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내 몸이 내가 아닌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건 뭐 석가모니 형님이 2500년 전에 떠들었던 이야기다. 내 영혼이 나일까? 그렇다면 영혼은 뭐지? 마음? 생각? 기억?
아테네인들은 테세우스의 배를 오랫동안 보존하였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판자를 하나씩 뜯어서 갈아끼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배를 배1이라고 하자. 테세우스의 배에서 갈아끼운 판자들을 버리지 않고 똑같이 생긴 배를 만들어 배2라고 하자. 배1과 배2 중에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인가?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예전부터 유명했던 듯 한데 다들 말장난이나 하려고 할 뿐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 하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육체는 잠시 빌려 쓰는 물질일 뿐 내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육체를 나라고 규정하면 똥오줌도 내가 되므로 피곤해진다.
육체가 내가 아닌데 영혼이 나라는게 말이 되는가? 결정적으로 영혼은 없다. 존재가 없다. 그러나 보통 말하는 영혼은 종교의 영혼과 다르니까 영혼은 있다고 말해도 된다. 언어라는게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보통은 인격을 영혼이라고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다.
종교의 영혼 = 특수한 물질
보통 말하는 영혼 = 마음, 생각, 기억, 항상성, 인격, 정체성, 동일성
임무로서의 영혼 = 신과 연결된 나의 역할
아테네인들은 무엇을 보존하려고 했던가? 집단적 기억? 테세우스의 배에 부여된 임무가 테세우스의 배다. 아테네인들이 테세우스의 배를 잊지 않게 하는 것이 테세우스의 배에 주어진 임무다. 어느 쪽이 더 아테네인으로 하여금 테세우스의 배를 기억하게 하는가?
하드웨어는 내가 아니고 당연히 소프트웨어도 내가 아니다. 나라는 것은 나의 주도권이다. 내 권력이 나다. 물질은 권력이 없다. 주도권은 내게 주어진 미션에 있다. 미션이 없으면 권력이 없다. 암행어사의 권력은 임무에서 나온다. 왕의 권력은 의무에서 나온다.
의무는 지는 것이다. 진다는 것은 버틴다는 것이다. 무너지면 연달아 모두 파괴된다. 버티는 것은 연결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연결단위이며 연결을 유지해야 한다. 의무는 부분에 없고 전체에 있다. 집배원의 의무는 송신자와 수신자의 연결상태를 유지하는데 있다.
연극이라면 배우가 내가 아니고 대본도 내가 아니고 캐릭터도 내가 아니다. 배우의 권력은 몸에서 나오는게 아니고 대본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배우의 권력은 역할에서 나온다. 나는 배우의 몸도 아니고 영혼이라는 대본도 아니고 주연이든 조연이든 역할에서 나온다.
고립된 나는 없으며 연결의 나만 존재한다. 내가 없으면 무대가 작동하지 않고 연극이 망하므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무대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다. 집배원은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연결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의무이고 나의 존재이고 본질이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은 아직 안봤지만 복제본 나와 또다른 복제본 내가 대립한다면 사실 둘 중에 어느 쪽이 살아남든 상관없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동물적 생존본능이 방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극복할 문제다. 바가바드 기타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내게 주어진 임무를 완성하는 쪽으로 행동해야 한다. 장예모 감독의 영웅에서 이연걸처럼 진시황에게 설득되면 안 되고 진시황의 빈틈을 봤다면 찌르는게 진시황에 대한 예의다. 선수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자격 박탈이다. 자객이 찌르지 않으면 그게 자객이냐고?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여서 일제의 조선침략이 앞당겨지더라도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왜냐하면 일제의 빈틈을 봤으니까. 포먼의 헛점을 봤으면 알리는 때려야 한다. 포먼이 챔피언이 되는게 더 멋지다고 때리지 않으면 도전자 자격이 없다. 권투시합 망칠 셈이냐?
배우는 그 무대를 완성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테세우스의 배의 임무는 무엇일까? 부분적 손상이 있지만 배 1이 태세우스의 배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판자조각을 뜯어서 새로 만든 배는 썩은 판자더미에 불과하다. 그것은 똥을 모아서 사람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배 1을 불태워야 배2가 태세우스의 배가 된다. 임무의 완결성으로 봐야 한다. 배 1을 뜯어서 따로 뭔가를 만든 것은 원래 임무를 포기한 것이다. 원본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완결성이며 원본을 보강하는 것은 허용이 된다. 완결성을 해치지 않는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가져온 썩은 나무는 테세우스 전성기의 모습을 간직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만들어본 것이다. 이것은 친자냐 양자냐의 문제와 같다. 양자를 친자로 착각하고 어른까지 키웠다면 친자다. 유전자가 중요한게 아니다. 양자가 친자의 임무를 하면 친자다.
