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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교안 120주년 기념 심포지엄
축사
“신축교안,기억과 화합”
조한건 신부 I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신축년 소띠의 해에 “신축교안,기억과 화합”이라는 주제로 과거를 성찰하고 기억하며 서로 화합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조선 학자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신앙 실천으로 시작된 매우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평신도의 자발적인 신앙실천공동체로 출발한 역사는 세계천주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랑거리임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이곳 제주도 조천 함덕 사람 김기량은 풍랑을 맞아 난파된 후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돌아와 복음을 본격적으로 전하였습니다. 이 역시도 얼마나 특별한 역사인지요!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교회는 초기 100여 년 이상의 긴 박해를 견디며 성장했습니다. 조선의 개항이 강대국의 강압에 의해 시작되었듯이,천주교 신앙의 자유도 선교사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부분적 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회의 개항기 역사를 교우(敎友)와 일반 백성 간의 갈등으로 인해 ‘천주교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고 하여,“교안(敎案)의 시기”라고도 부릅니다. 개항기 이후 외국과 조약이 맺어짐에 따라 서양 오랑캐라고 불리던 선교사들이 양대인(洋大人)이라 불리며 위세가 높아지자,그 양대인에게 기대어 이익을 얻고자 하는 신자들도 생겨났습니다. 조선 정부와 관리들은 국가가 처한 위기보다 자신들의 권세와 안위를 우선시하였고,지방의 세금으로 국가 재정을 메꾸려고 했습니다. 한반도 곳곳에서 천주교 교우들과 일반 백성들과의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어지기 마련입니다. 선교사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교우들 편이 되어주었고, 신앙을 갖지 않은 백성들은 차별을 느끼는 가운데 더욱더 세금 압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과거 신축교안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신축교안 120주년 심포지엄에서는 과거의 성찰을 통해서 어느 한 편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과거의 사실을 반성하고 직시하면서 그 아픔의 역사를 보듬어 안고 그 기억을 치유하며 새롭게 하나 되는 길을 찾았으면 합니다. 아니 벌써 이곳 제주에서는 2003년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문” 속에서 과거 서로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였으며, 지금은 상생과 화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2014년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복자를 포함한 124위 시복을 위해 방한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회의 지도자인 목자들은 양 떼를 지키는 이로서,‘기억의 지킴이’,‘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렇게 과거의 공로와 과오를 기억하며,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다시금 새로운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지킴이’가 되기를 청해 봅니다. 소가 느릿느릿 걸어도 마침내 밭과 논이 갈리고, 추수철에 곡물이 열매 맺듯이 이번 신축년은 새 희망을 위해 천천히 밭을 가는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제1 주제
천주교회의 신축교안 인식 형성과 변화
양인성 I 한국교회 사연구소 책임연구원
1. 머리말
2. 뮈텔 주교의 신축교안 인식
3. 천주교회의 신축교안 인식 변화
4. 신축교안 인식을 둘러싼 충돌과 대화
5. 맺음말
1. 머리말
1901년 5월 제주도에서 천주교 신자들과 민군(民軍)이 충돌하였다. 5월 28일 제주
성에 입성한 민군은 천주교 신자들을 대거 살해하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선교사와 신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프랑스 군함이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한국 정부도 정부군을 급파하여 민군 주모자들을 서울로 압송하였고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한국 정부는 피살자 배상 및 묘지 선정 등의 사후 처리 방안을 두고 프랑스 공사관과 협상하여 1903년 11월에 타결하였다.
이 사건은 ‘신축교안(辛표敎案)’,‘제주교난(濟州敎難)’,‘제주교란(濟州敎亂)’,‘제주민란(濟州民亂), ‘이재수(李在守)의 난’ 등이라 불린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의 성격은 복합적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신축교안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천주교회나 교회사 연구자들은 천주교 박해라고 규정하고 신자들의 희생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봉세관(操稅官)의 세폐(稅弊)와 천주교 신자들의 작폐가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 현재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역사학계의 연구는 여러 갈래로 나뉜다. 민중사의 관점에서 반 봉건. 반 제국주의 운동으로 평가하는 연구가 있다. 천주교와 토착문화의 갈등을 대표하는 사례로 신축교안을 주목하기도 한다.
교회나 민군의 입장이 아닌,프랑스나 김윤식의 신축교안 인식을 분석한 연구가 있다. 심포지엄 자료집도 있고, 교안 전후의 제주 사회와 천주교회를 문화사적 시각에서 검토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연구 성과로 신축교안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규명되어야 할 문제가 여전히 있다고 본다. 천주교회가 신축교안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물론, 천주교회의 신축교안 인식이나 기억을 다룬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료 분석이 충분하지 않거나 그 내용이 간략하여 이해하는데에 어려움이 있다. 100년 동안 천주교회의 신축교안 인식은 변화하였는데 기존 연구에서는 이러한 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천주교회의 신축교안 인식은 과거만이 아닌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축교안 120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서 천주교회의 신축교안 인식 형성과 변화 과정을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이 글에서는 신축교안 당시 천주교회의 문서, 프랑스 외무부 문서, 신
문 등을 분석하였다. 인식의 변화를 규명하기 위해 천주교회의 신문, 잡지 등의 간행물과 함께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의 논문도 참고하였다.
