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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배추 잎에 파, 마늘, 생강, 고추 등을 채 쳐 넣고 배와 밤, 대추 등의 온갖 과일은 물론이고 낙지나 마른 북어와 같은 해산물을 얹어 보자기처럼 싸놓은 후 익혀 먹는 김치가 보쌈김치다. 화려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특징인 보쌈김치는 맛도 특별하지만 보쌈 속에 들어 있는 갖가지 해물과 과일을 골라 먹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고명을 싼 넓은 배추 잎을 쭉쭉 찢어서 밥에 얹어 먹으면 겨울철 별미로 손색이 없다.
개성의 명물이라는 보쌈김치는 지금도 생각보다 먹기가 쉽지 않다. 집에서 보쌈김치를 담그는 데도 손이 많이 갈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제대로 담글 줄 아는 사람도 얼마 없다. 음식점에서 사 먹자니 제대로 된 보쌈김치를 내놓는 곳도 많지 않다. 만들기가 복잡한 데다 별도로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하니 김치를 돈 내고 사 먹는 데 따른 소비자의 거부감도 작용하는 것 같다.
옛날 신문을 보면 보쌈김치는 원래부터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개성 쌈김치가 맛있고 유명한 것은 그만큼 시간과 공력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인데 개성에서도 김장 전체를 쌈김치로 담그는 것이 아니라 조금 담가서 손님이 올 때 혹은 얌전하게 써야 할 때나 내놓는 김치라고 소개했다. 손님이 왔을 때나 집안의 특별한 행사 때 내놓는 특별한 김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쌈김치는 개성의 명물 음식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개성 김치라기보다 궁중 음식에서 발달한 김치라고 한다. 궁궐에서 임금님 수라상에 올리던 김치가 민가에 전해지면서 퍼진 별미기 때문이다. 구중궁궐에 전해 내려온 음식으로 왕족이나 궁궐을 출입하던 고관대작의 집에서나 담그던 김치였기에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보쌈김치는 한양에서조차 일반인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왕조가 멸망해 왕실 요리사들이 궁궐에서 나와 개인적으로 고급 음식점을 개업하면서 보쌈김치가 민간에 퍼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보쌈김치를 민간에 전파한 사람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요리사인 안순환이다. 안순환은 당시 20만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해 고급 음식점 식도원을 설립하고 당시 경성의 부자들과 경제인, 외국인에게 궁중 음식을 선보였다.
보쌈김치도 이때 선보였는데 김치 속에 넣은 갖가지 해물이나 과일과 같은 고명이 화려한 데다 담그는 방법도 독특하고 맛도 시원해 식도원을 드나들던 경성 부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궁중 김치였던 보쌈김치가 어떻게 개성의 명물로 이름을 떨치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두 가지 이유를 꼽는다. 하나는 배추와 관련이 있다. 보쌈김치를 언제부터 담갔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역사가 길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배추 잎으로 각종 양념을 비롯해 과일과 해산물을 보자기 싸듯이 싸려면 배추 잎이 크고 넓어야 하는데 이런 품종의 배추가 나온 것은 1850년 전후라는 것이다.
1910년 이전까지 조선 배추는 경성 배추와 개성 배추가 맛 좋기로 유명했다. 경성 배추는 지금의 동대문 밖 왕십리 일대 훈련원 자리에서 재배했고 개성 배추는 가을배추로 인기가 높았다. 경성 배추는 속이 비교적 알차고 잎이 작은 반면에 개성 배추는 잎이 크고 넓지만 속은 꽉 차지 않았다고 한다. 1923년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개성 배추는 키가 크고 탐스럽기는 하나 속이 덜 차고 고갱이가 여문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따라서 보쌈을 싸기에는 개성 배추가 훨씬 더 적합해 궁중에서도 보쌈김치를 담글 때면 일부러 개성에서 배추를 가져다 보쌈김치를 담갔다. 때문에 보쌈김치가 개성 김치로 알려진 것이다.
보쌈김치가 개성 김치로 명성을 얻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개성에 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쌈김치에는 고명으로 각종 해산물과 과일이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담그는 데도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담글 엄두조차 내지를 못했다. 그렇지만 송도 상인으로 부를 쌓은 개성 사람들 가운데는 보쌈김치를 담글 수 있을 만큼 살림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많았기에 개성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보쌈김치에 담긴 작은 역사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