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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섬세하며 세련된 조형미를 실현한 애상의 미학
신 항 섭 / 미술평론가
더러는 그림 앞에서 감상적이고 싶을 때가 있다. 유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애조가 깃들인 듯한 그런 선과 만나면 왠지 사연 많은 사람처럼 감상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고 싶어진다.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면 서러움이 된다던가. 서러움이야말로 미적 감수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첫째 요건인지도 모른다. 그 서러움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예술 속에 녹아들면 형언키 어려운 감동이 움튼다. 어쩌면 슬픔이란 인간을 가장 감성적이고 섬약한 동물로 만드는 신비의 영약인지 모른다. 그렇다. 슬픔은 인간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고조시키는 신비의 영약이다. 그래서 예술가에게는 적당한 서러움이 필요한지 모른다.
60대 이전의 세대는 운명적으로 슬픔과 동숙해왔다. 일제치하에서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서러움을 겪어야 했고, 6.25라는 처참한 동족상잔의 슬픔을 체험했다. 한 인간의 삶에서 이처럼 두 가지 큰 역사적인 비극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은 죄 없는 형벌이나 다름없다. 자의적인 선택이 아닌, 외적인 요건에 의해 억압당한다는 것은 한 인격체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무엇보다도 인격에 가해지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다. 외상은 비록 상흔을 남길지라도 일단 치료가 된다. 반면에 정신적인 상처는 일테면 인격에 대한 타격으로서 결코 지워지지도 아물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외부로부터의 상처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대개는 분노에서 체념 그리고 슬픔으로 전이된다. 상처의 형태가 변질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간에 한 인간의 힘으로는 거대한 역사의 격랑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는데 기인한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가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슬픔이 예술가의 미적인 감수성과 만나게 됐을 때 예술적인 가치로 전화되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6.25 전쟁은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혈연관계인 동족끼리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났건만 그 비극적인 사건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반세기가 넘도록 결말 없이 전쟁을 계속하는 곳은 적어도 지구상에서 한반도가 유일하다. 유혈비극은 끝났다지만 부모형지가 생이별한 상태에서 이념적이면서도 물리적인 대립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한반도야말로 세계인을 감동시키고 또 울릴만한, 본격적인 전쟁예술이 탄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이렇다 할 전쟁문학이나 전쟁미술을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아마도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데 있지 않을까.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고, 직접적인 대결상태 또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기에 긴장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직도 싸움의 한 가운데 서 있다는 팽팽한 긴장감이 모든 예술적인 상상력을 무디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 이념적이고 물리적인 대결이 해소되지 않은 미완의 상태에서는 어떠한 예술적인 상상도 공허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본격적인 전쟁문학 및 전쟁미술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미술계를 주의 깊게 보면 6.25와 관련한 예술적인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대적인 대치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전쟁 자체에 대한 그 어떤 제재일지라도 예술적인 성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조차 유보될 수밖에 없을뿐더러, 이 문제에 관한 한 본격적인 논의의 기회조차 마련할 수 없는 분위기다. 물론 6.25 미술에 관련한 전시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몇 차례 전쟁미술에 대한 기획전이 있었으나 심도 있는 평가나 비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역시 이념적인 대립 및 물리적인 대치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자칫 소모적인 논쟁으로 흐를 위험성 때문이었으리라.
김 한(金 漢)의 그림도 이와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이제껏 올바로 평가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그림의 제재는 향수, 즉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의 그리움이라는 것은 고향의 추억과 연관된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근원에는 6.25전쟁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향수란 일반적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일반적으로 고향이 그리우면 찾아가는 것으로써 해소될 수 있으니, 그리 대수로운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향수가 그림의 제재가 되는 경우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자칫하면 나약한 감상주의에 사로잡힐 수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향수, 즉 망향의 그리움을 제재로 하는 경우 서정성의 범주에서 맴도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하지만 그의 경우 향수는 고향을 찾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더욱 증폭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의 향수는 현실적으로 간단히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남북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현실적인 상황이 고향의 그리움을 해소시킬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개는 고향의 그리움에 집착하다가도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념하거나 단념하기 마련이다. 어차피 실현될 수 없는 일에 집착하는 것은 심신의 소모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거의 삶의 전부이듯이 고향에 대해 집착한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천동이다. 천동은 고기잡이 몇 척이 고작인 작은 어촌이고, 그가 사는 곳은 그로부터 자그마한 솔밭고개 하나를 넘어 자리한 아늑한 솔골이다. 솔골은 솔밭에 둘러싸인 채 20여호가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있는, 경주 김 씨들만 모여 사는 이른 바, 집성촌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꿸 수 있을 만큼 서로가 이웃집 사정에 빤했다. 그래서인지 그 자그마한 바닷가 마을에 대한 그의 추억은 남다르고 또 유별나다. 우년 시절에 일어난 조그만 일 하나까지 낱낱이 기억하는 것이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한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감수성은 장손으로 태어나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한 조부모의 극진한 애정에 의해 양육되었다. 특히 노년에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조부의 등에 업혀 넘나들던 솔골 고갯마루에 관련한 인상은 그의 뇌리에 가장 명료하게 인화돼 있다. 무슨 내용인지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던 조부의 흥얼거림은 어린 그에게는 항상 의문의 세계였다.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인데도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언어가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는 결코 조부의 그 난해한 언어의 세계에 잠입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곤 했다. 세상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처럼 알 수 없는 세계와 맞닥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조형세계에서 물상의 존재가 비현실적으로 자리하게 된 이유는 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심증이다.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자 작은 항구도시 성진항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성진에서는 외가에 맡겨졌다.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들과 떨어져 생활하게 된 셈인데, 외가에서도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거의 고기잡이배들이 들락거리며 제법 흥청거리는 항구에 나가 살다시피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어부들의 삶을 아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고기잡이를 하는 고깃배와 물자를 실어 나르는 상선이 오갈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한 항구의 정경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솔골포구 및 성진항과 관련한 많은 기억 중에서 고개 잡이를 나간 남자들을 기다리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가장 강렬했다.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라도 몰아치면 거친 파도가 야수처럼 날뛰는 바닷가에 나가 안절부절못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어린 가슴조차 불안에 떨곤 했다. 그러다가도 고깃배가 무사히 귀환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이었다. 어부들 가족의 애환은 그에게 인간 삶에는 자신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갖가지 희로애락이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해주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극단적인 인간 감정의 진폭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문학과 가까이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을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바다는 그에게 가장 좋은 조형의 선생이었다. 감수성이 남달랐던 그였기에 일상적인 바다풍경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바다를 보면서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배를 그리고 조개며 소라 게 따위를 무심히 그려댔다. 그 때마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어딘지 모른 미지의 세계를 넘나드는 꿈을 꾸었다. 그림을 통해 낯선 세상에 대한 꿈을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바다는 세상을 조형적으로 즉,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물 위에 떠다니는 배야말로 다양한 존재방식을 보여주기에 그렇다.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그 모양을 달리하는 배의 형태변화를 통해 입체적인 물상의 구조를 가장 실제적으로 파악하고 인지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보는 사람이 어떠한 곳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다채롭게 전개되는 입체적인 구조물로서의 배를 통해 인위적인 조형성에 대한 감각을 깨우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유소년 기에 사물에 대한 이해방식에서 이처럼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훗날 그가 예술의 길, 그것도 시각조형의 세계와의 만남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게 된 동기였지 않나 싶다.
그러나 화가의 꿈을 키우는 데는 어려움이 컸다. 무엇보다도 부친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중학교 졸업식에서 미술특기상을 받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친은 장남이 ‘환쟁이’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술학교에서 본격적인 그림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부친에 끌리다시피 지방 의학전문대에 입학하고 말았다. 부친은 장남인 그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결국 그 또한 아버지의 희망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자의식이 강한 그였다. 그러한 성격은 아마도 조부모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인해 형성된 편협한 시각의 단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부친과의 불화와 자신의 의지를 굽힐 수 없다는 생각에서 입학식만 마치고 가출하는 것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다. 무모한 짓이었지만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화가의 꿈을 접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 자체를 잃는 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더욱 열심히 그림 그리는 일에 몰두하는 한편 문학서적을 탐독하면서 예술가가 되겠다는 의지를 키워나갔다.
