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신화
은유와 지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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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강 하류와 사할린 지역에 살고 있는 니브히 족이라는 소수 종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곰 넋 보내기' 라는 정교하고도 흥미로운 제의를 치릅니다. 이들은 숲에서 데려온
새끼 곰을 아이를 기르듯 젖어미가 젖을 먹여 키웁니다. 그리고 이 새끼 곰이 두세 살 쯤
되었을 때 의례를 거행합니다. 그날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니브히 인들의 반지하 식 움집
안으로 곰은 내려갑니다. 그리고는 움집 안에서 곰은 인간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며 음식과
대화를 나누고 놀이를 벌인 후 제의장소로 끌려갑니다. 거기서 그는 제의용 화살에 맞아 죽
습니다. 니브히 인들은 죽은 자의 옷을 벗기듯 조심스레 죽은 곰의 가죽을 벗기고 뼈와 살
을 해체합니다. 니브히 인들은 이렇게 해주어야 곰의 넋이 기뻐하면서 인간과의 우애를 회
복시켜준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근대인들의 눈으로 보자면 웃기는 일이고 미개하기 짝이 없는 행위지만 이사
람들에게는 그렇게 곰의 넋을 보내야만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1927년에 이들을 만난 러시
아 인류학자 크레이노비치가 물었더니 한 노인이 대답 대신 신화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옛날 니브히 사람 하나가 사냥 도중에 길을 잃고 식량은 바닥이 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곰 발자국을 발견하고 잡으려고 발자국을 따라 굴로 들어갔는데 굴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
여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잘 대접을 받고 지냈는데 봄이 오자 집주인이 하류지
역에서 친구들이 사냥하러 올 테니 누가 손님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여자
가 니브히 사냥꾼을 데리고 내려가기로 했는데 그 여자가 털가죽을 걸쳐 입자 놀랍게도 곰
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곰은 굴 밖으로 나가 친구들의 창에 찔려 죽습니다. 그때서야 이니
브히 사냥꾼은 곰이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참 후 손님으로 갔던
여자가 돌아와서 사냥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넌 숲에서 길을 잃어서 이곳으로 왔
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사실은 네가 길을 잃도록 우리가 유인한 거야. 이리 데려와서 이
곳의 규율을 너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지."
노인의 옛날이야기는 황당한 듯하지만 니브히 사람들의 곰 넋 보내기 의례의 정당성를 보
증해 줍니다. 신화는 곰이 사람이고, 니브히 인들의 친구이고 친척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
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곰은 니브히 사람들의 손님으로 죽어야
하고 곰들은 사람들로부터 먹을 것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호혜( )의 관계인 것이지요. 수
천 년을 지속해온 니브히 인들의 의례와 신화는 우리 근대인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이야기
를 하고 있습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 너와 나는 자매형제라는 무차별적 사고, 전체성
의 세계관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그런 세계관의 실천이 바로 자연을 조절하는 문화적 '지
혜'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곧 지혜인이 동물과 다른 것은 문화가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동물적
본성을 지닌 자연의 일부이면서 제작 행위를 통해 자연과는 다른 인간 특유의 생활양식, 즉
문화를 지닙니다. 자연과 문화, 문화의 화엄 ( )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의 핵심적 주제가
여기서 떠오릅니다. 모든 신화는 자연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물질적
제작techne, 정신적 제작poiesis이라는 제작행위의 두 가지 측면은 문화의 양가성을 함축하
고 있습니다. 그리스 말에서 포이에시스가 꽃이 피듯 자연이 안에 숨기고 있는 풍부한 것을 바위
산을 깨뜨려 철광석을 캐내듯이 도발, 개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이에시스가 증여의 성
격이 강하다면 테크네는 교환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신화란 원시사회에서 증여가 교
환으로 가지 못하도록 통어하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곰은 형제이고 조상이
기 때문에 사냥을 하되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수만큼, 달리 말하면 곰과의 우애를 잃지 않
는 한도 내에서 사냥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간의 욕망을 조절하고 자연의 균형
을 파괴하지 않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그리고 문명의 한 극점인 근대라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지혜가 사라진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근대를 이성의 시
대라고 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을 야만의 시대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