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관계와 한(조선)반도 정세를 말한다
- 재일동포 군사·외교평론가 김명철 선생 대담록 -
⊙ 재일동포 2세인 군사·외교평론가 김명철 선생은 세계문제협의회(World Affairs Council)가 1999년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트레이에서 '코리아: 한 민족, 두 세계 (Korea: One People, Two Worlds)'라는 제목으로 열었던 국제토론회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왔다. 그가 토론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던 이 국제토론회에는 미국의 대북 정책조정관 윌리엄 페리가 기조발언자로 나섰다.
김명철 선생은 미국에 오는 길에 통일학 연구소를 방문했으며, 그 기회를 빌어 이 대담이 이루어졌다. 그는 뉴욕 방문이 두 번째라고 하였는데, 1997년에 워싱턴에 가는 길에 『뉴욕타임스』 편집주간의 초청으로 잠시 뉴욕에 머문 적이 있었다고 했다.
김명철 선생과 한호석 소장의 대담은 1999년 4월 28일 통일학 연구소에서 이루어졌다.
이 대담에서 김명철 선생이 사용한 호칭과 고유명칭들은 남(한국)의 용법과 관례를 따르지 않고 그대로 적는 원칙을 지켰음을 밝혀둔다. 아래에 나오는 각주는 읽는이들이 대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한호석 소장이 나중에 붙인 것이다.
김명철 선생의 일문 저서 『김정일 조선통일의 날: 북조선 전쟁과 평화의 시나리오』는 1998년 10월 도쿄의 고진샤(光人社)에서 출판되었으며, 지금 영문판과 우리말판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
오늘 이렇게 대담의 기회를 갖게 되어서 고맙습니다.
저는 그동안 미국정부 관리들, 미국인 정책전문가들과 교류해 왔는데, 조선문제를 연구하는 해외동포를 만난 것은 사실 오늘이 처음입니다.
대담에 들어가기에 앞서, 읽는이들에게 선생님을 소개하는 말로 이 대담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남(한국)과 해외동포사회에는 선생님에 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의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몇해 전 『뉴욕타임스』 기사에 보도된 선생님의 발언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피터 헤이즈가 일하고 있는 미국의 노틸러스 연구소(Nautilus Institute)의 웹사이트 '평화정책토론(Peace Policy Forum)'에 선생님의 글이 몇 차례 발표되었던 것을 읽었습니다. 남(한국)의 일간지도 짤막하게 선생님의 견해를 보도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읽는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선생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부모님의 고향은 제주도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주도에 딸려있는 위도라는 아주 조그만 섬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일제 식민지 말기인 1942년 일본으로 건너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제주도에서 해녀로 사셨는데, 당시 일본사람들이 제주도 해녀를 모집하여 일본으로 데려왔습니다.
일본 사람은 제주도 해녀가 제일이라고 하면서 집단적으로 모집하여 일본에 데려왔는데, 우리 어머니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오사카에는 제주도 사람들과 그 후손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저는 1944년에 시코쿠에서 태어났고, 일본학교를 다니며 자랐습니다. 조선말을 배우지 못하면서 자랐습니다. 저는 지바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는데, 일본말 다음으로 배운 것이 대학에서 배운 영어입니다. 저는 1966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피플스 코리아』에 기자로 들어갔는데, 조선말은 그때 배웠습니다. 『피플스 코리아』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도쿄대학교 대학원에 북조선 외교를 공부하기 위하여 2년동안 적을 두었습니다.
그때는 조선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동포들이 대학원에 연구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저도 연구생으로 있었지만 실제로 공부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 대학원에 있는 일본인 교수는, 솔직히 말해서 조선문제에 관해서 잘 몰랐습니다. 조선문제야 우리 조선사람이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 교수의 강의를 들어 보았자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년만에 그만두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피플스 코리아』에서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조선문제를 연구하는 미국인 학자, 정책전문가, 외교관, 언론인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프랭크 볼드윈, 브루스 커밍스, 존 홀리데이, 셀릭 해리슨 같은 사람들은 1970년대 초부터 알고 지냅니다. 버나드 크리셔, 도널드 오버도퍼 같은 사람들도 그 무렵부터 알고 지냅니다.
저는 그때 조선문제를 연구하면서 미국인 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을 읽어보았습니다.
조선역사를 공부하면서 제가 도달했던 결론은 조선문제는 결국 식민지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김일성 주석의 로작도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미국이 조선을 분단한 장본인이고, 조선혁명이 복잡하고 장기적이며 간고하게 된 것도 미국의
남조선 강점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조선문제에 관한 제 생각을 가다듬고 있던 무렵에 저는 『피플스 코리아』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때가 1984년이었습니다. 그 뒤에 저는 재일동포 2세인 조선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아무래도 가정의 경제생활을 맡아야 했기 때문에 일본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일본회사의 문건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다시 조선문제에 관하여 연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글을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언론, 미국인 학자들, 전문가들이 큰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노틸러스 연구소의 인터넷 토론장인 '평화정책토론'이 저에게 전자우편을 보내 연락을 했습니다.
노틸러스 연구소의 논평원(writer)이 되어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었습니다. 그때가 1997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노틸러스 연구소의 '평화정책토론'에 논문을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평화정책토론'에 실린 제 논문은 1998년 11월에 발표한 「제네바 협정이여 안녕히!(Farewell to 1994 Geneva Agreement!)」입니다.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 관계하고 있는 워싱턴의 관리들과 교류하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합니다.
미 국무성에서 저와 가까운 사람은 존 메릴입니다. 찰스 카트먼, 스캇 스나이더도 잘 알고 지냅니다. 국무성에서 나온 뒤에 지금은 아시아재단에서 일하고 있는 케네스 퀴노네스도 아는 사이입니다. 주로 이런 사람들과 연락을 하고 지냅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미 국방정보국(Defense Intelligence Agency)의 북조선 담당 정보관도 알고 지내고 있고, 서울과 도쿄에 나와있는 미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 관계자들도 알고 지냅니다. 미 국방성, 국방대학, 국가전략연구소에 있는 사람들도 잘 알고 지냅니다.
저는 미 태평양사령관의 초청을 받고 1996년에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사령부를 방문했습니다. 그 기회를 통하여 미 태평양사령부에 있는 사람들도 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여기에 밝히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 태평양사령부가 선생님을 초청한 것은 좀 뜻밖의 일로 생각되는군요.
저는 태평양사령부를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진도 찍으라고 허락하더군요. 태평양사령부의 고위관계자들과 식사도 함께 했습니다. 진주항(Pearl Harbor)도 돌아보고, 최신예 함정인 이지스함도 타보았습니다. 태평양사령부 안에는 연구기관(thinktank)이 있습니다. 아시아태평양안보연구소(Asia-Pacific Center for Security Studies)라고 합니다.
미 국방대학은 미 합동참모본부의 연구기관입니다. 미 국방대학 안에는 국가전략연구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연구소가 미 태평양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와 합동으로 이른바 '5027 작전계획(Operation Plan 5027)'을 작성한 곳입니다. 그리고 미 국방부 안에는 국방연구원(Institute for Defense Analysis)이라는 연구기관이 있습니다. 이 국방연구원 밑에 로스알라모스 국립 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가 있습니다. 바로 이 연구소에서 핵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국방연구원에도 제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워싱턴에 갈 때면 국방연구원, 국방대학 사람들도 만나곤 합니다. 미 국무성은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사령부에 대사를 발령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사라고 하면 다른 나라에 발령하는 외교관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평양사령부에 대사를 발령한다는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사를 발령합니다. 영어로는, 외교대사와 마찬가지로 '앰배써더(Ambassarder)'라고 부르는데,
그 역할과 기능은 정치고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정치고문은 태평양사령부는 물론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에도 나가있습니다.
