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가벼운 몸살이 났었네요. 종일 잤더니 많이 나아졌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쉼터 생각을 해봅니다. 며칠 전 어느 가족분과의 통화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쉼터에 갔더니 담배연기가 자욱해서 안 좋게 생각되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근래에 저에 대해, 담배와 관련된 질책이 왜 나왔는지...... "쉼터에 모여서 담배나 피워대면서 뭘 하자는 건지?"하는 회의가 들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쉼터를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쉼터의 필요성과 기능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쉼터 얘기를 하자면 어쩔 수 없이 제 공부과정, 임상경험, 그리고 제 생각의 변화과정을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1977년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에 입학했고 (아버님께서는 법학과로 진학해서 고시공부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1984~1985년에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당시에는 대학원에서 생리심리학과 산업심리학이 인기가 있었기에 주변 동료와 선후배들은 왜 제가 임상심리학 전공을 택하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1986~1988년 3년간을 서울대병원 정신과에서 임상심리 수련을 받았습니다. (주변 동료들은 바로 박사과정에 입학하지 않고 수련과정을 선택한 저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전통적인 진단기법과 심리치료를 배웠습니다. 심리치료의 경우에는 정신분석과 인지치료를 주로 배웠습니다. 당시에는 (지금도 거의 그렇겠지만) 정신재활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습니다. 1989년에 32세의 나이에 대구대학교 심리학과 교수가 되었고, 성격심리, 이상심리, 심리검사, 심리상담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습니다.
대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1993년에 계명대학교 심리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지도교수이신 손명자 교수님께서 1988년부터 혼자서 독학으로 정신재활을 공부해 왔는데, 저에게 같이 정신재활 분야를 개척해 보자고 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변사람들 대다수는 왜 고려대학교로 박사과정을 진학하지 않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또한 제가 가족교육을 시작하고, 재활센터를 만들고 할 때마다 왜 아무도 하지 않는 저런 일을 하는지? 왜 돈이 안 되는 일을 하는지? 하고 주변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입학시험과 동시에 1992년 12월부터 손명자 교수님의 권유로 "정신분열병 가족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하여 외국의 가족교육 교재 7권을 일차 번안하여 그것을 토대로 "가족교육 교재"를 개발하였고, 1993년 9월부터 가족교육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동아대의대 정신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철권 교수가 당시에 양산병원에서 시작한 가족교육과 거의 동시기에 시작했고, 김철권 교수의 프로그램과 함께 국내 최초의 체계적인 가족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정신분열병 환자를 돌보는 가족분들"을 작게는 5~6분을 1팀으로 처음에는 5주 교육과정으로 시작해서, 그 후에는 8주 교육과정으로 늘렸고, 수년 후부터는 1팀에 10분 정도를 모시고 12주 교육과정(매주 토요일 오전에 3시간씩 12주 동안 교육)으로 가족교육을 했습니다. 이 교육과정을 약 10년간 끊이지 않고 지속했으니 적어도 200~300명의 가족분들이 제게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대구가족협회 이름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했기에 저는 최소한의 강사료만 받았습니다.)