이 글에서는 먼저 신축교안 당시 천주교회의 교안 인식을 검토하려 한다. 조선 대
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의 인식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가 작성한 신축교안 관련 문서가 천주교회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천주교회의 신축교안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추적하려 한다. 천주교회의 인식이 제주 사회의 그것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로 인한 양측 간의 관계, 즉 대립과 대화를 검토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선 2003년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 선언문’ 발표까지만 다루기로 한다. ‘미래 선언’ 이후의 일은 현재 진행형이어서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없어서이다.
2. 뮈텔 주교의 신축교안 인식
1901 년 5월 13 일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제주도와 관련된 2통의 전보를 받았
다. 하나는 부산 본당의 로(IL. Rault) 신부가 보낸 것으로 제주도에서 “민란” 이 발생하여 신부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소식이었다. 다른 하나는 목포에서 온 것으로 대정 군수가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고 폭동을 일으키려 하니 보호해 달라는 내용이 었다. 뮈텔 주교는 주한 프랑스 공사 플링시(Collin de Plancy, 葛林德)에게 이소식을 알렸고, 플랑시는 한국 정부에 민란 진압과 선교사 보호를 요구하였다.
뮈텔주교는 5월 26일에 라크루와 무세 신부의 서한,제주도 신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사건 정황에 관한문서를작성하여 플랑시에게 보냈다. 뮈텔 주교는 제주 지방관들이 징세로 얻던 이득을 봉세관(강봉헌)이 거둬가자 이에 불만을 품고 민란을 유발한 것으로 여겼다. 지방관들이 상무사를 이용하여 민란을 조장하였다고 했다. 반면,지방관들과 갈등을 빚은 봉세관을 “공정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높게 평가하였다.
이미 보았듯이 봉세관의 과도한 징세가 민란의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뮈텔 주교의 문서에는 봉세관의 남세(激稅)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문제의 원인은 봉세관이 아니라 제주 지방관들의 부패였다.
뮈텔 주교는 관폐가 원인이었음에도 민란의 여파가 천주교회에 미친 이유를 봉세관이 몇몇 신자들에게 세금을 받을 농지를 주었기 때문이라 판단하였다.
그는 신부와 신자들의 작폐를 언급하지 않았는데,라크루 신부의 보고에 교폐와 관련된 내 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뮈텔 주교도 신부. 신자들과 비신자들과의 반목이 있었음은 알고 있었다. 그는 김원영 신부와 신자들이 연루된 오신락 사건을 거론하였다. 오신락 죽음의 직접적인 책임이 없더라도 김원영 신부가 법사(法司)를 대신하여 오신락 등을 사착(私提)한 것은 분명히 폐단이었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신부와 신자들의 책임을 지적하지 않고 비신자와 지방관이 교회를 모함한 사건이라 주장하였다. 이는 뮈텔 주교가 신부. 신자와 지방관. 비신자와의 갈등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말해준다. 뮈텔 주교는 교폐를 민란의 주요 원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뮈텔 주교의 5월 26일 문서에는 부족한 정보 탓인지 사건의 전개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그는 5 월 28일 이전까지 사건에 대해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5월 22일 신임 제주 목사 이재호를 만난 후, 제주도가 평온해질 것이라 낙관하였다. 한국 정부가 봉세관을 소환한다면 민란이 끝날 것으로 판단한 듯싶다.
그러나 5월 28일 제주성에 입성한 민군은 대치하고 있던 천주교 신자들을 살해하였다. 교당(敎堂)이 훼손되고 500~600명의 신자가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뮈텔 주교의 사건인식은 변화하였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그가 6월 13 일과 10월 25 일에 작성한 문서이다.
뮈텔 주교는 신자 학살이 발생한 지 2주일 후인 6월 13 일에 작성한 문서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냈다. 봉세관에 대한 도민들의 저항이 민란의 주요 원인이고, 천주교 신자들과의 문제는 “2차적”이라고만 했다. 그는 “끔찍한 소요”로 천주교회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민란을 “박해”라 지칭하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민란은 “무고한” 천주교 신자들이 “폭도”.“죄인들”에게 희생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신자들과 비신자들과의 충돌에서 비롯된 바가 컸다. 라크루 신부와 신자들은 5월 14일 오대현 등을 체포하고 제주 군수에게 넘겼고, 다음 날 대정성에서 비신자들과 충돌하였다. 그 과정에서 신자들의 발포로 피살자가 발생하였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대정 충돌은 민란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회에 참여한 도민들이 민군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사건인데도 뮈텔 주교는 신자들과 비신자들과의 무력 충돌을 언급하지않았다. 그의 5월 26일 문서에는 오대현의 체포를 언급하였지만, 6월 13일의 문서에는 이것마저도 뺐고, 천주교회의 피해만을 강조하였다.
