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김씨(豊山金氏) 봉화군(奉化郡) 물야면(勿野面) 오록(梧麓) 마을
위에서 오미동 풍산김씨 유연재(悠然齋)의 팔연오계(八蓮五桂) 중 둘째 망와 김영조(忘窩 金榮祖, 1577-1648, 吏曹參判, 右丞旨, 大司成), 셋째 장암 김창조(藏庵 金昌祖), 여섯째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 1587-1667, 工曹參議, 大司諫, 右尹)는 봉화 오록(梧麓)마을로 새 터전을 마련하여 이주(移住)하였음을 본 바 있다.
곧 봉화군 물야면 오록1리 ‘창마을’ 또한 당연히 풍산김씨 집성촌으로 유명하며, 전통가옥들이 즐비한 동네이다. 지명이 오록인 것은 마을의 우백호가 봉황산이요, 상서로운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든다고 하여 오록(梧麓)이며 그러해서 곳곳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나중에 이 마을은 또 앞쪽에 1700년대 구휼미 저장고(倉庫)가 생기면서부터 창말, 창촌(倉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풍산김씨 시조인 김문적(金文迪)의 18대손 노봉(노봉) 김정(김정, 제주목사)공은 이곳 오록리의 입향조로서, 특히 풍수지리설에 밝아 서벽 등 여러 곳을 둘러본 후, 숙종22년 병자(1696)년 음력 11월 이곳을 길지로 삼아 세거의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이곳은 원래 다른 두 성씨(안동권씨, 의령여씨)가 살고 있었으나, 풍산김씨가 세거한 후부터 점차 김씨 일족의 동리로 변했다.
노봉공은 중형 김개(김개, 동추)과 함께 가난과 싸우면서 마을에서 3리쯤 떨어진 신담에 움막을 짓고 이 터를 닦기 시작하였다. 내청룡 빈곳 어귀에 터를 닦고 남은 돌로 석축을 쌓아 그 앞에 성황당을 짓고 서편에 짐대라는 장승을 세웠다. 그리고 집을 짓고 동네를 이루면서 마을 중간을 흐르던 물길을 서편으로 돌렸다.
그 후 공의 고조부 유연당공의 9형제 중 둘째자제 망와(휘 영조, 이조참판)공과 셋째자제 장암(휘 창조, 도사)공, 그리고 여섯째 자제 학사(휘 응조, 우윤)공의 자손이 모여 한마을을 이루고 세거하였다.
이 마을 풍산김씨 문중에서는 조선말까지 과거 대·소과에 70여명의 인물이 배출됐다. 특히 정조, 철종, 순조 때에는 취헌 종태, 동서 중하, 오촌 규윤 등 세 사람이 참판으로 동시에 재직하여 세칭 옥당(玉堂)마을로 영남에 그 명성이 높았다.
이를 입증하듯 창마에는 마을 앞 솔숲 옆길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삼거리를 '솟대거리'라 부른다. 과거에서 소·대과에 오르는 경사가 있을 때, 그때마다 이 곳에 솟대를 세워 경하한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마을의 특징을 살펴보면 1. 유교문화의 계승지창마에는 마을단위로는 드물게 망와, 학사, 노봉선생을 불천위 제사로 모신다. 2. 경북 북부지역 전통가옥 최대 보전 지역장암정(만축정)과 노봉정사, 화수정사 등과 고색창연한 10여 채의 기와집들이 보전되어 있으며, 한국적 강학문화의 실천지로 손색이 없다. 3. 한국적 풍수 : ‘좌청룡, 우백호’마을 위쪽에는 진산으로 갈봉산(葛峰山)이 우뚝 솟아있고, 천석산(千石山 ; 좌청룡)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만석산(萬石山 ; 우백호)이 위치한다. 4. 울창한 송림현재 물야중학교 입구에서부터 마을 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약 120m 정도 형성되어 있다.
오록의 울창한 송림에 대하여는 오랜 전설이 전해오는 바인데 ①제주목사(濟州 牧師)를 지낸 김정이 영조 12년 천석산 좌청룡(左靑龍)의 꼬리가 짧아 이를 보완키 위해 제주서 가져와 뿌린 솔씨가 자란 것이라는 설.②김정이 제주에 사천서당을 세우고 화북포구를 축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다 그곳에서 영면하자 주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고향에 솔씨를 보내 일궜다는 구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