중요한건 인간의 의도이다. 양자를 친자로 착각했다면 의도가 친자이므로 친자다.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이다. 권력을 결정하는 것은 임무의 완결성이다. 완결성을 결정하는 것은 의도다. 이 문제는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로 확장된다.
나의 권력과, 완결성과, 의도와, 임무가 바로 나다. 육체나 영혼은 내가 아니다.그것은 보조재다. 임무에서 권력이 나온다. 임무가 나를 완결시킨다. 문제는 임무는 전체와 연결되는 형태로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신과 연결되어야 내 임무가 결정된다. 고립은 죽음이다.
인간은 신에게서 파견된 존재이며 죽으면 신으로 돌아간다. 타인은 나의 다른 버전이며 자식은 나와 동일하거나 나보다 더 나다. 나는 죽지만 나의 임무를 계승하므로 나보다 자식이 더 나다. 이는 독립지사가 자신의 목숨보다 민족의 앞날을 우선하는 이유다.
나와 자식 중에 하나가 나라면 내 임무를 이어받는 자식이 더 나에 가깝다. 내 몸도, 마음도, 영혼도 버릴 수 있는데 임무는 버릴 수 없다. 자식과의 연결을 부정하면 신과의 연결도 부정된다. 내가 죽는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죽은 것은 물질이지 내가 아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은 다음에 무엇을 할지 계획이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운게 아니고 뭔가 계획하라는 압박이다. 집단과 연결하라는 압박이다. 집단에서 임무가 나오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는 집단과 연결하여 무언가 할 일을 찾게 하는 압박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집단과 연결하는 것 밖에 없다. 그래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다. 연결을 확인하고 미션을 계승한다. 신의 계획을 나의 계획으로 삼으면 죽음의 두려움이 없다. 80억의 내가 평행우주로 존재하는 커다란 나로 복귀하는 것이다.
역설의 구조
문제해결 3단계는 문제발견>지렛대 확보>방해자 제거다. 보통은 집단의 권력이 지렛대가 된다. 어차피 하게 되어 있는 결정이라도 먼저 자신이 주도권을 잡은 다음에 도장을 찍어주는 법이다. 지렛대가 없으면 불안해서 속도를 내지 못한다. 인간이 시행착오를 거치는 이유다.
1. 집단의 발견 - 논리 - 선악의 판단 : 판단의 기준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2. 권력의 장악 - 심리 - 권력의 장악 : 집단을 격동시키고 닫힌계에 가두면 관성이 유도된다.
3. 문제의 해결 - 물리 - 도구의 이용 : 지렛대를 움직여서 방해자를 제거한다.
시행착오 오류시정 과정에 두 번 방향전환이 일어난다. 헷갈리는 이유는 1단계와 2단계가 원하는 것을 얻는 플러스 과정인데 비해 3단계는 방해자를 제거하는 마이너스 과정인 점이다. 이 원리를 알아야 철이 든 것이다. 일머리를 안다는 것이다. 물정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문제발견>지렛대 확보>방해자 제거
곧은 것은 굽은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역사는 직진하지 않는다. 인간은 왼쪽이 막혀서 오른쪽으로 가는 존재다. 갈 길을 가더라도 시행착오를 거치고 간다. 다른 모든 가능성이 물리적으로 봉쇄된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원래 가려던 코스로 돌아온다. 그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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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 예수의 역설이다. 죽으려는 자는 살 것이요 살려는 자는 죽을 것이다. 오자병법의 역설이다.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바위를 뚫는다. 이유극강의 역설이다. 도덕경은 역설로 가득차 있다. 참으로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진정한 예술은 졸렬해 보이며, 위대한 웅변은 어눌해 보인다. 주역은 통째로 역설이다. 역易은 변화다. 변화는 역설이다.
새옹지마는 역설이다. 언제나 의도와 반대로 된다. 왜? 수순이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세계는 역설에 지배된다.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유체는 역설에 지배되나 강체는 그렇지 않다. 당구공은 치는대로 굴러간다. 역설을 깨는 방법은 포석이다. 물은 그릇에 담으면 역설이 깨진다. 군대는 요충지를 장악하면 역설이 필요없다. 유체를 강체로 바꾸면 역설이 깨지고 뜻대로 움직인다.
