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폭염기간이 이어지고 시간을 맞추지 못해 첫산행에서 밀려난 가야산을 향한다...
인근에 수덕산(덕숭산)의 수덕사를 함께 하려던 것을 아직도 무더위는 계속되고 원거리라 늦게까지 산행이 이어지면 귀가에 애로가 따를 듯 해서 명당이 자리잡고 있는 가야산만 둘러보기로 한다...
답사일: 2019.08.26.(월요일) 맑음,미세먼지/좋음
어디를: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치리정류장-대치2리경로당-헬기장-490m-kt원효봉중계소(가야산정상)-650m(가야봉석)-상가저수지-석문봉갈림길-지름길-남연군묘(가야사지)-가야사버스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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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내에서 담아 본 통신탑이 보이는 가야산...
좌측은 석문봉, 우측은 원효봉..
버스기사는 예산분이라 침이 마르도록 설명이 이어진다...
용봉산 답사때문에 예산에 한번 더 와야한다고하니 친절하게도 가야산 들머리에 내려주신다..
들머리에서 바라 본 가야산....
확대...
대치리 정류장에서 바라 본 수덕산(덕숭산)은 다음 기회에...
계곡수퍼 앞을 지나...
대치2리경로당에서...
주민의 확인를 거쳐 원효봉중계소 방향으로 들어간다...
가을은 익어가고...
확연이 드러나는 가야산과 원효봉...
밤도..
사탕수수도 익어간다...
전주이씨 재실..
날 더운데 모기때의 공격까지 이어진다...
그물달린 모자와 부채가 유용한 듯...
포장도로는 헬기장까지 이어진다...
가야산이 가까워지고...
좌측에 능선길이 있는 듯...
평지에 가까운 길도 있다...
뜻 밖의 약수터...
헬기장...
헬기장에서도 남연군묘로 내려갈 수 있다..
포장도로를 벗어나...
우측 숲길로 이어진다...
490m에서 점심 후 몸을 풀고...
가야봉으로 향한다...
잠시 조망바위에서...
상가저수지...
옥계저수지...
국토지리정보원 앱을 보며 좌측으로 향한다..
다시 포장도로에 닿는데 가야산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우측으로 더 올라가보니...
가야산 정상에는 kt중계탑이 자리하고 있다..
잠시 후에 이곳으로 이동하게된다..
kt원효봉중계소 철문은 굳게 잠겨있어 진입할 수 없다..
KBS중계소로 다가가니 개들이 짓어댄다..
잠시 후 근무자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후퇴하여 조금전 그 길로 이동한다..
포장도로에서 좌측으로 이동..
이동하다가 길흔적을 따라가보니 중계탑이 다시 보이고 철책때문에 되돌아 나온다..
이 적색 시그널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가야봉으로 오르는 계단이 기다린다..
가야봉석이 있는 곳은 해발 650m가 조금 넘는다...
셀카봉을 준비했지만 쉽지 않은 촬영이다..
뙤약볕에 장시간 시름하다가 중단하고 하산한다..
가야봉에서 바라본 석문봉...
상가저수지...
홀로 걷는 젊은 산객과 주차장 방향으로...
좌측으로..
상가리사방댐..
주차장 방향으로..
상가저수지..
남연군묘 방향으로..
옥양봉이 정면에...
석문봉 갈림길에 남연군묘 안내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앱을 따라가는 수 밖에 없다..
앱을 보니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남연군묘로 이동하여 다시 나오는 그림이라, 지름길이 보이는 듯 해서 좌측으로 진입한다..
여기에도 덩치 큰 개들이 소리없이 다가와 있다..
남연군묘 위치를 내려다보고 후퇴하다가..
누군가 길을 낸듯한 곳으로 내려간다..
한적한 곳에 가야산 수퍼가 있는데 이곳에서 길을 물었더라면 수월했을 것을..
다시 앱을 따라 이동해본다..
이곳에서 후퇴하여..
주변을 뒤져보지만 남연군묘라 할수 있는 묘는 볼 수 없다..
원거리 답사라 포기하고 후퇴하다가 가야산수퍼에서 TV방송소리가 들려 문을 두드리자 수퍼주인이 있었다..
남연군묘 주변은 가야사가 있던 자리라 넓은 공간이 있다..
평지에서 조금 위에 남연군묘가 자리하고 있다..
가야사지에서 바라 본 가야산...
남은들상여..
영화 '명당' 속 흥선군에 대한 이야기..
시대적 배경은 세도정치기가 60년인데 그 유명한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의 아들인 23대 임금 순조치세 중반기에 가면서 전부 끝나고 한 개의 당을 제외한 나머지 붕당은 모두 소멸되는 일당 독재체제가 형성됐습니다.
마지막에 살아남아 독보적인 최대권력을 쥔 가문은 안동 김씨였습니다.