미국의 군부는 사령관 제도로 관리되고 있는데, 여기에 정부가 파견한 대사가 나가있습니다. 북조선과 비교하자면, 당이 인민군대 안에 정치위원(political commissioner)을 배치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조선)반도의 정책을 연구하고 있는 미국의 전문가들 가운데는 주로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계십니까?
셀릭 해리슨, 돈 오버도퍼, 피터 헤이즈, 브루스 커밍스, 에드워드 와그너, 에스라 보겔, 프랭크 볼드윈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밖에도 미 중앙정보국이나 국무성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보수적인 연구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도 교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국의 보수적인 연구가들을 더 잘 알고 지냅니다. 사실 보수적인 연구가들과 더 많이 만나고 있습니다. 제가 논문을 발표하면 커다란 관심을 두고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미국의 보수적인 연구가들입니다.
제가 조·미 사이의 대립관계가 해소되면서 결국 승리하는 쪽은 북조선이라는 내용으로 논문을 발표했을 때, 좋은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도 보수적인 연구가들이었습니다. 희한한 일이지요.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조선)반도의 정세가 조·미관계를 중심축으로 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이론을 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에 대해서 워싱턴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떠나서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조·미관계의 내용과 본질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가 됩니다. 오늘 대담에서 바로 이 문제에 관해 살펴보아야 하겠는데, 우선 워싱턴에서는 오늘의 조·미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말씀해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조선문제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북조선과 미국 사이의 군사적 대결상태를 중핵으로 한 조·미 정치문제라는 데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는 그 하위체계로 포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조선문제를 보게 되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북조선과 미국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는 정전상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정전상태는 지난 50여년 동안 지속되어오고 있습니다.
1953년에 있었던 조선전쟁 정전협정은 원래 군대와 군대 사이에서 진행된 협상의 결과입니다. 외무상이 나와서 협상하고 협정을 맺은 것이 아니었고 군사령관들 사이에서 협정을 맺은 겁니다.
조선전쟁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전쟁이었기 때문에, 외무상들 사이에서 평화협정을 맺은 게 아니라 군사령관들 사이에서 정전협정을 맺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미관계는 정전상태에 있으면서도 정치적 대화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북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대화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북조선을 정치적으로 무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정치협상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미국이 오래 전부터 북(조선)과 정치협상을 해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1988년부터 베이징에서 참사관급 접촉을 시작했고 차츰 수준을 높혀 오늘에 이른 것이지요. 이 문제에 관해서 설명이 요구됩니다.
1988년 이전까지는 북(조선)에서 미국에게 대화를 하자고 했어도 미국이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북(조선)이 처음으로 미국에게 조·미 직접대화를 제안했던 때는 1974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북(조선)은 미국에게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직접협상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북(조선)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88년에 이르러 미국은 비록 낮은 수준의 참사관급 접촉이지만 북(조선)과 직접 대화하는 통로를 열었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과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네, 그 문제는 역시 북조선의 핵개발 문제로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은 1988년 이전에는 북조선을 무시할 수 있었고, 무시해도 일없는 그런 상대였습니다.
미국이 북조선에 대해서 마음대로 반칙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무시하고 접촉하지 않아도 일없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미국은 북조선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북조선이 만일 핵무기를 가지면 문제는 달라지니까, 미국은 북조선을 이전처럼 완전히 무시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참사급 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회담은 1992년까지 서른 세번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탈냉전이라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조선반도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1990년부터 남북대화가 재개됐습니다. 조선반도에서 남북대화가 재개되고 있던 때에 부시 행정부는 만전쟁(걸프전을 뜻함)을 일으켰습니다. 1991년 2월 만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그 다음의 전쟁상대는 북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만전쟁을 해보니까 북조선하고는 전쟁을 하지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래서 부시 행정부는 1991년 5월 아시아주둔 미군의 감축계획을 발표했고, 6월에 가서는 워싱턴에서 조·미 고위급 접촉이 이루어졌고, 9월에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남조선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전술핵무기를 철수하겠다는 발언을 한 겁니다. 1992년도에는 팀 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을 중단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1년 9월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습니다. 1990년 10월부터 남북대화가 재개되면서 고위급 회담이 열렸습니다. 그 결과로 남북 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고, 조선반도의 비핵화 공동선언도 채택되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평양과 서울 사이의 협상이 너무 빨리 진척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남북 기본합의서를 실질적으로 이행하면, 그 다음 차례로 나서는 문제는 미군이 남조선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남북관계개선의 급진전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남북관계개선이 더 이상 진척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남조선은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있는데 중단되면 안된다, 우리는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하는 수 없이 남북관계개선의 속도를 앞질러 조선반도 정세변화의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두 가지 새로운 방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조·미 고위급 회담과 북조선에 대한 핵사찰이었습니다.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앞세워 북조선에 대한 핵사찰을 시작했습니다.
핵사찰이라고 했어도 그때까지는 부시 행정부가 북조선의 핵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삼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뉴욕에서 조·미 고위급 회담을 갖자고 했습니다. 그때 조지 부시는 서울을 방문한 기회를 이용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조·미 고위급 회담이 뉴욕에서 열리게 되었음을 자기가 직접 발표할 생각이었습니다.
부시는 1971년 리처드 닉슨이 키신저를 중국에 보내 미·중대화를 시작함으로써 전세계를 놀라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북조선과 대화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세계 언론에 발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사무처리가 잘못되어서 부시가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미 국무성의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부시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정대로 1992년 1월 22일 뉴욕에서 처음으로 조·미 고위급 회담이 열렸습니다.
그때 저는 조·미관계개선이 이대로 진전되면 가까운 장래에 조선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조지 부시의 지지도는 최고조에 달했으므로, 북조선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부시의 대북정책에 대해서 워싱턴의 강경보수세력이 감히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된 것이 참 잘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미 평화협정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딕 체이니가 국방성 장관이었는데, 미국은 북조선의 핵시설에 대한 사찰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딕 체이니는 상호사찰의 원칙에 입각하여 미국이 북조선의 핵시설을 사찰하는 대신 북조선이 주한미군기지들을 사찰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의 제안대로 주한미군기지를 북조선 사찰관이 사찰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조·미관계의 근본적 변화가 될 것이며 조·미 평화협정 체결의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기대는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조지 부시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북(조선) 인민군과 주한미군 사이의 상호사찰까지 실현될 수 있었는데, 그 가능성이 미국의 대통령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사라지고, 결국 핵위기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만일 공화당이 대선에서 이겨 재집권에 성공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조·미관계가 크게 발전되어 국교수립단계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서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만일 조·미 사이에 국교가 수립되면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주한미군에 대해 크게 변경된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는데, 미국이 북(조선)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내지 않고 그렇게 쉽게 주한미군문제를 처리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한미군철수란 한(조선)반도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이 약화되거나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워싱턴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미군을 남조선에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에 워싱턴 정가에서 새롭게 대두되었던 견해는, 아시아에 배치한 미 지상군은 미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에 자동적으로 말려들어가는 '인계철선(tripwire)'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군을 남조선에서 철수하더라도 그것이 곧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계속 남조선의 군사작전권을 가지고 있고,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시정권의 정책결정자들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한 영향력마저 포기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조선반도에서 북조선하고 계속 대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북조선과 대화하는 길을 택했던 겁니다. 그런데 조지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고 클린턴이 집권했습니다. 1992년 10월 경부터 워싱턴의 기류가 점점 이상하게 돌아 갔습니다.
서울에서는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래서 평양은 남북대화를 그만두었습니다. 남조선에서는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미국에서는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김영삼과 클린턴은 각각 1993년 2월에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대북정책에서 서로 뜻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 협상을 버리고 대결로 돌아섰습니다.