뮈텔 주교는 민란이 진압된 이후인 10월 25일에도 문서를 작성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냈다. 그는 천주교회의 피해가 컸던 이유를 “허무맹랑한 중상모략” 때문이라 하였다. 천주교가 전파되어 신자들이 크게 늘자 무당들이 요언을 유포하여 천주교를 모함했다는 것이다. 요언은 선교사가 어린애의 눈을 뺀다거나 시체의 골수를 먹는다는 등의 유언비어였다.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징세로 인한 갈등으로 폭동이 발생하자 봉세관은 제주도를 떠났다. “폭동의 공적인 목표”가 사라졌으므로 “공격의 화살”이 자연스럽게 천주교 신자들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 뮈텔 주교의 설명이다.
뮈텔 주교는 중상모략에 의한 반 천주교 정서가 제주도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정서에 영향을 준 배경으로 중국의 영향을 들었다. ‘중국의 영향5이란 배외(排外) 및 반 그리스도교를 표방한 의화단운동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의화단운동의 여파가 한국에도 미쳐서 1900년 7월 중국에서활동하던 2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함경도 함흥으로 피신하는 일이 있었다. 뮈텔 주교는 중국의 소식이 “무지와 악의로 변질되어” 유포됨으로써 한국인들의 외국인과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증오심이 천주교에 대한 격렬한 폭력을 유발하기도 했는데,신축교안이 그런 경우라고 여겼다.
이처럼 뮈텔 주교는 신축교안을 특수한 사례가 아닌, 반 외국인. 반 그리스도교라는 한국사회의 흐름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인식하였다. 앞에서 검토하였듯이 천주교회의 피해가 컸던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과 비신자들과의 무력 충돌 때문이었다. 따라서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에서 교회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뮈텔 주교는 선교사와 신자들의 무장이 불가피하였음을 주장하였다. 제주성이 “폭도”에게 포위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선교사들이 성문을 닫고 자위대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뮈텔 주교는 선교사들의 행동을 옹호하는 한편, 희생이 컸던 이유를 지방관들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는 한국 관리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뮈텔 주교는 앞선 6월 13 일 문서에서 관리들은 “폭도와 한통속”이고 선교사들이 제주도를 떠나길 원하였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제주에 파견한 군인들은 “폭도”를 제지하지 않아 폭력적인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이에서 보듯이 뮈텔 주교는 한국 관리들이 천주교에 적대적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선교사들과 함께 제주성에 있었던 지방관들이 도왔다면 구원병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음이 약해서였는지, 아니면 공모했는지” 지방관들이 민군과 타협하고 신자들과 한편이던 성안 주민들의 용기를 꺾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주민들이 성문을 열었고“폭도”가 진입하여 신자들을 학살하였다고 했다.
요컨대 뮈텔 주교는 제주 관리들이 봉세관에 불만을 품고 비신자와 봉세관, 신자사이를 이간질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민란이 일어났는데 천주교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천주교회의 피해가 막심했다고 주장하였다. 천주교회의 피해에 대한 한국 관리의 책임을 강조한 반면, 봉세관과 신자들의 결탁이나 교폐를 언급하지 않았다. 뮈텔 주교는 신축교안을 “무고한 신자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라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교회 밖, 비(非)교회 측은 신축교안을 어떻게 보았을까? 프랑스 공사 플랑시, 입교하지 않은 제주도민들,제주에 파견된 한국 관리들,제주에 있던 유배객 김윤식의 교안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인식을 검토한다면 뮈텔 주교의 인식이 갖는 특징을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플랑시는 봉세관의 과도한 징세, 봉세관과 경쟁하는 지방관의 선동을 교안의 원인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제주 목사 이재호의 보고서에 언급된 교폐의 대부분이 “덮어씌워진 것”이라고 했다. 사실은 단 한 가지로, 신자가 봉세관에게 협력하면서 권한을 남용한 것뿐이라고 했다. 플랑시는 민군 주모자들의 재판 진술을 들은 뒤 신자들을 향한 비방이 근거가 없음을 확신하였다. 민란은 오직 봉세관 때문에 일어났고 신자들은 민란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까닭에 공격당했다고 보았다.
교안의 원인에 있어선 플랑시와 뮈텔 주교의 인식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력 충돌과 관련해선 플랑시는 부정적이었다. 그는 대정 충돌을 두고 선교사들이 신중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끔찍한 보복을 자초하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정부와의 배상 협상에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민군이 내세운 ‘창의’의 명분은 봉세관의 폐단과 교폐의 시정이었다 .
1899년 제주 본당 설립 후, 신부, 신자들은 지방관, 비신자들과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갈등의 요인으로는 경제적인 문제, 종교문화적인 문제 등이 있었다. 교폐로 지목된 사례를 소개하면, 금전 및 토지 탈취, 채무 불이행, 교회 입교 강요, 토착 신앙 배척, 사착,사형(私刑), 봉세관과의 결탁 및 토지 소유권 탈취 등이었다.
이처럼 폐단을 저지른 신자들은 민군의 시선에선 “양민”이 아니라 “역적”이었다.
민군에 가담하지 않은 비신자들도 민군의 ‘창의’에 동조하였다. 5월 28일 성문을 열어 민군을 맞아들인 성내 주민들은 민군을 “의민(義民)”이라 부르고, 신자 살해를 “잘한 일”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뮈텔 주교가 “박해”라 했던 것과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비신자들의 교안 인식을 잘 말해 준다. 한국 관리들이 정부에 제출한 교안 보고서의 내용은 차이가 있었다. 봉세관 강봉헌은 채구석 등이 천주교 신자들을 구타했고, 민란을 일으켜 자신의 조사 사무를 방해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달리 제주 목사 이재호, 찰리사 황기연 등은 교안의 원인으로 봉세관의 남세와 교폐라고 하면서 특히 교폐에 비중을 두었다. 이재호는 민란이 크게 확대된 이유가 전적으로 천주교 신자들 때문이라고 했다.