그의 선택은 아주 오랜 동안 시련만을 안겨주었다. 화가는 가난과 동숙을 하게 마련이라지만 부모의 슬하를 벗어난 현실은 생각보다 몹시 험난했다. 그래도 한 순간도 화가로서의 삶을 후회해본 일이 없다. 고생을 낙으로 살아온 것이다. 생활이 궁핍할수록 믿을 수 있는 곳은 그림뿐이었다. 학업을 중단한 채 그림과 문학서적을 읽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어차피 가출한 마당에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코 화가로서 입지를 굳히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날 것을 결심했다. 6.25 전쟁은 그에게 고향을 떠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단신으로 월남했다. 물론 조부와 부모형제들이 고향에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월남 후 연고가 전혀 없는 그로서는 손재주 하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몰두해온 덕에 미군부대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으로 간신히 끼니를 해결할 수는 있었다. 그렇게 4년간이 지났을 무렵 뜻밖에도 부모형제들이 부산에 살고 잇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길로 부산에 가서 부모님과 상봉했다. 부모님과 여동생, 막내 남동생이 함께 월남했고 둘째 동생이 조부모님과 고향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동생에게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셈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향수는 망향가로 남게 된다. 술이 거나하면 그 특유의 미성으로 ‘가고파’를 부르곤 했다는데, 그 가곡이야 말로 망향가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는 성악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어 내로라하는 성악가들조차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누군가가 성악에 대한 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차렸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벨칸토 창법의 성악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어디 그뿐인가. 그에게는 문학적인 취향과 소양이 있어 시와 산문을 쓰기도 한다. 수년전 화문 집을 낸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화가이면서도 그림에 국한하자 않고 다양한 타 분야 예술에 대한 식견을 높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 작은 결실이다. 타 분야 예술에 대한 애정 및 소양은 그 분야 전문 예술인들과의 교우를 통해서도 섭취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는 상황 속에서도 자나 깨나 꿈꾸어오던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피난민으로서의 어려움은 말이 아니었으나 천신만고 끝에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학교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이미 예상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학비는 고사하고라도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할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출석일수보다 결석일수가 많았고, 결국 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중도에서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토록 열망하던 화가의 꿈을 끝내 접어야만 하는가 생각하니 앞길이 아득했다. 일생 가운데서 그때만큼 절망적인 순간이 따로 없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림만은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붓을 잡았다. 이래도 저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나 생활고 때문에 그림을 포기할 수는 없다며 자신을 다그친 것이다. 그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1957년 제6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써 화가의 꿈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런데 공모전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연줄이 없고서는 입선조차 얼마나 힘든가를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모두 다섯 차례 입선에 오르는데 그쳤고, 국전과 관련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을 보고 나서 더 이상 미련을 두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 공모전 출품을 포기한다.
이와 같은 결심의 배경에는 결혼과 더불어 식솔을 거느리게 된데 대한 책임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이남일녀를 두었는데 적어도 가장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직업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배운 것이라고는 그림밖에 없으니 다른 일은 할 수 없었다. 간판점, 무대장치, 초상화 등으로 그림과 연관된 일을 찾아 나선 것도 그림에 대한 미련을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미군초상화를 그렸던 인연으로 월남에 갔다. 물론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삼 년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안정된 생활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우 있는 생활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한 가정을 꾸려나갈 정도였다. 생활에 전념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가슴 한구석이 비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은 순수미술에 전념하지 못한 채 상업화나 그리는 현실적인 삶을 극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공허함이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안정을 찾지 못한 채 몇 개월간 그리스와 태국을 떠돌아다녔다. 그의 나이 이미 50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구축해야만 하는 시간을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외연에서 떠돌기만 했으니, 꿈은 점점 멀어져 가는 듯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찾기로 다짐했다.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붓을 들면서 개인전에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979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림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대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개인전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래도 개인전은 스스로에게 하나의 짐이자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개인전 이후 작업에만 전념하면서 거의 2년마다 개인전을 열게 되었고, 그로부터 10여년 만인 1991년 상업화랑(정송갤러리) 초대전 제의가 들어왔다. 마침내 상업 화랑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팔릴 수 있는 그림이 되었음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나서 1995년 제7회 이중섭미술상(조선일보 주취)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림을 시작한 이래 비로소 한 작가로서의 작품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화가 김 한이라는 이름이 한국미술계에 등재되는 순간이었다. 이중섭미술상 수상은 한 작가로서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 작가가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했다는 데 대한 미술계의 객관적인 인정일 따름이지, 어떤 형태의 결과도 아니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안다. 실제로 이중섭미술상 수상 이후에도 그의 신변에 큰 변화는 없다. 다만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많아졌다는 사실 정도를 느끼고 있을 정도이다. 그로서는 그 시선을 외면할 수 없다. 거기에 무언가 의미 있는 답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선한 인품의 소유자여서 처음 만난 사람들도 단박에 그 따뜻한 인간미에 반하고 만다. 그래서 교우관계의 폭이 없다. 지인 중에서 한 시인은 그를 가리켜 ‘숫배기’라고 표현했다. 정말 그렇다. 세상의 물정에 그다지 밝지 못한 것은 그렇다 치고, 외모에서도 그저 한없이 선량하기만 한 소년 같은 인상이다. 그래서일까. 한 마디로 ‘죄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에게 그처럼 죄 없는 기름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누군가가 선한 인품의 그에게 내린 축복이자 선물이지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그림에서만큼은 현실감각이 없다. 고희를 넘긴 오늘까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관한다. 그림이 무엇인가. 만일 업보가 있다면 그림 속에서 고향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고향을 버리고 온자에게 부여된 향수는 그대로 업보이고, 그림으로 고향얘기를 전함으로써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하는지 모른다. 그렇다. 고향은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기 전에 자신의 예술적인 감성을 살찌워준 텃밭이었다. 그러므로 고향에 대한 빚이 있는 셈이다. 혹여 그 빚은 죽어라 고향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는 것으로써 갚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닌가. 그래서 푸른 빛깔로 출렁이는 고향만을 노래하는 것인가.
반세기 동안이나 고향을 그리워했으니 이제는 속죄가 됐음직도 하건만 그는 매양 그 언저리에서 떠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의 그림에서 고향은 하나의 지워지지 않는 전설이 되었고 설화가 되었고 화석이 되었다. 그림 속에서 그의 고향은 우리 모두에게 고향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하나의 설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우리 앞에 제시되는 설화는 언제나 푸른 빛깔로 출렁인다. 그의 그림에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는 조형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푸른색이다. 왜 푸른 색깔인가. 이미 언급했듯이 그림의 제재는 향수, 즉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의 고향은 바닷가에 연한 조그만 마을이고, 낮은 솔밭언덕 하나를 넘으면 고기잡이 배 몇 척이 고작인 한가한 포구가 있다. 유년시절의 행동반경은 그 정도의 풍경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및 중학교 때는 고향으로부터 좀 멀리 떨어진 성진항에서 보냈다. 그의 어린 시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온통 바다와 관련된 풍경, 풍물뿐이었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듯이 푸른색은 바로 고향을 상징하는 바닷물 색깔인 것이다. 동해바다의 그 짙푸른 남빛을 일상적으로 눈에 익혀온 탓이지 싶다. 고향=바다=남빛이라는 하나의 등식이 그의 뇌리 속에 깊이 심어진 것이다. 고향을 떠올리면 곧바로 짙푸른 남빛 바다가 머릿속에 가득히 출렁인다. 그러니 어찌 고향그림 속에서 푸른 색깔이 빠질 수 있으랴. 그런데 그 푸른색은 반드시 바다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 푸른색이 바다와 하늘을 구분하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아 도무지 푸른 색깔만으로는 분별할 수 없다.
그렇다. 푸른색은 바다이면서 하늘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고향 솔골마을 및 포구의 풍경은 현실적으로 갈 수 없는 곳이다. 비현실적인 세계가 돼버린 것이다. 더구나 고향을 떠난 지도 반세기가 훌쩍 지나갔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이미 다섯 번이나 변했을 그처럼 오랜 세월이다. 아무리 기억이 뚜렷하다지만 반세기 이전의 시간을 소급하여 그 실체를 조합하여 복원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한 것은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해야만 하는 까마득한 과거의 잔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푸른 색깔이란 하늘의 색깔이자 동시에 바다의 색깔이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좀 더 확대 해석하면 하늘은 우주이다. 우주의 색채 역시 푸른 색깔이다. 우주는 무주천하이다. 네 것 내 것을 경계 지을 수 없는 곳이 우주이다. 우주처럼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세상, 그 곳이 바로 그의 고향하늘인 동시에 서울에 살고 있는 그의 현실적인 하늘이다. 고향의 하늘과 현실적인 하늘에는 경계가 없다. 그러기에 새들은 경계 없는 하늘을 날아 남북한을 자유롭게 오간다.
푸른 색깔은 그에게는 이념이나 사상의 대립 그리고 물리적인 분단 및 대치상태를 뛰어넘는 초월적인 공간이다. 아울러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상징적인 색깔이다. 과거(고향)의 하늘과 현실(서울)의 하늘이 하나이듯이 고향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염원을 담은 색깔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푸른 색깔은 마음의 상처를 상징하기도 한다. 푸른 멍 자국과 같은 색깔인 것이다. 푸른 멍은 속의 상처를 겉으로 드러내 준다. 부모 형제를 남겨 둔 채로 고향을 떠나왔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슴의 멍이다. 훗날 부모와 형제를 만났다고는 하지만 손아래 동생과는 여전히 이별한 상태이다. 동생의 존재가 그이 가슴에 또 하나의 멍을 남긴 것이다. 그 멍을 그림으로 그리고 색채로 풀어낸 것이 바로 푸른 색깔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 푸른색을 제외하면 도무지 그림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이다.