그것은 대북정책의 방향전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클린턴정권과 김영삼정권이 방향을 전환했던 원인과 배경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클린턴정권과 김영삼정권이 부시정권과 노태우정권과 다르게 갑자기 대북 대결정책으로 돌아섰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지 부시와 노태우는 전투를 직접 경험한 군출신이었습니다. 전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니까 조선반도에서 '유사시'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부시와 노태우는 미국이 제2차 조선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조선과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은 전투경험이 없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 가서 유학했던 사람입니다.
김영삼도 전투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영삼은 집권하기 이전까지 오랜 세월동안 야당정치인으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미국역사를 보면, 민주당정권이 공화당정권보다 더 위험합니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침략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클린턴이 집권하자, '아, 이거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클린턴과 김영삼은 전쟁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무모하게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클린턴은 집권하고나서 애쉬튼 카터를 시켜서 국제원자력기구 고위관계자를 워싱턴으로 불렀습니다. 그에게 국제원자력기구가 북조선에 대해서 강하게 나가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1993년 2월부터 국제원자력기구가 갑자기 북조선의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하기 시작하더니, 2월 25일에는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에서 북조선 특별사찰을 밀어부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강공정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클린턴정권과 김영삼정권은 소련이 무너졌으므로, 그때가 북조선을 압박하기에 절호의 기회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지구 위에 남아있는 사회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북조선을 그 기회에 아예 없애버리자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소련이 망하고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그것이 경제난을 촉발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형편에 있었던 북(조선)을 그때 강하게 압박하여 굴복시키려는 생각은 클린턴정권이나 부시정권이나 똑같이 가지고 있었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시정권이나 노태우정권도 북조선을 압박하자는 생각은 했겠지만, 대결정책으로 나가면 충돌위험이 높아진다는 측면을 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정권이나 김영삼정권은 무조건 압박을 가하면 자기들의 뜻대로 될 수 있다고 오판한 겁니다.
김영삼 씨는 야당 당수로 있을 때 김일성 주석과 만나겠다고 제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대통령이 되자, 조선반도의 최고 책임자, 통일 대통령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북조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강하게 밀어부쳐서 굴복시켜보자고 생각했습니다. 클린턴정권은 북조선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팀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것도 종전의 규모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군사적 위협을 가하려고 하였습니다. 조선반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위기 속에 밀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평양에서는 조선인민군 지휘관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일성 주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미국이 우리를 넘보고 덤벼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인민군 지휘관들은 "미국놈들과 전쟁을 하면 우리가 이깁니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인민군은 미국과 전쟁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자 김일성 주석은 "만전쟁에서 보았듯이 미국이 첨단무기를 동원하여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인민군 지휘관들은 "그래도 우리가 이깁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그렇게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만일 우리가 전쟁에서 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인민군 지휘관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회의장은 조용해졌습니다.
바로 그때 적막을 깨고 김정일 최고사령관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제가 답변드리겠습니다. 미국과 전쟁을 하면 우리가 이깁니다. 만일 우리가 지게 될 때면 지구도 깨져나갈 것입니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로 말하면, 그가 최고사령관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미국의 공격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타격수단을 실전에 배비하였다고 말하면서 미국과의 결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쟁시나리오를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한 군지휘관들은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김정일 최고사령관은 클린턴정권이 부시정권 때 중단했던 팀스피리트 군사훈련을 재개하기 하루 전날인 1993년 3월 8일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동원태세에 들어가도록 명령하였으며 3월 12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처럼 조선반도에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전쟁위기가 조성되자 미 국무성에서는 대북 압박정책에 대한 이견이 나왔습니다. 국무성 관리들 가운데 약 70%는 부시정권 때부터 일해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미 국방성 관리들도 대부분은 부시정권 때부터 일해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클린턴의 대북 압박정책이 제2차 조선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면서 그 정책을 반대했습니다. 미 국무성에서는 존 메릴이 반대했습니다. 로버트 매닝도 반대했습니다. 매닝은 미국이 북조선과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조지 부시가 선거에서 패배하자 관직에서 사퇴하였습니다. 이처럼 행정부 안에서 반대의견이 생기자 클린턴은 '5027 작전계획'을 다시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대북 압박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갔던 것인가요? 백악관이었습니까?
네, 백악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북 강경론자는 백악관 안보보좌관 새뮤얼 버거였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밖으로는 버거가 온건파로 알려져 있고, 국방부와 군부, 정보기관들이 강경파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이 대외정책을 수행해온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강경파는 원래 미 국무성입니다. 군부는 언제나 이길 수 있는 전쟁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미국 군부는 조선반도에서 계속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제2차 조선전쟁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무성은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국무성은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그저 군사적으로 밀어부치라는 지시만 내리게 됩니다.
걸프전이나 이번에 일어난 유고전쟁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는 데요. 이 전쟁은 미국 군부가 주도하여 시작한 것 아닙니까?
미 군부는 유고에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국무성이 적극적으로 나왔습니다. 가장 강경한 사람은 국무성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이 개입한 모든 전쟁을 일으킨 주도세력은 미국의 군부, 정보기관들, 군산복합체라는 강경파 세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한(조선)반도에서 대결과 긴장을 일으키는 강경한 정책은 바로 이 세력이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미국의 한(조선)반도 정책을 추진하는 세력을 강경파-온건파라는 단순 구도로 나눌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만전쟁에 참전해서 '사막의 작전'을 승리로 이끌고 나서 주한미군사령관이 된 사람이 게리 럭입니다. 게리 럭도 『워싱턴포스트』에 논평을 실으면서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미국이 북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하면 미국이 너무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고 하면서, '5027 작전계획'의 실행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5027 작전계획'은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과 국군이 북진하여 북(조선)을 점령하겠다고 하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작전계획과 미국 군부의 의도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데, 그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미국군대는 "시뮬레이션(simulation), 시뮬레이션" 하면서, 전쟁시나리오를 굉장히 좋아하는 군대입니다. '5027 작전계획'에서 '50'이라는 숫자는 태평양사령부를 뜻합니다. '2'라는 숫자는 조선반도를 뜻합니다. '7'이라는 숫자는 전쟁시나리오의 일련번호입니다.
그러니까 '5027 작전계획'은 태평양사령부의 주관 하에 실제로는 주한미군사령부가 집행하는 작전계획입니다. 그런데 이 작전계획은 원래 국가전략연구소가 세운 것입니다. 국가전략연구소 사람들이
부시 행정부 때부터 모의실험을 통해서 전쟁시나리오를 검토해 보니까 미국과 북조선이 전쟁을 하는 경우 결국에 이기는 쪽은 북조선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참, 희한한 일이지요?
그것은 직접 들으신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추정하시는 이야기입니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뉴스위크』,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같은 언론에 보도된 바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은 북조선과 전쟁을 해보았자 엄청난 피해만 입게 된다는 결론입니다. '5027 작전계획'에 관련하여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상세하게 나왔습니다. 극비로 취급되어야 할 전쟁계획의 내용이 왜 언론에 공개되었는가를 분석해보면, 클린턴이 그 작전계획을 검토해보고 이거 안되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 때문에, 더 이상 전쟁계획으로 활용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언론에 공개된 것 같습니다. 북조선과는 전쟁을 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당시)은 그러한 사정을 몰랐습니다. 남조선 언론들도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1994년 3월 하순에 남조선 언론도 '5027 작전계획'에 관하여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남조선 언론이 그 작전계획을 보도한 내용은 미국 언론이 보도한 내용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남조선 언론은 '5027 작전계획'을 보도하면서 주로 점령단계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본 언론도 마찬가지로 점령단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점령단계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게 중대한 차이입니다.
