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존 헤론 선교사(John W. Heron,蕙論,1856~1890)
“존 헤론” 선교사(John W. Heron)는 한국명 “혜론”(蕙論)으로 1858년 영국 더비셔주에서 출생하여 1870년 5월, 가족들과 함께 미국 테네시주의 녹스벌로 이주하였습니다. 테네시주 메리빌대학 의학과와 테네시대학교 의과대학을 수학하고 1883년, 뉴욕대학교 의과대학 “블랙웰 아일랜드” 병원에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깁슨”과 결혼한 후, 5월1일, 미국 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요코하마항을 경유 조선을 향했습니다. 일본에서 성경번역가 “이수정”을 만난 헤론 선교사는 조선어와 조선의 역사,문화를 배우고 6월20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
1885년 6월21일, 한성부에서 미국의 조선주재 외교관이며 선교사인 “호러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의 자택을 방문하고, 고종의 주치의가 되었으며, 1887년, 제2대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신실하게 성경을 연구하는 이상적인 의료선교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헤론은 “언더우드”와 “스크랜톤”과 함께 “성경번역위원회”에 임명되어 신약성경 번역에 참여 하였습니다.
1890년 7월26일, 헤론은 의료활동을 하던중 전염성 이질에 감염되어 갑자기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갑작스런 병환의 위중함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을 위로하려 병문안을 왔을 때, 그는 마지막 유언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가 여러분들과 함께 있습니다.” 7월29일 헤론의 시신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의 장례로 “양화진”에 묻혔으며 그의 묘비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4)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1858년 2월, 미국 펜실베니아주 손더튼에서 출생하여 1882년,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Franklin and Marshall College)를 졸업하고 감리교 드류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한 후, 1884년, 미국 감리교 선교위원회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1885년, 샌프란시스코항에서 출발, 부산항을 경유하여 조선 제물포항에 입국하였습니다.
1885년 4월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항으로 입국한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감리교회”를 설립하고 “내리교회”(인천 중구 내동 감리회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서학과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최초의 서양식 학교 “배재학당”(현,배재고등학교)을 설립하였습니다. 고종황제는 서양식학교 설립을 기념하는 명칭과 현판을 아펜젤러에게 하사하였습니다. 아펜젤러의 장남 “헨리 다지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亞扁薛羅2世,1889~1953) 또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배재학당 교장으로 취임하여 선교사업과 교육에 헌신하였습니다. 장녀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는 “이화학당”(현,이화여고,이화여대)을 설립하고 발전시키는데 공헌 하였습니다.
“성경번역위원회”가 설립되었을 때, “아펜젤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게일” 선교사와 함께 한글성경번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02년 6월11일, 제물포항에서 전라남도 목포항으로 향하던 “구마가와마루”호가 침몰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 배에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던 아펜젤러가 승선해 있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배가 침몰하는 순간, 승객 가운데 조선인 여학생의 위급한 생명을 구하려다 끝내 구하지 못하고 함께 익사하였습니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조선인 여학생과 조사 조한규와 함께 결국 찾지 못한채 서해 어청도 바다 깊숙이 잠들어 있습니다.
아펜젤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조선 선교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존경받는 삶을 살았고 그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복음선교와 성경번역, 미션스쿨의 설립과 복음전파, 신학교육을 통한 제자화 훈련, 문서선교를 통한 복음의 확장 등 아펜젤러의 선교발자취는 44년의 짧은 생애를 가장 신앙인 다움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자녀들도 한국 땅을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아 그리스도의 정신을 계승하며 선교와 교육에 헌신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살았고 결국 순교의 길로 갔습니다. 그의 시신은 지금까지 찾지 못한채 빈무덤만이 양화진(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남아 있습니다.