푸른 빛깔이 그렇듯이 소재 및 제재 또한 고향의 풍경 및 마을 사람들의 일상으로 한정한다. 어쩌다 간헐적으로 지방에라도 가는 날이면 현실적인 풍경을 기린 일이 있기는 하다. 그런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다. 그냥 나들이 삼아 한두 점 그린다는 기분이다. 화실에 들어와서는 다시 고향의 이미지로 되돌아간다. 그림의 대다수가 시종일관 고향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집요하게 일정한 대상에 몰두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이렇듯이 어린 시절의 추억과 관련된 고향의 얘기에 한정하다보니 그림의 내용 역시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의 그림은 풍경화의 한 표현양식을 따르고 있다. 바다와 배와 집과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성립시키는 주요한 소재 및 대상이다. 언제나 솔골포구 중심으로 한 그 주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얘기들이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사랑하는 남녀, 가슴을 드러낸 소녀들, 아낙네와 이이들, 어린 소년이 한 명 또는 청춘 남녀 두세 명씩, 때로는 대여섯 명이 함께 등장한다. 인물은 그의 그림에서 이야기, 즉 내용을 이끌어 가는 주체가 된다.
초기의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소년소녀이거나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처녀총각이었다. 낭만적인 감정이 앞서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이끄는 데는 역시 꿈과 사랑의 계절을 지나는 소년소녀 또는 젊은이들이 제격이었던 탓이리라.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아낙네와 아이들이 함께 하게 된다. 이때 아이들은 게, 물고기, 소, 닭, 소라 따위의 바닷가나 집안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과 놀이를 하는 모습이다.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바닷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흥겨운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고향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환상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초기만 하더라도 머지않아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기대 탓인지 비교적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로 넘쳤다.
그러나 해소되지 않는 그리움과 기다림이 아득한 꿈으로만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기게 되자 그림의 내용은 물론이요, 제재로 변화한다. 통일의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지고 분단이 고착되어 가는 징후를 느끼게 되면서 그림의 정서가 바뀌기에 이른다. 아름답게만 보이던 소년소녀 그리고 청춘남녀가 희희낙락하던 정경들 대신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림 속에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여인과 아이들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들인데,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고기잡이를 떠난 남편이나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와 함께 그림의 정서도 어딘가 쓸쓸하고 처량하게만 느껴진다. 이처럼 그림의 내용 및 정서가 기다리는 사람들로 채워지면서 구성도 환상적으로 변해 간다. 그의 그림ㅁ에서 중요한 조형적인 특징의 하나인 환상적인 구성이 강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현실적인 감각을 상실함으로써 일체의 물상은 자유롭게 존재한다.
푸른 색깔이 그렇듯이 공간적인 해석에서도 현실을 초월하여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무한 공간을 상정하고 있다. 땅과 바다와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 무한공간에서 온갖 물상은 자유롭게 유영한다. 고기잡이배는 꿈의 섬처럼 하늘을 떠다니는 것이다. 아니, 거기가 하늘이라는 근거는 없다. 더구나 바다라는 근거도 없다. 그저 파란 공간에 떠있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 파란 공간은 현상계를 벗어난 무한한 우주공간일 수도 있다.
여기에 대응하듯 그림에 등장하는 물상은 그 존재방식이 자유롭다. 다시 말해 현상계의 모든 물상은 땅 위에 기반을 두고 그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전후좌우상하의 방향은 수평의 땅을 기축으로 하는 설정이다. 그러기에 무게를 가지는 일체의 물상은 땅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설령 허공을 날아다니는 새 곤충 따위도 일시적인 비행일 따름이지, 땅 위에 존재한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이러한 형상계의 존재방식을 부정이라도 하듯 전후 좌우상하의 방향감각과 무관하게 물상을 배치한다.
뿐더러 물상의 크기 비례 균형 따위조차 무시한다. 물상이 존재하는 기축이란 그에게는 오직 사각의 평면공간, 즉, 캔버스일 따름이다. 그렇다. 그는 실상의 존재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집들이 바다 한 가운데 섬처럼 ㄸ 있는 듯하고, 배는 하늘 또는 우주를 부유한다. 물고기들이 거꾸로 서는가 하면 달이 배와 같은 크기로 자리한다. 어디 그뿐이랴. 땅은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사람 나무 물고기 배 집 따위가 푸른 색깔의 마한공간에 배치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림에 등장하는 일체의 물상은 유소년 시절의 추억 속에 함께 하는 것들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실상의 존재방식과는 무관하게 배치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일체의 물상은 분명히 현상계에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했던 것들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시간의 일이다. 과거의 일인 것이다. 과거는 실재했던 시간이면서도 현실에서 볼 때는 손에 잡히지 않는 세계인 것이다. 단지 그 자신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할 뿐인 그런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현실감각과는 동떨어진 지나간 시간 속의 일들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비현실적이다. 현실감각에 구애받지 않음으로써 그 자신의 조형감각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는 근거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자의적인 구성 및 배치, 형태의 재해석, 현실을 떠난 자유로운 공간개념이라는 조형적인 특징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푸른 색깔이 경계가 없는 무한공간을 상정하듯이 물상의 자유로운 존재방식 또한 현실을 뛰어넘는 추월적인 경계에 가 닿는다. 즉, 환상적인 세계가 전개되는 것은 그 자신의 꿈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꿈이란 현실적인 일체의 장벽을 뛰어넘는 그런 자유로운 세상을 의미한다. 고향을 찾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그런 세상 말이다.
그의 그림세계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형태해석이다. 비현실성이 강조되는 푸른색, 초현실적인 공간개념과의 조화를 위해서는 물상의 형태 역시 거기에 조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구에 직면한다. 만일 사실적인 형태들이 초현실적인 공간에 자리하게 된다면 시각적으로 불편하다. 사실적인 형태들이 거꾸로 선다고 가정했을 때 불안정한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형태를 비사실적으로 재해석하면 문제가 없다. 왜곡되거나 변형된 형태가 현실적인 공간개념을 벗어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초현실적인 물상의 존재방식과 환상적인 구성방식을 따르는 그의 그림세계가 성립되는 요건은 이와 같은 몇 가지 조형적인 특징에 있다. 실재하는 물상의 형태를 재해석하여 환상적으로 꾸미는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성의 묘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구성의 틀은 언제나 하나의 스토리가 전제된다. 설명적인 내용이 필요한 것이다. 스토리가 없이 단순히 소재의 나열이고 배치일 뿐이라면 조금은 싱거운 그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반드시 설화적인 스토리를 가진다. 비록 그것이 실제에 근거한다지만 손에 닿지 않는 아득한 과거의 일이고 보면 그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에게는 이미 현실과 연계할 만한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그것은 반세기라는 시간의 더미 속에 묵혀진 전설 또는 설화의 영역에 갇힌 셈이다. 그는 마치 추억의 파편을 하나씩 모아 단편적인 스토리를 만들고자 하는 듯싶다. 단편적인 얘기들이 모이게 되면 한 편의 서사시가 되리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설령 그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한정된 것일지라도 술회형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감으로써 비극적인 한 시대를 증언한다는 의미에 이를 수 있으리라.
이야기 형식의 그림을 견고히 뒷받침하는 것은 문학성이고 그 중에서도 서정성이다. 그의 그림에는 운문이 있고 동시에 산문이 있다. 이야기를 엮어가자면 필히 서술적인 구조의 산문형식의 내용이 필요하고, 농축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구하자면 간명하게 압축한 서정미가 필요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청소년기에 문학서적을 탐독하는 시간을 통해 그 자신의 인생관을 문학적인 이해의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문학과의 유대가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한 예술가로서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인간 삶에 관한 의문을 스스로 풀어갈 수 있는 해법이 바로 문학에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 문학적인 향기가 빠져 있다면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그림에 문학적인 이해를 보탬으로써 보다 더 깊은 사유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시를 짓고 산문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문학적인 정취를 담는데 아주 긴요한 요건이다. 설령 시와 산문을 쓰지 못할지라도 독서를 통ㅇ해 문학에 기반을 둔 사유의 세계를 거느린다면 문학적인 구조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문학은 다름 아닌 문자언어를 빌어다 쓰는 우리들 인간 삶의 문제에 대한 통찰이다. 인간 삶의 문제를 제재로 하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깊이가 있게 마련이다. 순수미를 추구하는 그림과는 다른 차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적인 가치 면에서 문학적인 제재를 다룬 그림이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인간 삶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는 그림이라면 아무래도 문학적인 정서가 담긴 쪽의 몫이다.
그의 그림은 고향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애환을 하나의 짤막한 이야기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산문체의 형식이 필요하다. 여기에다 간결한 화면구성을 위해서는 시적인 함축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조형적인 해석과 결부시켜 설화형식의 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 및 대상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는데, 이는 고향이라는 추억 속의 세계에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에 의혼하고 있는 고향얘기를 풀어내는 한 그 무성도 더 보탤 것이 없다. 소재 및 대상이 정형화됨으로써 내용 또한 한정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의 그림과 마주하고 있으면 무언가 자꾸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그림 속에 들어있는 대상 및 소재들이 얘기를 지어내면서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그림 속의 대상 및 소재들로 하여금 대신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그의 그림은 시와 같은, 때로는 짤막한 산문과 같은 문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읽히는 것이 많다. 그 소재들을 우리들 자신의 경험 및 추억과 결부시켜 우리들 개개인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바다 하늘 해 달 별 구름 파도 사람 물고기 나비 새 고깃배 소나무 소 닭 고양이 강아지 게 소라 집 꽃 과일 교회 따위의 소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하나의 그림에서 어떤 소재가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따라 그림의 내용이 달라진다. 다시 말해 그림마다 조금씩 다른 소재들이 조합됨으로써 내용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그 하나하나가 시임은 물론 수필이고 엽편소설이다.