1993년에 처음 가족교육을 시작할 때는 당사자의 사회복귀를 위해서는 당사자에게 "재활 교육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즉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강제로라도 억지로 깨우고, 밖으로 억지로 내보내고, 무슨 일이든 억지로라도 하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약 2~3년 정도 지나면서부터 제 입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당사자를 재활시키기 위한 가족교육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가족을 위한 가족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점차 취하게 되었습니다. (가족 자신이 편안해야만 당사자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자신을 돌보는 가족이 당사자에게 좋은 가족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또한 당사자에 대해서도 "교육훈련 방식에 입각한 재활"이 아니라 "재기철학에 입각한 지원"이 재활재기에 더 중요하다는 입장으로 변해갔습니다. (10년간 계속 수정해온 교육교재를 2003년에 새미래심리건강연구소에서 출판했습니다. 본 카페의 "촛불저서" 게시판에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1994년부터 가정방문을 시작했습니다. 가족교육을 받은 가족들의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애가 집에만 틀어박혀서 꼼짝도 안하는데 제발 한 번만 찾아와봐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처음에는 집으로 찾아들어 가고, 그 다음에는 집주변 동네를 같이 산책하고, 시내 커피숍에서 만나고, 학교 연구실로 찾아오게 하는 방법으로, 몇몇 당사자를 집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물론 무료로 했던 일입니다. 가족과 당사자들의 처지가 딱하게 느껴졌기에 자발적으로 그 일을 했었습니다. (나중에는 학교 근처에 당사자가 원룸을 얻어서 살게 하면서 무료로 또는 유료로 사례관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에 가슴 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제 외가쪽 친척 질녀가 조현병이었는데 (저는 제 고모님도 조현병입니다.) 제가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가정방문을 하고 있었죠. 집안에서는 (5식구가 사는 마당이 넓은 집) 모든 집안살림을 혼자서 다했는데 집밖으로는 한 발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10살 차이가 나는 막내 남동생에게 뺨을 맞고 그날 밤 자살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는 마음이 너무도 아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센터가 필요하다. 센터를 만들어야겠다." (만일 센터가 있어서, 그 질녀를 집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면 그 질녀가 자살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994년 10월에 부산에서 가족협회가 결성되었고, 1995년 1월에는 손명자 교수님과 제게 가족교육을 받았던 가족분들 30~40명이 모여서 대구가족협회를 결성했습니다. (조금 지나서 서울에서는 1995년 7월에 가족협회가 결성되었습니다.) 대구가족협회 가족분들과 의논하여 1995년 9월에 대구재활센터 (현재의 사단법인 대한정신보건가족협회 대구지부 부설 대구재활센터, 75인 이용시설)를 만들었습니다. 정신보건법이 1995년 12월에 통과되고 1997년 4월부터 시행되었으니, 정신보건법도 없던 시절입니다. 당시의 사회복귀시설은 전국에서 딱 1군데, 태화샘솟는집(1988년에 설립) 뿐이던 시절입니다. 나머지 현재의 모든 정신보건센터와 사회복귀시설은 1997년 이후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초기에는 대구가족협회의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대구재활센터에 대한 지원도 원활했습니다. 무소유는 1996년인지 1997년인지에 처음으로 대구재활센터를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 때의 센터의 분위기가 참 좋았다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매일 20~30명의 당사자가 센터를 이용했습니다. 그 때는 유급직원은 없었고, 모두가 계명대학교와 대구대학교의 대학원생과 학부생 자원봉사자들로 재활센터가 운영되었습니다. 직원이 없이 학생들이 프로그램을 진행했기에 학생들과 회원들간의 관계가 대등했고, 당사자들이 존중받는 분위기였습니다. 무상으로 사용하던 센터 공간을 비워야할 처지가 되었을 때, 일주일만에 10명의 가족이 100만원씩 내서 1,000만원을 보증금으로 하여 새로운 공간을 임대해서 공간문제를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운영비는 저도 수시로 보조해 줬지만, 가족들의 자발적인 후원도 많았습니다. 냉장고나 선풍기를 사주고 가시기도 하고, 수시로 통장에 50만원씩 또는 100만원씩 입금해주시는 가족분들도 여럿 계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무렵에 그렇게 센터를 운영할 걸 괜히 정부지원을 받았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1997년 4월 정신보건법이 시행되면서 정부에서 사회복귀시설에 대한 건축비와 운영비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첫 해에 운영비 지원은 따내지 못하고, 제가 노력하여 건축비(3억6천4백만원) 지원을 따냈습니다. 아직까지 가족협회가 사단법인도 아닌 상태였고, 부지도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건축비부터 땄으니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아마도 제가 복지부는 20~30번, 대구시청은 백번도 넘게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손명자 교수님이 2억을 마련하여 일단 대구시에서 분양하는 땅 200평을 매입했습니다. 