미국 언론들은 조선전쟁은 석 달 동안에 미군 전체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54만명을 동원해야 되고, 그리고 미군 사상자가 10만명이나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전쟁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간다는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남조선 언론은 점령단계를 자꾸 강조합니다. 같은 '5027 작전계획'인데, 바라보는 각도가 영 다릅니다. 미국 언론에서 전비와 전사자가 엄청나게 많다고 강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의사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나 남조선 언론과 일본 언론은 평양을 점령하겠다는 대목을 강조합니다.
거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겁니다. '5027 작전계획'의 내용을 보면, 그것은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 복제판입니다. 남포와 원산으로 상륙해서 평양을 점령하고 청천강까지 진격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50년 전에 써먹었던 작전계획의 복제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 원래 군사작전계획은 기밀에 속하는 것이어서 언론에 발표하는 게 아니지요. 언론에 공개할 수 없고, 또 공개해서도 안되는 군사기밀을 자꾸 공개한다는 것은 심리전을 벌이는 측면이 있지 않는가 생각되는데요.
심리전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발표했다는 겁니다. 미국 기자들은 국방대학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이 전해준 내용을 기사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조선 언론들은 국방대학 사람들이 아니라 남조선 국방부가 발표한 자료를 가지고 기사를 작성했던 것입니다. 미국 언론은 대북 강경책으로 나갔던 클린턴이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꾸어 평양과 협상하기로 결정하였는가 하는 원인을 파악하려고 정보를 찾다가 보니까, '5027 작전계획'에 관하여 알게 되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 언론은, 클린턴이 집권하자마자 북조선과 대결하다가 대화로 돌아서게 되었던 까닭은 '5027 작전계획'을 다시 검토해 보니까 조선전쟁을 벌이면 안되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미국 군부가 심리전을 벌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남조선은 남북대화에 나왔던 북조선 대표가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발언을 하자 그것을 문제로 삼았고, 그래서 남조선 국방부가 북조선의 '불바다 발언'을 맞받아치는 강력한 대응조치로 발표한 것이 '5027 작전계획'이었습니다. '5027 작전계획'을 공개하는 동기부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북조선은 그때 '5027 작전계획'이 공개되고 북침전쟁을 벌이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므로 긴장하였습니다. 북조선은 처음에 미국 언론에 '5027 작전계획'이 공개된 사연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몰랐습니까? 그러면 미국에 대한 정보가 어둡다는 겁니까?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겠지요. 어쨋든 '5027 작전계획'에 대해서는 미 군부가 다 반대했었습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도 언론에 나와서는 북조선에 대한 공갈과 협박을 하면서 쳐들어갈 것처럼 떠들었지만, 실제로 '5027 작전계획'을 재평가하는 데 참가해서는 반대했습니다.
전쟁반대라기 보다는 전쟁포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을 포기했습니다. 전쟁을 해보았자 엄청난 피해만 입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문제에 정통한 워싱턴의 전문가들은 이처럼 전쟁을 반대했고, 클린턴은 처음에 아무 것도 모르고 압박정책을 밀어부치다가, 나중에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김영삼정권은 이런 상황변동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김영삼정권은 클린턴정권과 달리 계속 대북 강경책을 밀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당시 남(한국) 언론에서는 대북정책에서 클린턴정권과 김영삼정권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된 내용이군요. 결국 클린턴정권은 김영삼정권 말기에 경원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분석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 국방성은 만일 제2차 조선전쟁이 일어나면 북조선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힐 수는 있지만, 만일 그렇게 하는 경우 미국도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북조선과 대화를 시작한 겁니다.
리온 시걸과 돈 오버도퍼의 책을 보면, 그 부분이 국방정보국과 중앙정보국이 클린턴의 북(조선) 선제공격계획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고, 미 군부가 클린턴에게 보고한 자체 보고서에는 너무 많은 전쟁비용과 전쟁피해가 나온다고 지적했기 때문에 결국 선제공격계획이 추진될 수 없었다는 내용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5027 작전계획'은 10년마다 한 차례 검토하게 되어있습니다. 부시정권 때인 1991년에 이 작전계획을 검토했으니까 2001년에 다시 검토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클린턴정권이 이 작전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였을 때, 미 군부가 반대했기 때문에 국무성과 의견마찰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5027 작전계획'을 재검토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작전계획을 검토하는 군부는 예전과 같은 사람들이었으므로 당연히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5027 작전계획'을 검토할 당시에 국방장관은 윌리엄 페리였는데, 그는 어떤 견해를 보였습니까?
페리는 그 검토사업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검토결과를 나중에 받아본 사람입니다. 당시 국방차관보는 애쉬튼 카터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국방정보국과 중앙정보국은 북조선은 얼마 가지 않아서 무너진다고 예상했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도 북조선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로버트 갈루치는 지금 미국이 북조선과 전쟁을 하지는 못하지만 북조선이 얼마 가지 않아서 무너진다면, 북조선과 협상을 벌여 잘 되지 않겠느냐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년쯤 협상을 하다가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합의문을 채택한 겁니다.
워싱턴의 다수파는 북조선이 얼마 가지 않아서 무너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런 기대감 속에서 워싱턴은 제네바 합의문에 도장을 찍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무성의 존 메릴은 북조선이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존 메릴 같이 북조선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소수파였습니다. 존 메릴은 조선반도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보고 있었고 그래서 북조선이 무너질 것이라는 기대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워싱턴의 일부 사람들로부터 한때 '친북적'이 아니냐 하는 의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북조선의 장래에 대한 전략적 인식과 관련하여 워싱턴의 견해가 이처럼 다수파와 소수파로 갈려져 있을 때, 저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Kim Jong Il's Strategic Goal (김정일의 전략목표)"이라는 논문이었는데, 노틸러스 연구소를 통하여 발표한 것입니다. '킴소프트(www.kimsoft.com)'에 지금 나와있는 논문은 다른 것입니다. 제 논문 「김정일의 전략목표」는 전략 및 국제문제연구소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에서 발간하는 『태평양 토론 (Pacific Forum)』에도 발표되었습니다. 제가 그 논문을 발표했던 때는 1995년 9월 초였습니다.
그 논문의 요점은 어떤 것인지 설명해주십시오.
저는 그 논문에서 김정일 총비서의 전략 목표는 조선의 통일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조선의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남조선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남조선의 민주화가 실현되려면 국가보안법을 없애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남조선의 민주화, 이 두 가지 조건이 선결되면 조선은 통일된다는 것이 김정일 총비서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그것이 바로 제네바 합의라는 것입니다. 제네바 합의를 그대로 이행한다면 2003년에 가서 미국은 북조선과 조·미 평화협정을 맺고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됩니다. 조·미 평화협정 체결과 국교수립이 실현되면, 국가보안법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논문에서 그러므로 김정일 총비서는 제네바 합의를 가지고 두 가지 과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은 시간을 질질 끌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국이 만일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게 되면 군사적 대결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군사적 대결은 오히려 북조선에게 유리한 것이다. 미국이 만일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고 조선반도에서 군사적 대결로 나아가면, 그것은 미국이 김정일의 지략에 넘어가는 꼴이다. 만일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고 조선전쟁이 일어나면 체르노빌형의 핵재앙과 참화로 남조선은 물론 일본도 파괴될 것이며 미국도 막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선택권을 이미 잃어버렸다. 미국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는 것 뿐이다." 이것이 제 논문의 주요 내용입니다. 미 국무성 관계자들도 이러한 내용의 제 논문을 읽고 놀랐다고 합니다.
미국이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서도, 한(조선)반도의 현존 대치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전략을 추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항구적인 대치전략을 추구하려 하지 않을까요?