이야기가 있는 그림은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제외하고도 마음으로 읽는 재미 하나를 덤으로 얻는 것이 된다. 시각적인 즐거움 이외에 사유의 세계를 거니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 사유의 세계란 희로애락이 담긴 곡절 많은 인간 삶에 대한 통찰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림이 단지 시각예술에 머문다면 얼마나 단조로울 것인가. 보이는 것 이면에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고, 그 의미를 담고자 노력한 예술가의 정신세계와 만나는 일이야말로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기쁨의 하나이다.
문학적인 향기는 다름 아닌 이와 같이 그림 속에 담긴 한 예술가의 인간 삶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 및 통찰에서 비롯되는 사상이자 철학적인 내용인 것이다. 그 사상 또는 철학이 서정석인 이미지와 만나면 시가 되고, 스토리를 내포한 구성적인 이미지와 만나면 산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시와 산문이 담긴 그림이다. 그런데 그 시와 산문은 모두가 애상이고 애조를 띠고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환성적인 이미지에는 낭만적인 요소가 강했다. 소년소녀들이 새와 게 소 따위와 어우러지면서 즐겁게 노니는 듯한 정경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막연한 유토피아의 환상을 갖게 할 정도였다. 그리움에 찌든 현실을 잊고 싶은 보상심리의 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머지않아 고향에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남북통일에 대한 한 가닥 희망마저 놓을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환갑에 다가서면서부터는 희망적인 정서는 현저히 희박해진다.
그에게서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남북통일에 대한 기대가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는 현실적인 상황 때문인가, 아니면 그 자신의 나이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 때문인가. 그러서는 이 두 가지 상황을 자각함으로써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기대를 차츰 저버리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상황은 그의 그림을 더욱 환성적인 세계로 이끌어 가는 요인이 되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형태가 이전보다 한층 단순화된다. 형태의 단순화는 필경 평명적인 이미지로 이행하게 된다. 이미지의 평면화는 화면구조의 단순성으로 나타나면서 동시에 구성적인 형식미를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인물을 포함하여 그림의 내용을 형성하는 소재들은 그 형태미가 하나의 틀로 고정된다. 윤곽선도 극히 단조로워진다. 1990년대에는 윤곽선이 거의 직선에 가까울 만큼 아주 간결하게 처리되고 있다. 이처럼 단순화되기 시작하더니 거의 추상적인 평면구성 직전에 까지 이른다.
여기에 이르면 현실감각은 사라지고 없다. 그의 작업이 변해오는 과정을 보지 못한 채 90년대 후반의 작업과 마주하면 고향의 정서를 감지하기 어렵다. 비구상적인 이미지가 지배하는 구성적인 표현형식으로 간단히 치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으로 읽을 수 있는 형태를 지양하여 조형적인 순수미만을 탐닉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 고향의 정서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의지의 표현인가. 반세기 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고향에의 그리움으로부터 과연 그처럼 간단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2000년대는 그에게 가장 극적인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예고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오랜 기다림 끝에 온 희소식은 반세기 동안 지켜온 고향의 그리움에 대한 적절한 선물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동생과 상봉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북한 이산가족 교환방문의 일원으로 선정돼 평양에 가서 동생과 만나는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유명시인이 된 동생과의 만남은 반세기 동안 그를 억압하던 모든 굴레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런 극적인 계기는 그에게 또 한 차례의 조형적인 변화를 모색할 것을 획책한다. 색채에서 확연한 변화가 온 것이다. 푸른색 중심에서 밝고 화사한 노란색 및 붉은 색 계열이 전체적인 색채이미지를 반분하는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 그도 고희를 넘겼다. 자연연령 70세이면 노경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되는데, 연령변화가 그림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세상을 보다 포괄적으로 보게 됨은 물론이려니와 인생관에서 확고한 주관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림에서 형식적인 변화는 크게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의식의 심화라는 측면에서는 이제야말로 새로운 경계에 들어설 수 있는 시점이다.
그림이 시각예술이라고 해서 반드시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추상적인 표현이 보편화된 이래 그림은 감정 무의식 잠재의식 따위의 비가식적인 인간의 내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구체적인 형태묘사를 위주로 해온 사실주의 이전의 표현양식과는 다른 조형세계가 전개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추구해온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면서 반추상에 가까운 작업 역시 조형개념의 획기적인 변화의 한 결실인 셈이다.
이처럼 추상성은 20세기 미술의 무한한 영역확장을 가능케 함으로써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조형세계에의 체험을 가능케 했다. 그의 작업 또한 이와 같은 추상성에 대한 이해로부터 독자적인 조형세계에 이를 수 있었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만 하더라도 한창 앵포르멜이라고 하는 비정형의 세계, 즉 추상이라는 새로운 미학이 풍미하고 있었다. 세계2차 대전 직후에 시작된 앵포르멜은 액션페인팅 등과 함께 일련의 추상표현주의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한국에 이들 추상회화가 들어온 것은 1950년대 후반의 일로써,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 새로운 표현에 굶주리고 있던 젊은 작가들 및 지망생들을 단숨에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기운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사실주의 작업을 하는 작가들까지 하루아침에 형태를 버리고 표현이라는 차원에서 아무런 제약이 없는 추상미술운동에 흔쾌히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앵포르멜 또는 액션페인팅에 동조했던 작가들 중에서 상당수는 다시 구상으로 회귀하고 만다. 추상미술에 대한 정확한 정보 및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단순히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시대의 흐름에서 낙오되는 듯한 불안감에 맹목적으로 빠져든 경우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순수추상을 체험한 작가들에게는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은 조형이라는 문제, 즉 독자적인 형태해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동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추상세계에 대한 체험은 훗날 한 작가로서의 독립된 조형세계와 조우하는 데 따른 긴요한 여건조성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경우도 이러한 예에 속한다. 만학이었단 그가 대학에 입학도 하기 전에 이미 앵포르멜의 거센 물결이 화단의 일각을 장악해들고 있었는데, 그 또한 시대의 흐름을 좇았다. 1995-57까지 수학한 그의 대학시절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보냈다.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10년 가까이 앵포르멜 미학에 현혹되고 말았다. 대학 생활과 겹치는 이 시기는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어야 했건만 실제로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학비마련은 물론이요.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일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생활고에 시달리던 나머지 대학생활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 아픔 속에서 앵포르멜과 만났기에 생명의 긴장을 공간과 마티에르에 의탁하여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그 자유로운 조형어법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어딘가에 매달리고픈 심정이었던 그로서는 그처럼 분방한 표현의 자유가 주는 매력에 간단히 사로잡혔던 것이다. 초기에는 형태가 들어가는 비정형의 세계를 추구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순수추상으로 넘어간다.
1960년대 중반의 작업은 전체적인 이미지가 단출해지면서 둔탁하고 두터운 마티에르의 선이 공간을 장악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이때에 이르면 추상적인 공간은 강렬한 인상의 검붉은 색조에 의해 지배된다. 이처럼 무거운 이미지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그대로 반영된 내면적인 아픔의 토로였으리라 짐작된다.
현재 사진 자료만 남아있는 1950년대 말 작업, 즉 대학을 갓 졸업한 1958년 이후 작품을 보면 화면을 여러 단위로 구획한 다음, 그 안에 반달이나 초승달과 같은 형태의 기하학을 패턴으로 한 이미지들을 들어앉히는 한편 쪽배와 같은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경우에는 쪽배 대신에 인물을 배치하기도 한다. 비교적 온건하고 이미지가 전개되는 가운데 전체적인 구성이 복잡하다. 그럼에도 시각적인 이해는 쉬운 편이었다. 형상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고향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이미 그림의 중요한 제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고향과 관련한 구체적인 형상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다. 1960년대 말엽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거의 작품이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그가 월남에서 3년 가까이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던 시기에 해당한다. 월남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수년 동안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그리고 그리스 태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방황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다 보니 그림을 거의 그릴 수 없었다.
자연연령 40대라면 한 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면서 확고한 기반을 닦아야 할 때이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붓을 놓음으로써 자연히 화단활동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1980년대 이후 독특한 자기세계를 확립하고도 아직까지 그가 이룩한 성과에 따른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시기를 허송세월로 보낸 데 따른 당연한 결과이다. 거의 작업을 하지 못한 채 허송세월을 하고 있을 때는 아예 화가의 길을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 그림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모양이다. 결국 그는 오랜 방황과 침묵 끝에 본연의 길로 되돌아 갈 것을 결심한다. 그러고 나서 1년도 채 걸리지 않은 짧은 동안에 작업에 전념하여 첫 개인전을 연다.