대구가족협회에서 가족분들이 한 분이 1,000만원씩 20명이 모금하여 2억을 만들어주기로 했습니다. 10분 정도 되는 가족분들이 입금해 주셔서 모금액이 1억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족협회 내에서 저를 몰아내려는 가족분들이 계셔서 생각지도 않았던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정부지원금(3억6천4백)이 확정되니, 몇몇 가족임원들이 똘똘 뭉쳐서 저를 배제시키고 자신들의 뜻대로 건축사업을 추진하려 했고, "배정규가 자기 재산 만들려고 하는데, 왜 가족들이 거기에 모금해 주느냐?"하며 이미 후원금으로 1,000만원씩 내놓았던 가족들에게 후원금을 돌려받으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IMF 가 터졌습니다. 후원금을 돌려달라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당시의 가족협회 회장님은 돌려주지 말라고 제게 조언하셨지만, 제가 돌려주기 시작하여, 결국 모금되었던 후원금 1억원을 다 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입했던 땅 200평 중에서 100평을 대구시에 반납하고, 나머지 100평에 대해서는 손명자 교수님이 7천만원, 제가 3천만원 희사한 것으로 하고, 가족협회에 부지를 무상증여했습니다. (제가 부담했던 3천만원에 대해서는 3년 전에 손명자 교수님께서 어려운 제 형편을 생각하여 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족협회가 사단법인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일이 추진되지 않기에, 제가 대한정신보건가족협회에 사단법인 설립자금으로 4천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대한정신보건가족협회는 각 시도별로 분담금을 받아서 제게 빌려준 돈을 갚아주기로 하였고, 저는 돈을 빌려준 지 5년 정도 지나서 3,300만원을 돌려받았습니다 (대구가족협회 분담금 700만원은 제가 희사하는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아무튼 3년간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대구재활센터 건물 신축을 끝내고, 2000년 2월에 대구재활센터를 현위치로 이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구재활센터 운영에서 손을 뗐습니다. (제 재산을 만들려고 한다는 오해를 받았기에, 그것이 억울해서 제가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뜻도 있었고, 정부로부터 운영비 지원을 받기 시작했기에 제가 없어도 잘 운영해 나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구재활센터는 직원이 8명인데, 가족 1명, 당사자 1명을 반드시 직원으로 채용하는 것으로 원칙을 정해두고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습니다.) (3년간 이 건축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전에 분위기가 좋았던 가족협회가 거의 사분오열되었고, 저도 몇몇 가족분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후 대구가족협회는 한 동안 잘 성장하였으나, 최근 3년간 회장과 임원들간의 다툼으로 심한 내분을 겪었고,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2000년 4월에 대구대학교 내에 "대구대학교 정신건강상담센터"라는 사회복귀시설(20인 이용시설)을 만들어서 정부보조를 받아서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10년간 센터 소장을 맡았습니다.) 처음 4~5년은 학교내의 교직원들의 반대를 극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시설도 아닌데, 학교내에 왜 저런 기관이 있어야 하느냐? 학교가 왜 공간, 비품, 근로학생 등을 지원해줘야 하느냐? 불필요한 기구이니 폐지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센터 직원들과 회원들 간의 격차를 줄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센터 직원들은 모두 다 제 제자인데도 불구하고 "회원들을 동등하게 대하라. 회원들에게 센터운영에 대한 일부 의사결정권을 줘라."는 제 주장 내지는 지시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센터 직원들은 "감사 지적사항이 나오면 누가 책임질 거냐?"는 논리로 제 지시에 저항했습니다. 한 번은 이런 말을 전해듣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센터에는 계급이 존재한다. 직원이 제일 위이고, 그 다음이 수련생, 그 다음이 자원봉사자, 그리고 회원들이 제일 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가 만들었던 대구재활센터와 대구대학교센터가 우리나라의 모든 정신보건센터와 사회복귀시설들을 통틀어서 직원과 회원들 간의 격차가 가장 적은 센터 상위 10% 이내에 들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했던 기대수준에 비하여, 당사자들을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 즉 당사자들의 발언권과 자율성에 대한 존중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재활재기의 근본 출발점은 당사자의 자유의사와 자율성입니다. 그렇지 않은 방법으로는, 즉 설득과 권유에 의한 방법으로는, 설사 10년을 공들여서 재활성공사례로 만들어 놓아도 하루 아침에 무너집니다. 애초에 재활성공사례로 만들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도록 해주겠다. 단지 뒷바라지만 해주겠다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는 성공적인 재활사례로 꼽히던 당사자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경우를 여러차례 목격했습니다.)