물은 형태가 없다. 에너지는 형태가 없다. 유체는 형태가 없다. 형태가 없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면 역설이 깨진다. 그 과정이 역설이다. 먼저 반대쪽에 조치해야 한다. 개가 밥을 먹어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고 먹는다. 물을 왼쪽으로 보내려면 오른쪽을 틀어막아야 한다. 에너지는 절대 플러스로 통제되지 않는다. 마이너스로만 통제가능하다. 움직이는 것은 반대로 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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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있는 게임은 의도와 반대로 된다. 똑바로 가지 않고 휘어져 간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반대쪽을 틀어막아야 한다. 늑대가 사슴을 잡으려면 한 마리가 반대쪽으로 돌아가서 길목을 지켜야 한다. 망치를 휘두르기 전에 모루로 받쳐야 한다. 칼을 휘두르기 전에 도마에 올려야 한다.
정치는 역설이다. 국힘당 찍어보고 후회한 다음에 민주당 찍는다. 계급배반투표로 지렛대를 만든다. 받침점을 기준으로 힘점과 작용점이 반대로 움직인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하지 않는다. A가 좋으면 B가 좋다고 말해서 A를 격동시켜야 한다. 경쟁자를 붙여서 지렛대를 만든다.
상대가 어떤 카드를 쥐었는지 확인하고 딜을 친다. 좋은 것도 통제수단이 없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 나쁜 일은 좋은 일의 사전 정지작업임을 아는 것이다.
세상은 역설이지만 역설에 매몰되면 안 된다. 노자를 잘못 배워 뭐든 부정하는 사람 있다. 역설에 따른 좌절은 이중의 역설로 극복할 수 있다. 역설을 정설로 바꾸면 된다. 유체를 강체로 바꾸면 된다. 지렛대를 박으면 된다. 닫힌계에 가두고 압박하면 된다. 사전 정지작업을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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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와 심리와 물리다. 선악의 논리는 초딩들에게 집단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개인 기준이 아니라 집단 기준이다. 심리는 중딩들에게 집단 내부에서 은밀히 작동하는 권력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이다. 인간을 격동시켜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은 다음에 통제한다.
진짜는 물리다. 논리는 모르는 사람한테 말을 거는 것이며 심리는 지렛대를 심어 통제가능한 상태로 바꾸는 것이다. 진짜는 행동이다.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말은 지렛대 뺏기 사전작업이다. 세상은 온통 역설이다. 의도와 반대로 되는 이유는 지렛대가 없어서다.
군중은 유체다. 유체는 닫힌계에 가두어야 통제된다. 야생마는 길들여야 통제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딴생각을 못하도록 경쟁자를 붙여놓고 고백해야 한다. 이 이치를 알아야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짜는 마이너스이고 플러스는 지렛대를 박는 사전작업이다.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건다면 논리다. 바둑의 초반 포석단계다. 말이 통한다 싶으면 심리전을 건다. 중반 전투다. 마음을 줬다가 놨다가 하며 당신을 격동시킨다. 두 번 튕겨야 진실을 알게 된다. 말은 가짜고 행동이 진짜다. 막판 끝내기는 물리다. 방해자를 하나씩 차단하면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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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깜박이 넣고 오른쪽으로 핸들 꺾는다. 자전거를 타더라도 가려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살짝 꺾었다가 다시 원하는 방향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야 한다. 곧장 핸들 꺾으면 전복된다. 오른쪽으로 가려면 왼쪽에 조치해야 한다. 좌회전 하기 전에 오른쪽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미국은 70평 이하의 집을 짓지 못하게 한다. 담장을 높이지 못하게 하고 잔디를 깎지 않으면 벌금을 물린다. 북유럽처럼 세금으로 조지든, 미국처럼 PC정책으로 조지든, 혹은 페미로 조지든, 한국처럼 부동산으로 조지든 반드시 그런 것이 있다. 세상을 만만히 보면 큰 코를 다친다.
선물공세를 편다면 플러스다. 플러스는 함정이다. 정치인은 지지자의 행동이 밑밥을 던지는 지렛대 작업인지 본심인지 판단해야 한다. 환심을 사되 외연을 차단하여 고립시킨다. 미끼를 물면 함정에 빠진다. 마이너스 행위로 방해자를 제거하고 세력을 넓히는 사람은 믿어도 된다.
사전 신뢰확보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철수, 유승민, 한동훈, 김두관, 김부겸 등 하수들이 판판이 깨지는 것이다. 밑바닥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정치를 잘한다. 일본말로 '단도리'라는 것을 해봤기 때문이다. 뭐든 곧장 가는 법이 없고 반드시 사전 준비작업을 거쳐서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