필자도 언제가 친구들과 술 한잔하면서 내뱉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서 이 말이 누군가의 시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해랑답다. 책상에 앉아서 쓰는 시가 있고 걷고 뛰면서 쓰는 시가 있다. 필자에게 선택하라면 당연히 후자다. 해랑의 시가 그렇다. 5연의 ‘속은 울고 겉은 웃는 세상’은 1연과 2연을 다시 한 번 함축적으로 반복하면서 다음 시인 <내가 가는 길에는>과 <거짓말>로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한다. 뒤의 두 시는 앞선 시들에서 나타난 시인의 메시지가 그대로 반복되므로 넘어가기로 한다.
<병실에서>는 3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다. 이 시는 해랑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 같다. 앞선 시들에서 소통 부재의 현실과 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고뇌가 그려져 있다면 <병실에서·1, 2, 3>은 모든 걸 뒤로 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는 시인의 성찰이 담겨 있다. <병실에서·1>에서 시적 자아가 속한 현실은 ‘무(無)’로 표현된다. ‘외로운 섬’은 병실의 은유로 보인다. <병실에서·2>에서 그려진 ‘북서풍 부는 골짜기’에 시인이 처한 현실과 고통이 함축되어 있다. ‘어머니’는 고통을 치유하는 상징적 존재이자 시인의 내면적 갈망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고독과 고통은 2연의 ‘괘종시계’로 인해 반전을 이룬다. 시인은 곧 ‘기도’를 통해 평안을 찾는다. 골짜기→어머니→괘종시계→기도로 이어지는 <병실에서·2>는 앞선 <병실에서·1>에서 나타난 시인의 고뇌와 번민을 해소하는 과정, 즉 시적 자아의 자기 회복의 과정으로 그려진다. <병실에서·3>은 시적 자아의 구원과 자각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과감한 말투로 외친다. ‘나에 대한 진정성을 알려면 입원해 봐라.’ 몇 줄 더 적은 뒤 시인은 급기야 다음과 같이 적는다. ‘병원에서는 보인다.’ 냉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어왔다. 사는 게 다 그렇지. 그런 게 인생 아니겠어라고 하지만 그런 상투적 말 속에는 극복할 수 없는 좌절이 담겨 있는 게 사실이다. 시인 역시 같은 과정을 수없이 겪어왔을 것이다. <병실에서> 1, 2, 3은 그러한 과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일종의 자기 고백의 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320호 병실’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절망의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이 그것이다. 하나의 공간이 두 개의 역할을 한다. 다만 치유의 과정이 자아 성찰을 통한 것이라는 점에서 해랑의 인간과 사회에 관한 통찰을 볼 수 있다. <병실에서·1>에서 ‘무’와 ‘섬’으로 그려진 320호는 <병실에서·3>으로 오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구원과 자각의 공간으로 바뀐다. 시인은 이것을 ‘신기하다’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해랑의 순수한 이성을 엿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병실에서·3>에서 첫 행부터 ‘신기하다’ 전까지 즉 7행까지를 한 연으로 하고, ‘신기하다’를 독립된 하나의 연으로 만든 다음, 시를 끝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마지막 두 행,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갈등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사족이다. 왜냐하면, 이 두 행이 없어도 시인이 독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이미 충분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4월, 태고사에서>는 불교적 시상을 배경으로 하나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이 시는 시인이 4월 어느 날 대둔산 태고사에 들러 사찰의 안팎을 둘러보던 중 스스로 평안을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시는 5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눈(1연)→목소리와 차 한 잔(2연)→목탁소리(3연)→까마귀들(4연)→염불소리(5연)’로 이어지는 시상의 전개는 시각과 미각 및 청각을 중심으로 오감이 합일되어 그려져 있다. 흔히 공감각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잘 나타난다. 해랑의 시 가운데 회화적 요소가 가장 잘 나타난 시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또 각 연에는 수많은 반전과 긴장이 담겨 있다. 1연에서 ‘4월의 눈’과 ‘봄’은 ‘천년 사찰’과 대비되어 시 전체를 아우르는 도화지 역할을 한다. 독자는 여기에 시인이 무슨 그림을 그릴지 이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2연에서 ‘보살님의 맑은 목소리’와 ‘차 한 잔’은 청각과 시각 및 미각을 오가면서 독자의 오감을 사로잡는다. ‘마음의 평화’는 시인이 주는 선물이다. 3연에서 ‘청공’과 ‘목탁소리’ 역시 시각과 청각을 다 사용한다. ‘목탁소리’가 ‘기암괴석 절벽을 타고’ ‘청공’으로 흩어짐으로써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소리가 되었다. 자각이자 해탈이다. 잠시 조지훈의 시, <승무>를 보자.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 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라는 시구가 있다. 눈에 보이는 건 까만 눈동자와 고운 뺨이지만 이를 통해 얻은 자각과 해탈은 별빛으로 승화되고 있다. <4월, 태고사에서> 3연에서 시인이 들은 것은 ‘목탁소리’지만 이를 통해 얻은 자각과 해탈은 ‘청공’으로 승화되어 있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주의와 인상주의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 해랑의 고뇌와 오랜 노력이 담긴 시이다. 4연에서 ‘까마귀’는 ‘고요’와 연결되어 시적 반전을 낳는다. 까마귀에 대한 해랑의 재해석이 보인다. 이 부분에서 해랑은 한국 시의 전통을 과감하게 탈피하고 있다. 한국의 민속에서 까마귀는 억울하게도 부정적 요소를 지닌 존재로 기억된다. 까치에 대비해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4월, 태고사에서> 4연에서 까마귀는 고요와 대비되어 영험한 존재로 해석되어 있다. 까마귀에 대한 재해석은 이 시가 가지는 수월성과 창의성을 돋보이게 한다. ‘고요’는 이 시에서 평안과 자각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여기서 해랑은 아주 놀라운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까마귀들이 고요를 ‘낚는다’라고 쓰고 있다. 영험한 존재로서의 까마귀는 중생의 자각을 이끌어내는 능동적 존재로 기록된다. 요약하면 이 시에서 까마귀는 영험한 존재이자 능동적 존재이다. 까마귀에 대한 해랑의 해석은 한국의 시를 한 걸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양의 시에서도 까마귀를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는 앞선 시, <동행>과 유사하다.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다시 적지 않는다.