황기연은 보고서에 교폐의 사례를 열거하였고, 봉세관과 천주교 신자의 결탁도 언급하였다. 이재호, 황기연 등이 교폐를 민란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천주교회의 책임을 강조한 점은 뮈텔 주교의 인식과 대비되는 것이다.
민란을 목격한 김윤식은 천주교 신자들과 상무회원들과의 갈등을 언급하였다. 그는 양측의 분쟁 원인을 봉세관의 폐해 때문이라 보았다. 그래서 5월 10일 강봉헌이제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별일 없이 끝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5월 14일 대정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는 신자들이 비신자들에게 “해독”을 끼쳤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몇몇에 불과했고 희생자들대부분이 선량한 이들이라고 했다. 김윤식은 교폐의 해악을 지적하면서도 민군에 대
해서도 “정도가 지나쳤다”고 하면서 비판적이었다.
정리하면, 제주의 비신자들, 한국 관리들, 김윤식 등은 교폐를 교안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뮈텔 주교도 신문 보도를 통해 이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선교사와 신자들의 보고를 전적으로 신뢰하였고, 교폐를 인정하지 않았다. 뮈텔 주교가 제주에 없었기 때문에 교안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교회에 대한 사회적 반감에 위기감을 느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뮈텔 주교의 판단은 천주교회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역 사회의 인식과 큰 괴리를 보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3. 천주교희의 신축교안 인식 변화
신축교안 이후에 천주교회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교회 간행물에 신축교안이 어떻게 서술되었는지를 검토해 보도록 하자. 1924년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 천주교 역사를 정리한『한국 천주교 기원과발전』을 간행하였다. 저자는 「제주(천주교 신자의 학살)」에서 신축교안을 다뤘다. 무속인들의 천주교에 대한 시기심과 중상모략,봉세관의 조세에 대한 불만이 학살의 원인이라 했다. 신자들의 학살,위태로웠던 선교사들 등 교회의 수난을 언급하였고, 민군을“폭도”로 규정하였다.
1931년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가 간행한『조선 천주공교회 약사도 이와 비슷하다. 저자는 신축교안을 “제주도의 교우 참살(학살) 사건”이라 칭하였고, “신교(信敎)의 자유”가 획득된 “광양시대”의 돌발적인 사건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비신자들의 시기심,“서울에서 국세를 받으러 온 관리”의 모함과 충동을 원인으로 설명하였다. 학살이 정부의 지시가 시행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폭민들의 흉포한 소행”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이 사건을 한불조약 이전에 있었던 정부의 천주교 금압과 다른 사례로 본 것이다.
위 두 서적에서는 봉세관과 비신자들의 시기심이 교안의 원인이라 했다.
‘천주교신자=희생자 / 민군=폭민’이라 했으며, 교폐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서적의 내용이 뮈텔 주교의 문서와 거의 동일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뮈텔 주교의 신축교안 인식이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기억으로 자리매김하였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신축교안의 원인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의견이 있어 주목된다.
대구 대목구의 남방 천주교 청년회가 발행하는 기관지『천주교회보(天±敎會報)』 1929년 2월 1일 자 기사에는 탐관오리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과실”이 원인이라고 하였다. “불량한 신문교우가 권리를 남용하고 이웃을 속여 재물을 탐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이것이 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평양지목구가 간행하는 『가톨릭연구』 1935년 9 • 10월호에도 이와 비슷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필자인 최덕홍 신부는 제주도의 신자들이 신수(神樹), 신당을 훼손하여 비신자들과 갈등하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입교한 자들이 신부의 권리를 믿고 무리한 횡포를 저지르는 사례도 있다고 했다. 이에 비신자들이 불량한 신자들을 물리치고 봉세관과 직권을 남용하는 자들에게 반항하기 위해 자위민단을 조직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적군”과 신자들이 제주성에서 필사적으로 교전하였다고 했다.
윗글의 필자들은 신자 중에 불량한 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작폐가 교안의 도화선이 되었음을 인정하였다. 이는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기억과는 다른 점이다. 필자들은 대한제국기의 신문 기사를 참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덕홍 신부의 경우에는 제주 지역의 본당에서 사목하면서 지역 정서를 이해한 결과로 여겨진다.
이처럼 교회 간행물에서 신축교안이 다뤄졌다. 하지만 그 내용이 간략하거나 기사(記事)류의 글이라서 교안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분석한 학문적 연구가 발표되었다.
류홍렬은 신축교안을 천주교 박해로 이해하고 ‘(제주)교난(敎難)’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전의 간행물에서는 ‘민란’, ‘학살 사건’ 등이라 하였는데, 류홍렬이 처음으로 ‘교난’이라 지칭하였다. 그는 신축교안을 1866년의 병인박해와 더불어 고종 시기에 있었던 “큰 박해”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신축교안을 제주도민에 의한 “사제 박해”라고 하면서 “관제 박해”인 병인박해와 구분 지었다.