국방정보국, 중앙정보국, 국무성, 국방성은 미국이 북조선과 전쟁을 할 수는 없지만 북조선은 조만간 무너질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들의 견해는, 경착륙(hard landing)은 북조선 난민들이 남조선으로 몰려오게 되어 대혼란이 일어나고, 남조선이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조선을 연착륙(soft landing)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북조선을 내부적으로 와해시켜보자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미 국무성에는 연착륙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워싱턴의 대세는 연착륙 추진이라는 전략으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미국은 북조선이 무너지게 되어 있으므로 10년 뒤의 일을 약속한 제네바 합의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은 일없다, 중유도 앞으로 한 두 해만 보내주면 그 뒤로는 보내주지 않아도 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케도(KEDO)의 신포 경수로 공사가 지연되어도 일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정일 총비서는 그러한 미국의 전략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미국의 제네바 합의문에 2003년이라는 이행시한을 적어넣었기 때문에 스스로 덫에 걸린 것으로 보았습니다. 북조선은 제네바 합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을 흔들 수 있는 지렛대를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그 지렛대란 전략 미사일과 핵무기를 뜻합니다. 제네바 합의는 어디까지나 북조선의 기존 핵개발 프로그램을 동결하자는 합의요 약속입니다.
기존의 핵개발 프로그램을 동결한다는 것도 영변 핵시설에만 한정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서 규정한 핵개발 동결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을 퍽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98년 후반기에 미국이 금창리 문제를 터뜨린 것을 보면, 미국이 동결 합의의 제한성을 파악하고 뒤늦게, 신경질적으로 문제를 들고나온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북조선은 미국이 2003년까지 제네바 합의에 규정된 합의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제네바 합의에 규정한 대로 중유를 보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신포 경수로 공사를 착공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미국은 북조선이 1993년 5월에 미사일 세 발을 시험발사한 것을 보면서 북조선의 미사일 능력이 어느 수준에 와있는지를 잘 알게 되었을 겁니다. 이제 북조선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선택은 그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로 되었습니다. 미국이 만일 2003년까지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못하면 그 합의는 자동적으로 파기될 것이고, 따라서 북조선은 그때부터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핵개발 프로그램을 재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2003년에 가서 북조선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재개하겠다고 위협하면 미국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김정일 총비서의 대미전략입니다.
북(조선)이 과연 핵무기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난해 후반에 금창리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설이 또다시 워싱턴 일각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지금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설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보수강경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보수강경파가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설을 말하는 이유는 북(조선)이 제네바 합의를 어기고 핵무기를 몰래 개발해서 핵무장을 했으므로, 이제 더 이상 북(조선)을 방치해서는 안되고 강한 압박을 가해서 굴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은 북(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핵무기 보유설을 흘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저들의 시각으로 보면, 북(조선)은 '깡패국가'인데, 그런 '깡패국가'가 핵무장을 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보수강경파가 말하고 있는 핵무기 보유설과 결론이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관점과 내용이 완전히 다릅니다. 갈루치가 제네바 합의문에 도장을 찍을 때, 워싱턴의 일각에서는 불만이 생겼습니다. 제네바 합의를 가지고서 어떻게 북조선의 핵개발을 막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갈루치의 대응논리는 이러했습니다. "제네바 합의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당신들이 요구하는대로 제네바 합의마저 포기한다면, 우리는 아마 북조선과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전쟁에서 우리가 과연 이길 수 있는가?" 이런 대응논리가 나오니까 공화당 사람들은 그렇다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제 추측이지만, 그러면서 갈루치는 북조선이 얼마 가지 않아서 무너질 것이므로 안심해도 좋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3년이 지나도 4년이 지나도 북조선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국무성, 국방성, 중앙정보국은 북조선 정세를 새롭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별 것 아닌 내용이지만, 저들이 새롭게 본 것은 북조선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김정일 정권은 더 강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방정보국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북조선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만을 계속한 것입니다. 국방정보국이 그렇게 한 데는 의도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 의도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워싱턴의 강경파가 대북정책, 조선정책을 주도해야 한다고 하는 의도입니다. 국무성, 국방성, 백악관은 북조선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이 오판하였음을 알았습니다. 북조선이 무너지기는커녕 미국에 대해서 당당하게 요구를 해오기 때문에 국무성, 국방성은 의회의 공화당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궁지에 빠지게 된 거지요. 그래서 국방정보국은 지난해 8월 중순 『뉴욕타임스』를 통해 금창리 문제를 들고나옴으로써 상황을 더 자극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이 이러한 대결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해서 북조선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미국이 강경하게 나오면 북조선에게 오히려 유리하게 됩니다. 북조선에 대한 압박은 결국 역효과를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미국이 강경하게 압박공세를 펼쳐서 조선반도에 긴장감이 돌게 되면 북조선은 미국과 협상하기가 그만큼 더 쉬워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 공화당은 외교권이 없습니다. 북조선과의 교섭은 행정부가 맡아 해야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강경파가 압박공세를 펼치고 북조선이 이에 대해서 강경하게 맞서게 되면, 미 행정부의 선택권은 양쪽에서 압력을 받는 만큼 좁아지게 되며, 워싱턴의 내부갈등은 표면화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강경파의 압박공세만을 보면 조선반도에 해가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북조선은 그 압박공세를 이용하여 역공을 펼 수 있게 되므로 오히려 유리한 측면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농담 섞인 말이 되겠습니다만, 혹시 미국의 강경파가 김정일 총비서에게서 비밀공작임무를 받아가지고 북조선을 도와주기 위해서 압박공세를 펼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웃음)
그래서 일부 철없는 논자들은 이른바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한국)의 강경보수파와 북(조선)이 서로 짜고서 한(조선)반도에서 계속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궤변이지요.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있다는 해괴한 논법입니다. 이러한 궤변은 남(한국)의 일각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은 정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대관계는 공생할 수 없고 다만 대치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공생할 수 있는 관계는 적대관계가 될 수 없지요. 정세를 정확하게 읽지 못하면, 대치상태가 마치 공생관계인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적대관계에서 힘과 지략이 뛰어난 쪽이 상대방의 내부갈등을 이용하여 공격을 펼치고 상대방을 자중지란에 빠뜨려 결국 제압했던 통쾌한 승전경험은 세계 전쟁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북조선은 대미관계에서 이런 전술을 펼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클린턴 정권이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북(조선)을 대화, 협상을 통하여 개방과 변화로 유도하자고 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개방유도전략, 또는 변화관리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워싱턴에서 '연착륙'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태평양 건너 남조선에 들어가서는 '태양정책(일본에서는 '햇볕정책'을 이렇게 부른다-옮긴이)'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은 '포용정책'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이름만 자꾸 바꿔 부른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또 이름만 자꾸 바꿔부른다고 해서 불가능하던 일이 가능해진다고 착각한다면, 그런 착각에서는 일찌감치 벗어나는 게 좋습니다. 북조선은 자주적인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식 개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라진-선봉지역을 보십시오. 금강산 관광을 보십시오. 개방하고 있지 않습니까. 북조선은 미국의 개방요구를 받아들여 라진, 선봉을 개방했고, 남조선의 개방요구를 받아들여 금강산을 개방했습니다. 그리고 개방지역에 "누구든지 들어오시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 일본, 남조선에게 개방지역에 들어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개방해도 선뜻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제사회에서는 거꾸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이 폐쇄국가이기 때문에 들어갈래야 갈 수 없다는 거지요. 미국은 말하기를, 북조선은 자기들이 자본주의 세계에 개방하면 사회주의 체제가 위태롭게 되고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문을 걸어 잠그고 개방전략, 포용정책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는 겁니다. 미국이 북(조선)의 개방지역에 들어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주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미국은 북조선에 대한 경제제재 조치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이 안에서 폐쇄의 빗장을 걸어놓은 게 아니라 미국이 북조선 밖에서 봉쇄의 빗장을 걸어놓은 것이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서, 미국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북조선을 개방하고 싶어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북조선의 개방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아서 외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미국의 자본이 북조선의 개방지역에 들어가 사업을 하다가 손해를 볼까 해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국은 북조선의 개방정책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는 겁니다. 