<낙엽>은 <병실에서·1>과 대비된다. ‘육체’라는 시어를 선택한 점에서 그렇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둘 다 현실적 육체, 즉 고뇌와 번민하는 존재로서의 육체를 표현한 점이다. 차이점은 <병실에서·1>에서 육체가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능동적 육체로 그려졌다면 <낙엽>에서 육체는 누군가에 의해 밟혀도 저항하지 못하는 수동적 육체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책도 다를 수밖에 없다. <병실에서·1>의 육체는 기도를 통해 <낙엽>의 육체는 희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따라서 전자는 개인적이지만 후자는 사회적이다. <낙엽>에서의 희생은 누군가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순교에 가까운 것으로 그려 있다. 즉 3연은 ‘이 한 몸 다 바치리’라고 적으면서도 바로 위에서 ‘밟는 소리가 그렇게 행복하다면’이라고 하여 희생이 결코 헛된 게 아님을 적고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3연의 배경으로 나오는 ‘겨울’은 수동적 존재를 능동적 존재로 바꾸려는 몸부림으로 비친다. ‘겨울이 오기 전’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겨울은 운명적 숙명적 현실이다. 그것은 죽음 또는 죽음과 같은 것이다. 겨울을 죽음으로 해석할 때라야 3연이 이해된다. 시인은 죽음과 같은 운명적 현실이 오기 전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비록 수동적 존재라 하더라도 말이다. 시적 행위이자 시적 실천이다. <낙엽>이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 남자>와 <친구>는 빼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꽃>은 이미 <동행>에서 한 번 언급된 바 있다. 시집 전체를 보면, 해랑은 꽃이라는 시어를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다. 꽃을 시제로 삼아 정면으로 탐구한 시는 《사각형》에서는 이 시가 유일하다. <꽃>에서 시인은 꽃 자체보다는 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시제로 삼고 있다. 표현은 대단히 공격적이다. 하지만 전혀 공격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해학적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3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개의 연은 모두 대구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꽃은 함부로 말하지도(1연) 웃지도(2연) 꺾지도(3연) 말아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꽃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인 자신, 나아가 우리 자신이 아닐까. 존재하는 모든 것,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꽃>은 실존주의적 생명주의적 철학과 가치가 담겨 있는 시이다. 존재는 존재하는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가 있다. 존재해야 할 이유와 목적 따위는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가치가 이 시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3개의 연에는 모두 ‘고통’이라는 시어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 고통은 ‘사선을 밥 먹듯이 한’ 것이면서 ‘별빛처럼 빛나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생애를 단축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고통은 아픈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관점에서 해랑의 시어 선택과 시어에 담긴 의미는 대단히 독특하다. 해랑도 각 연의 끝에서 ‘그대는 생각해 본 적 있느냐?’라고 하면서 똑같은 말로 반복 표현했듯이 그 고통은 생각할 가치 있는 고통으로 그려진다. 생각할 가치 있는 고통이라면 그것은 결코 아픈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꽃은 함부로 말하지도 웃지도 꺾지도 말아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우리다. 반복하지만 이 시는 전형적인 실존주의적 시에 속한다.
<메르스>와 <해와 별 사이에는> 이 두 시는 평을 하지 않겠다. 바로 제2부로 넘어간다.
Ⅲ. 제2부 : 내면적 성찰을 통해 드러나는 생명과 소통 의지
제2부는 <단풍잎이 하는 말>로 시작한다. 이 시는 작가의 삶과 생명에 대한 의지가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1연에서 보인 의지는 2연과 3연에서 몇 가지 비유로 나타나고 마지막 4연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식으로 시상이 전개된다. 특히 4연에서 ‘가을을 환하게 맞이하리라’라고 씀으로써 그러한 의지가 어떤 결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을은 이 시에서 적절한 선택이다. 2연의 ‘소리 내어 떨어질 때까지’, 3연의 ‘무로 사라질 때까지’는 죽음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자신의 의지가 변하지 않을 것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2연과 3연은 같다.
