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후 온갖 진통을 겪은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선출된 대통령이 권력을 행사하는 거처로 경무대라 명명된 공간이 국민에게 다가오게 된다. 고려시대 남경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백악산 아래 한강 이북에 자리 잡은 너른 터전, 경복궁 안쪽 깊은 곳, 서촌 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칠궁 언저리가 바로 그 자리다.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석조건물의 중앙청 과 더불어 경무대는 왜인들이 조선을 강제 합병하여 관할 권리 행정수반이 관저와 직무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원래의 경복궁을 훼손하고 세운 건물이었다. 중앙청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철거해 역사의 발자취에서 사라져 버렸고 경무대는 여러 대통령을 거치면서 이름과 규모도 변모되어가며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재의 이름은 지붕 청기와에서 유래되어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한국의 권력의 핵심적인 중심지 역할을 이어왔다. 현재의 청와대 배치와 규모는 제5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노태우 대통령 시절 건축된 것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이어서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으로 이어진 권좌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권력의 속성에 따라 불행한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 안에 임기 동안 머물며 청와대 주인 노릇을 한 권좌의 주인공은 대부분 불행한 일들을 경험해야 했었다.
5월 어느 날 기회가 있어 찾아 살펴보았다. 경복궁 전철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와 오래전 코오롱 본사가 있던 길을 따라 걸어 올라 분수대 광장에 섰다. 그리고 서서 천천히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시선으로 정리하며 청와대 전체를 아우르다, 길을 건너 정문으로 접근하여 절차를 빠르게 확인한 후 미리 동선을 짜 놓은 대로 걸음을 옮겨 나갔다. 백악산을 뒤로 인왕산과 낙산을 좌우에 둔 채로 안정된 숲 사이사이에 배치한 건물들 대부분은 거창함과 압도와 위압이란 과물처럼 다가왔다. 청빈 낙도라는 선현들의 혜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체불명의 건물들이었다. 중후하고 나름 멋을 지닌 고궁의 멋과는 상반되고 오로지 권력의 힘을 대변하는 건물들 뿐이었다. 나는 단호한 어조로 허세라 결론 지어버렸다.
이러한 마음은 관저 정문을 보면서 더욱더 공고해졌다.
북한산 정상에 서 있는 삼각을 이루는 한축인 화강암 덩어리 인수봉에서 빌려 왔을 법한 관저 출입문 인수문, 너무 고압적이었다. 20대 중반 즈음 군생활 시절 박정희 대통령 시절 긴요한 일로 인하여 업무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와 비교하며 청와대 경내를 걷게 되어 그런지 동안 권력의 권좌의 어두운 그림자가 오버랩되어 심성을 사납게 만들어 주었다. 과연 국가를 경영하면서 고작 재임기간이 4-5년 정도와 비견해 보았을 때 꼭 이 정도의 규모가 꼭 필요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정문을 들어서서 삼청동 방향 춘추문을 나설 때까지 떠나지 않었다. 왜 이토록 고립적인 제왕적 규모를 고집하였을까? 은연중에 깃든 권력의 허세가 만든 생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각인되었다. 왕권이 아닌 민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어느 누구도 이 부분에 대하여 지적했던 기억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하여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윤 대통령이었다. 그와 같은 생각을 청와대 곳곳을 경험하며 나도 모르게 공유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본관도 그렇지만 관저의 모습을 보며 그러한 생각을 깊어진 것 같다. 진실의 기본에는 늘 단순과 소박함이 궤를 같이한다. 불의는 늘 현혹시키는 궤변과 술책이 따르지만 진실은 이외로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와 단순과 소박의 범위 안에 있어 아무런 허물없이 조용히 감동을 받는 예술처럼 받이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냥 참 아름답다 하여도 진실을 대변하는 아름다운 말이 되는 것이 진실이 아닌가 새삼 느껴진다.
사람이 정주하는 공간, 주거공간 어느 범위의 크기를 벗어나면 쓸 때 없는 것만 쌓이기 마련이다. 한정이란 단어가 무색할 만큼 인간의 욕심은 바다보다 너르고 하늘보다 높아 그 크기와 깊이를 아무도 모른다. 그 크기를 조절할 줄 알아야 제대로 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일인데.. 조절 기능을 잃어버리면 화를 부르게 된다. 불필요한 것을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일이 바로 청빈한 삶이다. 그런 삶을 추구하려면 같은 것이 겹치는 순간을 만들면 안 된다. 간혹 그런 일이 생기면 즉시 주변을 살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눔의 길을 터야 한다. 선택한 가난이라 함은 궁핍한 삶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은 지니지 않는 삶이란 뜻이다.
관저인 한옥을 끼고 사방으로 돌며 내실을 가만가만 들여다보며 관심을 갖고 관찰해 보았다. 그리고 인수문을 빠져나온 후 답답한 마음에 숨을 열어 주기 위하여 일부러 관저 뒤 동산에 올라 산책을 열어 나갔다. 그것은 건물은 크지만 숨이 막힐 것 같은 고립무원을 느껴 기 때문이었다.
동산 아래에 있는 관저, 숲에 쌓여 지금 답답한 내 마음과 같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빈 공간이 보이지 않는 현대 도시의 빌딩 숲 풍경 또한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동산에 서서 인지하고 있었다. 현재의 문명이란 그림은 인간을 조금씩 질식시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접고 1부 능선 정도를 거스르며 올라서다. 발견한 건물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단순함과 여백이 좋은 두 칸 초가집과 네칸 짜리 누마루 기와집이 반겨 주었다. 자연과 소통하는 가옥으로 단순한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루고 있는 한국 전통가옥이다.
누마루 한옥에 사랑채 하나를 곁들인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고 연회가 필요하다면 별도의 건물 하나 정도 공용의 개념으로 건축해 놓는다면 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다가가 알림 글을 읽어보니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침류각이라 적어 놓았다. 흐르는 물을 벼개 삼는다는 뜻으로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뜻하는 말이다. 이 집의 원래 위치가 지금 관저 자리였는데 침류각을 이곳으로 옮겨 놓고 지금의 관저를 신축했다고 한다. 권력은 무엇인가 비밀스러워야 하고 견고해야 하며 과시성이 커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군림해야 직성이 풀리는 제왕적 발상이 아닌가 한다.
청와대는 서울의 중심부이자 구도심인 경복궁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고려시대(918-1392)부터 궁궐로 사용되었고, 조선시대(1392-1910)에는 경복궁 후원이었습니다. 고종 5년(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문무가 융성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경무대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 자리에 총독 관저가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 사령관이 머물기도 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 푸른 기와집이라는 뜻의 청와대로 이름을 개칭하였습니다. 1991년 지금의 본관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