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 비인부전/11]
격분한 허준이 마당으로 향한 방문을
왈카닥 열어젖혔다.
마당에 길 떠날 모습의 안광익과 김민세가 서 있었고,
내다본 허준의 얼굴을 향해 김민세가
손가락을 창날처럼 뻗어왔다.
"당신 지금 무어라 했소!"
"이 집안에 도둑놈이 너말고 누가 있느냐!"
"어째?"
허준이 굴러나왔다.
그들이 자기를 구해준 고마움은 안다.
또,
그들의 의술을 우러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자기가 의술에 관심이 있었을 때의
얘기다.
그 유의태와 인연을 끊은 이제 와서조차 그들에게 매도당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 땡추중 같은 놈이!"
"애비야."
"여보!"
하며,
손씨와 아내가 달려나와 말리려 했으나,
허준은 두 여자를 내치며 고함쳤다.
"내 비록 오늘까지 이 모양으로 살지라도 남의 집 감나무 가지 하나 꺾은 적이 없는데 내가 도둑질하는 꼴을 네가 보았다고 말을 함부로 해."
"꼭 남의 집 담을 넘어야 도둑이더냐?
유의태의 밥을 먹으며,
약초를 식별하는 수업을 쌓지 않았다면
그 산삼인지 뭔지가 그토록 값나가는
것인 줄 네놈이 어찌 알았을까?
보냐고 말하고 있는 게다!
그럼에도 유의태에 대해 고마워하는
말은커녕,
저 혼자 팔자 고칠 궁리에 바빴으니
그건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냐!"
" ..."
"욕심은 곧 도심인즉!
할 말이 있으면 해보아!"
"이 넓은 세상에 그저 제 한몸이나 팔자
고칠 궁릴 하는 이깐 허접스러운 놈을
땀 뻘뻘 흘리며 업고 온 내가 오히려
한심투성일세. 가세."
안광익이 김민세의 팔을 끌자,
손씨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두 분께선 혹 유의태 그분을 잘 아시는
처지시온지?"
"그게 무슨 상관이오.
저자가 이미 그 사람을 스승으로 보지
않는 터에 우리 또한 저런 망종을
아는 척하기 싫소이다."
"기실 사연은 그것이 아니오라."
"그만두오.
일일이 구차한 넋두리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한 몸들은 아니오.
아니 안 갈 셈인가?"
안광익이 허준을 지켜보는 김민세를
다시 잡아끄는데,
그 손을 물린 김민세가 허준의 앞으로
다가서며,
잠시 눈싸움을 하는가 했더니 뜻밖에도
방금까지의 언쟁을 의식하지 않는 나직한 한마디를 했다.
"면천시켜주랴?"
"어째?"
"제법 논어도 읽고 의서도 베껴낸 자가
면천도 몰라?"
"더불어 말하고 싶지도 않으니,
어서들 가버리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무언가 한 가지 들은 바가 기억이
나서 하는 소리다.
창녕 뉘 집엔가 가서 제법 중한 병 잘
낫우었다는 얘길...."
"그깐 작은 재주 따위 뭐 그리 대단한가! 그대는 다심해서 탈일세.
이잔 인두겁만 썼지.
제 어미의 눈에서 피눈물도 예사로 뽑는
살모사 같은 잘세.
좀 아까 보지 못했던가!"
"무엇이야!"
뛰어들 듯한 허준을 아내가 잡았고,
그 허준에게 김민세가 또 나직하게 말했다.
"면천시켜주랴?"
"흥."
"천하게 태어난 것이 억울하다면서?
그러니 면천시켜 줄까를 묻고 있는 게다."
"면천 너나 해라."
"이자가 도시 아래위도 가리지 못하고
말본새도 배운 게 없구만."
안광익이 씨근거리는 허준을 같잖은 듯이 보다가 어이없이 웃었고,
허준이 아직도 자기를 지켜보는
김민세에게 삿대질을 놓았다.
"너야말로 면천의 뜻을 제대로 아느냐!
중도 여덟 가지 천한 신분의 하나 아니냐. 그렇다면 네 신세나 내 신세나 마찬가지!
면천이 되고픔 너부터나 되란밖에!"
김민세가 눈도 깜박 않고 다시 한번
나직이 말했다.
"면천시켜 주랴?"
손씨가 얼른 사이에 뛰어들었다.
"대사님께선 어느 가람에 계시는 분이
시온지요?"
김민세가 그 손씨를 밀어내고 여전히
허준에게 말했다.
"암,
양반으로 태어나지 못한 바에야 이 세상
살 재미 없는 세상이고 말고.
양반이 아니거든 그 양반의 수족이 되어
꺼덕거리는 중인쯤으로라도 되든가!
그도 못 되거든 태어난 고장에 농사라도
마음놓고 짓고 살 평민쯤이라도 돼야
사람 신세라 할 수 있지."
허준이 어느덧 숨을 삼킨 채,
그 김민세의 눈빛에 압도당해 가는데
김민세가 어머니의 치마꼬리 잡고
훌쩍이고 있는 숙영을 가리켰다.
"이 아이가 귀여우냐?"
이어 이번에도 역시 콧물 눈물이 빠진
겸이를 가리켰다.
"이 네 자식이 귀여우냐, 그 말이다."
" ...?"