<그대에게>도 앞의 <단풍잎이 하는 말>에서 보인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시인은 여기서 ‘인연’을 말하지만, 그것은 ‘낙엽’과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 생명 의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시인은 인정하고 있다. 운명에 대한 겸허함이 녹아있다. 특히 내가 상대에게 말하는 듯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읽히고 설득력이 있다. 적절하며 시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가을>은 시 자체만으로도 작가가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세월의 어느 시간에 있음을 연상하게 한다. 1연의 ‘계절의 간이역’과 2연의 ‘내리사랑’이 그렇다. 3연에서 보이듯 시인은 여전히 가을을 전제한다. 4연의 ‘회고’와 5연의 ‘정리’는 가을을 전제한다. 한 폭의 수채화가 연상된다. 이렇듯 제2부에서는 유난히 가을이 많이 등장한다. 시인이 가을의 어느 시기에 여러 편의 시를 쓴 듯하다. 다만 시의 제목을 굳이 가을로 해야 했나 라는 아쉬움이 있다. 시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 등에 비추어 가을이라는 제목은 너무 상투적이고 시의 무게감을 떨어뜨린다. 또 4연의 ‘축제와 휴식의 계절로 나타나’라는 표현이 너무 어색하다. 이 표현은 시 전체의 흐름을 끊는다. 시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표현이 없었을까.
<가을 노래>와 <가을에는> 두 시는 앞의 <가을>의 후속편이라고 보면 된다. 달리 적을 게 없다. 그 사이 <거품>은 시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좀 생뚱맞다. 차라리 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필자의 이해 부족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간다.
<비 오는 날>에 이르러 시인의 생명 의지가 다시 한번 강하게 확인된다. 두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의 ‘천둥’ ‘소낙비’는 생명 의지를 뒷받침하는 배경 소재로 작용한다. ‘보석’과 ‘빛’은 생명 의지의 표현이고 이러한 의지가 ‘그대의 목소리’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대의 목소리’ 덕분에 시가 살아났다. 2연은 ‘빛’과 ‘아침 해’를 매개로 ‘봄’의 도래가 예정되어 있다. 여기서 ‘봄’은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말한다. 앞선 시들에서 시인의 생명 의지가 표현되어 있다면 이 시에서 그런 의지가 ‘봄’으로 변화됨을 알 수 있다. 해랑에게 봄은 가을과 다르다. 가을이 봄을 예정하지 않는다면 가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따라서 봄은 새로운 생명을 기약하는 일종의 약속이다. 마지막에 ‘푸르게 물들게 하리라’에서 생명 의지를 ‘푸르게’로 형상화하고 있다. 추상적 의지를 구체적 색으로 표현하는 건 시적 형상화의 기본이다. 동시에 윗줄의 봄과도 일치한다. 아주 잘 쓴 시다.
<울릉도에서> 1연의 ‘노래를 부르고 있네’와 <기도> 1연 첫 행의 ‘이 순간에도 기도합니다’를 통해 생명 의지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울릉도에서> ‘노래’(청각)는 ‘통통배’(시각)을 거쳐 ‘정화’에 이른다. 공감각적 표현 기법이 반영되어 있다. <기도>에서 ‘기도합니다’라는 표현은 1연부터 4연까지 표현만 다소 달리할 뿐 계속 반복되어 대구를 이룬다. ‘이 순간에도’(1연) ‘지금도’(2연) ‘오늘도’(3연) ‘앞으로도’(4연) 라고 씀으로써 점층법을 구사하면서도 시간적 순서를 따르고 있다. 시적 강조가 인생과 자연의 시간적 질서에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해랑의 시 전체에 나타나는 성질이다. 다만 이 시에서 그것이 좀 더 직설적으로 드러나 있을 뿐이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시간적 질서를 ‘이 순간에도’(1연) ‘지금도’(2연) ‘오늘도’(3연) ‘앞으로도’(4연) 라고 쓰지 말고 다른 사물이나 대상 등을 사용해 구사할 수는 없었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랬더라면 시는 훨씬 더 인상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직설적 표현이 해랑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방해가 되기도 한다.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세월에게>는 인생을 회고하는 회고적 시이자 관조적 시이다. 1연의 ‘이제는 “빨리 가자”하며 저만치 먼저 가네’에서 독자는 잠시 시를 덮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해랑의 직설적 표현이 힘을 발휘하는 대목이다. 특히 “빨리 가자”를 큰따옴표를 사용해 부각함으로써 독자는 누군가 지금 나에게 말하는 듯한 착각을 받게 된다. 시인의 전략이 정확히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이것이 해랑의 강점이다. ‘저만치 먼저 가네’를 통해 인생의 비애와 한계를 느끼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건 언제가 사라지게 된다. 2연은 1연에서 보인 시상이 그대로 반복된다. 이 시의 강점 또 하나는 음악적 요소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1연에서 ‘이제는’과 ‘저만치’가 ‘“빨리 가자” 하며’와 ‘먼저 가네’가 그렇고 2연에서 ‘네가’와 ‘너를’이 ‘싫어지려고 한다’와 ‘사랑하려고 하면’이 그렇다. 음악적 요소가 시의 호흡을 빠르게 하기도 하고 늦추기도 한다. 이건 순전히 독자에게 달린 것이다. 읽는 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시이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시가 해야 할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본다.
