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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모육아도(慈母育兒圖)종이에 채색, 23.5×31㎝,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그렇다면 신윤복과 아버지 신한평이 몸담았던 도화서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을까. '악학궤범'을 펴낸 성현(1439∼1504)이 쓴 <용재총화>는 놀랍게도 도화서에 근무했던 여성화사를 소개한다. 이 화사는 외모가 출중했다. '동문선'을 편찬한 조선의 대문호 서거정(1420∼1488)이 그녀에게 홀딱 반했다.
서거정은 젊은 시절 떼지어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활을 쏘면서 난동을 피우다가 사헌부에 끌려오는 신세가 됐다. 마침 그 자리에 홍천기(洪天起)라는 화사 역시 잡혀와 함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용재총화>는 홍천기의 용모가 '당대의 절색'이었다고 적었다. 서거정은 사헌부에서 홍천기와 마주하자 그 미모에 넋이 빠져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서거정의 죄를 추궁하던 대사헌 남지가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유생을 놓아주라"고 명했다. 그런데 풀려 나온 서거정은 오히려 일찍 방면된 것을 억울하게 여겼다. 서거정은 "공사는 마땅히 범인의 말을 묻고 또 자술서를 받아서 옳고 그름을 분별한 뒤에 천천히 해야 할 것이거늘 어찌 이렇게 급한가"라고 투덜댔다.
조선시대 여성 화가가 분명 실존했고 도화서에 소속된 여성 화가도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홍천기는 산수화로 이름이 나기는 했지만 그림의 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해지는 작품도 없다.
`담장 옆의 여인`.
20세기 초반. 조선시대 여인들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억압 속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했다. 고전은 천재였으나 여성이라 불행했던 인물들도 다룬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조선 여인의 인생은 남편을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는 '여필종부'와 7가지에 해당됐다고 아내를 내쫓을 수 있다는 '칠거지악'으로 대변됐다.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뎌야 했고 심지어 남편이 죽으면 함께 죽는 것이 최고 덕목으로 받들어지기도 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철저한 억압 속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고전은 천재였으나 여성이라 불행했던 인물들도 다수 다룬다.
여류문인 하면 광해군 때 역모 혐의로 극형에 처해진 허균(1569~1618)의 누나로도 널려 알려져 있는 허난설헌(1563~1589)을 빼놓을 수 없다.
허난설헌 표준영정
오세창(1864~1953)의 <근역서화징>은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이 일곱 살 때 시를 잘 써서 사람들이 '여신동'이라 불렀으며 그림도 곧잘 그렸다"고 적었다.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1563~1628)도 <지봉유설>에서 "(허난설헌은) 정자(홍문관 승문원 교서관의 정9품 관직) 김성립과 혼인했는데 근래 규수 작가로 제일이다"라며 그녀의 재능을 높게 쳤다.
`엄마와 아이들`. 20세기 초반. 사진 캘리포니아 디지털 박물관.
그런 허난설헌의 삶은 불행했다. 남편 김성립(1562~1592)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허난설헌은 "강남에 풀은 푸르렀건만 임은 돌아오지 않네…"라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을 원망했다. "허난설헌의 작품 중에는 자신을 멀리하는 남편을 그리워하고, 한편으로 원망하는 작품이 많다"고 <지봉유설>은 기술한다.
그녀는 애석하게도 27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김성립은 3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김성립도 시를 잘 지었다.
허난설헌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문학적 감성이 잘 묻어있는 시집을 남겼다. 중국의 문인들이 그녀의 시집을 구해가지고 가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1637~1692)이 집필한 <서포만필>은 이런 허난설헌의 재주가 과대포장됐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다음은 <서포만필>의 내용이다.
`책 읽는 여인`. 공재 윤두서의 장남 윤덕희가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여인은 손에 꼽을 만큼 극히 드물었다. 서울대박물관 소장.
"안타까운 것은 허균이 원나라와 명나라 문인들의 아름다운 구절이나 화려한 시편 중에 사람들의 거의 보지 못한 것들을 상당히 많이 채집하여 문집에 끼워넣어 허난설헌의 명성과 위세를 떠벌렸다는 것이다.
문집은 중국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전겸익(1582~1664·명나라 말, 청나라 초의 문인)의 남다른 감식안을 만나 속 내용이 모두 드러나 조선 사람들을 크게 부끄럽게 만들었으니 애석하도다."
실제로 전겸익은 <열조시집>에서 "허난설헌의 시'소전'이 사실은 자신의 첩 유여시가 지은 것이며 허난설헌의 많은 시가 중국 시인들의 시를 모방했다"고 혹평했다.
대신 <서포만필>은 그녀의 동생 허균의 재능을 높게 쳤다. <서포만필>은
"허균의 감식력은 근대의 제일이었다. 택당(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이식)은 매번 그의 자제들에게 '허균이 시를 잘 안다'고 칭찬했다. 그의 시는 형식과 격조는 별로 높지 않지만, 재주와 정서는 남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고 평했다.
문학적 소질이 남달랐던 허균이 짜깁기한 작품으로 누나를 뛰어난 시인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14.조선의 대문호를 홀린 도화서 여성 화가 [예술혼을 불사른 여인1] / 매일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