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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영광, 똘레도
똘레도에 가보면 돈키호테가 달렸을 황량한 벌판의 언덕에 옛 도시가 우뚝 솟아 있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언덕 아래로는 타호 강이 삼면을 휘돌아 흐르고 있어 천연적인 요새도시의 모습이다. 아랍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을 때 이들과 스페인간의 빈번한 전투가 있었고 적을 방어하기 좋은 요새도시인 똘레도는 도읍으로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실상 똘레도는 그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여러 나라의 도읍으로 이름을 떨쳤다. B.C 192년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변방으로 합병되면서 똘레툼(Toletum)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오늘날 똘레도의 어원이 된 것이다. 로마제국이 힘을 잃어갈 무렵 서고트족이 들어와 정착하고 579년에 그들의 왕조를 똘레도에 세웠다. 똘레도가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됨으로써 정치와 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400년에 개최된 1차 종교회의 이후 계속 여러 차례의 종교회의가 개최되면서 똘레도는 스페인에서 가톨릭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특히 589년 제 3차 종교회의 때는 서고트 왕국의 레까레토 왕이 공식적으로 가톨릭을 국교로 정함으로써 똘레도의 위상은 더 높아지게 되었다.
8세기에 접어들면서 스페인은 아랍 세력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 711년 아랍왕 타릭에 의해 똘레도가 점령당하게 된다. 이때부터 700년간 소위 ‘국토회복운동’이 일어나면서 스페인과 아랍 세력 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이어진다. 아랍의 침공으로 피레네 산맥과 시에라 산맥으로 몸을 피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우선 서쪽 시에라 산맥에서는 아스트리아 왕국을 세우고 레온까지 진출해 레온(Leon) 왕국을 세웠다. 반도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Castilla) 왕국의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통합하여 1085년 드디어 똘레도를 되찾고 2년 뒤인 1087년에는 그곳을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 정함으로써 스페인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만들었다.
한편 동쪽에서는 아라곤(Aragon) 왕국(카탈로니아와 발렌시아 포함)이 성립되어 1118년에 사라고사를, 1236년에 코르도바를, 1248년에 세비아를, 1343년에 알테시라스를 점령함으로써 국토회복의 염원을 구체화 시킨다. 당시 스페인은 레온, 카스티야, 아라곤 등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카스티야가 반도의 중부에 위치하여 가장 큰 비중을 지니고 있었다. 드디어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결혼을 하여 스페인은 통일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 가톨릭 부처왕의 분투로 1492년 그라나다에서 아랍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국토회복의 염원을 달성하게 된다. 마침 그 해는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해로서 스페인으로서는 경사가 겹친 셈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이 국토회복의 염원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 한 ‘짓거리’가 남미를 식민지로 만들어 그들로부터 금은보화를 뺏어오는 일이었다. 자신들이 아랍세력에 의해 지배를 당했던 그 아픔을 다른 나라에게 그대로 전가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정복자란 이름의 ‘콘키스타도르(Conquistadores)'라 불리는 스페인 약탈자들은 가는 곳마다 무자비하리만큼 금은을 약탈하였다. 국토회복운동 기간에 연마한 전투기술을 발휘하여 코르테스 일행이 1519년 멕시코 원정에 착수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즈텍, 마야인들을 정복했으며,1533년 피사로는 페루의 잉카제국에 들어가 잉카 문명을 파괴하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했던 것이다. 그렇게 중남미의 식민지 지배와 약탈을 통해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의 부와 영광은 남미의 희생 위에 쌓아올린 피의 재물이었다.
똘레도는 아랍세력이 그라나다로 물러가고 국토회복운동이 불붙었던 13세기부터 펠리페 2세에 의해 수도가 마드리드로 옮겨간 1561년까지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특히 아랍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 1492년 이후에는 통일된 스페인의 수도로 그 명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남미의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거둬들인 황금과 은이 이곳으로 흘러들어 오게 되고 그 때문에 똘레도는 금과 은이 넘치는 ‘엘도라도’가 된 것이다. 똘레도가 금은 세공으로 유명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국토회복 이후 가톨릭 국왕 부처는 반도 내에서 아랍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추방령을 내려 상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추방됨으로써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똘레도의 경제도 급속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스페인의 수석 성당, 똘레도 대성당
하지만 종교적 위상은 변함없어 가톨릭의 수호자인 스페인의 수석 성당으로 똘레도 성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페인에는 대성당을 ‘카테드랄(Catedral)’이라 부르는데 대성당은 이곳 똘레도를 비롯하여 산티아고, 세비아 등 세 군데만 있다. 규모는 세비아 대성당이 더 크지만 지위는 똘레도가 높다. 말하자면 스페인의 추기경이 이곳에 주재하는 것이다.
대성당은 똘레도 시가지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어 어디에서도 눈에 잘 뜨인다. 그런데 문제는 성당은 잘 보이나 골목이 워낙 미로처럼 얽혀있어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도 대성당을 올려다보며 나아갔는데 도저히 어느 길로 가야할지를 몰라 마침 그 동네 사는 스페인 아줌마가 있길래 우리가 아는 스페인어를 총동원하여(그래야 2~3 문장밖에 안되지만) 물어보았다.