자신 있으면 언제든지 라진·선봉지역에 들어가면 됩니다. 미국은 북조선의 개방지역에 투자를 많이 해서 달러가 들어가면 북조선 경제회복에 힘을 실어주어 결과적으로 북조선에게 유리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해서 문을 열어놓아도 들어가지 못하고 경제제재 조치만 붇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대담 내용을 종합한다면, 첫째로, 미국은 북(조선)과 전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을 하려는 의사는 있었으나 실제로는 할 수 없으므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미국은 변화유도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것도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남아있는 선택의 여지는 두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의 대치상태를 무한정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협상을 통하여 조·미 평화공존과 외교관계 수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로, 다시 말해서 조·미 평화공존과 외교관계 수립으로 나갈 것으로 전망하시면서, 그러한 전망의 근거를 제네바 합의에서 찾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거의 모든 전문가들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의 가능성만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미국은 한(조선)반도에 분단선을 그어놓은 장본인이며, 교전 당사자이며, 종전 이후 지금까지 대결과 긴장을 유지해온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것이지요. 미국은 한(조선)반도에서 차마 전쟁을 벌이지는 못하고 개방전략도 힘을 쓰지 못하게 된 상황에 놓여있으므로, 지금의 첨예한 대치적 정전상태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하려 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이지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미국이 조선반도에서 불안정한 정전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게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이 유지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유는, 미국이 만일 북조선과 정치협상을 하지 않고 제네바 합의를 파기한다면, 북조선은 자유롭게 됩니다. 말하자면, 밀림 속으로 호랑이를 풀어보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북조선이 만일 제네바 합의에서 벗어나면 수소폭탄을 만드는 것도 자유입니다. 북조선은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북조선은 만일 미국이 선제공격을 해온다면, 워싱턴과 뉴욕을 향해서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날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는 북조선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 나라입니다. 미국, 러시아, 영국, 중국, 그 다음입니다. 프랑스도 능력은 있는데 실제로는 가지지 않고 있으므로, 북조선이 다섯 번째 나라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있지만, 미국과 전쟁할 의사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북조선은 미국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미국이 만일 선제 핵공격을 해온다면 미국 본토를 향해 핵탄두가 장착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날릴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지금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인정하면 미국의 입장이 매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북(조선)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인정할래야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만일 지금 인정하면 큰 일이 납니다. 판이 깨져버립니다. 미국 정치권이 대혼란에 빠져 버립니다. 만약 미 국방성 대변인 베이컨이 기자들 앞에서 북조선은 워싱턴을 타격할 수 있는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어떻게 되겠는가? 미국 정치권은 지금까지 국방정보국, 중앙정보국은 도대체 뭐하고 있었던가 하고 공격을 퍼붓게 되고, 정보기관 책임자들은 모두 목이 잘립니다. 그러면 국가방위미사일(NMD)체계와 전역방위미사일(TMD)체계를 개발할 필요가 없게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돼버립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2003년 이후에는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까?
네, 제 생각에는 2003년 이후에 가면 인정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조·미관계가 평화공존으로 들어서고, 조·미 외교관계가 정상화된 뒤에는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조선의 핵무기 보유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 자기들을 겨냥하여 핵무장을 한 북조선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군은 전쟁에서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군대입니다. 미국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이 격화되면 주한미군 3만7천명의 목숨이 위태로와진다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었던 사건을 하나 말씀드리지요. 1994년 12월 17일에 주한미군의 헬리콥터가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가 조선인민군에게 격추당했습니다. 그 헬리콥터가 단 한 방에 추락하면서 미군 한 사람은 죽고 다른 한 사람은 생포되었다가 나중에 정치협상으로 풀려났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알려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두 달 전에 또 한 대의 주한미군 헬리콥터가 조선인민군의 총격을 받았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국방정보국 국장 크랙터가 주한미군의 헬리콥터를 타고 비무장지대를 시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종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그가 탄 헬리콥터가 비무장지대로 들어가 군사분계선쪽 가까이 접근하였습니다. 그러자 주한미군인지 국군인지는 모르지만, 남측에 있던 군인들은 그 헬리콥터가 북으로 망명하는 줄 알고 총격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한 발도 맞지 않았습니다. 인민군 군인들은 그 헬리콥터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침입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총격을 가했습니다. 인민군의 총탄은 그 헬리콥터를 맞추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엔진과 연료 탱크에 맞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격추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돌아갔습니다. 미국의 국방정보국장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워싱턴에 돌아가서 하는 말이, 북조선과 전쟁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헬리콥터 피격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은 비무장지대 부근에 미군 헬리콥터가 날아다니지 못하도록 일시적인 조치를 내렸습니다. 미국은 우발적인 충돌로 미국이 북조선과 전쟁을 하게 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전협정은 이미 1991년부터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조선반도에서 전쟁위기를 방지할 아무런 장치도 없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발적인 충돌 때문에 전면전이 터질 수 있지 않습니까?
우발적인 충돌이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것을 미국이 염려하였다는 것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미국은 조선반도에서 우발적인 충돌이 전쟁으로 터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1997년 9월 18일 새벽에 강릉 앞바다에서 잠수함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북조선은 그 잠수함이 통상훈련을 하다가 기관고장으로 표류하여 강릉 앞바다에 좌초되었다고 인정하면서 잠수함을 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정권은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잠수함에 탔던 요원들을 모두 사살했습니다. 그러자 북조선은 백배 천배로 복수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조선반도에는 살벌한 긴장감이 감돌게 되었습니다. 그때 미국은 이러다가는 전쟁이 터지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여 두려워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정찰위성은 북(조선)의 잠수함이 남(한국) 해역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김영삼정권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의도적이었던가요?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요. 그때 미 태평양사령부는 잠수함사건에 대해서 발표했습니다. 그 발표에 의하면, 얼마전에 원산에서 두 척의 잠수함이 출항했는데, 한 척은 돌아갔고 다른 한 척은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발표내용은 북조선 잠수함의 항해는 통상훈련이었다는 암시를 주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사령부의 발표에 따르면, 돌아가지 않은 그 잠수함을 찾기 위해 북조선 항공기들이 동해에서 수색작전을 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미 태평양사령부가 북조선 잠수함의 움직임과 수색작전을 포착하고 있는 가운데 그런 발표를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발표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잠수함이 특수임무를 띠고 항해했던 게 아니라, 통상적인 훈련을 하다가 고장이 나서 표류했던 것임을 암시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측면에서 보면, 태평양사령부는 북조선을 도와주고 있는 겁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요? 그 까닭은 미국은 북조선이 백배 천배로 복수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반도에서 자기들이 바라지 않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잠수함사건으로 일어난 남북 사이의 긴장이 전쟁으로 번져가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미국은 남조선 당국이 정치적 위기의 출로를 찾으려고 고의적인 무력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의문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남(한국)의 정권이나 군부는, 만일 전쟁을 일으키면 남(한국)도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신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겠습니까?
평상시에는 남조선이 군사작전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사시라도 남조선은 수도경비사령부라든가 몇 군데의 병력에 대한 작전권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남조선 당국은 미국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경향도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승만정권은 미국이 정전협정을 맺으려 하자 이를 반대하면서, 미국의 말을 듣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거제도 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박정희정권도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면서, 미국의 말을 듣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김영삼정권도 비슷한 행동을 했습니다. 소련이 무너짐으로써 북조선의 후방이 없어지고, 중국도 북조선을 도와주지 않고 있는데다가 경제난에 빠져 있는 북조선이 매우 약해졌다고 판단한 거지요. 그래서 미국의 도움이 없어도 대북강경책으로 밀고나갈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지요.
