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굶기다
박승민(1964년~) 말들이 창자 깊은 곳에서 울음처럼 날아갔으나 방음벽에 막혀 공중에서 얼어붙는다. 광화문에서는 화살처럼 툭, 부러진다. 들어야 할 사람이 듣지 않은 말들이 침묵의 눈雪으로 천막 위로 회군한다. 슬픔에도 내성이 쌓여가는 12월의 광장 막사 말은 허약했으므로 간다. 숫돌의 강건체에 얹어 퍼런 달빛 속에서 이리저리 날을 벼린다. 자음과 모음이 꽉 물리게 빈 틈 없이 의미를 건다. 왜 말은 거기까지 닿지 않는가? 둔탁한 말들은 수십 번 망치질로 문맥을 펴고 너무 얇은 말은 내용이 없으므로 쇳물을 한 줌 더 끼얹는다. 말은 무색이지만 말에 덧씌워진 빨간색을 뺀다. 말을 굶기고 말을 뒤집고 말을 협상하고 말을 다그치고 말을 수배하고 말을 풀어주고 말을 다시 대질심문하고 말의 뼈대를 분석하고 말의 출처를 낮추고 높이고 귀는 왜 말을 작동하지 않는가? 새벽하늘의 멍 자위를 뚫고 돌아온 슬픔들이 돼지기름처럼 또다시 천막 위로 떨어진다. 하얗게 하얗게 종루에서 부서진다. ■감상: 시위나 집회 장소에 가면 사회적 약자들이 얼마나 많은 지 확인이 가능하다. 그들의 손에는 말로 다 할 수 없어, 들어줄 사람이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전단지를 만들어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자신들의 사연을 들어달라고 간절함을 담아 보낸다. 수구 언론은 돈이 되는 기사, 권력의 실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쫒아 미화하는데 바쁘다. 정작 소외받고 힘없는 사람들의 말은 전단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겨울로 들어선 지금,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집밥을 얼마나 먹고 싶겠는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울부짖는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들은 행복할까. 그들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듣는 사람이 없다. 따듯한 방안에서 식구들과 오순도순 앉아 드라마를 보면서 하루를 이야기할 시간에 겨울 복판에서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처럼 굳어간다. 그들은 힘이 없어 목소리도 작고 말의 힘도 없다. 억울한데 그 억울한 마음을 들어달라고 젖먹던 힘까지 동원하는데 들어야 할 사람은 듣지 않고 오히려 약자들에게 호통을 친다.
말의 힘이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광장에 서는 일밖에 없다. 12월 누가 광장에 천막을 치고 싶겠는가. 온기가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들이 지금 광화문 광장에 있다. 기약없이 하루가 가고 하루를 맞이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줄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아 겨울 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진정 그들의 말을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진심으로 들어줄 권력자가 없어서 이다. 그 권력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청와대에 있는 분들은 관심이 없다. 말을 굶겨 말들이 모두 죽으면 그 나라는 겨울공화국이라는 이름이 붙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모르는 것 같다.
|  | | ▲ 김희정 |
◇<미룸에서 만난 詩>는 김희정 시인의 안내로 시 한 편 감상하는 코너입니다. 미룸은 미(美) + 룸(Room) =아름다운 방이라는 뜻이 담겨 있고, 순순 우리 말로는 미루다(어떤 일을 미루고 삶의 여유를 찾아보자) 이런 뜻도 있습니다. 김희정 시인은 2002년 < 충청일보> 신춘문예, 2003년 <시와정신>에 당선돼 문단에 나와 시집으로 <백년이 지나도 소리는 여전하다>, <아고라>,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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