류홍렬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교안이 발생하였다고 보았다. 지방관들의 착취,평안도 출신 봉세관의 남세에 대한 도민들의 배타심, 봉세관과 사설(私設) 상무사의 대립, 신자들의 미신 행위 타파와 징세 관여에 대한 유림(儒林) • 무녀들의 반감, 탐관오리에 대한 신자들의 규탄과 관리들의 천주교 질시, 일본 상인과 상무사원의 결탁 등을 원인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교폐를 부인하였다. 교안 당시 신자들의 작폐를 보도한 신문 기사가 “난민”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므로 “전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제주도민의 배타성, 보수성, 호전성이 교안의 “숨은 원동력”이라 주장하였다. 즉, 신축교안은 천주교 신자들의 비행이 아니라 관리들의 부패와 완명한 민심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이 류홍렬의 시각이다.
류홍렬은 민군과 일본인의 관련성을 지적하였다 . 제주도에 있던 아라가 등이 민군에게 무기를 팔고 선교사 살해를 부추겼다는 것은 프랑스 선교사의 문서, 플랑시의 문서, 『속음청사(織勤W史)』 등에서 확인된다. 뮈텔 주교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문서에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류홍렬은 일본인들이 민군을 조종 내지 원조한 배후세력으로 지목하였다. 일본인들이 프랑스 세력을 쫓아내 한국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로 개입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축교안을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평가하였다.
류홍렬의 연구는 교회 자료만 아니 라『증보 탐라지』, 『속음청사』등의 자료도 발굴하여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신축교안의 원인, 경과, 사후 처리 등을 분석함으로써 신축교안의 종합적인 검토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도 천주교회의 입장을 옹호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교폐를 보도한 신문 기사를 “난민”의 의견이라 치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였다.
교안(敎案)의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도 발표되었다. 이원순은 교안을 “박해 금압에서 자유 • 해방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모든 분쟁과 외교적 절충”이라 정의하였다. 그는 1901년 제주의 사건을 교안의 한 사례라 했다. 발생 시기(한불조약 이후), 외교적 문제(프랑스 공사관의 개입)에 주목하였다. 즉,신축교안을 한불조약 이전의 천주교 금압과는 다른 성격의 사건이라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박해의 측면도 있다고 보고 ‘제주교안(신축교안)’이란 단어 대신에 ‘신축교난’이라 하였다. 이원순은 신축교안의 예외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20년간 발생한 교안에서 피살된 신부가 단 1명이고, 비신자가 피살된 사건이 2건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 다른 교안들과 달리 신축교안은 대규모의 인명이 살상된 “최악의 교안”이었다. 이는 “제주도라는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한국 정부의 “적절한 대책”으로 단시일 내에 진압되고 제주도만의 사건으로 끝난 것을 “다행한 일”이라 했다. 이원순의 설명에는 천주교회를 옹호하려는 측면이 있다고 판단된다.
교안과 관련된 인명 피해가 “극소”하였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희생자가 발생한 신축교안이 특수하고 예외적인 사건임을 강조하였던 것 같다.
정리하면, 천주교회의 신축교안에 대한 기본 인식은 신자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몇몇’ 신자들의 과실이 있었고, 이것이 비신자들과의 갈등을 유발하여 교안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물론 교폐를 부정하고 신자들의 신당 파괴 등을 미신 타파 행위로 옹호하는 의견이 여전히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의 과오도 있었다는 주장은 천주교회 내에서 공감을 얻었다. 교회사가들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신축교안의 다양한 측면이 밝혀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본인의 민군 개입설인데, 이는 훗날 역사학계의 논쟁적인 주제로 다뤄지게 된다. 연구의 성과로 천주교회는 ‘민란’,‘학살 사건’ 대신에 ‘교난’,‘교안’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4. 신축교안 인식을 둘러싼 충돌과 대화
천주교회는 신축교안을 천주교 박해로 기억하였다. 그런데 1961년, 민란의 중심지였던 대정 지역에서 천주교회의 기억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기록한 ‘삼의사비’가 세워졌다. 이는 교회 밖,특히 제주사회의 신축교안 기억이 천주교회와 큰 차이가 있음이 말해 준다. 제주 사회는 신축교안을 어떻게 기억하였는지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제주 사회의 신축교안 기억은 구전설화를 통해 전승되었다. 구전설화 대부분은 이재 수 등이 천주교 신자들의 횡포에 격분하여 제주성을 진압하고 교폐를 해결한다는 과정 서술이 주를 이룬다. 교안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세폐의 문제는 설화에 잘드러나지 않는다. 오대현, 강우백 보다는 이재수가 민란의 주도자로 그려지고, 그의 민중적 영웅상이 부각된다.
눈여겨볼 점은 제주 사회가 이재수를 특별히 기억한다는 점이다. 1921년 제주 출신의 김형식은『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재수를 김홍집, 전봉준 등과 함께 고종때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았다. 이미 검토한 것처럼 구전설화 등에서도 이재수를 영웅으로 그렸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문서나 교회 간행물에서는 이재수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교안 당시 천주교회에서 민란의 주모자로 지목한 자는 상무사를 조직한대정 군수 채구석이었다. 그렇다면 제주 사회가 신축교안을 ‘이재수 난’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이 었을까? 그가 관노(官奴) 출신으로 서진(西陣)을 이끌면서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인 것 같다.