당시 남(한국)의 국방장관이 국회에서 말하기를, 만약 북(조선)이 공격해오면 '통일전쟁'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 선생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분위속에서 나온 건가요?
그러니까 북조선의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남조선 당국이 정세를 오판하고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조선은 처음부터 남조선 당국과 상대하지 않고 있는데, 남조선 당국은 북조선을 강경책으로 압박해보겠다고 오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북조선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군사창구인 군사정전위원회마저 마비되고, 남북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되면 정전상태를 유지하기가 곤란해질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1991년 3월에는 남조선의 황원탁 소장을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내세웠고, 북조선은 그러한 조치를 문제로 지적하면서 군사정전위원회를 마비시켰지만, 결국 미국은 북조선과 다시 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커트 캠벨은 1997년에 남조선 국방부에 편지를 보내어, 미국은 북조선과 긴장이 격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으므로 북조선과 군사대화창구를 다시 열어야겠다고 했습니다.
북(조선)에 관련해서는 왜곡된 정보라든가, 정세인식에 대한 무지, 또는 편향된 시각으로 인해 판단착오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입니다. 남(한국)의 일부 전문가들 가운데는 북(조선)의 경제력이 약화되는 바람에 군사력도 따라서 약화되었고, 남(한국)은 경제력 성장을 기반으로 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리영희 교수 같은 사람은 전쟁수행력이라는 개념을 쓰면서 북(조선) 역량의 총체적 부실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북 사이에서 북(조선)이 불리해진 군사력 불균형 상태를 주장하는 논법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역사를 살펴보면, 경제력이 약한 나라라고 할지라도 큰 나라와 벌인 전쟁에서 이긴 사례가 많습니다. 물론 경제력이 강해야 전쟁수행력도 강하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이지만, 경제력이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겁니다. 프러시아나 명치유신 시기의 일본은 경제력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지만,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조선전쟁, 베트남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 알제리해방전쟁을 보면 경제력이 미약한 나라가 경제대국들과 맞서 전쟁을 한 것입니다. 전쟁에서는 부국이 빈국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경제력 우위가 곧 승전요인이라고 하는 주장은 역사를 모르는 소리입니다.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것은 무기도 없고, 후방도 없고, 경제력도 없는 조건에서 하는 전쟁입니다. 북조선은 미국에 대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폭정신과 승전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 1백만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자폭정신과 승전사상은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으로부터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전쟁에서 한 목숨 바치겠다는 전투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조선의 경제력이 약해졌다 해서 군사력도 약해졌다고는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본주의 나라의 군대는 부당한 전쟁의 목적을 위하여 동원된 군대이며 정신력을 상실한 군대이므로 경제력이 약해지면 금방 군사력도 약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혁명군대는 어떠한 난관과 시련 속에서도 혁명승리를 위하여 전투할 수 있는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조선인민군은 나라의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1년 이상 전쟁을 할 수 있는 무기, 탄약, 석유, 식량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중국의 한 군사전문가가 죽음을 각오한 군대에게 패배는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은 오늘도 통하는 진실입니다. 반면에 미군은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조선이 이길 수 있다는 겁니다.
북(조선)이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국의 첨단무기를 상대하여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지금 일반적인 판단은 북(조선)의 무기체계가 낡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첨단 무기체계를 가진 미국을 상대해서는 도저히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북(조선)은 미국과 화해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착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쟁사의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현대전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공군력이 전쟁에서 차지하는 몫이 매우 커졌다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공군력은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쟁사의 역사적 교훈입니다. 군사전문가들은 이러한 교훈을 알고 있습니다. 공군력은 중요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현대전에서 가장 우세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 미국은 공군력과 해군력이 월등히 우세하다고 보는 거 아닙니까? 미국은 공군력과 해군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니까 세계를 제패하겠다고 하는 군사적 야망을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조선전쟁도, 베트남전쟁도, 그리고 이번에 유고전쟁도 다 명백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제 밤에 나토 최고 사령관 클라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 공군기들과 함선들이 첨단 미사일을 동원하여 한달 이상 유고를 공격했지만 미군은 코소보의 세르비아군을 무력화시키는데서는 실패했다, 세르비아군은 아직도 강력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공군력과 해군력을 가지고서는 상대를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오늘날까지의 교훈은 공중전에서 최신무기가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최신무기는 일부만 있으면 족하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수적 우세입니다. 미그(MIG)-21이 에프(F)-15, 또는 에프(F)-16하고 1 대 1로 대결하면, 아마 미그(MIG)-21이 패할 겁니다. 그런데 2대 2가 되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미그(MIG)-21 두 대와, 에프(F)-15, 또는 에프(F)-16이 두 대가 공중전을 벌이면 미그(MIG) 21이 패하지 않고, 오히려 거꾸로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에프(F)-22가 나왔는데, 그 속도를 보면 20년 전에 나온 팬텀(Phantom)하고 같습니다. 팬텀과 에프(F)-15, 에프(F)-16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기본은 다 같고 달려있는 장치만 다른 겁니다. 전자장비만 다른 겁니다. 예컨대 올해 나온 최신형 자동차와 20년 전에 나온 자동차를 비교해보면 기본성능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다만 첨단전자장비가 몇 가지 더 달려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민전쟁의 관점에서 보면, 혁명군대는 제국주의 침략군보다 한 세대 낡은 무기를 가지고서도 상대를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조선전쟁에서 왜 미국이 이기지 못했습니까? 그때 북조선이나 중국이 항공모함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비(B)-29가 한 대 있었습니까? 잠수함이 한 척 있었습니까? 미국은 그 모든 첨단무기를 동원해서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조선전쟁 때 언제나 폭격을 받은 쪽은 북조선이었습니다. 북조선은 미국 본토를 향해서 총 한 방 쏠 수 없는 전력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베트남전쟁은 또 어떠했습니까? 미국에게는 비(B)-52 전폭기가 있었습니다. 항공모함이 있었습니다. 핵동력 잠수함도 있었습니다. 북베트남은 워싱턴을 공격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폭격을 당한 건 하노이였습니다. 제공권은 미국이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미국은 이기지 못했습니다. 미국이 항공기와 항공모함이 모자라서 이기지 못한 게 아닙니다. 유고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전쟁의 교훈도 똑같습니다. 서구의 전쟁관은 언제나 무기체계와 무기성능을 앞세웁니다. 그에 비해, 북조선의 전쟁관은 언제나 인민의 조직력과 정신력을 앞세웁니다. 조직적으로 단결된 인민들이 싸운다면, 한 세대 낡은 무기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이 북조선의 전쟁관이며, 민족해방전쟁사의 역사적 교훈입니다. 게다가 자연지리적 조건도 전쟁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북조선 산악지대는 매우 험준합니다. 안개가 끼고, 구름이 덮고 있는 날이 많으므로 미국의 첨단무기 성능을 크게 떨어뜨립니다. 유고슬라비아도 조선의 지형과 비슷합니다.
북조선은 미국을 상대로 군비경쟁을 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북조선이 어떻게 첨단전자장비를 장착한 인공위성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군비경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과의 군비경쟁은 생각도 하지 않거니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북조선은 미국하고 경쟁해서 항공모함이나 이지스함을 보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엄청나게 값비싼 항공모함이나 이지스함을 상대적으로 값싼 미사일로 격침하자는 전법입니다. 미사일 한 기를 만드는 것이 항공기 한 대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가격이 쌉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건 간에 군사과학기술이 어느 정도 발달하게 되면 미사일을 개발하여 항공모함, 이지스함을 격침할 수 있는 공격력을 가지게 됩니다. 작은 나라도 큰 나라에 능히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민군은 '무적 함대'라고 하는 제7함대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미 국방부와 군부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북조선과 전쟁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언젠가 미국의 기자 한 사람이 저에게 말하기를, "미국 군대는 전문적(professional)입니다. 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논문에서 만일 북(조선)과 미국의 전쟁이 일어나면 핵미사일의 교전이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해서 설명해주십시오.