2003년부터 저는 박사논문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외부 일들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헤아려보니 제가 맡고 있던 감투가 20개이더군요. 학교 내에 5개, 학교밖에서 15개의 직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직함들을 거의 다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2004년도에 박사논문을 썼고(박사입학한지 12년만에 졸업했습니다.) 2005년도 한 해를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이전에 졌었던 빚들도 다 갚았고, 각종 직함도 거의 다 내놓았던 상황이라, 학교 강의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어서, 개인적인 자유시간이 많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대학교수가 되었던 첫 한 해와 2005년도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았더라면, 이후의 분란들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무난한 인생이 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2005년 12월에 잘 알고 지내던 서울대병원 선배의사(최진옥 원장)가 대구에 병원을 새로 만드는데 정신장애인 재활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는 병원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같이 만들어보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그 때부터 병원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서서 3번을 실패했습니다. 아무튼 2006년 3월이 병원 오픈 예정이었기에 (실제로는 약 1년 6개월 뒤에 오픈) 2006년 2월에 그 근처로 집도 이사하고, 병원자리 바로 옆에 180평 공간을 임대하여 "파란마음 교육문화센터"라는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교육도 시키고, 공동작업장도 운영하고, 가게도 여러개 운영하려는 계획을 가졌습니다.) 직원도 2명 채용했었죠. 한 명이 무소유인데 당시에 대구재활센터 직원으로 잘 근무하고 있던 무소유를 소장으로 스카웃한 것이고, 또 한 명이 파란마음(김연수)인데 제 대학원 제자였죠. 이렇게 한 이유는 직원과 회원이 평등한 관계인 센터를 만들려면 소장이 당사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직원을 쓸 때도 전문가와 당사자를 반반씩 채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원 오픈이 늦어지고, 병원으로부터 받기로 한 보조금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서, 직원들(무소유, 파란마음) 월급을 첫 몇달만 제대로 챙겨줬고, 이후로 월급을 반액만 주거나, 제대로 주지 못해서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다. 결국 무소유와 파란마음이 각자 다른 직장을 찾아 떠나고, 한 동안 직원 없이 지내다가, 끝무렵에는 단감이 직원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센터에 방화사건도 일어나고, 제 힘으로 센터를 유지할 힘이 없어서 3년 만에 센터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에 최진옥 원장과 대구가족협회 회장을 역임하신 현귀섭 목사님이 연합하여 그 자리에 "한일병원 부설 대안학교"를 만들었고, 현재 매일 40~50명의 회원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2009년도 2월에 센터 문을 닫고, 1년간 저는 더 이상 병원을 만든다거나, 센터를 만든다거나 하는 일은 않기로 마음 먹고, 교수생활에만 충실하려고 했습니다. (부채문제로 2007년도부터 수면제와 조울증 약을 복용하기 시작해서 5년간 약물복용을 했습니다. 2009년도에는 부채가 2~3억이 되어 힘들었지만, 더 이상 무리하지 않았다면 갚아나갈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2010년도부터 저는 다시 병원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섰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헛된 제 욕심으로 허망한 꾀임에 빠진 것이지요. 이 무렵에 단감이 재발해서 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면회를 간 저에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파란마음센터 다시 만들어주세요."라고 부탁했고, 저는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2010년 8월에 지금의 대명동 "파란마음심리상담센터" 공간을 임대하여 센터 겸 쉼터로 운영했고, 2011년 2월말에 파란마음(김연수)에게 무상으로 넘겨주었습니다. 이때 여러가지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재활상담/사례관리 전문센터"로 운영해줄 것을 당부하고 넘겨주었지요. 그런데, 두 달 만에(2011년 4월) 제가 교통사고(사망사고)를 내게 되었는데, 사고를 내는 순간 저는 "내가 번잡하게 살아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다."고 직감적으로 느꼈고, "병원 만드는 일에서 손을 떼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 일로 학교를 휴직하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결과는 다행히 벌금형이었습니다.) 막상 병원설립 계획을 중단하고 아무런 활동을 않고 지내자 돈의 흐름이 막혔습니다. 이전에도 돈으로 인한 고통이 심했지만, 돈의 흐름이 막히자 빚독촉이며 돈문제로 인한 고통이 매우 심했습니다. 집에 강제압류가 2번 들어왔습니다. (지금 또 3번째 압류가 들어오려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회생신청을 했지만 채권자 동의요건 미비로 기각되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다른 어려운 일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파란마음이나 단감에게 했었던 약속들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 했던 대부분의 약속들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2년 반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2013년 8월에 학교를 퇴직했습니다. 