반면,천주교회가 채구석을 민란의 주모자로 지목한 것은 이미 검토하였듯이 한국 관리들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제주 사회의 신축교안 기억은 1961 년 8월 대정 지역의 주민들과 이재수의 후손들이 세운 ‘삼의사비’에서도 이어진다. 삼 의사는 이재수,오대현,강우백을 가리킨다.
비문에는 장두(狀頭)들이 “의”를 내세워 작폐를 저지르는 천주교 신자들을 “토벌”하였다고 했다. 민군을 “의군(義軍)”으로,그에 대항한 천주교 신자들을 “적도(賊徒)”라 지칭했다. 장두들은 서울로 잡혀가 프랑스인의 요구로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했다. 이는 재판의 불공정함과 장두들의 억울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삼의사비에도 교폐로 인해 교안이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고 봉세관의 남세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재수도 재판 당시 봉세관의 남세를 진술했지만, 도민들의 기억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작폐만이 각인된 셈이다.
1962년 제주신문사에서 간행한『제주도지』에서도 신축교안을 다뤘다. 이 책의 저자는 교폐를 교안의 주요 원인으로 보았다. 구전설화와 마찬가지로 이재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이재수의 행적에는 역사적 사실과 영웅적 설화가 뒤섞여 있다.
“이재수는 황천검을 빼어 들고 표표한 자 수십 인을 한칼로 무찌르니 칼 쓰는 법은 삼국적에 조자룡 같더라.”라는 문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도 눈에 띈다. 이재수가 “두령(頭領)”으로서 오대현, 강우백을 지휘하였다는 것이나 선교사들을 죽이자는 백성들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처럼 ‘삼의사비’와 『제주도지』등에서는 이재수를 영웅시하고 교회를 부정적으로 표현하였다. 수백 명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반성이나 비판도 없었다. 그럼에도 천주교회는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교안으로 인해 남아 있었던 반(反)천주교 정서를 무시할 수 없었고, 위축된 상황에서 쉽게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천주교회나 제주 사회나 수난과 민란의 기억을 각자의 영역에서 재현하였다. 자신들의 기억을 간직한 채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갈등이 빚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 후반부터 바뀌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103위 시성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 각 교구에서는 순교자 현양운동을 전개하였다 .
제주교구도 1977년 9월 25일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 하였는데, 장소가 신축교안 희생자들이 묻힌 황사평이었다. 이는 제주교구가 신축교안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황사평이 단지 교회 공동묘지가 아니라 제주교구의 순교사적지(순교성지)가 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이전에도 천주교회에서는 신축교안 희생자를 순교자로 인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구 차원에서 인정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변화의 또 다른 배경은 제주교구의 설정이었다. 1977년 3월 21 일 제주 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다. 1979년은 제주도 첫 번째 본당인 제주 본당의 설립 8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계기로 제주교구는 제주도 초기 교회사에 관심을 가졌다. 초기 교회의 역사에서 신축교안은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구의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제주교구는 “고증을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취지로 1980년 김옥희의 『제주도 신축년 교난사(濟州島辛표年敎難史)를 발행하였다. 「발간사」에서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지나간 상황이 왜곡되게 전해지는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하면서 “명백하게 당시의 상황을 돌아보고 반성과 새로운 시발의 역사적인 기점으로 삼으려 한다.”고 하였다.
김옥희는 기존 연구에서 활용하지 않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를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선교사들의 문서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였기 때문에 뮈텔 주교의 인식과 동일한 점들이 많다. 예컨대, 제주의 지방관들이 도민들을 선동하였다거나 유언비어
로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되었다는 점 등이다. 김옥희는 일본인들의 개입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민란 세력의 주체성을 부인하고 일본인들의 배후 조종설을 주장하였다. 제주 사회의 교안 인식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였다. 제주 사회에서 영웅시하는 이재수에 대해서 신자들뿐만 아니라 “무죄한 양민들”까지 살해했으므로 의거를 일으킨 영웅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제주 목사 및 찰리사의 보고와 이를 보도한 신문 기사를 과장되고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 제주도민들이 이렇게 왜곡된 내용을 사실로 “오인(誤認)”하고 있다고 보았다.
『가톨릭신문』은 김옥희의 책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룬 역사서”로 평가하였다. 김옥희가 “충실한” 사료 검토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규명함으로써 기존의 단편적이고왜곡, 편향된 역사 인식을 극복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천주교회의 신축교안 인식에 대해 제주 사회에서 불만이 제기되었다. 현기영은 1983년 소설『변방에 우짖는 새!를 출간하였다. 그는 “천주교 측 호교가의 아전인수 격”인 연구만 있음을 지적하면서 문학성의 추구보다 “민란의 진정한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오성찬은 1983년 3월「이재수 란’의 제주도민은 폭도가 아니 었습니다」라는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작성하였다.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의 대립은 ‘삼의사비’를 둘러싼 갈등을 촉발하였다. 1961년에 세워진 삼의사비가 1980년대에 도로 확장을 이유로 대정골 중심인 홍살문 거리에서 ‘드레물’ 구석진 곳으로 옮겨졌다. 비석의 초라함을 안타깝게 여긴 대정 고을 연합
청년회는 1997년 4월 20일 새로운 비석인 ‘제주 대정 삼의사비’를 건립하였다. 이에천주교회가 직접 대응에 나서 건립 기념식을 제 때에 치르지 못했고, 비석을 감싼 검은 천을 가렸다가 벗겼다 하는 일이 반복되기도 했다.