1979년 11월 서울 관훈동에 있는 희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은 김 한이 무고함을 알리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이때의 작업을 구도에서 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 가령 소라 해바라기 또는 인물의 머리 부분을 전면에 배치한 다음, 그 뒤쪽으로는 바다와 섬 등대 고깃배 초가집 교회당 오징어 바닷고기 갈매기 달 따위를 배치하는 형식의 풍경화였다. 그 구성으로 보아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솔골포구 또는 성진항의 추억을 재생산해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화하거나 세부를 생략하는 조형기법을 구사함으로써 형태가 변형되거나 왜곡되는 가운데 환상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재들의 존재방식은 현실적인 공간개념에 합당했다. 배나 부두 따위의 전면에 재치된 소재 및 대상은 대체로 사실적인 공간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가능한 한 실제상황을 실감나게 재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반영된 작업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고요한 수면 위에 정박한 고깃배들의 단조로운 형태미는 한가로운 바닷가의 인상을 잘 드러내주었다. 그는 이때만 해도 거의 동일한 소재 및 동일한 구도를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단지 소재의 위치와 크기만을 바꾸는 정도로 여러 점을 유사한 시점에서 그렸다. 기억에 의존하여 고향 앞 바다, 그 조그만 포구를 재현하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 그처럼 거의 비슷비슷한 구도의 작업을 반복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색채이미지는 하늘 및 바다의 색깔인 푸른색과 땅의 색깔인 갈색을 기조로 하는 이분법적인 색채개념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 탓에 퇴색한 탓인지 색감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겁다. 닻을 내리고 부두에 정박한 배들의 그 정적인 구도는 현실적인 감각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어딘지 모르게 무겁고 음울한 정서가 지배하는 가운데 형태는 비교적 단순하게 처리되고 있다. 이미 볼 수 없는 과거의 풍경이기에 그의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어 재조립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자연히 개략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 마련한 첫 개인전은 70년대를 마무리하면서 동시에 창작생활에 전념하는 그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에서 시작된 그의 열정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적어도 2년마다 개인전을 여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한 작가로서의 기반을 이 10년에 걸쳐 마무리 지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독자적인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을 확고히 구축한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1980년대의 작업은 서서히 구체적인 묘사방식을 버리면서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정서를 지향하게 된다. 달콤하고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보는 듯하다. 어린아이들과 처녀들이 그림의 내용을 주도하면서 설화 또는 전설을 형상 언어로 재현하는 듯한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푸른색 바다를 배경으로 꿈처럼 떠있는 하얀 색깔의 어선들이 평면적인 이미지로 단순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색채이미지는 청색 일변도이다. 그리고 화면을 분할하여 구성적인 이미지로 결합하는 따위의 방법을 구사함으로써 현실성이 거의 소멸하는 과정에 이른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앵포르멜의 한 영향으로 보이는데,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확정되는 평면구성의 조형어법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평면적인 구성을 특징으로 하는 작업을 1980년 작 ‘정박지’ 한 작품으로 그친다.
80년대의 작업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가 지배하는 경향이다. 그런데 특기할 점은 ‘정박지’에서 보여준 청색 중심의 색채이미지가 이 시기에 서서히 형성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1년 서울 관훈 미술관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담긴 그림, 즉 문학성이 짙은 제재로 들어가고 있다. 그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추억에 의해 성립되는 서정적인 그림세계의 기초를 마련되고 있었다. 타향살이가 고달프다하지만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데는 단지 아름다운 추억 때문만은 아니다. 그로서는 아름다움보다는 형제를 두고왔다는 인간적인 죄책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고향의 바다를 노래하는 것으로써 그 죄스러움은 대신할 수 있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고향을 제재로 하는 그의 그림은 기억에 의존함으로써 완전한 재현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들로만 조합한 고향정경이 그려지는 것이다. 고향의 정경은 스케치하듯 간결하고 명쾌하게 전개된다. 어린 눈에 비친 고향의 정경은 그대로 꿈결처럼 정겹기만 하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그 자신의 체험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것들이다.
그러한 이미지들이 스케치작업과 같이 거침없는 선묘로 표현되고 있다. 거친 듯하면서도 유려한 율동을 수반한 자유로운 선의 유희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낭만적인 감정이 그리 유도하는 까닭인지 흥겨움을 유발하는 곡선이 많이 이용되고 있다. 파도라든가. 구름, 섬 따위의 이미지는 리듬이 실린 선명한 곡선에 의해 그려진다. 물결치듯 춤추듯 경쾌하게 움직이는 커다란 곡선은 흥겨운 기분을 유도하는 것이다. 인물을 포함하여 나무 꽃 게 오징어 물고기 따위의 형태는 대부분 율동미가 강한 곡선으로 묘사된다.
검은색으로 형태의 윤곽을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써 시각적인 이해가 쉽다. 윤곽선은 모두 과장된 곡선으로 처리되는데 이때 전체적인 이미지는 아동화와 같은 비현실성이 강조된다. 얼굴이나 물고기 따위에서 비례를 무시한 채 실제보다 훨씬 크게 과장하는 수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실제를 왜곡하고 변형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갈 수 없는 지나간 시절을 아름답게 묘사하려는 것은 고향에 대한 애정의 한 표출이다. 희망적이고 낭만적인 감정은 어린 시절의 꿈과 무관하지 않다. 바다를 통해 먼 세상을 꿈꾸어온 유소년기의 감수성으로 회귀하고 싶은 열망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장법은 어린 시절 고향의 인상 및 추억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으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 아쉬움은 대체로 실제보다 아름답게 꾸밈으로써 보상받는 것이다.
이때부터 청회색 암청색 회청색 따위의 푸른색 위주의 색채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푸른색 중심으로 꾸며지는 그림에서는 신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데, 이는 어스름한 저녁풍경과 잘 어울린다. 실제로 푸른 색조가 화면을 장악하는 그림에서는 달이 바닷가에 떠오르고 있는 초저녁 시간을 상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널뛰듯이 춤추는 파도가 유난히 강조되고 있는 그림은 어린 시절의 강렬한 인상에서 비롯되고 있다.
바닷가 사람들에게 파도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이어서 두려움의 대상이다. 낭만적인 감정마저 빼앗아 가는 거친 파도는 대개 슬픈 결말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고기잡이 나간 남편 아버지를 둔 가족들은 파도를 보며 가슴을 태우게 된다. 거기에 낭만이 자리할 곳은 없다. 파도가 삼킬 듯이 넘실대는 부두에 나가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낙네와 아이들의 모습이 그에게는 결코 아름다운 추억은 아니다. 그래서 음울한 분위기의 회청색 또는 청회색이 쓰이고 있는지 모른다. 어떤 사연이 있든 간에 고향에 대한 추억은 아름답게 마련이어서 결코 심각한 분위기로 몰아갈 수는 없는지 모른다.
두 번째 개인전이 있은 지 2년 뒤인 1983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세 번째 개인전이 열린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들은 같은 해에 그려진 작품 중심으로 꾸며졌다. 특기할 점은 형태에서 사실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물을 비롯하여 기와집 및 초가집 그리고 교회당 건물 따위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상을 위치시키는 방식에서도 현실적인 공간감이 반영되고 있다. 그래서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이전의 작품 경향과는 사뭇 다르다.
달리 표현하자면 목가적이라고 할까. 물상을 제법 먼 거리에서 바라봄으로써 시야가 넓어지고 있다. 어느 특정 사물에 집중되던 시선이 너른 지역으로 분산되면서 목가적인 정경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꽃이 피는 봄날의 고향정경을 밝고 화사하게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흰색의 교회당 건물이 지어내는 이국적인 정취에 사로잡혔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추억과 관련하여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존재들을 실제에 가깝게 선명히 부각시킴으로써 그 시절을 보다 생생하게 반추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색채 또한 구체화시킨 형태와 마찬가지로 현실색에 가깝다. 손에 잡힐 듯이 명료하게 다가오는 고향정경을 이처럼 구체적이고도 선연하게 떠올리고 있는 것은 이때뿐이다. 고향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만들어내는 서정적인 정취는 그리움의 농도가 얼마나 짙은지를 말해준다. 이렇듯이 갑자기 고향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키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일까.
이와 함께 겨울정경을 서술한 작품도 이때 처음으로 나타난다. 머리에 하얀 머릿수건을 쓴 여인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의 형태를 변형시킴으로써 조형의 아름다움, 즉 그 자신의 미적 감각이 반영된 인위적인 조형미를 추구하고 있다. 머리의 크기에 비해 목이 너무 가늘어서 가련하게 보이는 여인은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듯, 바닷가를 서성인다. 거칠게 일렁이는 파도를 배경으로 기다리는 모습의 여인은 애상에 젖어 있다. 그의 미적 감수성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표현이다. 이때 비로소 그의 미적 감수성이 고향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애절한 이미지로 왜곡시키고 변형시킨 여인의 모습에서 그만의 조형적인 비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형태를 결정하는 윤곽선은 이전보다 한층 부드럽고 세련되어 가고 있다. 손의 테크닉과 조형감각이 점차 무르익고 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그에 비례하여 작업량도 그만큼 많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1985년에 서울 동방프라자미술관에서 네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의 작품에서는 색채가 화려해지고 밝아지는 동시에 윤곽선은 명확해지고 있다. 따라서 그림은 전체적으로 경쾌하면서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 제재 또한 바닷가 정경 일변도에서 목가적인 정취로 이동하고 있다. 소 물고기 닭 꽃 과일 따위의 소재가 말해주듯이 파도가 춤추는 음울한 정경의 바닷가 풍경을 벗어나 목가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 자신이 무언가 짓눌리는 듯한 상황 속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감정을 가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인물의 동작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삶의 즐거움, 즉 환희의 감정을 드러낼 때 몸짓 또한 그에 비례하는 까닭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목가적인 삶의 정경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하나의 운문이고 산문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이처럼 그림의 내용 및 정서가 돌연 밝아지는 데는 어떤 동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나 이를 통해 심경의 변화를 읽을 수는 있다. 그 변화의 주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은 그에게 하나의 이상향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현실성을 상실한 고향이기에 꿈처럼 아름다운 이상의 땅으로 만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환상적인 이미지도 더욱 증폭된다. 실제로 이 시기의 그림 속에서 현실적인 그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은 거의 배제된다. 오직 이상향에 근접하는 아름다운 삶의 정서만으로 넘친다. 그림의 내용만으로는 그대로 유토피아이다. 개인적인 고향의 의미를 넘어 우리 모두가 꿈속에서 그려온 유토피아를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싶다.