연금은 포기하고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아서 급한 사채들을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은행빚 3억 정도는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안정되면 파산신청을 할 생각입니다. 파산신청을 하고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도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게 그 에너지가 좀 더 올라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파란마음(김연수)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제 약속을 믿고, 다니던 직장(금오공대 학생생활연구소)을 그만두고 2011년 2월말부터 "파란마음심리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지금껏 버텨낸 것만으로도 파란마음(김연수)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재활상담/사례관리" 전문상담센터는 돈이 되지 않습니다. 고객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란마음(김연수)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센터를 유지해 왔을 뿐만 아니라, 센터공간을 당사자들이 쉼터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또한 당사자들을 동료상담가로 양성하고 활용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저는 학교를 퇴직한 직후인, 2013년 9월에 간신히 보증금 500만원을 마련하여 지금의 쉼터(행복나눔쉼터) 공간을 제 사무실 겸 쉼터 용도로 사용하려고 임대했습니다. (2013년 9월에 초롱이를 샀는데, 그것도 새 공간을 얻게된 계기가 됩니다.) 처음에는 월 30만원의 임대료와 월 30만원 정도의 유지비는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교수직을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기로서니, 그 정도 돈을 못벌어내겠는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게는 유료상담이 가장 손쉬운 돈벌이 방법이지만, 저는 유료상담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전문가로 기능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월세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초롱이 문제로 옆사무실과 갈등이 있었고, 그래서 올해 5월에 침산동 사무실로 잠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침산동에서 상담센터를 운영하는 제 제자도 제가 병원 만든다고 설칠 때, 제 말을 믿고 직장을 그만두고 나왔다가, 제가 병원설립을 포기하면서 백수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상담센터를 오픈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9월에 다시 지금 제가 거처하는 "치료공동체"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쉼터는 5월부터 7월까지 3~4개월간은 향기/캠벌 부부가 맡아서 운영했었고, 8월부터 지금까지는 조나단이 맡아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나단이 맡고 난 이후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쉼터가 만들어졌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즉 이전에 대구 성당동 파란마음교육문화센터 시절(2006~2008년)에도 쉼터로서의 기능을 상당 부분 했었지만, 그 시절에는 "쉼터"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명동 파란마음심리상담센터 공간을 쉼터로 겸용하던 시절(2010~2013년)에도, 그리고 제 사무실과 겸용이던 시절에도 말로는 쉼터라고 했지만, 파란마음(김연수)이나 저라는 전문가가 중심에 있었기에, 당사자들이 전문가에 대한 의존없이 자립적, 자율적으로 쉼터 운영과 이용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향기/캠벌이 맡고난 이후, 그리고 조나단이 맡고난 이후, 쉼터는 진정한 "당사자들의 자율적인 공간"으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사자들의 재활과 재기를 위해서는 다양한 시설들이 필요합니다. 교육훈련을 위한 기관도 필요하고, 공동작업장도 필요하고, 당사자-운영 가게들도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쉼터도 필요하고 당사자-운영 또는 당사자-주도 센터도 필요합니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전문가없이 당사자들끼리 운영하는 당사자-운영 센터도 정부에서 운영비를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정부는 당사자들을 믿지 못하고 있기에, 전문가-주도 센터 개념만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당장의 눈에 보이는 성과를 중요시하기에 얼핏 아무런 효율적인 기능이 없는 듯한 "쉼터"와 같은 시설의 필요성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교육훈련을 위한 기관이나 공동작업장 등,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기관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쉼터"와 같이,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가도 되고 가지 않아도 되고, 아무런 부담없이 서로 만날 수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안해도 되고, 언제든 자유롭게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잠도 마음껏 잘 수 있고, 있고 싶은만큼 있다가 가고 싶을 때는 언제든 가도 되는, 부담없고 자유로운 공간이 일차적으로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당사자들은 이미 여러 곳에서 자신들만의 쉼터를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2년전쯤 작고하신 당사자인 고 양장훈 선생님의 경우, 1990년대에, 정신병원과 요양원 외에는 사회 속에서 당사자들을 위한 시설이나 공간이 전무하던 시기에,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누구든 자신의 집에 놀러와서 하루 종일 지내고 갈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들의 식사를 챙겨주었습니다. 