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가르침의 유대적 배경
1.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 생각하거나 분석할 때 예수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았던 유대인이라는 점을 때로는 잊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는 철저하게 유대적 배경 속에서 활동했고 발언했다는 점을 유대의 문헌인 ‘미쉬나’, ‘미드라쉬’, ‘탈무드’, ‘엣세네 문헌’ 등을 통해 분석한 책이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대 중동문명 전문가인 조철수의 <예수평전>는 ‘예수’에 대한 시각을 보통의 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안내한다. 저자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이 유대적 전통과 유대적 갈등 속에서 명확하게 파악될 수 있음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제시하는 것이다.
2. 우선 ‘유대적 문화 배경’을 통해 예수의 말과 행적을 살펴보자. 예수는 희생제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의 화해를 강조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했다면 그와 화해해야 속죄일에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유대적 믿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잘못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라’라는 말도 일방적인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화해하라는 권고인 것이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예수의 말이 있다. 유대인들에게 ‘자선’과 ‘선행’은 매우 중요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다. 성서에는 ‘토라의 말씀과 선행’이 신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조건임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 구절은 자선을 행한 사람이 누구에게 자선을 행했는지를 모르게 하여 자선받은 사람을 보호하는 방책에 대한 제시이다. 유대인들 또한 ‘자선’의 중요성 못지않게 자선받는 사람의 수치심과 존엄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미드라쉬(토라의 해설서)에도 몰래하는 선행의 중요성을 다시금 보여준다. “비밀리에 주는 선물은 화를 누그러뜨린다. 오하난 랍비는 말했다. ‘누구든 비밀리에 자선을 행하면 찬미받으시는 거룩한 분이 그와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서 화라고 불리는 죽음의 천사를 누그러뜨린다.’”
3. 예수의 많은 가르침은 일상적 언어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것의 속뜻은 대부분 ‘토라’와 관련되어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예수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시오.’라고 말했고, ‘청하시오, 찾으시오, 두드리시오’라고 가르쳤다. ‘보물’은 토라에 대한 올바름 깨달음이다. 유대인들은 일상의 삶을 넘어선 토라의 지혜를 얻는 것을 최고의 행복이자 보상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지혜’, ‘빛의 길’, ‘영원한 생명’ 등은 모두 ‘토라’를 지칭하는 용어였던 것이다. 예수가 ‘토라를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토라를 더하려고 왔다.’는 말도 이러한 유대적 배경에서는 예수 활동의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토라’에 대한 공부를 혼자서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좋은 스승을 만나 두 명의 제자들이 모여 토론과 논쟁을 통해 지혜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청하시오, 찾으시오, 두드리시오’라는 말도 유대 공동체의 교육문화를 통해 해석할 수 있다. ‘청하시오’는 좋은 스승을 찾으라는 말이요, ‘찾으시오’는 같이 공부할 학생을 구하는 일이며, ‘두드리시오’는 스승과 학생이 함께 토라의 지혜를 추적하라는 학습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유대사회는 교사에 대한 존중을 아버지보다 우선시했다. 아버지보다 교사를 먼저 대접하고 위급 상황에서는 교사를 먼저 구하라고 말했을 뿐 아나리 교사의 장례가 아버지의 장례보다 우선이라는 점을 말하는 유대 문헌의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수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는 제자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장례를 치르게 하라’라고 말했다는 구절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과 모순되는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대의 교사 문화를 통해 접근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례를 치르게 하라’에서 ‘죽은 자’를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 망자가 생기면 그 망자의 가족 또한 망자로 취급되어 유대적 규약에서 일시적으로 풀려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핵심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기에 아버지의 장례보다는 자신의 장례가 우선이라는 점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자가 ‘먼저 아버지의 장례’라고 말했을 때 자산의 장례가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5. 이렇듯 저자의 해석은 매우 독특한 유대적 문화와 상황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고 때로는 급진적인 성격까지 드러나게 된다. 유대적 배경 속에서 예수의 언행을 추적하는 저자의 시도는 특히 ‘엣세네 파’와 예수와의 관계를 추적하면서 더 놀랄만한 점을 밝혀낸다. 저자는 엣세네파의 <하박국서 해석>에 나타난 구절을 통해 엣세네 공동체와 예수가 한때 같은 공동체 일원이었으며 후일 서로가 결별하여 갈등을 겪었을 가능성을 예수의 언행을 통해 분석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선 <하박국서 해석>에 나오는 ‘진리’라고 불리는 사악한 사제가 예수였다고 추정한다. 엣세네 공동체는 추방당한 사제를 다음과 같이 공격한다. “그가 의로운 교사와 그의 의회 사람들에게 지은 죄로 하느님은 그의 적들의 손에 그를 넘겨 주었다. 그는 응징받을 것이며 그의 선택받은 자들을 사악하게 했기 때문에 목숨의 쓰라림으로 시간을 보낸다.”