그의 그림으로 확정지어주는 특유의 여인과 모습도 밝아졌다. 물고기와 꽃을 안고 있을뿐더러 바다에도 꽃이 떠있다. 그런데다가 단지 짙푸른 남빛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남녀를 묘사한 작품에서는 비현실적인 공간개념이 도입되고 있다. 땅이 아닌 바다에 앉아있다는 설정이야말로 현실적인 공간개념을 초월한 환상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공간해석은 향후 그의 조형세계를 이루는 뚜렷한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한다. 뿐만 아니라 화면에서 인물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설명, 즉 배경에 대한 설명이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화면에서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모든 형체가 뚜렷하게 부각된다.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이 없이 명확하다. 색채 대비에 의해 형태가 더욱 선명히 드러나기도 한다. 이는 긍정의 표현이다.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밝은 강렬한 원색적인 성향의 색채에다 소재들 또한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과 과일 그리고 꽃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지어내는 정경은 생의 환희를 유도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흥이 돋게 만드는 것이다. 누워있는 소에 기대어 피리를 부는 소녀, 가슴을 드러낸 채 닭을 날리는 소녀, 물고기를 머리 높이 위로 들어 올리는 소녀, 그리고 오리와 과일 바구니를 든 여인들의 모습에는 한결같이 삶의 기쁨이 담겨 있다.
그러나 1987년 다섯 번째 개인전에 이르러 울긋불긋한 원색을 떠나 푸른색으로 회귀한다. 고향의 남빛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도졌는지 모를 일이다. 회청색이 증가하면서 검은색 윤곽선이 형태를 장악한다. 푸른색 바탕에 검은색 윤곽선은 조화로운 동거임을 증명한다. 이와 같은 단조로운 색채이미지는 그의 작품세계에서 하나의 공통성으로 작용한다. 그럴 때 푸른색은 대체로 야경일 경우가 많다. 밤의 색깔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다와 하늘을 분별할 수 없는 일체의 공간으로 상정할 경우에도 푸른색이 쓰인다. 그러나 밤의 시간을 나타낼 때는 예외 없이 달이 존재한다.
이 시기의 푸른색도 야경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1988년도 작품 중에서 가을 정경을 표현한 경우에는 갈색 및 붉은 색 계열의 색채가 많이 쓰이고 있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그림에서 푸른색은 밤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한 칠흑의 어두움이 아니라 어스름 땅거미가 내리는 초저녁 시간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1987년도에 푸른색으로 회귀함과 동시에 드러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인물 중심의 구성으로 완전히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모자상, 즉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등장하는 빈도가 높아진다. 아기가 어머니의 등에 업혀있는 상태인데, 과일을 딴다거나 나비를 희롱하거나 꽃나무에 올라앉은 닭을 쳐다보는 따위의 목가적인 제재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시골사람들의 그림 같은 삶의 정취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걱정이 없는 유소년의 시각으로 본 세상정경이다. 거기에는 오직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달콤한 세상살이에 대한 찬미만이 있을 따름이다.
특히 선묘형식의 형태묘사, 즉 검은색으로 표현되는 뚜렷한 윤곽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형태는 전체가 곡선으로 이루어진다. 그 곡선은 거의 원형을 지향한다. 그러다 보니 동글동글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비록 입체적인 양감을 표현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원형을 기반으로 하는 곡선에서는 팽팽한 양감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인물묘사에서는 마치 터져 나갈 것만 같은 팽팽한 탄력이 손끝에 느껴지는 듯하다.
이렇듯이 활력이 느껴지는 곡선으로 재해석되는 인물의 형태는 그의 작업에서 하나의 뚜렷한 조형언어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1989년도 이후의 작품에서 독자적인 형식미를 결정짓는 조형언어의 하나로 확정되어 간다.
여인이건 아이이건 남자이건 간에 팔뚝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있다. 실제보다 지나치게 과장되고 왜곡되었건만 형태미는 아름답다. 전체적인 비례가 어색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렇듯이 과장된 형태미에서는 어색하기는커녕 되레 시각적인 쾌감이 느껴진다. 일상적인 시각을 뛰어넘는 파격미가 시각적인 즐거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회화적인 조형세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환상인 셈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림에서 기대하는 것은 극복된 현실, 다시 말해 화가의 시각이 만들어내는 그 자유로운 조형의 변주를 통해 정신 및 감정의 쾌감을 맛보는 데 있는 것이다. 닫힌 현실을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 및 감정의 세계를 유영할 수 있는 공간이 다름 아닌 그림이다.
왜곡된 형태미는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하나의 제안인 것이다. 이처럼 양감이 강조되는 인물 중심의 구성 및 푸른색은 독자적인 형식미를 지향하면서 지속된다. 1989년도 이후 작품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군상이다. 발가벗은 어린아이들, 가슴을 드러낸 한 두 명의 소녀 또는 처녀들, 모자(어머니와 아들), 남녀, 두 명의 아낙네들로 국한됐던 인물구성에서 세 명이나, 그 이상의 숫자가 동원되기에 이른다.
그러기에 구성적으로는 복잡해지는 상화이어도 시각적인 현란함은 증가한다. 인물의 동작이 역동적으로 커짐으로써 화면은 시각적인 긴장감으로 넘친다. 나비를 희롱하면 춤추는 아낙네들의 역동적인 이미지는 화면을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 채운다. 인물들로 거의 빈틈없이 화면을 채움으로써 시각적인 압박감이 커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도는 환희에 찬 인물들의 현란한 동작 그 자체를 표현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어릴 때 보았던 아낙네들의 춤추는 모습을 어린이의 시각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그림들은 한마디로 무릉도원을 연출한다. 과일과 나비와 꽃을 즐기며 춤추는 아낙네들의 그 아름다운 모습이야말로 어린 그의 눈에는 황홀한 꿈이자 환상이었으리라.
1990년도는 그의 조형세계에서 진정한 독자적인 비례가 완성되는 시기이다. 어쩌면 한 화가로서 가장 눈부신 순간일지도 모른다. 순수미를 표방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눈이 열린 것이다. 교육적인 효과에 응답하는 선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고안해낸 인위적인 선으로서의 고상함, 즉 조형적인 세련미를 터득하였음을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동글동글한 형태의 과장된 선으로 양감이 강조되는 인물을 묘사했다. 거기에서는 동글동글한 곡선이 지어내는 풍만한 양감의 인물과 풍요로운 자연의 이미지가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했다.
이에 비해 90년도의 작품에서는 곡선대신에 직선에 가까운 선이 나타난다. 여전히 양감이 강조되는 왜곡된 형태를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 직선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시각적인 흐름이 급박하게 진행되는 것은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배경을 무한공간으로 설정한다던가, 인물중심의 구성으로 전환함으로써 시각적으로 간결하다. 인물의 포즈는 밑에서 올려다보는 형국이어서 하체부분이 커지는 반면에 머리 부분이 상대적으로 축소되는 기형이 된다. 이러한 구도 또는 포즈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나, 배경을 단출하게 처리함으로써 새삼 인물의 포즈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부분적으로 직선적인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시각적인 인상이 한결 간명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푸른색의 농도가 현저하게 짙어지고 있다. 아울러 면 분할에 의한 평면적인 구성이 처음으로 시도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다양한 조형적인 변화는 조형의 묘미를 스스로 일깨우는 즐거움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특히 색채대비에 의해 만들어지는 포름의 조화 및 변주는 형태미 뒤쪽에 은닉된 조형의 또 다른 매력임을 절감케 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우리들의 미감을 현혹시키는 회화적인 조형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천명한다.
인물이 배제된 채 고깃배 달 나비 물고기 화병 등대 새 따위의 소재를 자유롭게 배치하는 가운데 색면 구성을 전개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시적인 정서가 농축되어 있다. 작품 하나하나가 그대로 한 수의 서정시인 것이다. 달콤한 꿈과 사랑과 환상을 동시에 아우르는 깔끔한 운문의 세계인 것이다.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처리되는 화면구성 및 청색 위주의 색채이미지가 주는 신선함은 밤바다의 낭만과 환상의 세계로 빠뜨린다. 청결한 의식의 정화를 맛보게 하는 그런 싱그러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이미 더 이상 갈 데 없을 만큼 극히 세련된 선을 구사하여 짙푸른 색깔의 무한공간을 배경으로 인물 배 달 물고기 따위를 적절히 배치하고 있는 정적인 구도의 몇 작품은 그가 실현한 환상의 미학 그 정점에 이른다.