양장훈 선생님은 "밥 문나?" 철학을 갖고 계셔서, 다른 당사자들 밥 챙겨 주는데에서 많은 보람을 느끼셨습니다. 지금도 기초생활수급자 아파트에는 당사자들끼리 모이는 집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집을 다른 당사자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해주는 당사자들은 나름대로 어떤 "사명감"과 "의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들끼리의 모임은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하루하루를 즐겁게 지내는데만 치중하여, 대낮부터 포커, 화투, 그리고 술로 시간을 때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향후 이들이 건전하고 다양한 문화생활과 여가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욕구나 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경제적 형편, 차량이동수단 미비 등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컴퓨터, 스마트폰, 통신비 지원 등 정보접근성과 관련된 도움도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대구 대명동 쉼터를 처음 방문하셨던 가족분들은, 제가 그러한 당사자들의 모임(포커, 화투, 술로 하루를 보내는 모임)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심정과 비슷한 심정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렇게 지내도록 내버려둬도 되나?"
지금 쉼터에서 담배를 피워대서 담배연기가 자욱한 현실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쉼터 이용을 꺼리는 당사자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단감입니다. 단감은 비염과 천식이 심해서 공기가 탁하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흡연을 금지시키는 것도 능사는 아닙니다. "담배를 자유롭게 피울 수 있는 공간"은 많은 당사자들의 오랜 꿈입니다. 당사자들은 일반인들보다 흡연율이 높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을 위한 효율적인 금연프로그램이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 쉼터를 이용하는 회원들은 지금의 공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늘 건물밖 도로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담배를 자유롭게 피울 수 있는 곳"과 "자유롭게 피울 수 없는 곳"에 대한 당사자들의 선호도나 이용률은 많이 차이가 납니다. 저는 지금의 쉼터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바람직할 지, 아니면 피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지금의 쉼터 관리자(조나단)와 주 이용자들의 뜻에 맡기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일 좋은 해결책은 쉼터의 공간이 지금보다 더 넓어지고 방도 많아져서, 비흡연공간과 흡연공간이 분리되는 것이겠지요.
지금의 대구 대명동 쉼터가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까지 자주 이용하는 당사자는 10 여명 수준입니다. 하지만 지금 정도로 서로간의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친분이 쌓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가 각자 지금처럼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재발위기에 있는 당사자가 찾아와도 다들 도망가지 않고 버텨내면서 그 당사자를 감당해 내고, 쉼터의 중요성과 역할을 서로가 명확히 인식하고, 쉼터에 애정을 갖게 되고, 이 곳을 기반으로 각자 자신의 재활과 재기의 의지를 다지기까지, 지난 몇 년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의 모두가 뿔뿔이였지요. 서로가 서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다툼이 일어나거나 기분 나빠하며 가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당사자들은 모래알 같다." 당사자들끼리 서로 이해해주고 뭉치고 협력하는 건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콘크리트에는 모래가 필요하다." 당사자들을 모래라고 한다면, 일반인은 흙이겠지요. 하지만 흙으로 콘크리트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저는 당사자들 간의 유대와 연대가 처음 몇 년간은 일반인에 비해서 많이 힘들겠지만, 일단 유대와 연대가 형성되고 나면, 그것은 일반인들의 경우보다 매우 강력하고 끈끈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진실성이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쉼터의 필요성을 저도 이전에는 미처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3년 6개월 동안 저는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백수생활, 인생바닥을 경험한 것이지요. 그 시기가 저로 하여금 당사자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뀌게 했습니다. 저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었고, 일찍부터 많은 사회활동을 했습니다. 제 전화번호부에는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등록되어 있습니다.