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대한 정의는 매우 많다. 법을 빨리어로 담마(dhamma)라고 하는 데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뜻과 진리라는 뜻이 있다. 이러한 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대상의 법과 진리의 법이 있다. 대상의 법은 위빠사나 수행의 네 가지 대상으로 이것을 사념처라고 한다. 사념처의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이다. 사념처를 경전에서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이라고 한다. 진리의 법이란 이상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려서 얻은 무상, 고, 무아의 통찰 지혜다. 무상, 고, 무아는 존재하는 생명의 성품으로 더 이상 다다를 것이 없는 궁극의 진리다. 이처럼 법은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이며 이것 자체가 궁극의 진리로 이끈다.
법을 발견하면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법을 모르고 살면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법이 있어도 누구나 법을 얻는 것이 아니다. 법은 법을 얻으려는 의도가 있어야 법을 얻는다. 법을 얻으려는 의도는 선한 일의 공덕을 쌓은 사람이 인과응보로 일어난다. 인간은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모두 의도가 있어서 행위를 한다. 그러므로 선한 일의 공덕을 쌓아서 선하게 살려는 사람이어야 법을 얻으려는 의도가 일어난다. 이처럼 법이 없어서 법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현상계의 질서가 모두 법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이 눈을 가려 항상 드러나 있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이 먼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괴로움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네 가지 대상이란 나의 몸과 마음에 느낌과 법이 포함된 것이다. 인간이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네 가지 대상은 괴로움을 해결하는 해탈로 가는 문이다. 이 문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결코 번뇌를 소멸시킬 수 없다.
이러한 법이 있어도 진실을 알려는 의도가 없으면 법이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법을 알려는 의도가 없으면 아직 괴로움에 대한 절실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괴로움이 있지만 어리석으면 괴로움이 있는지 모른다. 인간이 추구하는 감각적 욕망이 사실은 괴로움이지만 이것을 즐거움으로 아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이다. 바로 즐거움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사념처 수행을 해서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서 아는 통찰 지혜가 나야 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선한 일을 한 공덕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수행에 앞서 선한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사는 세상에 바른 가르침이 있어도 바른 가르침이 아니다. 내가 바른 가르침을 대상으로 받아들여서 그대로 실천할 때 비로소 바른 가르침이다. 진리가 있어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가 진리의 가치를 무시하면 오히려 진리가 거추장스러운 장애로 전락할 수 있다. 내가 진리를 받아들여서 그대로 실천할 때 비로소 진리의 고귀한 정신이 살아나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 이러한 선택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바른 가르침이 없어서 따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으면 바른 가르침이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설령 눈에 들어왔다고 해도 하찮게 여기고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바른 가르침이 있어도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없는 법을 찾지 말고 있는 법을 찾아야 한다. 있는 법은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다. 인간이 사는 것은 정신과 물질이 있어서 산다. 정신과 물질이 사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으로 들어오는 정보로 산다. 그러므로 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자신의 감각기관에 있다. 나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들어오지 않아 괴로움이 없는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 이런 결과로 괴로움이 소멸한 자유를 얻는다.
출처: 한국 명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