1990년은 그 자신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조형언어 및 어법이 예고되었다는 듯이 해일처럼 몰아닥친 한 해였다. 그는 이 한 해 동안에 의심할 여지없이 한 작가로서 갖추어야 할 일체의 조형적인 요구를 일시에 충족시키고 말았다. 더 이상 그에게 무엇을 주문할 수 있을까 싶으리 만치 완벽한 개별적인 조형세계를 확립한 것이다. 어느 면에서 그 이후의 그림은 이 시기에 이룩한 성과를 기반으로 한 변주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다. 직선적인 선을 특징으로 하는 작업은 1994년경까지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선의 색깔이나 색면의 색깔이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다. 그렇지만 조형의 기본정조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평면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짐과 동시에 색면 분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도 이후의 뚜렷한 변화의 하나이다. 아울러 인물을 흰색으로 설정하고 그 배경으로는 다양한 색면을 배치하는 형국이어서 상대적으로 인물에 대한 인상이 강화되고 있다. 색면 대비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고 있다는 징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1992년도부터는 본격적인 평면구성이 도입되고 있다. 인물의 해석에서 구체적인 형태는 거의 생략되거나 단순화된다. 평면성을 강조함으로써 세부적인 표현이 무시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전체상을 통해서나 인물의 형태미를 파악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는 즐겨 쓰는 과장된 표현기법, 즉 팔뚝과 손을 몸통에 비해 지나치게 부풀려 놓는 식의 부분적인 과장법을 적용한다. 머리 부분에 비해 몸통이 몇 배 이상 커지는 불균형한 인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인물해석을 통해 그의 독자적인 비례가 완성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에 따라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과장되는 부분도 조금씩 달라진다. 초기에는 어깨 및 팔뚝이 부풀다가 하체가 비대해지거나 신장이 커지는 등 점차 신체의 다양한 부위로 이동한다.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화면이 간결해지고 단순하게 처리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처럼 보인다. 형태의 변조에 따른 하나의 공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형태의 세부를 표현하지 말 것, 윤곽선을 사용할 것, 모든 이미지는 평면화 할 것, 면 분할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 구성적인 아름다움을 모색할 것, 과장된 이미지를 통해 독자적인 비례를 확립할 것 따위가 조형의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1992년도 작업 중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선이 나타나는데, 이전의 선보다 한결 두툼하면서도 자유로운 감정이 느껴진다. 윤곽선의 형태로 주어지는 굵직한 선은 대체로 완만한 곡선을 지향함으로써 시각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이다. 또한 선은 다양한 유채색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점도 특기할 일이다. 그러기에 유채색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발색이 억제된 중간 색조를 유지함으로써 따스한 분위기를 지어내고 있다. 그의 작업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스한 감정 처리가 인상적인 작품일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
1992-93년도에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구성적인 화면이 확고한 조형의 틀로 정착된다. 특히 다수의 인물이 함께 하는 군상에서는 극단적인 명암대비와 같은 색채대비가 돋보인다. 푸른색일지라도 농도의 차이 또는 미묘한 색조의 변화를 통해 다양한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인물을 중심으로 분할되는 색면들이 저마다 다른 색채의 농도에 따라 표정을 달리하면서 심도 깊은 강간을 만들어낸다. 특히 짙은 남색배경과 희게 처리되는 인물의 대비로 인하여 화면은 시각적인 긴장으로 넘친다. 밤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이러한 색면 대비 수법을 통해 작품세계는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치닫는다. 어두운 밤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거나 혹은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모습의, 흰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시각적인 인상은 극렬하다. 푸른색 계통의 색상이 주는 그 신비적이면서도 차가운 이성적인 분위기 탓인지 현실은 미약하기만 하다.
이때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특징은 윤곽선이 섬세한 선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형태를 지지하는 윤곽선이 섬세해지고 세련된 멋을 풍김에 따라 인물에 부여되는 이미지 또한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지닌다. 과장된 형태미에도 불구하고 흰색의 한복이 지어내는 시각적인 인상은 단아하다. 전체적인 이미지가 간결해짐으로써 윤곽선이 한층 명확해지고 있는 것도 이 시기의 조형적인 특징이다.
더구나 극도로 단순화시킨 형태해석은 시각적인 이해로부터 발단하는 일체의 상상력을 무력화시킨다. 거기에 이미 현실은 없다. 환상이 자리할 뿐이다. 오직 승화된 현실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의 가슴속에서 고향의 이미지는 이제 그 실제성을 상실한 것인가.
1990년도 중반으로 가면서 화면은 수직 및 수평으로 분할되고 구성적인 이미지는 강화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직선의 사용빈도가 증가함으로써 시각적으로 간명하다. 등장인물이 현저하게 많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은 복잡하지 않다. 이러한 시각적인 효과는 역시 수직 수평의 화면분할이라는 화면의 기본적인 패턴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이처럼 수직 수평으로 화면분할하고 구획하는 직선과 인물 및 물상들을 형ㅇ용하는 곡선이 만남으로써 발생하는 긴장을 역이용하여, 상충과 조화의 묘로 반전시키고 있다. 직선과 곡선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의 두 이미지가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한편 그의 작품 경향으로서는 특이하게도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본다는 시점의 변화가 일어난다. 물론 소수의 작품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실내정경과 바깥풍경을 하나의 화면으로 통합하는 새로운 구도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이 새로운 것은 아닐지라도 그에게는 모처럼 자신의 존재를 실내에 두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역시 실내라는 공간은 시야가 좁다. 그러나 시야가 좁음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구나 시간대는 밤이다. 밤은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힘이 있다. 세상의 온갖 형태를 완전히 지우거나 희미하게 만들어 놓음에 따라 자연히 시각으로 파악되는 세계는 한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불이 켜진 실내라면 불빛이 닿는 한정된 실내고간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의 폭도 대체로 보이는 것으로 좁혀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의 실내정경과 바깥풍경을 동존시키는 화면에는 인위적인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내와 바깥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를 구분하는 것은 직선적인 선으로 구획하는 창의 이미지 정도이다. 전체를 암청색으로 통일시킨 다음 선으로 창의 이미지를 만들어 실내와 옥외를 구분 짓는 것이다. 소재는 거의 동일하다. 인물 꽃병 도자기 물고기 나비 고깃배 달 과일 따위가 보인다.
이처럼 깊은 밤의 이미지를 표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화면을 온통 검은색으로 덮는다 하여 밤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밤을 흐르는 기운이 피부에 닿는 듯 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맑고 투명한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 암청색은 고기를 얼어붙게 만들기라도 하듯 쾌적하다. 팽팽한 밤의 공기가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이는 바닷가의 그 청명한 밤공기를 아는 자만이 지어낼 수 있는 생동감의 표현이다.
1994-95년에는 소나무가 주요한 소재의 하나로 떠오른다. 솔골 포구라는 마을을 상징하는 소나무 밭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난 것인지도 모른다. 조부의 등에 업혀 넘나들던 야트막한 산등성이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는 방풍림이었다. 파도라도 몰아치는 날이면 바람에 맞서는 의연한 소나무들의 늠름한 모습이 새삼 되살아난 것일까. 수직으로 서있는 소나무들의 그 기상이야말로 힘든 사람의 지켜나가는 굳건한 힘의 표상이리라.
그의 그림에서 소나무는 의인화된다. 약화형식으로 처리된 소나무의 형태에서는 강직한 남성미가 강조된다. 화면을 수직으로 굳건히 서 있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가롭게 흔들리는 고깃배들과 군데군데 물고기 꽃 새 파도 따위를 배치하는 구성적인 화면이 환상적이다. 소나무와 함께 바닷고기를 말리는데 쓰이는 마른나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수직 수평으로 얽어매어 쓰는 나무들이 실내정경의 창틀처럼 화면을 구획하는 조형적인 요소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소나무가 등장하면서 화면은 구조적으로 견고한 틀을 갖게 된다.
또한 반원형을 두세 겹씩 반복하여 겹쳐 놓은 파도의 이미지를 약화형식으로 도상화한 것도 새롭다. 부분적으로 그래픽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이와 같은 파도의 이미지를 별도의 옅은 푸른색 평면 안에 넣어 다른 소재와 분리시키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1996년도로 넘어가면 또 한 차례의 조형적인 변조가 이루어진다. 오밀조밀 어깨를 비벼대고 있는 고향의 집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역시 약화형식으로 간결하게 그려진다. 세부적인 묘사를 배제한 채 굵은 윤곽선만으로 집의 형태를 만들고 있다. 집들은 어두운 배경에 옅은 청색의 실루엣 또는 검은 윤곽선으로 강직하게 표현된다. 굵고 힘찬 검은 윤곽선은 집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적용된다. 푸른 바다 및 달의 이미지 위에 얹히는 검은 선은 전혀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이다. 우리에게 이처럼 강렬한 인상의 선에 대한 기억이 달리 있었던가.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그만의 조형감각이 일구어낸 멋인 것이다.
1997-98년에는 완전한 평면화가 진행된다. 모든 색조는 짙어지고 여러 조각의 평면으로 분할되던 화면은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모든 형태는 사각형 및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단순화된다. 완전한 평면 구성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과 이미지는 극히 간소하다. 반추상 또는 비구상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거기에서 온전한 형태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각형 및 원형의 이미지들이 화면 중심으로 집결하는 상황에서 고깃배 인물 달 따위가 숨겨진 그림처럼 간신히 그 모습을 드러낼 따름이다.