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고, 친한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교수직을 휴직하고 (결국은 퇴직하고) 제가 은둔생활을 하던 시기에,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더욱이 일문제로 또는 돈문제로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몇몇에 불과했습니다. 정말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그 시기에 제게 먼저 연락해오고, 저를 찾아와주고, 제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고, 제게 밥을 사주고, 담배를 사준 사람들은 당사자들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집에서만 지내고, 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어쩌다 일이 있어서 밖에 나오더라도 주머니에 돈이 한푼도 없었기 때문에 한 시간쯤 되는 거리는 으레껏 걸어다녔습니다. 커피숍은 제게 매우 사치스러운 공간이었습니다. 당사자들은 제게 무료급식소나 매우 가격이 저렴한 중국집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당사자들은 돈이 없이도 행복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실천하고 있는 "인생의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족한 돈을 가치있게 쓰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을 베푸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로부터 그들의 "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놓고 편안하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사실 제게도 그러한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집에서 아내는 제게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고 구박해 대는데,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서 가고 싶어도 갈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절"에 가는게 그나마 도피처였는데, 매일처럼 "기도"만 하고 사는 것도 힘든 일이었고, 무엇보다 앞날이 보이지 않으니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전의 제 친구들(주로 대학교수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만나도 화제나 관심사도 다르고, 돈의 씀씀이도 다르고, (저는 항상 얻어 먹기만 해야 하고) 아무튼 지금은 만나도 공통점이 거의 없습니다. 제게는 지금 "쉼터"가 가장 소중한 공간입니다. 그 곳에는 제가 좋아하는 그리고 저를 좋아해주는 사람들(당사자들)이 있고,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돈이 한 푼도 없어도 밥이 해결되고, 잠자리가 해결됩니다. 또한 제 시간 또한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누군가의 의논상대가 되어줌으로써 가치있게 제 시간을 사용합니다. 저는 쉼터를 이용하는 다른 당사자들도 저와 비슷한 느낌과 심정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 했는데, 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다 보니, 정작 쉼터의 필요성, 중요성, 기능에 대해서는 충분히 얘기하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쉼터"에 대해서 보다 설득력있게 얘기하기 위해서는 저도 좀더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듯합니다. 저는 며칠 전 쉼터에서 자다가, 아침 6시경에 잠결에 당사자들끼리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나단, 캠벌, 웅호씨, 이종찬 등이 둘러 앉아서 "쉼터를 잘 이끌어가는 방법"과 관련된 진지한 얘기를 2시간 정도 나누는 걸, 잠결에 얼핏 얼핏 들었는데, 속으로 감탄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이끄는 어떤 집단상담보다 더 대단한 집단상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서로가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 상당히 적절히 호응해 주었고, 전체적으로 건설적인 방향으로 대화가 이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지금껏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지금도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있지만, 저는 대구 대명동 행복나눔쉼터가 당사자들의 재활재기를 상호지원하는 오프라인 공동체로서 바람직한, 좋은 시작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사라의 열쇠"가 온라인 공동체로서 그들의 자기치유를 촉진해주고 있고, 그들의 재활재기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에 쉼터를 방문하여, "자욱한 담배연기"에 놀라셨던 가족분들께, 겉으로 보여진 "담배연기"에 놀라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시기 보다는, 지금까지 일이 되어 온 과정을 짐작해 주시고, 지금의 쉼터와 쉼터 이용회원들이 갖고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봐주시고, 그들의 판단력과 자생력을 믿어주시고,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앞길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시간 여유를 갖고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탓하고 나무라시기 보다는 믿고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쉼터의 외형이 어떤지 모르겠는데... 남편의 과거를 돌이켜 봤을 때, 담배 피울 때 제일 좋아하던 장소는 옥상이었습니다.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 피우는 걸 좋아하더군요. 휴대용 재떨이를 소지하고 다녔기 때문에 담뱃재는 항상 들고 내려와서 비닐에 단단히 묶어 버렸고요. 그래서 집에 냄새가 베지 않았어요.