네, 북조선과 전쟁을 하면 결국 미국도 죽는다는 겁니다. 미국이 망하면 이 지구도 혼란에 빠져 망하게 됩니다. 북조선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미국 본토에 쳐들어가서 강점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북조선에 쳐들어가서 평양을 점령해야 합니다. 북조선은 워싱턴을 점령하고 공화국 깃발을 휘날릴 생각이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북조선에게 요구되는 것은 미국의 워싱턴을 공격할 수 있는 전략 미사일 능력만 가지면 되는 겁니다. 북조선이 핵탄두를 장착한 전략 미사일로 워싱턴, 뉴욕, 시카고를 공격하면 미국은 항복하고 맙니다. 다른 도시를 공격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미국은 핵미사일 방어력이 전혀 없습니다. 미국의 대도시들은 핵미사일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들 도시가 위치한 지형은 평야지대이므로 핵무기의 파괴력은 최고도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북조선의 도시들은 오래 전부터 미국의 핵공격에 대비하여 견고한 지하방어시설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대로, 미국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수백 기나 가지고 있고, 북조선이 보유하고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몇 기 되지 않습니다. 만일 북조선이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국의 핵미사일이 북조선 전역을 초토화시킬 겁니다. 그렇지만 북조선도 핵미사일을 발사하여 미국의 다리 한 쪽과 팔 한 쪽을 끊어놓을 겁니다. 그 전쟁에서 북조선이 죽겠지만 미국도 얼마 뒤에 죽게 됩니다.
이제 대담은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 문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논문에서는 북(조선)의 미사일 개발사업을 김정일 총비서가 이끌어온 것으로 지적하였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미국과 맞서싸우려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능력을 갖추어야 미국이 북조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고, 미국을 협상자리에 끌어낼 수 있게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지난 조선전쟁 시기에는 일본의 공군기지에 있는 비(B)-29가 날아가서 평양을 폭격했지만, 이제는 북조선도 워성턴, 뉴욕, 시카고를 파괴하는 공격수단을 보유하여 보복능력을 갖자는 겁니다. 김정일 총비서는 1973년에 후계자의 지위에 추대되자 새로운 대미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미국과 협상을 하는 협상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동시에 미국과 전쟁을 하여 이길 수 있는 전략 미사일 부대를 창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으로부터 미사일 개발기술을 지원받으려고 했는데 소련이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사일 개발도 다른 나라를 넘겨다보지 말고 자체의 힘으로 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집트가 제4차 중동전에서 북조선이 도와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소련제 미사일을 북조선에 넘겨주었습니다. 북조선은 그 미사일을 분해하고, 역설계하는 방식으로 자체의 미사일을 개발했습니다. 자력으로 미사일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때가 1984년이었습니다. 개발기간이 10년가량 걸린 셈이지요. 그러한 자체 기술력을 토대로 해서 미사일 개발 수준을 계속 끌어올려, 1989년에 이르러서는 다단계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북(조선)이 다단계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때가 1989년이었던가요? 우리는 1998년 8월에 발사했던 '광명성 1호'의 발사체가 북(조선) 최초의 다단계 추진체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다릅니다. 북조선이 다단계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던 때는 1989년이었고, 다단계 미사일을 발사하여 미국을 공갈했던 때는 1993년 5월 29일이었습니다.
북(조선)이 1993년 5월에 발사했던 것은, 미국이 이름을 붙여준대로 하면 '노동 1호'였습니다. 그런데 '노동 1호'는 다단계 미사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단계 미사일입니다. 북조선은 1993년 5월 29일에 1단계 미사일과 3단계 미사일, 두 종류의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그때 일본의 노도반도 앞바다에 떨어진 미사일은 1단계 미사일이었습니다. 미국은 그것을 '노동 1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북조선은 하와이 앞바다까지 날아간 3단계 미사일도 발사했습니다.
선생님은 노틸러스 연구소의 평화정책토론회에 발표하신 논문에서 북(조선)은 1993년 5월에 다단계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지적하신 바있습니다. 그런데 노틸러스 연구소에서는 그 대목에서 묶음표를 친 편집자 주를 달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고 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의 주장 이외에는 1993년 5월의 3단계 미사일 발사사실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자료가 있습니까?
북조선이 1993년 5월 29일에 3단계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사실은 제가 처음 밝힌 것입니다. 1998년 10월 남조선 일간지에 주한미군사령부의 발표가 인용되어 보도되었는데, 그 내용은 1993년 5월에 북조선이 발사한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갔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미사일이 어디에 떨어졌는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북조선 미사일의 탄착지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북조선의 미사일이 하와이 앞바다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차마 밝히지 못하는 겁니다. 그저 일본열도를 넘어갔다는 사실만 언급한 겁니다. 그런데 미사일은 인공위성과 달라서 발사한 뒤에는 어디엔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북조선의 미사일이 일본의 노도반도 앞바다에 떨어졌다는 사실은 1993년 6월 『마이니치 신문』에 발표됐습니다. 그때 미국은 또 다른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서 날아갔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추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993년 5월로 말하면, 미국이 북조선에 대해서 핵문제를 가지고 압박하고 있었던 위기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은 사실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북조선 미사일의 탄착지가 노도반도 앞바다라는 사실만을 밝히고서, 그 정도의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습니다. 만일 그때 미국이 북조선의 3단계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모두 밝혀버렸다면 미국은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을 겁니다. 북조선 무수단 발사장에서 노도반도 앞바다까지는 5백km이므로, 그 정도의 미사일 능력이라면 미국이 북조선과 협상해서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아사히 신문』 논설위원 후나바시라는 사람이 올해 1월에 그 신문에 실은 기사를 보면, 주일 미국대사 폴리가 일본 총리 하시모토에게 1993년 5월 북조선이 시험발사한 미사일은 일본 열도를 넘어갔다는 사실을 통보했다는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 나온 일본 텔레비전 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미 국방성 차관 커트 캠벨이 1993년 5월 북조선이 시험발사한 미사일이 일본 열도를 넘어가서 태평양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일본 자위대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태평양에 떨어졌다고만 말했지, 구체적으로 하와이 앞바다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제가 책에서 밝혀놓은 것을 읽고서 어떤 일본 전문가가 타이 방콕에서 도쿄에 있는 저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그는 제가 쓴 책을 읽어 보았다고 하면서, 1993년 5월 29일에 북조선이 하와이 앞바다에까지 날아간 3단계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것이 사실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이라고 답변해주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러시아사람 군사전문가에게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하려고 모스크바에 갔습니다. 그는 일본에 있는 김명철이라는 사람이 북조선의 미사일에 관해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인가고 물었습니다. 그 러시아의 군사전문가는 그건 사실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989년에 북(조선)이 다단계 미사일을 개발했다는 것은 또 어떻게 된 것입니까?
1989년에 다단계 미사일을 개발했다는 것은 북조선의 발표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단계 미사일을 개발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1993년 5월에 가서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는 겁니다. 그때 만약 시험발사에서 실패했으면 아마 미국이 북조선을 깔보고 전쟁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북조선은 1992년에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맞지 않아 연기하고, 작년 8월 31일에 발사하여 성공한 겁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북조선의 미사일 능력이 이만저만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은 북조선과 협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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