<가을에 서서>와 <가을밤에>는 큰 특색이 없고 앞서 소개한 시에서 나타난 메시지와 시상이 그대로 반복된다. 다만 <가을밤에>의 3연에서 ‘인생의 끈’을 ‘행복과 축복의 끈’으로 적은 건 좀 상투적이고 가벼워 보인다. 순간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시간을 두고 다시 한번 걸러서 고쳐 썼어야 한다. 감정은 솔직할수록 좋겠지만 그것을 독자들에게 내놓을 때는 반드시 퇴고를 거쳐야 한다. 시는 시집에 실려 독자들의 손에 오르는 순간, 그때부터는 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시가 독자에게 가는 순간 그건 독자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시는 시인의 소유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움>은 누군가를 그리워하지만 가지 못하는 애상을 노래한 시이다. 1연의 ‘오솔길’은 인생의 여정일 텐데 시인은 그것을 ‘오솔길 끝’으로 씀으로써 자신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덕에 ‘이 놈의 세월 나를 놓아주지 않네’가 설 자리를 갖게 되었다. 완벽한 구성이다. 시인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고 누구나 겪는 일이라 독자들의 공감을 사게 하는 좋은 시이다. 다만 2연에서 하늘을 파란색으로 표현한 것이 좀 어색하다. 파랑은 젊음과 생명을 표현한다. 시인의 다른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독자의 관점에서는 왜 갑자기 파란 하늘이 등장하는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2연에서 시의 호흡이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리움에 사무쳐 있는 / 내 마음 모르는 / 가을은 소리 없이 다가오네’를 ‘그리움에 사무쳐 있는 / 내 마음 모르는 가을은 / 소리 없이 다가오네’로 바꾸면 어떨까. 시인은 가을을 마지막에 부각하고자 하나, 이 시에서 가을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시어이므로 차라리 ‘소리 없이 다가오네’를 부각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 시에서 2연의 ‘가을’은 1연의 ‘세월’의 의미를 띤 시어이므로 1연에서 세월이 나를 놓아주지 않은 만큼 2연의 가을도 소리 없이 다가오는 걸 강조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바보인생>, <구봉산>, <때가 되면>은 뺀다. <바보인생>은 세상과 인생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시이고 <구봉산> 역시 산을 빗대어 표현했을 뿐 <바보인생>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도 같다.
<은행나무>는 시인의 생명 의지가 다시 확인되는 시이다. 의지는 ‘하늘마저 멍드는 겨울이 와도’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 의지가 ‘찬 세상에 미소를’ 띄울 것을 약속하고 있다. 희망찬 시이다. 다만 마지막에 ‘그래도 ’갑‘질은 하지 않으리’라는 구절이 이 시의 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한다. ‘갑질’에서 ‘갑’에 작은따옴표를 쳐 강조함으로써 시인의 의지와 현실 비판 정신을 동시에 보여주어 이 시의 지향이 무엇인지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가치를 높이지만, 1행부터 7행까지 즉 그전까지 전개된 시상이 독자 일반의 예상에서는 갑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이 또한 시인의 전략과 의도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판단하라고 한다면 전자를 택하겠다. 시인이 이 사실을 모르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독특한 시이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가식과 포장으로 덮인 세태를 호되게 비판하는 시이다. 시인의 분노가 보인다. 이것이 독자를 불편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 도망갈 곳도 없다. 시인의 전략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79편의 시 속에 이런 시 하나 있어도 괜찮겠다. 다만 마지막 연인 4연에서 시인의 의지가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된 점이 아쉽다.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말을 굳이 써야 했을까. 해랑의 시 가운데 제2부는 이런 식으로 끝맺음을 하는 시가 적지 않다. 이것이 오히려 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특히 이 시에서는 그렇다. 포장으로 가득한 세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시상을 잡고 그것을 구체적 사물이나 현상의 해석을 통해 표현하는 것만으로 끝냈다면, 독자는 이 시를 읽고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시는 독자에게 너무 쉽게 답을 알려주어도 안 되지만, 시인 자신의 의지나 각오를 너무 쉽게 노출해서도 안 된다. 독자들이 자신의 길을 찾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어땠을까. 해랑은 욕심이 많다. 하고 싶은 말도 많다. 그만큼 힘든 세파를 견뎌왔음을 알 수 있다. 시 곳곳에 시인의 고단한 삶이 녹아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조차도 내려놓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해랑의 시를 읽고 깨닫게 된다. 감히 말하자면 해랑의 시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찾지 못하는 강점이 있다. 이 강점이 온전히 살아날 필요가 있다. 한국 문학의 자산이자 유산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검은 버섯>과 <물방울>은 건너뛰고 바로 제3부로 넘어간다. 이 시에 대해 적을 것은 이미 앞에서 다 적었기 때문에 다시 부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이다.
Ⅳ. 제3부 : 존재 이유에 관한 성찰
갑자기 <한복>이 등장한다. 한복에 관한 시인의 해석이 이채롭다. 시에서 한복은 3연의 ‘무지개 꽃’이 된다. 한복을 묘사한 시이지만, 이 시에서 그것은 입는 물건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 ‘온 세상 무지개 꽃으로 핀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제3부에서 시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암시하는 시이다. 제2부에서 보여준 개인적 개별적 성찰이 제3부에서는 사회적 역사적 성찰로 전화한다. 한복이 어느 개인이 아니라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탁월한 해석이다.
<컵라면>은 해랑다운 시이다. 일상의 소품에서 시상을 찾는 능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작은 성’은 컵라면 그릇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비유한 것이고 ‘당근과 야채 조각들’은 그러한 세상에 갇힌 우리의 현실과 운명을 노래한 것이다. 3연의 ‘작은 희생에도 가슴 아파하지 않고’라는 말은 삶의 전선에서 싸우는 고단한 우리의 삶을 적은 것이며 마지막에 ‘삶의 병사들’을 ‘얄밉네’라고 표현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컵라면이라는 작은 물건 하나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고단한 시간을 묘사하는 해랑의 묘사 능력이 대단히 놀랍다. 이 시가 탁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러한 고단함에 대한 시인의 주관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그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있다. 얄밉다고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결론을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언뜻 우스워 보이지만 절대 우습지 않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참 좋은 시이다.