안동 김씨를 이끌던 수장은 김조순이었습니다. 김조순은 사람 자체는 대단히 유능하면서 겸손하고 처세술이 뛰어나고 속된 말로 낄끼빠빠에 능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미 충분한 권력을 쥔 상태에서 김조순은 그 이상의 권력을 원하지도 않았으나 정조는 이러한 김조순을 총애하여 죽기 직전 김조순에게 순조를 부탁했으며 순조 역시 김조순을 아버지 모시듯 따랐습니다. 그럴수록 김조순 개인의 권력은 물론 안동 김씨 가문의 권력도 그만큼 막강해졌습니다. 일당 독재체제가 형성되면서 안동 김씨의 입김은 조선에서 절대적이었습니다. 김조순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김조순을 기점으로 가문이 나라를 지배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된 셈이었습니다. 김조순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김조순은 끊임없이 권력의 핵에서 멀어지려고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오히려 권력에 다가가게 됐지만요! 문제는 안동 김씨의 가문이었습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여러 양반들이 안동 김씨 가문에 붙어 부정청탁을 하면서 안동 김씨 가문은 더 권력이 강해졌고 그만큼 더 부정청탁이 이루어지는 등 조선 정계의 악순환이 이뤄졌습니다.
김조순이 죽자 그의 아들,조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가문의 권력으로 왕가를 누르고 조선 정치를 문란하게 했습니다. 김조순에겐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특히 악명 높고 권력욕의 핵심에 있던 아들이 막내였던 김좌근이었습니다. 김좌근은 오히려 형들보다 훨씬 권력욕이 심했으며 권력의 중추부에서 안동 김씨를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 가장 강하고 더럽고 악의적인 권력가문으로 올린 인물이었습니다.
1834년 순조가 죽고 그의 손자이자 죽은 효명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조선 24대 국왕 헌종이 됩니다. 헌종 대에 안동 김씨 일가와 김좌근의 힘은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무소불위의 힘이었습니다.
김좌근은 그의 아들이었던 김병기와 함께 온갖 부정한 일을 일삼으며 조선 정치를 타락하게 만들었고 민생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하기만 했습니다. 수많은 안동 김씨 일가의 사람들과 그 일가에 빌붙은 관리들도 김좌근을 보고 따라했습니다.
조선 조정의 요직은 전부 안동 김씨와 그에 빌붙은 정치인들 뿐이라 사회나 정치를 개혁하기조차 불가능했습니다.
헌종은 1849년 23살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그의 왕권강화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아버지 효명세자가 22살에 죽었으니 참으로 비통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은 탓에 헌종에게도 독살설이 따라붙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증일 뿐 구체적 정황이나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사실화할 수 없습니다.
안동 김씨에서는 왕실 중에서 바보나 다름 없는 글자조차 모르는 시골소년을 데려다 강제로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 임금이 조선 25대 국왕 철종인데 철종은 국사나 정사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모든 권한은 안동 김씨 일가에 일임하면서 본인은 유흥에만 빠져 살았습니다.
흥선군은 전주 이씨 방계에 해당하는 왕실인 듯 왕실 아닌 왕실 같은 왕실이었습니다. 엄연히 전주 이씨라 왕가의 피는 왕가지만 일반 양반보다 못한 왕실이었죠. 그러나 그러한 왕가였어도 당시 어지러웠던 정세 속에서는 왕실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면 상당히 위험했습니다. 오히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거나 혹은 전혀 위험한 요소로 보이지 않게끔 처신하는 게 왕실로서 편안히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흥선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흥선군은 '파락호'라는 지금으로 보면 조직폭력배와 다름 없는 집단들과 어울리며 온갖 바보 같은 짓들을 하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독특하고 해괴한 흥선군을 왕실의 체면을 떨어뜨린다며 손가락질 했지만 김좌근은 그런 흥선군에게 오히려 연민을 느끼며 그의 그림을 사고 용돈을 주는 등 흥선군을 나름 챙겨줬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흥선군의 연기였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흥선군은 파락호의 한량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정만인이라는 지관을 만나게 됐습니다. 여기서 지관이란 풍수지리를 보는 토지학자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이 정만인이라는 지관은 흥선군에게 충남 덕산군에 2명의 황제를 배출할 수 있는 묘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단 그 자리에는 가야사라는 오래된 절이 위치하고 있어서 묘지로 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뒤 그 일부를 가야사의 주지에게 주고는 강제로 승려들을 내쫓은 다음 자신의 건달들과 함께 가야사에 불을 질러 전부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기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흥선군은 나중에 누군가 아버지의 묘에 손을 댈까봐 철을 녹여 부었고 그마저 모잘라 강회를 비벼서 부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 과장해서 만든 스토리가 영화 <명당>이랍니다. 이 이야기는 정사에는 실려있지 않고 야사에만 기록되어 있어 100%믿을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지금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가면 실제 가야사 터가 있고 남연군 묘가 있습니다. 가야사가 당시 불에 탄 건 사실로 보입니다.
[출처]영화 <명당> 속 세도정치기와 흥선군 뒷이야기 +후기|작성자Double 1
가야사지에서 막버스를 놓치지 않기위해 재촉한다..
정방향으로 들어왔다면 무난하게 찾을 수 있는 남연군의묘 안내판...
상가리경로당
가야사주차장에 닿는다..
예산버스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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