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조반정과 호란
가. 인조반정(仁祖反正)
광해군 15년 1623년 능양군(綾陽君), 이서(李曙), 이귀(李貴), 김류(김鎏), 김자점(金自點), 이괄(李适), 신경진(申景禛), 심기원(沈器遠), 구굉(具宏), 구인후(具仁垕), 최명길(崔鳴吉), 최내길(崔來吉), 이중로(李重老),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나중 이괄의 난때 투항하여 자결) 등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폐모살제(廢母殺弟,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것)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아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류희분(柳希奮)등을 축출하고 능양군(綾陽君)을 인조로 추대했다.
나. 이괄(李适)의 난
⑴ 원인
인조 2년 인조반정의 공신으로서 2등공신에 책록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는데 1624년 음력 1월 22일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李旃), 韓明璉(한명련),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楫), 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하고 이괄의 아들 이전(李旃)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⑵ 경과
이괄은 이수(李邃, 이괄 동생), 이전(李旃), 한명련(韓明璉), 기익헌(奇益獻), 원종경(元宗慶)등과 함께 압송하려 온 사람들을 죽이고 1624년 3월 11일(음력 1월 22일) 항왜병 100명을 선봉장으로 하여 1만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3월 29일(음력 2월 11일) 이괄군은 한양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서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제(興安君 瑅)를 왕으로 세웠고 인조는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였다. 이괄은 장만(張晩)과 임경업(林慶業)과의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여 광주를 거쳐 이천까지 도망갔다.
⑶ 결과
4월 1일(음력 2월 14일) 이천에서 李适(이괄), 李邃(이수, 이괄 동생), 이전(李旃, 이괄 아들), 韓明璉(한명련), 한모(韓某), 원종경(元宗慶) 등 9명이 부하 韓明璉(한명련)과 함께 부하장수 奇益獻(기익현, 진도), 李守白(이수백, 거제), 李先哲(이선철, 남해), 李善述(이선술, 영해), 柳震楨(류진정, 금성)에게 살해되어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⑷ 영향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공주)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한윤(韓潤)과 한택(韓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1624년 인조 2년 摠戎廳(총융청), 御營廳(어영청) 설치
1626년 인조 4년 守禦廳(수어청) 설치
다. 정묘호란(丁卯胡亂)
⑴ 원인
인조반정후 서인은 친명반금정책(親明反金政策)을 펼쳤고 이괄의 난에 실패한 후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과 한택(韓澤) 형제가 후금에 투항하여 (姜弘立) 휘하로 들어가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자 명나라 정벌에 앞서 조선을 제압하여 배후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⑶ 경과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Hongtaiji,皇太極)은 광해군의 복위의 명분으로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광해군 복위의 명분으로 3만명으로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하였다. 여기에는 한족 출신의 이영방(李永芳)(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투항), 조선 출신의 강홍립(姜弘立,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 참전했다가 투항)과 한윤(韓潤)(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도 포함하여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평산으로 쳐들어 왔다. 철산 용골산성의 정봉수(鄭鳳壽・1585∼1668)와 의주의 이립(李立), 가산 부근에서는 김여기(金礪器)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회군하는 적을 맞아 타격을 입혔다.
의주 : 의주목사 이완(李莞)은 사로잡혀 피살.
정주 : 정주(定州)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포위해 선천부사 기협(奇協)이 전사하고, 정주목사 김진(金搢)과 곽산군수 박유건(朴惟建)은 포로
안주(安州) :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은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싸웠으나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남이흥은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순국
인조는 훈련도감과 어영군의 병력을 호위에만 투입
⑶ 결과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해 형제 관계를 맺고 명에 사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철수하였다.
라. 병자호란(丙子胡亂)
⑴ 원인
후금은 1636년 조선에 사신을 보내 기존의 형제 칭호를 버리고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는 국서에서 나라 이름을 청(淸)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였다. 조선 정부는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다’는 명분론으로 청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전론이 팽배하여 주전론은 金尙憲(김상헌), 洪翼漢(홍익한), 尹集(윤집), 吳達濟(오달제), 鄭蘊(정온), 李敬輿(이경여), 趙絅(조경), 兪棨(유계) 등이 주도하였고 주전론은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화친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척화론으로 선회하여 주전론으로 기울었다.
⑵ 경과
청은 홍타이지(태종)는 인조 14년 1636넌 12월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왕자와 비비은 먼저 강화도로 피난을 갔으나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갔다. 산성에는 군량도 저고 구원병도 오지 않고 강확다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들이 포로로 잡혀서 최명길 등이 주화파의 건의을 받아들여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 송파)의 청태종 진영에 나와 항복하여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청이 명을 공격할 때 원병을 파견할 것을 약속하였다.
⑶ 결과
청은 소현(昭顯)・봉림(鳳林)의 두 왕자와 김상헌(金尙憲), 강경한 척화론자들(평양서윤 홍익한(洪翼漢)・교리 윤집(尹集)・교리 오달제(吳達濟))을 인질로 데려갔다.
주화론 :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홍서봉(洪瑞鳳)
의병 : 박철산(朴鐵山)이 이끈 의병부대는 용강 부근의 적산에서 ‘의병산’으로 불리게 되었고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1642년(인조 20년) 명(明)과 연결하여 청(淸)을 치려고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청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왔다.
1653년 효종(1649~1659) 4년. 네델란드인 Hendrick Hamel 표착 1667년 탈출하여 표류기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