<행복이란>부터 해랑의 주관이 드러난다. 처음부터 ‘피곤함을 느낄 때’라고 적음으로써 그다음 구절을 예상하게 한다. ‘노랫소리’와 ‘따스한 바람’은 행복의 은유다. 시는 행복을 5연에서 정의하고 있다. ‘마음을 조금씩 비워가고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것이 없다. 이 시의 특징은 바로 윗 구절이다. ‘세월 따라 가며’가 그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에 구속된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해랑은 모든 걸 시공간의 제한 속에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철저한 사실주의 시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해랑의 시에는 기교가 없다. 우리는 많은 시에서 불필요한 기교를 본 적이 있다. 그러한 기교가 시를 망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해랑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일상의 언어를 기초로 시를 쓰는 해랑이 숱한 기교와 덧칠에 지친 다른 시들에 비해 유난히 돋보이는 이유이다.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기교를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언어 이면에 있는, 아니 언어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우리의 삶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시이다. 해랑의 강점이다.
<터널 속에서>라는 제목의 시에는 정작 터널이 없다. ‘어둠 속으로 들어왔지만’ ‘나갈 수도 없는 인생길’을 통해 터널을 유추할 뿐이다. ‘겨울에도 타오르는 장미’는 무엇인가. 존재 이유이자, 앞서 제2부에서 표현된 생명 의지의 계승이다. 다만 마지막 2행 ‘항상 밝지 않는 어둠을 밝은 인생으로 불태우리라’가 시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게 아쉽다. 시인 자신의 각오가 너무 쉽게 드러난다. 앞서 적었듯이 이런 식의 표현은 자제하는 게 좋다. 시는 자신의 각오를 밝힘으로써 그것이 설 자리를 제한한다. 아쉽다. 해랑의 시가 가지는 일종의 오래된 습관으로 보인다. 대상을 대상 그 자체로 해석하고 자신의 의지나 각오를 절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독자에게 더 많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고백적 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예를 윤동주의 <서시>에서 볼 수 있다. <서시> 1연 마지막에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단 한 줄로 적힌 2연의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로 보완되어 있다. 독자가 이 시에서 감동하는 것은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때문이 아니라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때문이다. 시에서 시인이 자신의 의지나 각오를 적을 때는 항상 독자를 생각해야 한다. 독자가 생각할 여지를 남겨야 한다. 윤동주의 <서시>가 많은 사람의 입에서 회자하는 이유이다.
<길>은 3편의 연작시이다. <길·1>에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자 ‘가지 못해도 가야 하는 길’은 <길·2>에서 ‘힘들고 힘들어도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야 하는 길’이 되고 <길·3>에서 그 길은 마침내 ‘어머니 같은 길’로 승화한다. 3편의 시는 하나이며 같이 읽어야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읽을 수 있다. 시인이 인생을 회고하는 회고시이자 인생을 관조하는 관조시이다. 마지막 ‘어머니 같은 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운명에의 순응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치유이다. 어머니가 갔던 길이 결국 우리가 다시 가게 되는 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인정하는 것이 어쩌면 궁극적 치유일 수도 있다. 여기서 시인의 숙명론적 사고가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치유를 전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희망적이기도 하다. 시의 구체적 표현에 대한 언급은 별론으로 하고 시 전체가 가지는 의미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이 정도로 적고 넘어간다.
<행복>과 <행복과 불행>은 앞서 <행복이란> 시의 반복이다. 다만 <행복>에서 ‘눈 차분하게 감고’를 통해 세상과 한 발 떨어져 있는 시인의 관조적 태도가 보이는 점에서 시인이 행복을 관조적 회고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노래’는 행복이다. <행복과 불행>에서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적고 있는데 너무 사실적으로 적어서 달리 설명할 게 없다. <행복과 불행>은 시라기보다는 짧은 수필에 가깝다.
<목소리꽃>은 제목부터 독특하다. 앞서 <동행>에서도 ‘동행꽃’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같은 방식으로 목소리꽃도 시인이 부여한 어떤 의미를 담는 그릇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는 특히 마지막 3연이 ‘딱 하나 / 그대의 예쁜’으로 끝남으로써 여백을 남겼다는 점에서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참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한다. ‘그대의 예쁜’ 뒤에 목소리라는 말을 적지 않아도 독자는 그 다음에 올 말을 알 수 있다.
<5월에는>에 등장하는 ‘말 한마디’는 소통 부재와 상호 배려 부족의 현실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산장산을 오르며>에서 ‘내가 가야 할 길’(1연) ‘내가 꼭 가야 할 길’(2연)을 시인은 ‘미소 지으며’(1연) 가겠다고 하기도 하고 ‘눈물짓지 않고 웃으며’(2연) 가겠다고도 한다. 시인의 각오와 의지가 담겨 있되 독자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다.
<재회>는 우정을 노래한 시이기도 하고 인연을 노래한 시이기도 하다. ‘세월’ ‘추억’ ‘끈’ 등이 그렇다. 앞서 <동행>과 유사한 시상이 적용된 시이다.
