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극(탈놀이)에 담긴 사상과 세계관
1. 가면극(탈놀이)이 무속의 굿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면극에 담긴 사상 속에서 굿에서 극으로의 변화 과정을 추적한다. 우선 가면극에는 전통적인 ‘신명풀이’가 담겨 있다. ‘신명’은 신령이 외부에서 들어온다는 것과 내부의 생기가 충만하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신명은 신과 인간의 합일을 통하여 발생한다. ‘굿’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와 합일됨으로써 신의 공수를 받아 미래를 예측하거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형식을 보여준다. 이런 굿의 특징은 가면극, 특히 제의적 가면극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하회별신굿에서 양반은 부네와 결합하고 ‘강릉단오제굿놀이’에서 양반은 소맥각시를 시시딱딱이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는다. 이런 묘사를 통해 신과 인간, 양과 음의 화합을 통한 다산과 풍요를 추구하는 무속적 세계관이 완성되는 것이다.
2. 그러나 후대의 세속적 가면극에서는 이러한 ‘화합과 상생’의 형식이 파괴된다.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노장이 소무를 유혹하여 결합하지만 취발이에게 빼앗겨 쫓겨난다. 굿에서 보여주는 ‘싸움굿-화해굿’의 구조가 갈등의 해결이나 화합의 형태보다는 한 쪽의 패배로 결론나는 것이다. 또한 할미는 차별 속에서 죽거나 쫓겨나고 양반은 말뚝이에게 조롱을 받고 권위를 잃어버리며 노장은 속세에 부끄러움만 남긴다. 이러한 변화는 상업적 발전과 민중과 중인들의 성장에 따른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할미의 인간 창조의 기능과 노장의 중생 교화의 기능과 양반의 통치 기능이 부정되고, 첩의 생산기능과 취발이의 자녀교육의 기능과 말뚝이의 통치의 보조기능이 강조되는 것은 천신이 지배하는 고대신정에서 할미·노장·양반이 지배하는 중세시대를 거쳐 첩·취발이·말뚝이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근대 사회로 이행되어온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3. 가면극에서는 오래된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도래하는 ‘송구영신’의 오래된 굿의 세계가 재현되고 있다. ‘새로운 것’의 도래는 어떤 문명권이든 특별한 제의를 통하여 재현하고 있다. 그것은 공동체의 안녕과 지속을 위한 중요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늙은 할미가 죽고 젊은 소무가 선택되거나, 노장이나 양반이 취발이나 포도대장에게 젊은 여인을 빼앗기는 장면은 낡은 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것을 상징하는 제의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후대의 세속적 가면극에서 표현되고 있는 계급적이며 민중적인 특징까지 가미되어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혈통과 가문에 의해서 결정되던 귀속 사회에서 개인적인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획득사회로 전환되던 조선 후기의 시대상이 반영”된 것이다.
4. 이렇듯 후대의 가면극은 굿의 ‘상생-화합’적 형태가 ‘상극-갈등’의 형태로 전환된다. 이러한 갈등 구조는 가면극의 대표적인 3가지 마당에서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먼저 ‘양반마당’에서 신분적 질서를 강요하는 양반에 맞서 반항하는 말뚝이의 역할이 중시된다. 대부분의 가면극에서 양반들은 여럿이 등장하여 말뚝이를 누르려하지만 말뚝이는 혼자서 양반들을 상대하고 조롱하며 그들의 위선을 드러낸다. 거대한 말뚝이 탈은 민중들의 독립성과 저항성의 상징적인 모습이다. 경남 지역 가면극에는 같은 지역이면서도 양반에 대한 다른 태도가 나타난다. ‘수영야류’와 ‘통영오광대’에서는 영노가 결국 양반을 잡아먹는 것으로 끝나지만, ‘동래야류’와 ‘고성오광대’에서는 양반을 살려준다. 이러한 차이는 ‘상극-상생’에 대한 지역적 수용의 정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5. ‘노장마당’과 ‘할미마당’에서도 이러한 갈등 구조가 전개된다. 점차 노장의 권위는 취발이로 상징되는 세속인에게 파괴되고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가면극의 변화 속에서 안타까운 장면은 ‘할미마당’에서 볼 수 있는데. 할미는 영감과 만나 적극적인 구애를 보여주고 주도적인 행위를 하지만 결국 영감에 의해 버림받거나 첩과의 싸움 속에서 죽거나 쫏겨나게 된다. 이러한 장면은 가면극의 전승집단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기도 하며 또한 가부장적 사회의 사회적 편견이 표상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무당굿놀이에서는 할미가 신화시대의 대지의 여신이나 지모신이나 성모에 버금가는 여신의 모습을 보이지만, 신화적 질서가 붕괴된 세속사회의 탈놀이에서는 할미가 영감과 첩을 위한 속죄양이 되는 운명을 짋어지게 되었다.”
6. 가면극의 사상과 갈등 그리고 세계관은 익살스러운 ‘골계미’로 표현된다. 때론 내용상으로 비극적인 장면이 등장하지만, 표현의 방식은 결코 비장하지 않고 풍자와 해학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골계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은 골계미가 가면극에서 약점을 부각하거나 비정상인 모습을 과장하거나 불일치와 부조리를 통하여 표현되고 있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이상을 부정하고 현실을 긍정하거나 존재가 당위를 극복하면 골계미가 생성되는데, 이상과 당위에 대하여 느꼈던 위압감과 긴장감이 해소되고 정신적 우월감과 해방감을 느끼게 되면서 웃음이 유발된다.” 골계미는 풍자의 형태로 가장 잘 표현되는데 풍자는 언어를 반복하거나 동음이이의어 또는 유사음어를 통해 익살스럽게 구사된다. 때론 동일한 형식 속에 내용을 바꾸는 일명 ‘패러디’기법이 활용되기도 하였다. “하층계급이 양반문화를 섭취하되 자기화하고 부정적으로 계승하여 양반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탈놀이 전승 집단은 비판정신과 저항정신 및 창조정신을 지녔기 때문에 양반문화에 위압당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상층문화를 수용하여 독자적인 미학을 개척할 수 있었다.”
6. 현재 전승되고 있는 가면극은 과거 ‘굿’의 전통이 발전되어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굿의 세계가 원래 보여주고 있던 화해와 상생이라는 이상적인 세계 대신 점차 세속적이고 실제적인 현실에 대한 묘사가 극의 핵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면극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다양한 시점이 중첩되어 있고 모순적인 장면이 동시에 등장하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공연방식에서 나타나는 ‘총제와 집약’, ‘경쟁과 모방’, ‘서사와 비서사’, ‘파탄과 화해’의 형태 속에서 그리고 같은 극 속에서도 한 인물의 다양한 모습을 통하여 이러한 이율배반적 성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목적과 결과를 중시하고 형식논리를 초월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억압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표현하고 억압적인 대상을 공격하면서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첫댓글 - 고통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