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앰 댓 하권 3. 완성, 모든 것의 운명
문: 깨달음의 수단에 관한 질문을 받으시면 선생님은 예외 없이 "내가 있음" 의 감각 위에 마음을 두는 일을 강조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특정한 생각이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걸까요? "내가 있음" 에 머무름이 어떻게 제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까?
M: 관찰한다는 사실 자체가 관찰자와 관찰 대상 모두를 바꾸게 되어 있어. 결국 자신의 본성을 바라보지 못하게 막는 것은 마음이 허약하고 둔감하기 때문이고 또 마음은 섬세한 것은 그냥 지나치고 거친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야.
만약 내 말대로 "내가 있음"의 느낌에만 마음을 집중하면, 자신의 마음과 마음에 떠도는 모든 영상들의 정체를 완전히 알 수 있게 되지. 자신이라는 것은 행동 속에서의 밝은 조화이기 때문에 멍청함을 없애주고 마음의 불안정을 진정시켜 주면서,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마음의 성질을 바꾸어 주게 되어 있어.
이런 변화는 그리 거창해야 될 필요는 없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어둠으로부터 빛으로의, 부주의함으로부터 자각으로의 근본적인 이전이 되는 거야.
문: 꼭 "내가 있음" 이라는 공식으로 해야 됩니까? 혹시 다른 문장으로 하면 안될까요? 가령 "탁자가 하나 있다." 라는 말에 집중을 한다고 하면 똑같은 결과가 올 수 없을까요?
M: 집중연습으로는 좋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탁자라는 관념을 넘어설 수가 없어. 지금 자네가 할 일은 탁자에 대한 관심이 아니고 바로 자기 본성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려면 자네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서인"내가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의식의 초점을 두어야 하네.
그것과 늘 함께 있고, 놀 때도 함께하고, 생각도 그것에 관해서 하고, 그 속으로 깊이 젖어들고 그렇게 하다보면 무지의 껍질이 깨어지면서 진리의 영역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야.
문: 제가 "내가 있음" 에 초점을 모으는 것하고 껍질이 깨어지는 것 사이에 인과 관계는 없습니까?
M: 자신을 알고자 하는 충동은 이미 자네가 준비되어 있다는 신호야. 충동은 언제나 내면에서부터 솟아나고 있지. 만약 지금 때가 되지 않았다면 자아탐구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정진할 의욕도 힘도 생기지 않을 거야.
문: 구도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성취로 이끄는 것이 스승의 책임이 아닙니까? 스승의 빛나는 얼굴이 저희를 끌어들여서 이 고통의 수렁에서 끄집어 내어 주는 것이 아닌가요?
M: 구도자를 바깥의 스승에게 데려다 주는 것은 바로 내면에 있는 스승이야. 이건 마치 엄마가 아이를 선생님께 데리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스승이라는 것은 자네 본성의 사신(使臣)이니 반드시 스승에게 믿음과 공경을 다하도록 해.
문: 제가 믿을 만한 스승은 어떻게 하면 발견할 수 있습니까?
M: 가슴이 말해줄 거야. 스승들은 언제나 구도자를 찾고 있으니 스승을 발견하는데는 큰 어려움은 없어. 스승들은 언제나 자네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단지 자네가 준비되지 않았을 뿐이야.
배울 사람이 먼저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좋은 스승을 만나더라도 그냥 지나친다든지 말을 잘 따르지 않게 되어서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지.
내 경우를 보면 내가 뭐 그다지 총망받을 만한 것도 젼혀 없었어. 난 그냥 스승을 만나서 말을 듣고 그 말을 믿고 잘 따랐을 뿐이야.
문: 제가 자신을 완전히 그 분의 손에 내맡기기 전에 그 사람을 잘 살펴봐야 하는거 아닌가요?
M: 온갖 수단을 써서 잘 살펴보라구. 하지만 뭘 알아낼 수 있겠나? 단지 자네의 수준만큼 느낄 수 있을 뿐이지.
문: 일관성이 있는지, 또 가르침과 실제 생활이 맞아 떨어지는지 관찰해 보겠습니다.
M: 아마 무수한 부조화를 보게 될거야.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런 것은 아무런 증거도 되지 않아. 단지 그 사람의 동기가 중요할 뿐이야. 자넨 그 동기를 어떻게 할텐가?
문: 전 적어도 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 조절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를 기대하겠습니다.
M: 그런 사람은 많이 보게 될 거야. 하지만 자네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스승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즉 본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줄 수 있어. 그런데 그 것이 외면적인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가 이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지 않았어?
자네가 그를 알기 위한 유일한 판단방법은 자네 자신 스스로가 변해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어. 만약에 그를 만나 좀더 평화를 느끼게 되고 행복해 진다면, 또 보통 때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깊이 있게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면 사람을 제대로 만난 것이야. 처음에는 시간의 여유를 두라고, 그러나 일단 사람을 믿기로 작정을 했으면 절대적으로 믿고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아주 성실하게 따라 보게나.
스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그와 사귀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더라도 그건 큰 상관이 없어. 만약 뒤섞이지 않고 마음의 혼동만 없으면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어. 일단 어떤 사람을 영혼의 스승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면 말을 귀담아 듣고 잘 기억해서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돼.