<우산>은 2편의 연작시다. 다만 <우산·1>은 사람이 사물에게 <우산·2>는 사물이 사람에게 하는 말을 적었다는 점에서 같은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논증하는 형식을 취했다. 시집 맨 앞의 <핸드폰 1·2>와 같은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산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우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 즉 존재 이유를 표상하는 시어가 아닐까 한다. 존재는 그것이 가지는 고유의 의미를 유지할 때 가치 있는 그 무엇이 된다. 시인은 이점을 <우산·2>의 마지막에서 ‘차라리 비와 연인 되어 내 몸이 활짝 피어있는 날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함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고유의 의미를 회복해야 함을 해학적으로 비꼬고 있다.
<눈부신 세상>과 <영국사를 지키며>는 넘어간다.
<걸레> 역시 일상의 소품을 통해 시상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앞서 <핸드폰> <우산>과 같은 시적 창의를 드러내고 있다. 소위 걸레의 재해석이다. 이채롭다. 걸레는 지저분한 물건이지만 사실 걸레 덕분에 세상이 깨끗해짐을 우리는 잊고 살 때가 많다. 3연에서 시인은 걸레를 ‘사랑스럽다’고 함으로써 걸레의 존재 이유를 통쾌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걸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걸레는 눈에 보이는 표상일 뿐이다. 표상 이면에 감추어진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쉽게 잊고 지나가는 것, 우리가 가벼이 여기는 것, 그러한 것도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일종의 경고성 시이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일종의 교육적 목적을 가진 시이다. 걸레를 사랑스럽다고 한 시인의 마음이 순수하기까지 하다.
<금요일에는> 일상에 지친 샐러리맨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시이다. 마지막 연에서 ‘초등학교에 입한 어린아이처럼’이라는 표현이 독자의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든다. 편안한 시이다. 금요일을 ‘즐거운 나의 천국’이라고 묘사했다. 일종의 해방구이자 탈출구로 해석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금요일이 다음 주 월요일의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 시에서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런 생각이 필요하지 않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 오늘은 무조건 금요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샐러리맨의 일상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바로 그 점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이 시는 그 자체로 어떤 가치나 지향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존재 이유를 찾아가는 우리의 고단한 삶을 우회적으로 또 해학적으로 묘사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Ⅴ. 제4부 : 삶과 죽음, 운명에의 순응
제4부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억류>부터 <고향의 향기>까지 5편, <어머니> 연작시 7편, <비움> 연작시 8편이 그것이다. 하나씩 보자.
<억류>는 울릉도에서 쓴 시이다. 시상은 ‘삼박사일’이라는 시간적 제한 속에서 전개된다. ‘바람에 밀려다니는 파도’를 통해 시인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엉뚱하게 ‘바위에 화풀이하고 죽는’ 모습이 다분히 해학적이다. 아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고뇌와 고단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이다. ‘결국은’으로 시작되는 4연이 독자를 긴장시킨다. ‘울릉도 사랑에 빠져 억류당했다’고 수동적 표현을 적고 있지만, 그 의미는 전혀 수동적이지 않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그렇다.
<나뭇잎을 보며>를 통해 시인은 우리가 삶과 죽음, 즉 운명을 대하는 태도를 조심스레 적고 있다. ‘나뭇잎을 따지는 말자’(1연)고 하기도 하고 ‘함부로 떠들지 말자’(2연)고 하기도 한다. 각자의 운명이 어떻든 그것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뭇잎을 따지 말자는 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 고유의 의미대로 그 자체로 존중하고 배려하자는 의미이다. 함부로 떠들지 말자는 건 존재와 운명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이고 왜곡된 시각과 시선을 경계하는 일종의 경고다. 그렇지 않고 존재와 운명을 제대로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자세와 태도가 우리에게 다시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시는 그 자체로 참 좋은 시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쯤 읽어보았으면 하는 시이다. 시는 쉽게 쓰여져 있다. 불필요한 비유나 은유도 없고 어려운 시어로 도배질도 하지 않았다. 어떤 기교도 없다. 그저 나를 잘 아는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고즈넉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적고 있다. 분명 시를 본 것은 눈인데 내 마음에 들리는 것은 귀이고 마음이다. <나뭇잎을 보며>는 눈으로 보는 시가 아니고 귀로 듣는 시이다. 해랑의 강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시이다. 이 시를 영어로 바꾸어 미국 등에서 출판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고 다음 시로 넘어간다.
<내 마음에는 고향이 있다>부터 시작해 <고향이 시였네>와 <고향의 향기>까지 3편의 시가 소위 고향 3부작이다. 각 시가 다 좋다. 묶어서 적는다. <내 마음에는 고향이 있다>는 마음 속에 추억되는 고향을 그리고 있다. ‘발자국 소리’ ‘풀벌레 울음소리’로 기억되는 고향은 심지어 ‘먼지 일으키며 가는 차 소리’까지도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1연) 그만큼 고향은 하나의 완전체로 기억된다. ‘눈 오는 이 추운 겨울’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어머니 목소리처럼 들린다.’(2연) 시인에게 고향은 어머니 목소리이다. 고향을 청각적 요소를 통해 기억해내는 해랑의 고향 3부작이 이채롭다. 이 시는 온통 귀에 들리는 청각적 요소로 가득하다. 하지만 독자에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시각적 요소로 느껴진다. 시인의 감각을 구사하는 전략이 아주 탁월하다. 시는 이래야 한다. <고향이 시였네>는 시 한 편 쓰려고 고향에 들렀다가 온통 시가 되어버린 고향의 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시인의 모습을 그린 시이다. 시가 고향이고 고향이 시이다. 이 시는 통째로 하나의 은유다. 하지만 아쉬움이 하나 있다. ‘다 시였네’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중간에 있는 건 빼고 마지막에 한 번만 적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차피 연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연으로 쓴 시인만큼 같은 얘기를 두 번 반복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앞서 적었듯이 시는 뺄 수 있는 건 다 빼는 게 좋다. 안 그러면 소설이나 수필이 되기 때문이다. <고향의 향기>는 고향을 추억하고 회고하는 시인의 마음을 적은 시이다. 시 자체로서는 그리 특이한 점은 없다. 다만 앞의 <내 마음에는 고향이 있다>와 비교해 이 시는 후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고향의 향기’ ‘쇠똥 냄새들’이 그렇다. 물론 시각과 청각도 들어있다. ‘벼의 얼굴’은 시각이며, ‘쓰름 매미 소리들’은 청각이다. 하지만 시 전체로는 후각이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더 정확히 적자면 후각에서 시각으로 또 청각으로 전화되면서 고향을 다양한 감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지막에 한 폭의 ‘수채화’로 기억된다. 적어도 시인에게는.