단색의 짙은 푸른색으로 통합된 무한공간 속에서 평면적인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집결하고 또는 분산하는 모양에서 군대의 분열식이 연상된다. 이미지 구성에서 자율성을 허락하는 가운데 어떤 보이지 않는 조형적인 질서에 의해 화면이 통제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는 그 자신의 미의식이 합성해낸 새로운 형태의 조형적인 질서인 것이다. 이러한 조형적인 변조는 푸른색이 만들어낸 신비이다. 다시 말해 바다와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 없는, 무한공간을 상정하는 푸른색의 자유로운 존재방식이 이러한 형태의 조형적인 형식을 산출해낸 것이다.
일체의 형태묘사로부터 한껏 자유로운 푸른색 단일 공간이 주는 시각적인 개방성이야말로 어떠한 형태의 현실적인 제약에도 구애받지 않는 무한한 자유를 상징한다. 기억의 방에 감금된 고향을 일체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자유의지가 이처럼 열린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다가 1998년 중반 이후에 다시 변화가 일어난다. 추상세계 직전까지 갔다가 일 년도 안 돼 돌연 인물의 형태가 구체성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반추상 또는 비구상의 세계에 진입했다가 거꾸로 되돌아 나오는 셈인데, 그처럼 급변하는 상황변화의 진폭이 놀랍다. 무슨 연유였을까. 거의 사실적인 형태 근접하는 단계까지 형상성을 회복하게 된 변화의 배경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 아마도 순수 추상 직전까지 이르고 나서 그로부터는 더 이상 고향의 이미지를 붙들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창작충동의 원천이자 그 자신의 개별적인 조형세계의 근원인 고향의 이미지를 버리고서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한시도 고향을 논외한 그림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던 탓이리라.
실제로 어쩌다 고향과 무관한 소재 및 제재를 다룬 일이 있지만 겨우 한두 점에 그쳤던 사실을 상기하면 이해할 수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제거하면 더 이상 창작의 열정도 영감도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반추상의 경계까지 갔다 미련 없이 돌아섰다던 것은 아닐까.
형상을 회복하면서 평면적인 이미지에 빼앗겼던 선이 복구된다. 소묘를 꾸준히 계속해온 까닭에 선을 되살리는 것은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림을 시작하던 초기단계부터 오늘까지 어떤 형식으로든지 소묘를 계속해왔다. 그의 선이 세련된 멋을 지닐 수 있었던 데는 다름 아닌 소묘가 뒷받침되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소묘는 언제나 유채작업을 구상하는데 따른 기초가 되었다. 일종의 에튜드의 셈인데 소묘를 통해 작업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시켜 캔버스에 옮기는 식이다.
소묘를 보면ㅇ 그가 어떤 선을 구사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단순히 특정 소재의 형태를 실제에 가깝게 재현하는 형식이 아니라 그때그때 떠오르는 영감을 순식간에 정착시키기 위한 속사의 성격이 짙다. 그런데도 그 하나하나가 유채화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공간을 확보한다. 그 세련된 선이 소재와 만나면서 이리저리 얽히는 가운데 고향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형상을 회복하면서 그는 연필 선과 같은 형태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선으로 형태를 찾아내고 있다. 실제보다 과장되던 인물의 형태를 실제의 비례에 가깝게 접근시키는가 하면, 수직 수평의 선분으로 분할하던 이전의 구성적인 화면으로 복귀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인물 구성 역시 여자들 중심의 군상에서 탈피하여 남녀가 함께 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남녀의 모습 또한 보다 실제상에 밀착시키는 한편 나체 형태가 된다. 하체만을 살짝 가리는 형태의 근육질의 남녀가 마치 나비가 꽃을 희롱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춤을 추는 모습으로 보이는 남녀를 중심으로 화면은 사랑의 환희와 같은 감정이 넘친다. 이처럼 급작스런 애용의 변화 및 형태의 변모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향수에서 사랑으로 제재가 바뀌게 된 진정한 도기는 무엇일까. 노경에 가까워지면 되레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변화한다더니, 그 또한 그러한 경지로 들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인가. 즉, 일체의 세속적인 시선을 벗어나서 자연감정 그대로 청춘을 회복하고 싶은 열망의 증표인가. 그러한 정황은 색채이미지에서도 발견된다. 붉은 색 계통의 색채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붉은 색은 열정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의 기운이 그와 같은 붉은 색을 선호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어느 면에서는 남북한이 화해분위기로 가고 있는 현실상황으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 소식을 알고 싶어 하던 동생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짐으로써 혹시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희망ㅇ은 기대보다 훨씬 빨리 실현되었다. 북한ㄴ에서 유명 시인으로 성공한 동생과 평양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남북한이산가족 상봉단의 일원으로 선정되는 행운이 주어졌던 것이다 .혹여, 뜻하지도 않은 기쁜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예술가 특유의 감각으로 직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한 직감이 붉은 색으로 표출되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붉은 색을 중심으로 하는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밝은 유채색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은 1999년 이후의 작품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기운을 타고 또 한 번의 주목할 만한 조형의 변주가 이루어진다. 이제까지의 청색 위주의 색채이미지가 황갈색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제재는 여전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지만 조형적인 접근방식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소재 역시 새롭다. ‘회고’ ‘懷(회)’ ‘탑’ 따위의 명제가 말하고 있듯이 고향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게 됐다. 옛날을 돌이켜본다는 의미로서는 고향과 연관 지을 수 있으나 실제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그가 줄곧 다루어온 소재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여전히 인물과 달 고깃배 따위가 등장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조형의 기조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 기하학적인 이미지에 가까운 선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 비구상성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연필로 그은 듯한 섬세하면서도 감성적인 이미지가 흠씬 묻어나는 선들이 교차하면서 지어내는 표정이야말로 세련미가 무엇인지를 웅변하는 듯싶다. 한마디로 감칠맛 나는 선의 아름다움이 한껏 강조되는 작품들이다.
이제까지 작품의 흐름과 조형적인 변모를 살펴보았듯이 ‘향수’또는 ‘망향’이라는 일관된 제재를 중심에 두고 그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 또는 시대적인 환경변화나 조형적인 이념 그리고 인생관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응답해 왔다. 그가 온 길은 그림 속에 명쾌하고 드러나 있다. 숨길 것도 없이 오직 그 자신의 미적 감수성과 미의식 그리고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감정의 흐름에 솔직해 왔다.
고향의 정서를 그림에 반영하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리고 실향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뿐만이 아니다. 화가 중에서도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월남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말고는 그처럼 집요하게 향수로 일관하는 화가는 다시없다. 그림의 제재가 온통 고향에 대한 그리움뿐이다. 그래서일까. 제재 자체만으로도 그의 작품세계는 유별나다. 그 유별난 제재에 일생을 집착함으로써 그로부터 독자적인 형식 하나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로서는 기대하지 않은 보상인 셈이다. 예술이란 이런 것인지 모른다.
서두에 밝혔듯이 그의 그림은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치고 또 어떠한 결과에 이르렀던지 분단이 만들어낸 결과이자 결실이다. 가고 싶을 때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고향을 사랑한다고 해도 어느 시점에서는 마침내 진력이 날 것이다. 분단으로 인해 갈 수 없는 땅이 되었기에 그토록 목메어 부르고 불러도 매양 그리운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볼 때의 그의 조형세계의 원천은 분단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의 미학이란 반드시 직접적인 전쟁과 관련한 스토리를 전제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세계가 보여주고 있듯이 분단이라는 현실은 넓은 시각에서 볼 때 창작에 직접 또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인적인 시각 또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 그 제재 및 표현방법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물 및 상황을 받아들이는 미적 감수성에도 차이가 있고 미의식과 사상에도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를 재해석하여 예술적인 표현으로 승화시키는가의 문제는 순전히 작가 개인적인 취향이나 사상에 맡겨질 일이다.
그의 그림에 민족이라든가 국가라는 거창한 관점은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한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과 관련한 조그만 세상, 즉 바닷가 마을에 대한 소회라는 소박한 시각이 담겨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의 추억을 매개로 하여 우리 모두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고향의 정서를 일깨워 주는 힘은 아주 강렬하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감정을 되살려주는 마력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미적 삼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의 감정을 흔드는 힘이 있다. 그가 그림 속에 농축시키고 있는 고향의 그리움이란 체험적인 진실의 고백인 까닭이다. 그는 일체의 형식적인 기교를 버렸다. 오직 순수한 시각으로 고향의 이미지를 아름답게 좀 더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조형적인 개별성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고향은 그에게 간구의 대상이 되었다. 진정 간절히 원하는 대상이었다. 이성에 대한 사랑이 수많은 위대한 문학을 탄생시켰듯이 고향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애상의 미학이라는 그의 그림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가 이룩한 성과는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김 한의 개별적인 감수성 및 사유의 공간에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반세기 동안이나 키워온 고향의 그리움과 속죄의 감정은 누구와도 공유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 속에 녹아든 조형적인 세련미에 취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고향얘기 따위는 잊어도 좋다. 설령 그림에 담긴 내적인 정서에 공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단지 보이는 아름다운 조형세계에 대한 시각적인 이해만으로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