(5) 윌리엄 벤턴 스크랜톤 선교사(William B. Scranton,시란돈,1856~1922)
“윌리엄 벤턴 스크랜톤” 선교사(William B. Scranton)는 1856년 5월29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븐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872년 별세하신 평범한 부친과는 달리 스크랜톤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Mary Fletcher Scranton)은 감리교 출신으로 부친은 감리교 목사였습니다. 스크랜톤은 어머니의 신앙과 사상을 이어 성장하였지만 선교사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1878년,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1882년, 뉴욕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그해 “룰리 와이드 암즈”(Loulie Wyeth Arms)와 결혼 후 클리브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1884년 여름,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는 조선 조정에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가한다는 소식이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에 전달하였습니다. 맥클레이의 보고로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는 조선선교를 검토하고 선교사 후보를 찾았습니다. 당시 맥클레이는 클리브랜드에 있는 스크랜톤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을 찾아 왔습니다. 어머니와 상담을 한 맥클레이 선교사는 스크랜톤에게 조선 선교사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였고, 스크랜톤은 그 자리에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후 스크랜톤은 장티푸스 열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까지 열병에 걸려 스크랜톤의 마음은 착잡하였습니다.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한 스크랜톤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해외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이같은 결정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와 해외여선교회에 통보하였습니다. 1884년 10월,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이 해외여선교사로 임명되고 12월에는 스크랜톤이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1885년 2월3일, 미국을 출발한 스크랜톤 모자 선교사는 제물포에 도착하였으나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일본 요코하마항으로 향하였습니다. 일본으로 도피중인 박영효를 통하여 조선어를 배우고, 5월3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초기 6주간은 제중원에서 알렌 선교사(H.N. Allen)를 도와 의료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그후 9월10일 정동에 사택을 구입하여 민간의료기관 진료소를 설치하고, 1886년 6월15일, 민간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고종황제는 “시병원”(施病院)이라는 병원 명과 현판을 스크랜톤에게 하사 하였습니다.
스크랜톤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은 1887년, 동대문에 부인전문병원인 “보구여관”(여성보호와 구제전문병원)을 설립하였으며, 그후 1894년, 남대문 빈민지역 상동으로 보구여관을 이전하였습니다. 특히 콜레라 등 전염병 환자들과 행려병자와 고아들을 치료하고 보호하였습니다. 스크랜톤의 병원은 선교와 치료라는 양날개로 움직였으며 가난한 부녀자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여성아동전문병원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특별히 여의사들이 많았던 “동대문 부인진료소”는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스크랜톤은 감리교 선교부의 임원 가운데 “성서한역통일회” 회장으로 성경번역작업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스크랜톤은 이러한 성경번역작업과 병행하며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를 설립하였고 “전덕기”(1875~1914,목사)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1891년, 스크랜톤은 동대문 부인진료소 내에 “동대문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교회부설기관으로 “볼드윈 매일 여학교”를 운영하였고 삼청동교회, 청량리교회, 화양교회 등을 분립개척 하였습니다. 동대문교회 출신 인사로는 “정춘수”(조선기독교감리회 3대감독)와 “오경린”(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초대감독)이 있습니다. “상동교회”는 1901년, 한성 중구 남대문로에 스크랜톤이 설립한 감리교 교회로 “공옥학교”(남여공학 초등학교)를 부설로 운영하였습니다. 상동교회 출신 인사로는 “이동녕, 박용만”, 그리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있습니다.
1907년, 스크랜톤은 일본을 지지하는 해리스 감리교 감독과의 마찰로 인하여 성공회로 교단을 옮긴후, 평신도 의사로 전환하여 서울, 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대련 등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스크랜톤은 어머니의 신앙을 계승하여 평신도 사역자로 조선 전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후, 1917년, 일본 고배로 건너가 1922년 소천하였습니다.
스크랜톤은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선교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시병원과 보구병원(여성아동병원), 동대문부인진료소(현,이화여대의과대학)그리고 아현교회와 상동교회와 동대문교회 등을 설립하였습니다. 아울러 볼드윈 매일여학교와 공옥학교를 설립하여 성경과 기독교교리를 가르쳐 평신도 지도자로 양성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감리교 성서한역통일회 회장으로서 성경번역작업을 주도하고 복음전파에 심혈을 귀울였습니다. 특히 신앙심이 남다른 어머니와 함께 양날개를 이루며 조선의 부흥운동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