논란 속에 세워진 비석의 내용은 1961년의 비석에 비해서 표현이 순화되었다. “적도”,“적당”이라는 표현은 사라지고 “천주교도”라고 표기되었다는 점이 그 예이다. 하지만 주요 내용은 1961년의 것과 큰 차이가 없어, 신축교안의 책임을 전적으로 천주교회에 돌리고 있다.
이처럼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는 신축교안 기억을 두고 대립하는 일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회가 기존 입장만을 고수한 것은 아니었다. 천주교회도 신축교안을어떻게 바라보고 기억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 계기로는 첫째 역사학
계의 신축교안 연구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둘째 ‘제주 선교 100주년’(1999년) 기념사업으로 교구사를 편찬하면서 신축교안 인식을 재검토하였다는 점이다.
민중사 또는 지역사가 유행하면서 신축교안도 역사학계에서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연구자들은 특정 자료 의존과 편향적 해석을 기존 연구의 문제점으로 지적하였다. 교폐가 민란의 주요 원인이라 했고, 민란이 확대되어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것도 천주교회의 책임이 크다고 했다. 일본인의 개입설(사주설)에 대해선 유보적이거나 또는 단지 무기만 제공한 것이라고 했다. 제주도의 특수한 사회경제적, 종교적 상황에 주목하면서 ‘민란’이 도민들이 주체적이고 참여한 반제, 반 침략적인 민중항쟁이었다는 연구가 있었다. 반제 민중항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민군의 일부 발언에 근거한 것이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천주교회는 연구자를 초청하여 신축교안 연구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는 등 역사학계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천주교회가 역사학계의 모든 견해를 수용하진 않았다. 하지만 역사학계의 연구가 천주교회의 인식에 변화를 준 것만은 분명하다. 예컨대, 2004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간행한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 「제주교안」 항목에는 봉세관의 조세 수탈과 천주교회의 교폐로 교안이 발생한 것으로 서술되었다.
제주교구는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교구사를 편찬하면서 신축교안 인식을 재검토하였다. 제주교구는 1997년 한국교회사연구소와 함께 제주도 초기 교회사 자료집을 간행하였다. 신축교안 자료들을 수집, 정리한『신축교안과 제주 천주교
회j도 있었다. 제주교구는 자료집을 내는 과정에서 공식적인 용어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동안 교회 간행물에는 ‘제주교난’,‘신축교난’,‘신축년 제주민란’ 등의 용어가사용되었다. 교회 밖에서는 ‘이재수의 난’,‘제주교란, ‘제주민란’ 등으로 불렸다. 이는 관점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천주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신축교난’이 사건의 복합적인 성격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는 점도 한계였다. 이에 제주교구는 1901년의 사건이 천주교 금압 정책이 종식된 이후에 발생하였고, 박해와 유사한 성격이 있으며, 외교적인 사안과 관계된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교난’보다는 ‘교안’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1997년 5월 제주교구는 ‘신축교안’을 공식 용어로 채택하였다.
제주교구는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1997년 10월 3일에 신축교안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심포지엄에서는 교안 당시 살해된 신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제주교구는 그들을 순교자로 불렀고,황사평의 성역화사업을 진행해 왔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97년에 ‘20세기 순교자’ 명단 조사를 추진하면서 신축교안 희생자들을 포함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순교자 현양은 신자들에게 혼란스러움을 주기도 했다. 교회에서 공경받는 순교자들이 교회 밖에서는 ‘작폐한 자들’로 기억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1901년 피살된 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그들이 순교자인가 아니면 희생자인가의 문제였다. 발제자인 최석우 신부는 배교를 강요당하는 일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입증할 기록이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피살된 신자들을 순교자로 보기 어렵고 신앙으로 인한 희생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최석우 신부의 주장은 제주교구가 2001년에 간행한 교구사에 반영되었다.
심포지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발제자인 문창우 신부는 교안 당시에 있었던 선교사들의 문화우월주의, 교회의 전통신앙 배척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는 종교 간의 대화,타 문화와의 만남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안 당시 교회가 보였던 배타성을 반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처럼 천주교회는 신축교안 인식을 되짚어보기 시작하였다. 신축교안을 ‘무죄한신자들’이 희생된 ‘천주교 박해’라고만 주장하지 않았다. 도식적으로 결론 짓기보다는자료를 참고하여 신중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또한, 교안 당시에 있었던 교회의 과오를 반성하고 제주 사회와의 대화를 통해 화해의 길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천주교회는 제주 사회와의 대화에 나섰다 . 제주교구는 2001년 12월 1일 "1901 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함께 ‘진실과 화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03년 11월 7일에도 49()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1901년 신축교안에 대한 종합적 검토’라는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날 양측은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천주교회는 “과거 교회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동양 강점을 위한 치열한 각축의 시기에 선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주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였다. 기념사업회는 제주도민을 대표하여 “봉건왕조의 압제와 외세의 침탈에 맞서 분연히 항쟁하는 과정에서 많은 천주교인과 무고한 인명 살상의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하였다.