6. 예수와 엣세네 공동체와의 연관성은 엣세네와의 유사성을 통해 파악된다. 엣세네파는 누구보다도 토라에 대하여 엄격하게 해석하고 엄정한 규약에 대한 실천을 요구했다. 그런 점이 예수에게도 나타난다. 예수는 마음 속의 간음도 실제와 똑같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이혼에 대한 엣세네파와 엄격성과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대교의 ‘힐렐파’는 ‘남편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의 아내와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토라를 유연하게 해석했다. 반면 엣세네파는 <창세기>의 노아 이야기를 통해 두 사람의 결합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예수가 말한 음행을 제외하고는 이혼의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점도 엣세네파의 결혼의 엄격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엣세네파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엄격하게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과 상당히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만약 맹세를 어긴다면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게(속되게)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모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7. 하지만 복음서에는 예수와 엣세네파와의 유사성보다는 대립과 갈등이 더 많이 등장하고 있다. 예수는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엣세네파의 교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엣세네파는 철저하게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초하여 구성된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빛의 아들들’이라고 칭했고 다른 집단들을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들의 문헌인 <단합체의 규례>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빛의 모든 자식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모든 자식들을 미워할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엣세네의 규례를 비판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들끼리만 돕고 남을 미워하는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점을 공격한 것이다.
8. 예수의 엣세네파에 대한 비판은 계속된다. 예수는 평온이 아니라 ‘칼’을 가져왔다고 말하며 가족들의 불화를 부추기는 발언을 한다. 이러한 언명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웃과의 사랑을 말하고 악인을 용서하라는 예수가 가족의 분열을 말하고 혼란을 제기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다. 예수의 말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엣세네 공동체’에 대한 경고라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부정하는 엣세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제자들에게 내리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그의 집의 사람들’은 엣세네 사람들을 가르키며 엣세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을 조장하는 언행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 속에서 엣세네파와 경쟁관계를 가졌던 에수 공동체의 성격과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9. 엣세네파와의 갈등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 더욱 심화된다. 엣세네파는 안식일의 규정을 철저하게 준수했다. 더욱 충격적인 규례는 안식일날 사람이 수원지에 빠졌더라도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예수는 그러한 엣세네의 폐쇄성을 문제시한 것이다. 안식일이라도 사람의 목숨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내용은 당시 유대교의 ‘할라카’(법규의 해석)에도 나타난다. 예수는 안식일에 대한 엄격함에 매몰되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엣세네파를 비판하였던 것이며 ‘안식일’을 제정한 신의 뜻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휴식과 가족과의 시간을 허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10. 엣세네파에 대한 경고는 계속 이어진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는 비유에서 ‘길에 떨어진 씨앗, 바위에 떨어진 씨앗,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며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이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예수 공동체가 좋은 땅이라는 점을 주장하면서 당시 그들과 경쟁 관계였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그리고 엣세네인들을 공격한 것이다. 특히 ‘길가에 떨어진 씨앗을 빼앗아 가는’ 사탄은 ‘엣세네파’라고 지칭될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예수는 엣세네파와의 유사성과 함께 핵심적인 가르침에서 대립되는 관점을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엣세네파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옛세네파의 유사성과 차이점은 예수가 엣세네와 결별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예수가 추구했던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어떠한 ‘하느님 나라’가 인간에게 진정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담겨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실질적인 개선이다. 규약과 형식에 지배되지 않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뜻과 그것을 실현하는 인간의 뜻이 결합된 완전한 세계에 대한 희망이다.
11. 예수의 언행과 비유는 상당히 축약된 표현과 심층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신학자들이 그것의 의미와 배경을 추적했다. 20세기 초 신학자 시바이쩌는 ‘예수 연구’는 각자가 갖고 있는 세계관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으르 강조했다. 그 후 예수의 ‘유대적 성격’이 강조되면서 예수의 활동을 유대적 배경에서 해석하는 다양한 시도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 또한 서구적 철학적, 문화적 전통의 시각에서 바라본 예수의 모습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철수의 <예수평전>은 철저하게 유대적 문헌에 기초하여 예수의 행적과 말씀의 의미를 추적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유대교 문헌의 표현방법은 조금은 낯설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유대교 문헌의 성격과 표현방식 그리고 그들의 전통적인 토라에 대한 의식과 표현의 핵심에 익숙해진다면 예수에 대한 관점은 새롭게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저자는 보여주고 있다. 철저하게 유대적 배경 속에서 파악되는 예수의 모습인 것이다.
첫댓글 - 예수가 유대인이고,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유대문화 뿌리 속에서 성장하였겠지. 예수가 전한 복음도 이웃 유대인을 향한 것이었고. 후에 제자들에 의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재생산해서 뻗어나간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뭐가 획기적인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