"암 귀여울 테지.
항차 지각이 없는 들짐승이라 해도
제 자식은 귀여운 법인데,
넌들 어찌 제 자식 귀여운 줄 모르랴. 하나."
"그래, 하나 뭐란 말이냐."
"듣자 하니,
너는 사노비의 신센데도 관가의 눈을
속이며 떠다니는 잔 듯한데."
" ...!"
"숨어다니는 네 신세가 드러나는 날,
그 화는 결코 네 한몸에 미치지 아니할
게다.
어느 상전 밑에 팔려가 대대손손 종노릇
하면서,
또 처자식 또한 제법 얼굴값을 하는
생김새면,
어느 놈의 장난감이 될지 짐작이나 하랴? 종년 배 위에 올라타는 건,
누운 소 등에 올라타는 만치 쉬운
노릇이라는 양반이란 자들의 농지거리쯤 너도 알 터인즉슨!"
"이 중놈이! 어째!"
그 뛰어드는 허준을 안광익이 우악스런
손으로 밀쳐냈다.
"중 입에서라고 반드시 염불만 나오란
법 있느냐.
육두문자라도 들을 본새가 있거든
들어두어!"
밀려난 허준에게 김민세가 다시 다가
들었다.
"암,
거기까지 알고 나서야 어찌 면천하고
싶지 않으리.
설사,
제 간과 눈알을 빼주더라도 면천될
길이라면 암,
원할 놈 많지."
"홍,
그래서 솔가하여 여진 땅으로라도 도망치란 그 말이로군."
"천만에."
"어째?"
"면천하는 길도 확실히 두 길이 있으니."
"두 길이 있다고?"
"하나는 사내의 씨주머니를 부서뜨려
궁중에 뽑혀 내시가 되어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르면
종이품 상선에 이르는데,
그 하는 일은 임금의 어명을 출납하며
임금의 수라상을 감독하는 일이다."
"내시 ..."
"일명 경사방대감이요!
대전설리라고도 부르는 그 상선의 직책은 천한 인간으로 태어나,
조선 천지에서 대감이라 불리는
하늘 아래 단 하나의 인물이다."
" ...!"
"하나 씨주머닐 잘라낸다고 반드시
궁에 뽑힌다는 보장은 없고,
이미 뽑혀서 궐내에 버틴 내시의 숫자가
1백 40명,
아니 그것보다 이미 아내까지 거느린
너는 그 내시의 자격도 없다."
" ..."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
어의가 되는 길뿐."
"어의?"
"어의 ...
왕족의 건강을 돌보고 임금의 시탕을
책임지는 직책인 어의 ..."
"그 어의도 대감이다, 그런 말이오?"
"천만에,
그 길도 오르고 올라서 양반들이 독차지
하는 도제조,
부제조 아래 어의로서 의명을 떨치고
떨쳐 실무인 내의원정이 되고서야 정삼품이 되는 것이 고작이다."
"하나 ..."
하고 안광익이 냉소했다.
"정삼품도 정삼품 나름,
대감이란 호칭은 옥당(임금이 있는 곳)에 오를 수 있는 문관 벼슬에 한하고,
의술 따위 천직은 당하관 정삼품에 영감이 고작이지, 훗훗."
허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놀리고 있는 얘기 같았다.
될성부른 얘기들이 아니었다.
"하나,
어의의 직책만 찬다면 대대손손 종살이나 제 처자식과 본의 아닌 생이별 따윈 면하고 살리라."
허준의 눈이 비웃으며 안광익을 향했다.
"내 알기 당신이야말로,
그 내의원 출신인데 왜 당신은 면천의 길을 마다하고 내게 떠드는 게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밥 한 상 차려준 네 모친과 네 자식들을
위해서지.
내 말은 그뿐!"
안광익이 그 김민세의 법의자락을 끌었다.
"가세."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허준이
내뱉었다.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라지, 미친놈들!"
그 허준 따윈 더 거들떠보지도 않고,
김민세가 손씨에게 합장하며
"나무관세음보살 ..."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득히 첫닭이 울고 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김민세에게 마주 합장하던 손씨가 그래도 무언가 미련이 되어,
그러나,
부르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을 쫓아갔고
갑자기 얼어붙어 있는 허준에게 아내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될성부른 일이 아니올시다.
우연히 그래본 거겠지요. 들어가소서."
그 순간이었다.
허준이 갑자기 마당을 뛰쳐나갔다.
가족이 놀랄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으로 허준이
달려가고 있었다.
.
바람속으로 달려 나루터 언덕비탈을 굴러내려온 허준은 엎어질 듯이 섰다.
마악,
강심으로 쪽배 하나가 떠가고 있었고
그 위로 배를 젖는 김민세가 보였다.
허준이 외쳤다.
"대사님, 나 좀 봅시다. 대사니임--"
강바람이 그 소리의 반을 흐트러뜨렸다.
허준은 멀어가는 배의 방향으로 모래톱을 달리며 다시 절규했다.
"시키는 대로 하리다.
면천하는 길이면 무슨 짓이든 하리다앗!
날 좀 보고 ... 가 ... 오 ... 날 ... 좀!"
피를 토하 듯한 허준의 절규를 분명
들었음직한데도,
배 위의 두 사람은 돌아보지 않은 채 배는 점점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