<어머니>는 총 7편의 연작시다. 하지만 각 시는 강조하는 점이 약간씩 다르다. 이점을 먼저 적자면, 1은 어머니의 생전의 모습을, 2는 어머니의 죽음을, 3부터 7까지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담담한 어조로 적고 있다. <어머니> 7편을 통해 삶과 죽음, 운명을 대하는 해랑의 정신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어머니·1>은 생전의 모습을 적고 있다. ‘옷을 고옵게 차려입고 산책’한다든가 ‘굽어진 등을 진 채 실버카에 매달린’ 모습 등은 시인의 추억 속에 자리한 어머니의 모습을 적은 것이다. 표현 자체는 그리 특이할 것이 없는데, 시인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모두 표현했다는 점에서 이 시를 읽는 독자는 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를 추억하게 한다. 사실주의적 표현이 가지는 장점이다. 이 시에서 등장하는 어머니는 애틋하면서도 그리운 어머니다. <어머니·2>는 어머니의 죽음을 묘사한 시이다. ‘강’은 죽음의 은유다. 부모의 죽음을 강에 비유하는 건 한국 고유의 전통적 묘사이자 민속 전통이다. 시인도 그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마지막 4연의 ‘뒤돌아보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세요’라는 말이 독자들의 마음을 울린다. ‘어머니 사랑합니다’는 시인의 감정을 반영한 것일 수는 있어도 독자를 울리지는 못한다. 다소 상투적인 표현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시 전체의 구조상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어머니·3>에서 시인은 어머니를 ‘말이 없으시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실제로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시인의 기억과 회상 속에 말이 없음을 적은 것이다. 즉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의 생전의 모습을 추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말이 없으신 어머니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도 엿볼 수 있게 한다. 2연에는 ‘옛 모습에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과 슬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고통을 보여준다. <어머니·4>는 생전 어머니의 말씀을 그대로 시 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해랑의 강점이다. ‘니들 형제끼리는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은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의 말이다. 이 말이 독자를 울리는 것은 시인의 어머니의 말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든 시는 보편의 정서와 감정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독자가 읽는다. 보편의 정서와 감정은 기교와 채색으로 덮으면 덮을수록 더 지저분해진다. 해랑은 이점 명확하게 알고 있다. 아들을 자랑하는 어머니의 모습 또한 우리 모두의 어머니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개나리가 활짝 핀 후에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점에서 어머니는 그리움의 존재로 남는다. <어머니·5>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특정의 시간을 회고한 시이다. 추도일에 쓴 시가 아닌가 한다. <어머니·6> 역시 ‘아들 주려고 기다렸다’거나 ‘건강에 아주 좋은 것이니 나만 먹으라고 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의 어머니를 그리고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그대로 쓰고 있다. 이렇게 시를 쓰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해랑의 무서움이 보이는 시이다. <어머니·7>의 마지막 연에 다시 ‘강’을 등장시킴으로써 해랑은 <어머니·2>에서 보여준 강을 매듭짓고 있다. 연작시 7편은 강에서 강으로 끝난다. <어머니> 7편은 어머니의 죽음과 이를 회고하는 시인의 그리운 마음을 절절히 적은 시이다. 하지만 이 시들을 통해 삶과 죽음을 대하는 해랑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점을 간략히 적으면 다음과 같다. 해랑은 어머니를 회고할 때 회고의 배경이 되는 시간이나 공간을 ‘초여름 같은 봄’(어머니3) ‘휴일 아침’(어머니4) ‘벚꽃이 활짝 핀 봄’(어머니5) ‘고향에 온 새벽 아침’(어머니6) ‘이팝나무꽃 활짝 핀 초여름 이른 아침’(어머니7)으로 적고 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어머니를 추억하는 시간이나 공간은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시간이다. 봄이 그렇고 아침이 그렇고 꽃이 그렇다. 해랑에게 죽음은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건 아픔이지만 그 아픔은 새로운 삶과 생명으로 전이된다. 죽음에 대한 능동적이고 긍정적 해석이 해랑의 시 전반을 흐른다. ‘손을 흔드시는 것 같아’(어머니3) ‘예정된 벨처럼 울렸던’(어머니4) ‘어머니를 보았다’(어머니5) ‘전화기를 들고서야’(어머니7)를 통해 해랑에게 어머니의 죽음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어머니의 죽음 자체는 과거 사실이더라도 그 의미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다가온다. 무엇을 의미할까. 죽음이 죽음 자체로 끝난다면 그것은 절대 현재형이 될 수 없다. 어머니의 유산, 가르침과 사랑은 해랑의 마음속에 현재형으로 남아있다. 생명은 그런 것이다. 해랑은 죽음을 과거의 사실로 적지 않고 현재로 끌어내었다. 운명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될 때 그 가치가 있다. 해랑은 이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아니 절대 슬퍼할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이 해랑 앞에 나아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해랑의 <어머니> 7편이 세상의 숱한 어머니에 관한 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제 시집 《사각형》의 종반부로 간다. <비움> 8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비움>은 해랑의 철학과 가치관 세계관이 담겨 있는 시이다. <비움>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삶과 죽음, 운명에 대한 시인의 자각과 깨달음을 담은 시이다. <비움·1>은 ‘겨울’로 시작한다. 