애매한 태도야말로 심각한 결함이 되어서 스스로가 많은 번뇌를 낳게 되지. 그리되면 문제는 스승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어리석음과 고집에 있는 것이 되지.
문: 그러면 스승이 제자가 자질이 없다고 쫓아내 버립니까?
M: 그렇다면 스승이 될 수 없어. 참된 스승이라면 시간을 좀 더 두고 제자가 좀 더 순화되고 차분해져서 보다 더 수용적인 태도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문: 왜 그렇습니까? 스승들은 왜 그렇게 고생을 자초하시지요?
M: 사람들이 꿈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보니까 사람들을 깨우고 싶은 거야. 사람은 고통과 번뇌를 잘 견디지 못해. 그러나 스승의 인내심은 그 한계가 없기 때문에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어. 스승들은 절대로 실패를 하지 않아.
문: 저의 첫 번째 스승이 마지막 스승이 되는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분 저분에게로 찾아다녀야 합니까?
M: 전우주가 자네의 스승이야. 만약 잘 성찰해서 살기만 한다면 모든 일로부터 배울 수가 있어. 마음이 깨끗하고 때가 없으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배울 수가 있어. 자네의 내적 자아가 외면의 스승으로 나타나서 그분을 믿고 따르도록 만드는 것은 자네가 게으르고 안정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야.
문: 스승이라는 것이 꼭 있어야 합니까?
M: 그건 마치 엄마가 있어야 되는 거냐고 묻는 것과 똑같애. 의식의 차원이 좀더 나은 쪽으로 상승을 하려면 도움이 필요해. 물론 그 도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형태를 지니지 않을 수도 있어.
때로는 미묘한 영성, 또는 한 순간의 직관일 수도 있는데 어찌됐든 도움은 반드시 필요한 거야. 내적인 자아는 언제나 자신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어, 적합한 때를 기다리며 모든 일에 애정을 갖고 효율적으로 준비해 두지. 그러다가 그걸 전해줄 사람이 필요하거나 안내자가 필요하면 그 사람에게 스승을 보내는 거야.
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선생님께서는 내면이 자아는 현명하고 선하고 아름다우며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처럼 말씀하시고, 인간이라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단순한 투영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려고 이렇게 고생하고 계십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처럼 중요하지 않다면 그들이 잘 살든 못살든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습니까? 그건 마치 그림자에 신경을 쓰는 거나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M: 지금 자넨 이성을 도입한 거야. 육신과 자아 사이에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 안에 "내가 있음" 의 형태로 자아가 비치고 있어. 마음이라는 것은 본시 완전하지 못하고 거칠고 항상 불안하며 분별도 통찰력도 결여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본성을 자신으로 알지 못하고 자신이 육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야.
마음은 본성 속으로 녹아 들어가면 육신은 아무런 문제도 만들지 않아. 그냥 있는 그대로 인식과 행동의 도구로써 내면에 있는 창조적인 불씨의 표현으로 남아 있게 되지. 육신의 궁극적인 가치는 우주적인 본체를 발견하는 데에 봉사하는 것일세. 그리고 우주적 본체라 하는 것은 결국 우주 자체야. 만약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되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큰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거야.
문: 자신을 발견하는 길에는 끝이 없습니까?
M: 시작이 없기 때문에 끝도 없지. 그러나 내가 스승의 은총 덕분에 발견하게 된 "진정한 나" 는 지칭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거야. 난 이것도 저것도 아니야. 그 사실 하나는 아주 확실해.
문: 그러면 그 끝없는 구도의 길, 자성을 끝없는 새로운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것은 어디에서 생기는 겁니까?
M: 그 모든 것은 현상의 영역에 속해. 더 높은 것은 낮은 것으로부터의 자유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주의 정확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네.
문: 낮은 것은 무엇이고 높은 것은 무엇입니까?
M: 자각의 측면에서 생각을 해봐. 더 넓고 깊은 의식이 더 높은 것이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의식을 영속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어.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유일한 의미이고 목적이지.
요가의 본질은 바로 그런 의식의 수준을 높여서 소유와 자질과 능력에서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야.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 우주가 바로 요가의 도장이지.
문: 완전하게 되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지향점인가요?
M: 궁극적으로 보면 모든 생명체의 지향점이지. 마음속에 깨달음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 가능성이 확실성으로 바뀐다구. 일단 어떤 생명체가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듣고 이해하게 되면, 그것이 내면으로부터의 최초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절대로 잊지 않게 돼.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자연스런 흐름으로 스승이라는 축복받은 형태를 취하게 되지.
문: 그러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자성을 되찾는 것입니까?
M: 그밖에 뭐가 있겠나? 마음이 길을 잃었다가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사실은 길을 잃는다는 말 자체가 적합지 않아. 본시 집을 떠난 적도 없었어. 단지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지. 그러한 까닭으로 마음은 언제나 자각을 해야해.
본성에 대한 망각이 반복되지만 않는다면 실수라는 건 없는 셈이야. 그렇다고 깨달은 사람들이 억지로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깨달은 사람은 곧 그 상태야.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지.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