우리말의 대성당이 어디에 있냐는 의미의 “돈데 에스타 카테드랄?”이라 물어보니 이 아줌마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났다고 반가운 내색을 하며 따발총 쏘듯이 따다다다 해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스페인어로 물어본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참을 그리고 나서 알겠냐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어오는 것이었다. 모른다고 시늉을 했다간 다시 따발총을 쏘아댈 것 같아서 우리가 아는 또 다른 스페인어인 “그라시아스!”를 연발하며 얼른 자리를 떴다. 그래도 그 아줌마의 제스처가 워낙 커서 대충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동작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 이래서 중요하다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손으로 가리켜준 골목을 돌자 정말 광장이 나오며 고딕식 대성당의 장엄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이 성당은 프랑스식 고딕사원으로 페르난도 3세 때인 1227년 착공하여 무려 266년이 걸려 국토회복운동을 종결한 1493년에 완공되었다 한다. 애초에 이 성당은 1212년 아랍군을 크게 물리친 나바스 데 똘로사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알폰소 8세와 히메네스 대주교에 의해 건립이 결정되었다. 이슬람 왕국 시절에 회교사원이 있었던 곳을 개조한 것이다. 그래서 성당 내부는 이슬람과 스페인 양식이 혼합된 무데하르 양식으로 되어 있다. 1221년에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이 공사를 승인하는 교서를 내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만큼 가톨릭 권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성당인 셈이다. 당연히 스페인의 대주교가 이곳에 거주한다.
우뚝한 탑 사이로 성당 정면에 3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이 문을 통과하면 면죄를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면죄의 문’으로 불려진다. 오른 쪽에는 ‘심판의 문’이 있고, 왼 편에는 ‘지옥의 문’이 있다. 입장료를 그곳에서만 받아 대개는 면죄의 문을 통해 들어간다. 모두들 세상을 살면서 죄를 많이 지어서 그리로 들여보내나 보다. 그래서 용서받길 바라는 것이리라. 성당 옆과 뒤편에도 문이 있는데 성체 현시대를 실은 마차나 가마가 드나들기 편하게 만든 ‘야나(평탄이라는 뜻)문’과, 사자상 기둥을 세운 ‘사자 문’이 있다. 입구와 출구가 다르기에 성당을 다 보고 나갈 때는 대개 이곳을 이용한다.
성당 내부는 그야말로 보물 천지다. 남미에서 가져온 풍부한 금과 은으로 만든 수많은 보물과 조각품 등으로 내부를 장식했다. 특히 성체 축일에 가마를 메고 시내를 도는 성체 현시대와 안치대는 무려 180kg의 금과 2톤의 은으로 만들어졌다니 남미의 보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 희생된 것이다. 역사는 정복자들에 의해 기술되기에 그들의 약탈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거룩한 사업으로 미화된다. 남미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들이 왕실이나 교회로 들어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약탈에 면죄부를 준 것이다. 무자비한 약탈과 살인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행했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남미 스페인 정복자들의 광기를 다룬 베르네 헤어조크 감독의 <아귀레, 신의 분노>란 영화가 있다. 월남전을 다룬 <지옥의 묵시록>의 중세판 버전인데 광기에 사로잡힌 주인공 아귀레가 살인과 약탈을 무단으로 자행하며 스스로를 ‘신의 분노’라 자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오만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 스페인 정복자들은 군대와 같이 늘 사제를 동행했다.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사제는 군인들에게 승리를 위한 기원을 드린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지만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겠다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도 신부가 “교회는 강한 자의 편”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래서 금은보화로 장식한 화려한 스페인의 성당을 다니다 보면 남미에서 저지른 그들의 만행이 자꾸 어른거려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이 성당의 또 다른 걸작은 바로크 양식으로 1732년에 나르시소 또메가 만든 ‘트란스파렌테(Transparente)'다. 위층에 있는 제단인 셈인데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가고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었으며 주변에 가브리엘, 라파엘, 미구엘, 우리엘 등 4명의 천사를 조각하였고 대리석 기둥에도 수많은 조각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천정에서 빛이 들어오면 대리석 조각들이 빛은 받아 천상의 모습을 재현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성당의 가장 위대한 보물은 성물실에 전시된 그림들이다. 이곳 똘레도에 살았던 엘 그레코를 비롯하여 고야, 벨라스케스, 루벤스, 반 다이크의 그림들이 줄줄이 걸려있어 유명한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대부분 예수와 사도들의 모습으로 이 성당의 재정이나 위상을 짐작케 한다. 특히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성당을 다녀보면 이렇게 엄청난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건 교회의 세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성당은 당시 세계를 주름잡았던 스페인의 수석 성당이니 그 교세가 오죽했겠는가?
가장 눈길을 끄는 그림은 정면에 바로 마주치는 엘 그레코의 <엘 엑스폴리오>다. 번역하자면 <옷을 벗기우는 그리스도>정도 되겠다.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 붉은 성의를 벗기는 로마 병정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하늘을 향해 원망하는 듯이 처연한 눈빛을 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옆으로는 고야의 그림 <유다의 입맞춤>이 있어 뭔가 이 그림들을 통해 예수의 처형 당시를 증언하는 것 같다. 풍속화 같은 당시 생활상을 주로 그린 고야도 이런 그림을 그렸나 놀라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순한 눈과 긴 얼굴 그래서 처연한 모습을 특징으로 하는 엘 그레코의 사도상이 죽 걸려있어 엘 그레코의 미술관인 것 같은 착각도 든다.
첫댓글 예, 맞습니다. 스페인 이탈리아 못지 않게 유럽 최대의 가톨릭 국가로서 면모를 지니고 있고 더군다나 유럽에서 가장 먼저 통일된 국가를 이루어 중남미의 식민지를 개척했으니 그 풍부한 금과 은들이 교회를 위해 쓰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스페인 성당들은 내부가 무척 화려합니다.