춥고 배고픈 겨울인데도 시인은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다. 적어도 1연은 그렇다. 다만 2연에서 그렸듯이 ‘볼썽사나운 인간들 때문에 마음에 가시가’ 박힌 것이 애처로울 뿐이다. 솔직하다. 그래서 해랑이다. 시는 ‘웃음을 빼앗길 뿐’이라고 적지만 독자는 오히려 이 말 때문에 웃는다. 너무 솔직해서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시가 독자를 감동시킬 때는 솔직할 때이다. <비움·2>에서는 ‘비우는 것도 용기’라고 적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사계절이 겨울처럼’ 보인다고 했다. 인생에 대한 관조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비움·3>에서 시인은 ‘겨울이 오기 전에 옷을 벗었다’고 하면서 그랬더니 ‘마음이 편하고 따스하다’고 했다. ‘속이 후련하다’고도 한다. 남들은 이래저래 야단이고 또 걱정하지만 시인은 그렇지 않다. 시인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적은 것이면서 동시에 독자들에게 암시하는 것이 있다. <비움> 8편의 시 중에서 비움이 무엇인가를 가장 직설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다만 시의 마지막에 ‘후련한 내 마음속에는 자유와 행복이 가득하다’는 말은 적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적지 않아도 그 앞에 이미 충분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족이다. 시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비움·4>는 비움의 고통을 노래한 시이다. 1연에서 ‘마음을 비우고나니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솔직한 말이다. 비우는 게 어디 그리 쉬운가. 시인의 고통이자 우리 모두의 고통이자 숙제다. 해랑은 그것을 솔직히 적은 것이다. 비우는 데는 주변의 유혹도 있다. ‘가시 같은 말 때문에’(4연) 마음이 아팠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잠시 지나면 마음은 편했다’(4연 마지막 행)고 한다. 비움의 고통과 인고의 시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쉽게 쓰여 있으면서도 공감이 가는 시다. <비움·5>는 일종의 반전이다. 비운 다음에 찾아오는 일종의 금단현상을 적고 있다. 시인은 ‘비우고 비웠는데 마음이 편할 줄 알았네 잠시 뿐’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 <비움> 8편의 시가 바로 <비움·5> 때문에 더 돋보인다. 동시에 그다음 6에서 8까지의 시가 기대된다. <비움·6>은 1연에서 시집의 제목인 ‘사각형 탁자’를 묘사하고 있다. 사각형 탁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비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시인은 솔직하게 적은 뒤 그 고통을 차라리 ‘졸업하고 싶다’고 적는다. 독자들의 마음이 이와 다를까.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졸업은 무엇인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운명이고 죽음이다. 인간의 운명 중에 죽음보다 더한 것이 있는가. 하지만 그것은 신의 영역. 둘째는 모든 것을 떠난 나만의 시간 즉 휴식이다. 어느 것으로 해석하여도 상관없다. 어찌 됐든 해랑은 시의 마지막에 ‘밖의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사각형 밖의 세상이다. 사각형 밖의 세상은 비움의 공간이다. <비움·7>은 비움의 고통을 어떻게든 벗어남과 동시에 비움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시인의 몸부림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몸부림을 ‘봄꽃 피는 그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다. 운명에 순응하는 삶의 겸허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포기한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비움·8>은 1연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꽃이 피면 좋고 꽃이 져도 좋다 비가 와도 좋고 눈이 와도 좋다’고 한다. 해탈이다. 삶의 경지다. 관조적 태도가 돋보인다. 동시에 삶과 운명에 대한 겸허함과 절제가 보인다. 사각형 밖의 세상, 즉 비움의 공간은 바로 겸허함과 절제를 통해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게다. <비움> 8편은 시인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것도 간결하게 말하는 시이다. 표현상의 기법 등은 따질 필요가 없다. 내용 그 자체로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적었듯이 해랑의 강점은 일상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아주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려내는 데 있다. 어떤 기교나 채색도 해랑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해랑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비움> 8편은 해랑이 자신이 누구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하루하루를 사는지 독자들에게 고백하는 고백시이기도 하다. 이 경우 독자로서 시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회원신간시집>코너는 말그대로 회원님들의 시집을 소개하는 곳입니다. 시인사진과 약력, 시집사진(이미지)을 간단하게 올리는 등 소식을 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올리신 글은 시와 산문 등 <대전의 시인들>코너로 옮겼습니다.
달마님! 감사합니다. 마땅히 올릴 코너가 없는 것 같아 올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시집이미지(사진)와 시인사진(약력포함)이 있으면 <회원신간시집>코너에 게시된 내용을 참고하여 올려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