쉼터 밖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쉽지만 당사자 본인들의 심정은 피해를 주지않으려고 될수 있으면 밖에서 피웠으면 좋겠지만 불안할때도 있고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세상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기때문에 저는 당사자 본인분들이 귀찮아서 움직이기 싫어서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세상사람들과 틀리게 이해가 아니라 너무 힘들기 때문에 어쩔수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입장의 취지에서 댓글 남깁니다. 저는 제가 흡연자라고 제가 당사자라고 제가 정당화시킬려는 목적은 아니라는 입장과 양심의 글을 올립니다.
물론 그렇지만 담배를 안피우거나, 담배 때문에 힘들어하는 당사자 역시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베란다가 있으면 참 좋을텐데... 베란다에 원형 탁자 놓고, 의자에 앉아 담소하면서 담배 피우면 담배맛도 좋을텐데... 쉼터에는 베란다가 없는 모양인가 봐요? 아쉽네요. ㅠ.ㅠ
조나단! 좋은 말이야. 셋이 합심하고 협력해야지. 좋은 말이야. 다만 한 가지만 조금 수정하면 싶네. 내 생각에... 진실한 마음은 모두에게 있으니 (자칫 당사자에게만 진실한 마음이 있다하면 전문가나 가족은 짜증스럽지.) 당사자는 "병에 대한 직접경험"이 있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한데...
첫댓글 촛불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저도 마음으로 쉼터에 지원을 하겠습니다... 다들 파이팅!! 하셨음 좋겠습니다!!
촛불님!! 사연이 깊네요~ 대명동쉼터는 지금처럼 자유로운 공간이었음합니다~ 흡연은 당사자들이 스스로 자제하며 밖에서 나가서 태우기도 합니다 .. 지금보단 앞으로는 연기가 덜 자욱할꺼란 약속 드립니다~~
쉼터의 외형이 어떤지 모르겠는데... 남편의 과거를 돌이켜 봤을 때, 담배 피울 때 제일 좋아하던 장소는 옥상이었습니다.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담배 피우는 걸 좋아하더군요. 휴대용 재떨이를 소지하고 다녔기 때문에 담뱃재는 항상
들고 내려와서 비닐에 단단히 묶어 버렸고요. 그래서 집에 냄새가 베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역사를 되돌아 보네요.
쉼터 밖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할때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쉽지만 당사자 본인들의 심정은 피해를 주지않으려고 될수 있으면 밖에서 피웠으면 좋겠지만 불안할때도 있고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세상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기때문에 저는 당사자 본인분들이 귀찮아서 움직이기 싫어서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세상사람들과 틀리게 이해가 아니라 너무 힘들기 때문에 어쩔수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입장의 취지에서 댓글 남깁니다. 저는 제가 흡연자라고 제가 당사자라고 제가 정당화시킬려는 목적은 아니라는 입장과 양심의 글을 올립니다.
물론 그렇지만 담배를 안피우거나, 담배 때문에 힘들어하는 당사자 역시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베란다가 있으면
참 좋을텐데... 베란다에 원형 탁자 놓고, 의자에 앉아 담소하면서 담배 피우면 담배맛도 좋을텐데... 쉼터에는 베란다가
없는 모양인가 봐요? 아쉽네요. ㅠ.ㅠ
우리는 진실한 마음이 있습니다. 직원은 지식이 있습니다. 보호자는 돈이 있습니다. 이 셋이 조화로울 때 답이 나올 것입니다. 사라의 열쇠입니다. ㅋㅋ
조나단! 좋은 말이야. 셋이 합심하고 협력해야지. 좋은 말이야. 다만 한 가지만 조금 수정하면 싶네. 내 생각에... 진실한 마음은 모두에게 있으니 (자칫 당사자에게만 진실한 마음이 있다하면 전문가나 가족은 짜증스럽지.) 당사자는 "병에 대한 직접경험"이 있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한데...
진실도 저마다의 오류를 가진 진실이지요. 가장 순수한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라의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