‘미래 선언’이 천주교회의 신축교안 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1998년에 발표한 ‘현대 순교자’ 명단에는 신축교안 때 피살된 신자 51명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2015년 8월에 공개한 ‘근현대 순교자 81위’ 명단에는 신재순만 포함되었다.
신자와 비신자, 순교자와 단순 희생자를 규명하기 어렵지만, 라크루 신부의 복사 신재순은 기록이 확인되므로 ‘신앙 증거자’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반영된 것 같다 .
그러나 이것으로 신축교안때 피살된 신자들이 희생자인가,순교자인가의 문제가 명확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천주교회는 피살된 신자들을 여전히 ‘순교자’로 기억하고 있다. 교안이 천주교 전파, 외래 종교에 대한 도민들의 반감, 조세의 과중한 부담, 도민들의 외부 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주 사회는 어떠한가? 이를 파악하기 위해 ‘미래 선언’ 전후인 1993년과 2006년 제주도청에서 발행한 『제주도지j를 보도록 하겠다. 두 자료를 비교해 본다면 ‘미래 선언’이 제주 사회의 신축교안 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93년의 『제주도지』 「조선시대 말기의 민란」에서 신축교안을 다루고 있는데, 제목을 ‘천주교란’이라 했다. “외래 종교에 대한 민중의 반항”이라는 시각으로 교안 당시의 천주교회를 부정적으로 서술하였다.
「종교一천주교」에서는 ‘신축교난(이재수난)’이란 별도의 소챕터를 두고 교안의 원인, 과정, 결과 등을 설명하였다. 교안의 원인으로 무녀와 일본인의 능간이 있었다고 하는 등 천주교회의 인식을 일부 반영하였다. 그런데 2006년의 『제주도지j를 보면, 여전히 ‘천주교란’이라 되어 있고, 그 내용도 1993년의 것과 거의 똑같다. 「종교一천주교」에선 1993년의『제주도지』에는 없는 ‘제주 천주교회 설립 이전’의 역사를 추가하였다.
그러면서 ‘신축교난(이재수난)’을 ‘초창기의 시련과 영광’이란 제목의 소챔터로 대체하고 교안을 짧게 언급하는 데에 그쳤다. 이는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가 대화에 나섰음에도 각자의 신축교안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음을 잘 말해 준다. 오랜 기간 평행선을 달려왔던 만큼 단기간에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의 ‘진정한 대화’는 앞으로의 숙제이다.
5. 맺음말
신축교안은 한국천주교회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제주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신축교안의 영향은 다른 지역에도 미쳐 전라도 지도 등지에서 발생한 교안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교안의 여진은 제주 사회에서 계속 있었고, 그로 인해서 천주교회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처럼 신축교안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컸지만, 천주교회는 오랫동안 교안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편향된 인식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였고, 천주교 박해로 신자들이 희생되었다는 도식적인 설명만을 되풀이하였을 뿐이다. 교폐를 부인하고 선교사의 자료에 근거하여 호교론적 주장을 펼쳐왔다. 그러다 보니 천주교회의 기억에는‘순교’만 있을 뿐이었다.
신축교안에 대한 선택적 기억을 한 것은 천주교회만이 아니었다. 제주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제주 사회도 그동안 그들의 관점에 따라 신축교안을 해석하고 기억해 왔다.
이재수를 비롯한 민군을 영웅시하였고 수많은 인명 살상에 대해 별다른 반성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피살당한 천주교 신자도 같은 제주도민이었다는 점은 잊힌 채 ‘의거’,‘항쟁’으로 기념할 뿐이었다.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의 인식은 이처럼 크나큰 괴리를 보였다. 집단 간에 기억의 차이가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도 그 기억이 주는 상처는 너무나 컸다. 그럼에도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는 선택적 기억만 할 뿐, 화해를 위해 대화를 나누거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가 만남을 갖고 대화를 시도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무관심하거나 때론 대립하던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는 교안 발생 100년이 지나서야 만나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미래 선언’은 충분히 평가받을 가치가 있
다. 하지만 ‘미래 선언’ 이후에도 천주교회나 제주 사회의 신축교안 인식이 이전보다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이는 단발적인 만남과 대화로는 접점을 찾기가 어려울 것임을 일깨워준다. 또한 상대의 인식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변화도 없을 것이라는 점도 깨닫게 해준다.
2021년은 신축교안 120주년이 되는 해로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는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는 2021년 사목교서에서 신축교안에 대해 교회가 반성하고 참된 형재애로 동반 성장하자고 하였다. 제주 사회는 4월 6일에 신축항쟁 120주년 기념사업회 창립 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기념사업회는 기념행사,교육 및 출판, 홍보사업 등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천주교회와 제주 사회가 다시금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셈이다. 양측의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